불가능한 유토피아와 (불)가능한 공동체

 

불가능한 유토피아와 (불)가능한 공동체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 대한 단상



차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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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되면 누구나 자신의 소망을 한두 가지쯤 빌어 보기 마련이다. 그 소망은 때로 집단적인 꿈이 되기도 한다. 구성원 모두가 저마다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공동체에의 열망. 이를 유토피아의 꿈이라고 한다면, 그런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현재 누군가 유토피아를 소리 높여 말한다면 그것은 망상으로 치부되거나 아니면 도리어 그 속에서 지난날 파시즘적 억압이 유추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른 모든 꿈이 그러하듯 유토피아의 꿈 역시 그것이 실현될 수 없는 현실의 부정성을 강력하게 환기함으로써 역사에 개입해 왔다는 사실만은 기억해 두어도 좋을 듯하다. 그 자체는 비현실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유토피아의 가정은 현실을 비판하고 또 변화시키고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힘과 관련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상을 관철시킨다. 적어도 지난 연대에 우리가 유토피아의 꿈과 실천적 정치를 연관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문맥에서일 것이다. 지배세력의 억압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저항의 서사는 현실 정치와 유토피아의 길항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만하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이 현재에 이르러, 그런 지평을 우리 문학에서 재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의 정치성이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문학이 세계와 연관하는 한 그것은, 심지어 정치를 완전히 떠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정치적이라 생각한다. 90년대를 통과한 이후 현재까지 전개되고 있는 미시 권력에 대한 다양한 탐구가 지난 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자양분 삼아 새로운 공동체의 상을 모색하는 데까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무능한 정치에의 도저한 혐오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집권세력이 바뀌어도 공동체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물론 과연 그러한가는 또 별개의 문제다)는 체험적 인식은 문학이 소위 대문자 정치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인식되는 데 일조했다. 어느 시점부터 사람들은 문학과 정치를 연관시키는 순간 억압과 환멸, 혹은 철지난 비세련성부터 떠올리게 된 것이다. 문학이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현실의 정치와 결별해야만 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문학에서, 특히 최근의 비평에서 지난 세기 정치(학)의 자리를 회의하며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윤리(학)의 문제다. 실로 우리 문학은 지금 넘쳐나는 윤리적 언표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단순한 유행쯤으로 취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니, 그저 수사적인 차원이 아닌 한 그것이 토대하고 있는 나름의 비평적 사유와 판단을 정밀히 따져보아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바꿔 말해 이제 윤리(학) 전면화의 명(明)과 암(暗)을 차분히 살펴볼 시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 문학이 윤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우리 삶의 새로운 준거점을 모색하고 있다는 한 방증일 터인데, 그 탐구는 대체로 (절대적) 타자에 대한 사유와 맞물려 있으며, (근본적) 적대와의 대면 이후 주체적 행위란 무엇이며 또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쉽지 않은 질문을 내장하고 있다. 쉽지 않다는 것은 그것의 문학적 실천에 대해 최소한 지금의 우리는 그 구체적 해답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며, 나아가 그런 실천이 공동체적 지평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또 어디까지 갱신할 수 있을 것인가.


새해를 앞두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다시 펼쳐 본다. 우리 문학사에서 타자의 윤리학과 공동체의 정치학을 동시에 그리고 이보다 더 치밀하게 천착한 사례가 또 있을까. 이상욱의 자유론, 황희백의 사랑론, 그리고 이 둘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조백헌의 자생적 권력에의 모색에 이르기까지 『당신들의 천국』은 이청준 정치학의 결정판이자, 동시에 그것을 반성하고 회의하는 작가의 면모가 뚜렷이 드러나 있는 야심작이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된다. 단순히 분량만 놓고 보거나 휴머니즘적 드라마 특유의 감동으로만 따진다면 2부가 소설의 본령으로 파악될 법하지만, 조 원장과 황 장로의 대면 등 가슴 뛰는 명장면들이 여럿 있기는 하나 실화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않은 2부보다는, ‘더렵혀진 기원’이라 할 만한 주정수 시대에 대한 메타 텍스트인 1부와 상욱의 탈출에의 변(辯)이 기록된 편지와 함께 평범한 개인으로 섬으로 다시 귀환한 조 원장의 면면이 담겨 있는 3부가 작가 특유의 문제의식이 더 선명하다. 결국 이 문제의식은 소설가 이청준의 (反)유토피아 탐구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섬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조백헌의 행위 양상과 그 한계를 중심으로 간략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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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평자들이 『당신들의 천국』을 희망적인 비전을 담고 있는 소설로, 다시 말해 이청준 소설에서 예외적인 작품으로 읽어내곤 해 왔다. 이러한 평가는 물론 조백헌이라는, 이청준 소설에서는 희귀한 캐릭터에 힘입은 바 크다. 소록도에 부임한 이 새로운 원장은 대체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 최량(最良)의 지배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제복’과 ‘총’으로 표상되는 군인으로서의 신분이나, 스포츠(축구)를 통한 집단의식의 고취, 혹은 오마도 간척사업을 비롯한 재건 사업, 바깥의 위협에 대한 과장된 강조 등 폭넓게 배치된 알레고리를 통해, 작가가 개발 독재시대에 대한 비판, 나아가 지배권력 비판을 의도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백헌이라는 인물의 화해적인 면모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보기는 무리이지만 말이다. 이 점은 조백헌 주도로 이루어지는 섬의 개혁에 제동을 거는 소설 속 여러 인물들에 의해서도 계속적으로 강조된다. 단적인 예로, 한센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황 장로가 조 원장에게 하는 (서술자가 ‘무서운 복수심’이라 정리하고 있는) 전율 이는 추궁의 한 대목에서는, 조 원장 역시도 지금까지의 소록도 지배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천국 건설에만 매진했지, 그 과정 속 한센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했다는 비판이 제시된다.


―원장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소.

노인의 사연은 서두로부터 가파른 핀잔조로 시작되고 있었다.(181면)


서로간의 섬에 대한 이해의 각도와 깊이가 다른 만큼 『당신들의 천국』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숱한 대화(대결)의 장면들은 불꽃 튀는 설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정태 정도를 제외하자면 대개의 경우 조백헌은 주로 듣는 쪽에 가까우며, 그는 자신의 견해를 인물들의 비판적 개입에 의지해 끊임없이 수정해나간다. 조백헌-황장로, 조백헌-이상욱의 대화가 특히 그러한데, 이 둘은 물론이고 비중 있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소설 속에서 조백헌의 관찰자이자 비판자 혹은 주석가의 역할(그리고 조 원장까지를 포함해서 이들 모두가 한센인들에 대한 관찰자, 비판자, 주석가이기도 하다)을 부여받고 있다. 이 대화들에서 두드러진 공통점은 모든 인물들이 한사코 조백헌의 정체와 동기를 심문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마도 간척사업에 지지를 표시하는 황 장로 편지의 서두는 “원장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간척 사업 이후 섬을 습격하고 궤변과 협박을 늘어놓는 이웃 주민 사내의 첫 번째 질문 역시 “원장님은 도대체 의삽니까, 사회사업갑니까”라는 조백헌의 정체에 관한 야유 섞인 의문이다. 작중인물들은 낙원이 건설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백헌의 확신을 의심하기 전에 먼저, 그가 낙원 건설에 매진하는 까닭을 심문한다. 질문은 간단하다. 조백헌은 한센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왜 그는 한센인의 천국을 만들고자 하는가. 한센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한센인에게서건 그렇지 않은 인물들에게서건 곧바로 의심의 대상이 되지만, 원장의 동기에 대해서 소설은 이렇다 할 부연을 하고 있지 않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모든 주요 인물들의 과거 내력은 상당 부분 그 베일을 벗지만, 유독 조백헌만은 (무언가 그의 인물됨의 맥락이라거나 헌신의 이유를 추론할 만한) 과거에 대한 의미 있는 언급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조백헌에게는 소록도 부임 ‘이후’의 삶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록도 병원의 초대 원장인 주정수의 낙원 건설 시도 동기는 분명하다. 저 유명한 ‘동상(銅像)’에의 욕망이 그것이다. 이상욱을 비롯하여 섬사람들을 짓누르는 동상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권력과 지배의 욕망이 필연적으로 약자의 존재와 희생을 매개로 한다는 무거운 진실을 누설한다. 그러나 조백헌에게서는 이 점이 불분명하다. 그리고 이 불분명한 동기(혹은 그가 동상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가 중반까지 이 장편의 긴장감을 지탱하는 가장 큰 자원이다. 2부의 마지막에서 조백헌의 진심에 감화된 황 장로는 조백헌의 동상이 “이 섬이 우리 문둥이들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오래오래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할 단 하나의 사랑의 동상”이라고 말하며, 섬사람들이 그에 대해 자발적으로 품게 된 경의감을 감동적으로 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조 원장의 행동과 관련된 의문 자체를 해소해내지는 못한다. 무엇보다도 황 장로가 조 원장에게서 발견했다고 하는 ‘사랑’의 정체가 적잖이 모호하다. 이는 『당신들의 천국』의 공백이자 핵심이다. 핵심인 이유는 자명하다. 한센인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 나아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섬에서 발원한 ‘자생적 운명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백헌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단순화의 잘못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센인은 유토피아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이어야 한다, 한센인이 아닌 한 그는 천국건설의 한 매개일 뿐이다. 그러나 낙원 건설의 실패로부터 얻어진 이 깨달음 역시 애초 그의 전력투구를 해명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적으로 가정해 볼 수 있는 조백헌의 동기는 그러므로, 그가 바깥에서 ‘주어진’ 상징적 위임을 최선을 다해 완수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 정도이다. 소록도에 원장으로 부임해온 순간부터 그는 원장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그것 역시 섬사람들이 그토록 비난하는 ‘~을 위해’라는 명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 경우 목적어의 자리에 놓이는 것은 한센인도 아니고 조 원장 자신도 아닌, 소록도에서 원장으로서의 일을 하라는 순수한 명령 그 자체다. 그는 부임인사를 생략하는 등, 전임 원장들의 업무 수행 형식을 대체로 무시하고 따르지 않지만, 그것이 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그 나름의 방식이고 또 그에 따라 가시적인 결과물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된다. 그리고 이 점이 이상욱과 조백헌을 결정적으로 갈라놓게 한다. 이상욱은 조 원장으로 하여금 섬의 실체에 눈뜨게 하고, 결정적인 위기에서 그의 목숨을 구하며, 편지를 남기고 섬을 탈출함으로써 조 원장의 허점을 고발하고 다시 그를 섬으로 귀환하게 만드는 등 서사 전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일련의 행동이란 어디까지나 조 원장의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 황 장로가 사랑을 내세워 이상욱의 자유를 비판하는 핵심도, 그의 자유가 대타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자유가 지배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이끌어낸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어떤 해방도 이루어 낼 수는 없다는 뼈아픈 진실이다. 그러나 원장의 행위는 그저 현상 유지의 차원이 아니라, 적극적인 낙원 건설(出-小鹿)의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열망은 분명 원장으로서의 책임 이상, 명령 이상의 것을 가리키고 있다.


원장은 아무래도 그 돌둑이 돌둑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무엇을 보고 있었다. 물밑을 달리고 있는 그 어슴푸레 흰 선분은 너무도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그것은 영혼을 지니고 숨을 쉬며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였다.

원장은 꿈길을 따라가듯 하얀 돌둑을 쫓아 조심스럽게 배를 몰아 나갔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간 만큼 물 밑의 선분도 앞으로 앞으로 그를 앞장서며 물 밑을 뚫어 나아가고 있었다. (243~244면)

 

소설을 통틀어 조백헌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단 한 순간은 오랜 기다림과 시련 끝에 돌둑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대목이다. 이 장면은 2부의 첫 번째 장 ‘출소록기(出小鹿記)’의 클라이맥스다. “숨이 막힐 듯”, 마치 “꿈길을 따라가듯” 하얀 돌둑을 따라가는 조 원장은 감격하는 원생들을 이끌고 울면서 바다를 건넌다. 원장의 눈에 비친 돌둑은 그에게는, 그저 돌둑이 아니라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무엇”, “너무도 아름답고 환상적인”, “영혼을 지니고 숨을 쉬며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나 다름없다. 그 시선은 가히 자신이 창조한 형상을 바라보는 조물주의 시선, 혹은 공들여 빚은 예술품을 마침내 완성한 장인(匠人)의 시선에 육박한다.


“장엄하고 감동적인 한 편의 해상드라마”라는 서술자의 논평이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은 이 대목에 이르러 조 원장의 변모를 공들여 암시한다. 섬사람들이 한데 엉켜 기쁨을 나누던 순간이라면 독자는 이전에 이미 목격한 바 있지만 당시의 조 원장은 그 감격에서 스스로 소외된 유일한 예외였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병원팀이 축구시합을 이기고 돌아오던 날 심지어 시종일관 냉소적이던 이상욱마저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만, 그 감격의 도가니 속에서 원장은 혼자 “눈물을 흘리지 않고 웃고 있었”으며, 조 원장의 미소를 본 상욱은 그와 그가 말하는 천국에 대한 기대를 다시 한 번 접는다. 이상욱의 예리한 눈은 원장의 미소로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화합하는 기쁨이 아니라, 전체주의적 열광을 작동시키고 그를 기반으로 지배자에 대한 저항을 불식시키는 원장의 뛰어난 조종술을 읽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갖은 고난 끝에 돌둑이 솟아올랐을 때 보여주는 원장의 감격은, 비록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던 목표의 현실적 달성이라는 차원에 어느 정도 경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을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뚜렷이 확인하게 해준다. 이 장면을 본 독자라면, 그리고 이후 안팎의 거듭된 시련과 싸우는 조 원장을 본 독자라면, 타의에 의해 섬을 떠나더라도 절강제만은 보고 떠나고자 하는 조 원장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가 시작한 간척사업의 한 매듭이라 할 수 있는 절강제를 보지 못하고 조용히 떠난 조백헌이, 다시 섬으로 돌아와 준비하는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축사에서 둘의 결혼을 “버려져 있던 두 개의 방둑이 오늘 비로소 우리 눈앞에서 굳게 이어지는 절강제”, 곧 제2의 절강제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수차례 도전에도 끝내 이루지 못한 천국에 대한 그의 마지막 희원이다. 


조백헌이 이 또 하나의 절강제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는지 그러지 못했는지를 소설은 끝내 말해 주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그것 역시 실패에 가깝게 그려진다. 초판 해설 「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에서 김현은, 만약 소설의 주인공이 이상욱이었다면 “「소문의 벽」에서의 박준의 운명처럼 영원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천국에의 꿈 때문에 광태에 이르는 한 지식인의 심리적 과정이 처절하게 그려질 것”이라며, 『당신들의 천국』은 조백헌을 주인공으로 함으로써 이청준이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 한 편을 완성했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너무나도 섬세한 독자인 김현이 박준과 이상욱의 공통점만을 지적하고 박준과 조백헌의 공통점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히 장인적 자세로 천국 건설에 매진하던 그는 3부에서는 광인의 색채를 너무나도 선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3부를 이끌어 가는 기자 이정태는 오랜 시간이 흐르고 조백헌을 다시 만난 뒤, 그의 모습과 언동에서 “쉴 새 없이 일렁이고 있는 그 무서운 광기와 불안스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조백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섬에만 오래 계시더니 원장님은 이제 무엇엔가 잔뜩 미쳐가고 계시는 것 같군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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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글에서 김현은 “사랑을 전제로 한 이들의 결혼은, 열린 개인주의가 사회화하는 제일 좋은 전범이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을 화해롭게 모으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울타리를 열어버린다”고 쓰며, 그 글을 “이청준 소설에서는 극히 희귀한,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어 있는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후일담을 술자리에서나마 듣고 싶은 것이다”로 끝맺고 있다. 그는 왜 윤해원과 서미연의 후일담을 듣고 싶어 한 것일까. ‘하게 되어 있는’이라는 유보적인 수식어가 말해주듯 『당신들의 천국』은 ‘사랑을 전제로 한 이들의 결혼’을 확인하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결혼식 대신 소설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것은 광태에 휩싸인 조백헌의 주례사 연습이다. 다음을 보라: “시간이 이미 늦어버린 속에서도 조백헌의 능청스런 축사 연습은, 그리고 그 자신의 광기에 못 이긴 기이하고도 진지한 연기는 아직도 한동안이나 더 도도하게 계속돼 나가고 있었다.” 윤과 서의 후일담까지 갈 것도 없이 독자는 윤-서의 결혼식 광경을 볼 수 없고, 이미 늦어버린 조의 축사가 그들의 결혼식장에 도달할지 하지 않을지조차 알 수 없다. 소설 속에서 결혼식은 치러지지 않고, 남은 것은 조 원장의 주례사뿐이다. 이청준은 조백헌으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에 기반한 화합을 말하게 하는 동시에 그런 그의 희망 어린 기대를 의문 속에 밀어 넣는다. 조백헌의 광태가 반복적으로 지적되고 있다는 점, 그의 축사 연습 장면에서 작가 특유의 겹의 구조가 뚜렷이 구사되고 있는 점 등은 그 방증이라 할 만하다. 조 원장의 광기어린 축사는 결혼에 때맞추어 섬으로 돌아온 이상욱에 의해 엿들어지고, 다시 그런 상욱과 원장은 기자 이정태에 의해 관찰된다. 이정태는 ‘다소의 감동’과 ‘연민어린 비웃음’이 교차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원장의 축사를 엿듣고 있는 이상욱을 바라보는데, 이때 상욱이 결혼이 성사되기 위한 암묵적인 비밀을 떠올리고 있음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윤해원을 위하여, 어차피 문둥이 집단끼리 끼리끼리 모여 살게 된다는 체념어린 패배 의식을 허용하지 않기 위하여 건강인 여인에 대한 윤해원 자신의 떳떳한 자기 극복을 위하여, 조 원장과 서미연 사이에선 아직도 그녀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윤해원에게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조 원장은 이제 이정태에게 그 두 사람의 떳떳한 결합을 위해 그의 힘을 보태자던 것이다. (중략) 어쨌든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의 혼사는 모든 것이 조 원장의 사려 깊은 이해와 결단 속에 그럭저럭 탈없이 혼인날을 맞게 된 것이었다. (421~422면)


결혼식의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인 윤해원은 속는 자, 끝까지 홀로 속아야만 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결혼 상대인 서미연이 비한센인이라 믿고 있지만, 서미연은 섬에서 태어난 미감아 출신이다. 기자 이정태에게 서미연의 출생 내력을 전하며 조 원장은 그 사실이 섬에서는 자신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비밀이라 말한다(물론 독자는 서미연이 그에게 보다 먼저 상욱에게 이미 그 사실을 고백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를 비밀로 하면서까지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조백헌의 궁극적인 의도는 윤해원 개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건강인 여자와 환자 사이의 결합”으로서 그들의 결혼을 비한센인과 한센인의 화해의 한 상징으로 무대화해내는 데 있다. 윤과 서의 결혼은 (원장이 이 섬을 울타리 쳐진 천국 곧 ‘문둥이들만의 천국’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상욱의 편지로 깨닫게 된 자신의 실패를 수정하고자 하는 조백헌 최후의, 그리고 최선의 시도이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서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떳떳함’은 오히려 그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징후적으로 노출한다. 조백헌이 그토록 강조하는 믿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윤해원을 속이는 기만의 토대 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며, 비밀이 끝까지 유지되어야만 하는 그 결혼의 전망 역시 전혀 밝은 것이 아니다. 소설은 윤해원이 비한센인 교사가 섬으로 들어올 때마다 펼쳤던 집요한 구애의 내력을 반복적으로 일러 준 바 있다. 윤해원의 서미연에 대한 사랑은, 그 대상을 이상적 자아의 위치에 놓는다. 즉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비한센인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비한센인인 한에서만 (서미연을) 사랑할 수 있다. 그녀가 비한센인이라는 기만은 조 원장이나 서미연이 말하듯(혹은 바라듯) 윤해원 자신의 ‘자기 극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조 원장의 광기는 그 사실을 봉합하고자 하는 안간힘(혹은 스스로의 기만을 인정하는 무의식) 속에서 피어나며, 조 원장의 축사에서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말해지는 형식(독백)과 지연(遲延, 그가 결혼식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원장님의 천국에 또다시 눈에도 보이지 않는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있다는 증거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원장님이 천국이 진정 저들의 천국이 될 수 없다는 보다 더 좋은 증거는 바로 원장님 자신의 국외자적 편견 속에도 있습니다. (……) 원장님은 이 섬이나 섬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하시지 못합니다. 운명을 같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절대의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더욱이나 이 섬에서는 사정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운명을 살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없는 사랑이나 봉사는 한낱 오만한 시혜자로서의 자기 도취적 동정으로밖에 보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을 줄 수 없는 사람을, 그 사람의 천국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시혜자의 일방적인 동정이라 해도 그 이유 한가지만으로 그의 값진 봉사가 함부로 배척되어서는 안 될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그 때문에 원장님을 탓할 일도 아닐는지 모릅니다. 원장님과 섬 사람들은 애초부터 서로가 다른 운명을 살게 마련이었으니까요. (391~394면)


조백헌 원장과 황희백 장로가 지배자(비한센인)와 피지배자(한센인)로서 대칭을 이루고 있다면, 한센인 부모를 두고 뭍으로 떠나 다시 섬으로 회귀한 인물군이 소설의 또다른 한 편에 위치한다. 이상욱, 윤해원, 서미연이 그들―소설은 이들을 삼각관계로 묶고 있고, 이는 다소 자연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서술자에 의해 강조된다. 윤해원과 서미연의 관계는 비교적 뚜렷하지만, 상욱의 경우에 서미연을 향한 그의 마음은 조 원장의 추측으로만 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조 원장은 상욱의 섬 탈출의 중요한 원인이 질투, 즉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 방해 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이며, 이들은 모두 소위 ‘미감아’ 출신이다(윤해원은 ‘건강인’으로 섬에 들어와 발병하고, 그 이후에 섬에 있는 누이의 존재가 밝혀진다). ‘미감아’란 말만큼 한센병에 대한 대중의 뿌리 깊은 오해를 드러내주는 말도 없을 터이다. 아직은 감염되지 않았다란 의미의 미감(未感)이란 말은 유전되지 않는 한센병의 실체를 부정한다. 황 장로를 제외하자면 섬의 주요인물 셋이 모두 미감아란 설정은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지식의 차원에서) 비한센인이지만, 운명의 차원에서는 한센인이다. 섬을 탈출한 이후에도 뭍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일 수 없었으며, 섬에 있으나 없으나 자신은 섬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이상욱의 고백은 그 사실을 환기한다. 그렇다면 이상욱이 말하는 그 ‘운명’의 정체는 무엇일까. 조 원장은 섬과 운명을 같이 하지 못하며, “운명을 같이 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절대의 믿음이 생길 수 없다”는 이상욱의 비판은 단순히 ‘태생적인 한계’ 이상의 맥락에서 좀 더 깊이 있게 음미될 필요가 있다.


저 긴 편지 속에서 원장의 ‘국외자적 편견’을 지적할 때 상욱은, 조 원장이 바깥의 시선으로 섬을 재단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만 본다면 조백헌이 “나의 운명을 함께할 각오로” 다시 섬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아무런 진전을 볼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조 원장 자신은 그런 각오로 섬으로 다시 회귀한 이후에도 섬을 변화시킬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원장의 지위에 있지 않은 자신에게 이제 아무런 힘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라 풀이한다). 한센인과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섬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한센인의 고통을 함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조백헌이 놓치고 있었던 것, 그가 한 번도 절실히 사유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조백헌에게 한센인은 고통을 겪는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착취당한 ‘집단’으로서만 존재하며, 소설은 한센인들이 지금껏 주정수와 같은 지배자의 압제로 수난 받았다는 사실은 공들여 전달하면서도 그들이 한센병으로 인해 현재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소설 속 조백헌은 한센인의 천국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은 열렬히 보여주되, 그 열정의 출발점에 있어야 할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공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에게 한센인의 고통은 육체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가령 “몸으로 앓고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섬사람이 앓고 있다는 언급들)에서 사유되며, 그러한 맥락에서 그 고통은 한시라도 빨리 치유 혹은 교정되어야 마땅할 것일 따름이다. 이 점을 환기해 보는 것은 조 원장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는 물론 아니다. 비단 조 원장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정서는 흔히 타인의 육체적 고통보다는 정신적 고통에 보다 쉽게 이끌리며(아마도 독자가 한센인의 고통보다 조 원장의 고통과 좌절에 더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한 그러한 경험 속에 있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소설은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조 원장이라는 지배 권력이 끝내 도달하지 못한 한 지점을 현시한다. 굳이 바깥으로부터의 시련(실상 이는 그 불가능성을 가리는 장애물에 가까울 터다)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센인의 고통에 가닿지 못하는 한 조 원장의 공동체 설계는 좌초를 예정할 수밖에 없다. 황 장로가 다분히 종교적인 사랑론을 펼치며 원장에게서 다른 지배자들과는 달리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할 때, 그 말의 울림이 예상외로 크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조백헌이라는 이 희귀한 지배자의 열정을 이상욱이 사랑이 아니라 ‘시혜자적 동정’이라 일컫는 것은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설득력이 없지 않다.


원장은 말없이 마지막 병사까지 이정태를 안내해 갔다.

이번에는 아예 일그러진 입 하나를 제외한 모든 감각 기관을 상실한 환자들이었다. 네 팔다리와, 눈, 코, 귀가 하나도 성해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코와 귀와 눈들이 흔적도 없이 짓물러버린, 흡사 옷에 싸인 살덩이 한가지의 모습이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지가 오래 되어 입을 열어도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상스런 소리들을 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특별병사 환자들의 수를 모두 합하면 3백명 이상이나 될 것 같았다. (중략)

―저런 모습으로 살아 있을 수가 있다니. 인간의 삶이 저기서도 기도를 하고 감사를 지닐 수가 있다니……

그것은 참으로 이정태로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형언하기 어려운 이상스런 감동이었다. (375~376면)

 

소설 속에서 한센인의 몸, 그 육체성에 대한 서술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은 조백헌이 이정태에게 섬을 안내하며 마지막으로 이끌고 간 ‘특별병사’ 장면에 이르러서다. 그 전까지 섬이 겪어온 역사와 현재 모두에서 한센인의 육체성은 부차적으로 취급되거나 은유적으로 서술되며, 소설은 그것과 독자를 직접 대면시키지 않는다. 상욱들은 물론이고 황 장로까지도 육체적인 차원에서 그가 한센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위 인용문에서 소설은 섬주민들 중 무려 3백명 이상에 이르는, “입을 열어도 사람의 그것이라 할 수 없는 괴상한 소리를 내는” 특별병사 환자들의 면면을 제시하지만 이에 대한 이정태의 촌평은 외부자적인 ‘충격’과 ‘감동’에 그치고 있어, 있는 그대로의 재현(representation)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전시(展示)에 가까운 듯한 개운치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소설이 육체의 문제를 건너뜀으로서 한센병의 사회적 함의를 더 예각화시킨 측면은 분명하다. 전염성이 약해 분리수용되어 치유하여야 할 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식민지시대부터 소록도에 격리되기 시작한 한센인들의 삶은 푸코식 접근을 용이하게 할 뿐 아니라, 해석자로 하여금 다양한 차원의 알레고리를 재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남는 문제는, 이 해석의 알레고리가 작동하는 순간 ‘한센인’이라는 말 그대로 ‘특별한’ 타자들의 고통의 자리가 연기와도 같이 사라져버린다는 데 있다.


“이 섬에선 어디서나 죽은 자들만이 말하고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요.”

 

‘사자(死者)의 섬’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당신들의 천국』의 첫 번째 장은 이미 그 점까지를 일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관력이 뛰어난 원장이 간파한 대로, 이 유령의 섬에서 산자들은 말하지 않는다. 섬에서의 끊이지 않은 자살사고가 그러하듯 죽은 자들만이 죽음으로써 말하는 곳이 바로 이 섬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조 원장이 행하는 모든 것은 말하지 못하는 그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할 터이다(이는 또한 작가 이청준의 말하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백헌은 정부를 향해, 섬의 이웃 주민들을 향해, 기자를 향해, 그리고 무엇보다 한센인들을 향해, 한센인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하여 말한다. 스피박은 언젠가 재현을 두 가지 맥락에서 서술한 바 있다(「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대표한다(vertreten)는 뜻에서의 재현과 대상을 드러낸다(darstellen)는 의미에서의 재현이 그것이다. 전자의 재현, 곧 누군가를 대신해서 말하는 행위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언제나 왜곡과 은폐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섬사람들이, 특히 상욱이 심지어 원장에게는 동상이 없음을 확신한 연유도 끝내 그의 말을 회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조백헌 최후의 일성(一聲)이 결국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광기어린 독백으로 남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맥락에서 이는 또한 딜레마이다. 대상을 드러내는 재현이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타자들의 삶에 접근할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천국』이 아직도 많은 일반 독자들의 뇌리 속에 한센인의 삶을 환기해 준 소설로 기억되는 것이 바로 그 재현의 힘이 아니던가.   


그 고통의, 경험의 직접성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는 비판은 그러므로 안이한 것이리라. 그 딜레마는 비단 이청준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침묵당한 타자를 재현하고자 하는 모든 작가들의 딜레마이자,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할 우리 모두의 딜레마이다. 그 불가능성을 인정한 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어떤 담론을 빌어서도 충분히 말해질 수 없는 타자를 통해 거꾸로 우리가 가진 담론의 결여를 반성하는 것(스피박, 「하우주체의 문학적 재현」) 정도가 아닐까. 이청준이 그 자신의 유토피아론을 야심적으로 펼치면서도, 희망적 전망을 내세우는 대신 자신의 주인공을 광기로 몰아가야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고, 『당신들의 천국』의 문제성 역시 그 지점에서 선명하다. 《문장 웹진/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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