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의 애도를 위하여

 

91년의 애도를 위하여

―김연수, 「구국의 꽃, 성승경」



이수형




우리 문단에서는 조금 특이한 경우로, 김연수는 단편집의 표제를 그 안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에서 따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짓는 편이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그 예인데, 이처럼 독자적인 표제로 묶일 수 있는 단편들의 모음이 마치 일종의 기획 패키지 상품 같아서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제목을 접할 때 종종 ‘나는 기획작가입니다’라는 변형된 버전이 환기된다.

실은 둘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유효 기간이 지났을 수도 있지만 그 표현도 고색창연한 “감정의 유로(流露)”라는 낭만주의적 작가관이란 게 아직도 남아 있다면, 모름지기 작가란 자연스러운 자기 영감을 표현하는 사람이지 집필 기획을 입안하고 착착 집행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작가≠기획작가=유령작가’라는 공식이 가능하다. 별로 웃기지 않은 농담이다.

「스무 살」이라는 단편이 실린 첫 번째 단편집 『스무 살』은, 이런 제목 짓기 놀이에서 예외다. 그리고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또 단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발휘되는 작가 특유의 기획력이 확인되기도 하지만, 『스무 살』을 읽으면 자연인 김연수의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비교적 많이 ‘유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요컨대, 『스무 살』 역시 그 제목을 ‘내가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나 혹은 ‘나는 89학번 작가입니다’로 바꿔도 무방할 정도의 기획이 전제되어 있지만, 그래도 ‘아이’ ‘유령’과 ‘대학생’ ‘89학번’의 차이는 꽤 크다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스무 살』의 단편들을 쓰고 있었을 김연수는 89학번 대학생으로 강의를 듣거나 교정을 걷고 있었을 테고, 졸업했다고 해야 불과 2, 3년차였을 것이니 말이다. 『스무 살』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삶과 소설의 근접성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실감? 하지만 어차피 현장에 가까이 있어봐야 대개는 “실감나지 않는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게 아니면, 혼란? 아무튼 정의하기 곤란한 감정이다.


『스무 살』에 수록된 「구국의 꽃, 성승경」(최초 발표는 《현대문학》 1997년 8월호)에는 “92년 충무로에서 시위를 하다가 죽은 한 여학우” 성승경을 중심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이야기의 한 축을 이끄는 재민은 아마도 80년대의 끝 무렵에 대학에 입학했을 것이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데모만 열심히 했고, 제대 후에 “이제라도 한번” 하는 심정으로 92년 대선에 출마한 민중 후보 지원 조직에서 ‘구국의 꽃, 성승경’이라는 2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중동무이,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났는데도 “무엇도 할 수 없”어, 끝을 맺지 못하는 시나리오를 긁적이거나 압구정동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한다.

다른 한 축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누나의 죽음을 접한, 성승경의 남동생 승진의 이야기로, 마치 죽은 자의 혼이 빙의라도 된 양, 점점 누나를 닮아가는 그는 유품이 된 원피스를 꺼내 입고 압구정동 거리를 배회한다. “압구정동에서만은 누나의 옷을 입은 승진도 혼란을 느끼지 않았다. 온갖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압구정동 그 거리는 승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정체성이 혼동되고 있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다행히 그러한 혼돈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요약하고 보니 뭔가 상투적인 것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작가 후기가 소설보다 더 민감하게 보여주고 있는 어떤 장면의 반복 같은 것, 말하자면 “그로부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의 책을 읽던 눈으로 24시간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는 스타TV를 밤새워 봤고 대학노트에 고민을 빽빽하게 적어가던 손으로 컴퓨터 오락에 탐닉했다. 어떤 콤플렉스도, 죄책감도, 심지어 성찰도 없었다”와 같은 것.

갑자기 정치의 시대가 가고 문화와 욕망의 시대―영화든 복장도착(transvestism)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가 도래했다는 것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한데, 화염병을 던지다 구속되었던 88학번이 이제 1000만 관객이 든 영화의 감독이 되었고, 지금은 압구정동뿐 아니라 어디서든지 넘쳐나는 취향과 정체성의 자유를 목격할 수 있게 된 듯도 하다. 그러나 또 그게 전부가 아닐 것은 분명하다. 후기는 “어떤 콤플렉스도, 죄책감도, 심지어 성찰도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콤플렉스를, 죄책감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성찰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소설 아닌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성찰을 시작해야 할 것인가? “92년 충무로에서 시위를 하다가 죽은 한 여학우” 성승경은 91년 5월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 진압에 압사한 한 대학생을 연상시킨다. 91년 봄 이른바 분신 정국 속에서 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10만 20만을 운운하는 대규모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고등학생, 넥타이 부대,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에 동참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 “87년 6월 항쟁 당시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고 묘사하거나, 또 “80년 광주민중항쟁사건 이후 11년 만에, 그리고 박종철?이한열 씨 사망 사건 이후 4년 만에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91년의 5월은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사회평론》91년 6월호 참조)고 모종의 여운을 남기면서 끝맺는 기사를 십수 년 뒤에 읽는 자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또 모든 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1년의 봄이 80년의 봄이나 87년의 여름처럼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91년 봄은 대필과 변절의 추문 속에서 슬그머니 실종되었고, 다음해 대선에서는 재민이 잠시 지원 조직에 몸담았던 민중후보도 아니고, 또 공선옥의 「목마른 계절」에서 현순 씨가 “그가 대통령 안 되면 모두들 혀 깨물고 죽어야 한다”면서 결사 지지했던 후보도 아니고, 3당 합당의 주인공이었던 후보가 승리했다.

91년 봄에 거리에서 진행되었던 사건보다, 오히려 그때 대한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그리고 가을까지 흥행을 이어가 〈터미네이터2〉를 누르고 서울 관객 100만 돌파의 성적을 거뒀던 〈늑대와 춤을〉이 더 오래 기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91년의 시위나 92년의 대선 따위는 잊어버리고 영상이나 게임을, 그것들을 아우르는 문화상품을 탐닉하라는 시대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치에서 문화로’라는 명제는 실은 그 안에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흐름 전체를 담고 있는 것이어서,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문젯거리이다. 한발 물러나,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즉 ‘~에서 ~로’라는 변화의 형식만을 문제 삼기로 하자.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는 당연히 ‘어제에서 오늘로, 또 내일로’의 변화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변화가, 0시를 기점으로 어제에서 오늘로 바뀌는 것처럼, 그렇게 단정하게 진행될 수만은 없다. 여기서부터 성찰을 시작해 보자. 사실, 콤플렉스니 죄책감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그처럼 단정 일변도로만 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산물’―그렇다고 해서 ‘주산물’보다 덜 중요하지는 않은―이기도 하다.


「구국의 꽃, 성승경」은 죽은 자에 대한 병적 애도(mourning)에 관한 소설이다. 애도란, 소박하게 말하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또 살아야 한다거나 애인과 헤어졌지만 여자(혹은 남자)는 또 얼마든지 있다는 식의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과정이다. 일견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그래서 아무도 그런 과정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라고 정색하며 물어본다면 이에 대답하기란 간단치 않다. 어쨌든, 한때 애착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상실해버린 것과 자기를 분리해내는 심리적 작업을 애도라고 부른 프로이트는, 그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작업이 실패하는 많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구국의 꽃, 성승경」의 재민과 승진의 이야기도 그 사례들 중 하나이다.

같이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서영에게 재민이 말한다. “그래, 분명히 죽었어. 우린 장례식 때도 가봤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성승경이었어. 나는 누구보다도 더 자주, 더 많이 성승경의 사진을 보았던 사람이야. 잘못 볼 리가 없어.” 재민은 죽은 성승경과 편의점에서 재회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애도가 정상적으로 종결되기 위해서는 죽은 자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데,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죽은 자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것이다. 예상대로 되었다면 재민이 찍고 있던 다큐멘터리 ‘구국의 꽃, 성승경’은 민주 열사로서의 그녀의 죽음을 증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인간 성승경은 사라져갔고 그 자리를 대신해 구국의 꽃 성승경이 16밀리 카메라 속에서 완성되어” 갈 뿐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사로잡힌 그는 끝내 작업을 끝내지 못한다.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민 내부에 있다. “80년대 한 선배가 분신을 하고 뛰어내리면서 거의 성지처럼 된 곳”에서 그 선배를 기리는 기념비가 과연 솔직한 것인가를 의심했던 그가 성승경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비로서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은 1차적으로는 회색의 회의주의에 빠진 재민 개인의 의혹이면서, 동시에 성승경을 ‘구국의 꽃’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그 기록은 더 이상 80년대 열사의 이미지를 환기시키지 못한다는 것, 혹은 80년대에 열사가 환기시켰던 이미지를 더 이상 갖지 못한다는 것, 요컨대 그것은 단지 “성승경을 세속의 자리에서 신성의 자리로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투사된 결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90년대적 의혹이기도 하다.


네가 공(空)을 찍었든, 네 욕망을 찍었든 그게 바로 진실이야. <구국의 꽃, 성승경>이 아니라 로맨틱 스릴러를 찍었다고 해도 너는 그렇게밖에 찍을 수 없었을 거야.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하란 말이야. 더 이상은 죽은 사람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밤을 헤매지 마.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승경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네가 천 년 만 년을 기다린다 해도 살아 있는 성승경은 돌아오지 않아. 이미 죽어버린 거야. 그리고 너는 죽은 성승경을 찍은 거야. 그 죽음을 그냥 받아들였으면 해.


그렇다면 성승경은 왜 죽은 것인가? 민주 열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면 다만 우연한 불운 때문에 죽은 것인가? 서영은 재민에게 “그 죽음을 그냥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만, 그는 성승경의 죽음을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성승경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고, 또 그래서 그는 성승경을 만날 수 있다.

다른 한 쪽에서 승진 역시 누나 성승경의 죽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쓴다. 그 역시 누나의 죽음을 열사의 죽음으로도, 그렇다고 단지 불운한 죽음으로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나가 죽자, 승진은 남자인 자신에게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누나의 죽음은 남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승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왜 누나는 죽었는데, 자신은 죽지 않았는가? 똑똑하고 붙임성 좋아 모든 친척들이 여자로 태어난 게 아깝다고 할 정도의 누나였는데, 죽어버렸다. 덜 똑똑하고 붙임성도 없는데다가 세상과 잘 유화하지도 못하는 자신은 살아남았다. 어쩌면 승진 자신은 남자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승진은 누나의 죽음이 남자들 때문이며, 따라서 같은 남자인 자신에게도 얼마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희생된 피해자로서의 누나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스스로 피해자가 됨으로써 그 죄책감의 일부를 갚으려고 한다. 물론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이것이 그가 누나의 죽음을 납득하는 방식이고, 그래서 그는 “죽은 누나의 옷을 입고 아버지 몰래 밤마다 밖으로 나가 여자 행세를 하는 일”을 계속한다.

애도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완결되는 것이라면, 죽은 사람 때문에 자기 자신들이 “죽은 사람처럼 핏기 없는 얼굴로 밤을 헤매”거나 “죽은 누나의 옷을 입고 아버지 몰래 밤마다 밖으로 나가 여자 행세”를 하고 그렇게 헤매다 압구정동의 한 편의점에서 조우하는 재민과 승진에게 애도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또 그런 식의 애도는 결코 끝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들의 애도는 정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또,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라도 그저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는 식의 애도는, 그러면 정상적인 것인가? 아무튼 성승경의 애도되지 못한 죽음은 재민과 승진에게 콤플렉스와 죄책감을 유산으로 남겼고, 「구국의 꽃, 성승경」은 그 콤플렉스와 죄책감의 기록이다.


좀더 범위를 넓힌다면, 「구국의 꽃, 성승경」만이 아니라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포괄하는 김연수의 소설쓰기 전체가 일종의 애도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에서 지금으로’라는 형태를 띤, 상실을 동반한 변화가 있고, 결코 깔끔할 수만은 없는 그 변화가 남긴 부산물 때문에 소설쓰기를 시작했다면, 그런 소설쓰기는 애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구국의 꽃, 성승경」은 그 작업의 기원에 ‘정치에서 문화로’ 혹은 ‘80년대에서 90년대로’라는 변화가 놓여 있으며, 그 91년의 변화에 대한 애도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89학번 작가인 전성태의 「연이 생각」(《창작과 비평》2001년 봄호)을 덧붙여 보자. 「연이 생각」의 서술은 「구국의 꽃, 성승경」에 비해 훨씬 고백적이고, 또 91년의 죽음들에 대한 생각도 동일하지만은 않다. 적어도 「연이 생각」의 화자는 그 “젊은 죽음들은 분명 권력을 향해 있었다는 공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한편에서 “열패감과 무력증에 더 발을 들여놓고”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나는 그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라고 꽤 애를 쓰며 살아왔다. 나는 그가 생이 버거워서 도망쳐버린 아이쯤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무슨 강박증 같은 심리에 시달려왔다. 일테면 나는 무모하게도 그의 죽음이 한때 거리에서 쓰러져간 숱한 젊은이들의 죽음과 나란히 놓여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저 1991년 어름, 소위 그 전염병처럼 번지던 죽음의 행렬의 마지막으로 기억되길 원했으며, 나아가 열사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저 1980년대적인 죽음들에 대한 어떤 마지막 상징쯤으로 자리잡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연이를 추억하는 행위가 결국은 한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지우겠다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가 혐의를 씌운다고 해도 나는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다.

아무튼 나는 연이의 죽음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의도를 꽤나 진지하게 마음속에서 키워온 셈이다. 이때껏 그 아이의 죽음은 그런 의도 때문인지 늘 내 곁에 머물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나는 상복을 못 벗은 상주처럼 일상을 잃고 살아왔다. 그렇게 되자, 마치 그의 죽음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그 길밖에 없는 것마냥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죽음 앞에 어떤 비석을 세우자는 의도는 아니었다. 열사라니, 당치도 않다. 그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그 나이에 할 법한 고민을 안고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나약한 젊은이에 불과할 뿐이다. 그에게 누군가 열사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시대에 대한 지독한 희화화이기 십상이고, 한편 연이에게는 더없는 모욕이 되리라 생각한다.


91년에 죽은 것도, 그렇다고 민주화의 대의를 위해서 죽은 것도 아닌 연이를 한사코 91년의 죽음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싶은 ‘나’의 바람은 그 공분과 열패감의 역학 관계 안에서 비로소 설명될 수 있다. 연이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애도를 마치기를 원하는 ‘나’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열사도 아닌 그렇다고 “생이 버거워서 도망쳐버린 아이”도 아닌 연이를 애도하는 것은 실은 ‘나’의 한 시절을 애도하는 것이다. 그 시절은 그 시절이고 지금의 나는 또 나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애도가 한 시절을 아예 없었던 것처럼 들어내는 것이 아님은 물론인데, 그럴 거면 애초에 애도의 책임 따위는 떠맡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91년의 봄은 80년의 봄이나 87년의 여름처럼 기억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애도가 절실히 요청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장 웹진/ 2006년 11월》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