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와 위반의 알레고리

 

윤대석(문학평론가)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줄여서 『재즈』로 명기함)의 세계는 실제 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재즈』는 실제 세계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이 말은 『재즈』에서 헬기가 한강에서 솟아나와 ‘재즈 교회’ 신도들을 구출해간다거나, 아침에 지하방에서 출근해서 3층으로 퇴근한다든가 하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는 『재즈』에서 기이한 사건이나 개연적인 사건 모두가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작품의 화자도 그것을 표나게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처제가 오면 그 침대를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 공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걸 못하게 하면…… 그는 죽는다. 그런데도 그런 공상을 하면 안 된다는 사람이 있다. 그의 단칸방에는 침대가 없다고. 아내의 동생을 탐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142면)


여기에는 이 소설을 설명해주는 두 가지 요소, 즉 위반으로서의 에로티즘과 현상계의 투명한 인식을 거부하는 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우선 에로티즘은 도덕, 혹은 제도라는 금기에 대한 위반, 즉 부도덕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면 주인공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금기의 위반은 죽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 두 번째 요소에 대해 조금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 ‘공상하기’로 드러나는 알레고리는 카프카에게서 보듯이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불가능해졌을 때 가능한 인식의 방법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에서 비롯하는 명징한 인식적 근원으로서의 주체와 그 주체의 총체적인 세계인식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믿는 해체주의자들에 의해 알레고리는 방법이 아니라 인식론으로 전환하게 된다. 폴드만(Paul de Man)에 따르면 언어는 상징과 알레고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징이란 언어의 표상 기능과 의미 기능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지 않는 언어 표현인데 반해 알레고리는 자체의 구성 요소가 아닌 의미를 임의적으로 지시함으로써 일단의 의미의 해독이 완료되면 잠재적인 암시적 의미 기능이 소진되는 기호이다. 상징이 주체의 투명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자들의 환상에 불과하며 우리의 언어 세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존의 의미가 지워지고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지는 알레고리적 기호 세계라면 우리는 총체성의 요구를 포기해야 한다. 세계는 단일한 체제, 단일한 기호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호들의 차이와 연기, 즉 기호의 유희에 의해 임의적으로만 파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재즈』에서 세부적인 사실들, 즉 TV가 몇 인치인가, 주인공이 사는 곳은 몇 층인가, 아내가 무엇을 먹고 토했는가 하는 것은 오직 기호들의 흔적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들이다. 실제의 영역에서는 지하는 지하이고, 3층은 여전히 3층이다 하더라도 가상이나 언어의 영역에서는 그것은 흔적에 불과하다. 가상과 언어의 영역인 소설은 실제 세계를 직접적이고 투명하게 지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폴드만이나 데리다의 기호에 대한 이론이 기호의 전적인 자율성을 인정하는데 반해 『재즈』에서는 오히려 기호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알레고리가 방법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재즈』에서 해체주의자들의 관점이 수용되기는 하지만 『재즈』가 전적인 유희로 기능하지 않고 하나의 반성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해체주의자의 이론 자체도 하나의 반성의 기능으로 작용할 뿐이지 언어적 유희가 아니다. 그럴 때 총체성의 요구는 해체론자들의 말과는 달리 포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연기되는 것이며 무의식 속으로 숨겨지는 것이다. 하나의 기호가 차이와 지연, 혹은 흔적에 의해서 나타날 뿐이고(데리다) 알레고리에 의해 임의적으로 지시되는 것(드만)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숨겨진 총체성을 물을 수 있고 물어야 한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던에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료타르의 논의에 관해 쓰면서 정치와 역사의 목적론이나 역사의 위대한 동인, 주체 등을 우리가 믿지는 않기 때문에 정당화의 서사, 즉 총체성이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러한 모순은 총체성이나 메타 서사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잠복된 것으로 파악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재즈』는 분명 상당히 자율적인 가상의 영역이며 기호의 유희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는 그것의 정당성을, 혹은 그것의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재즈』는 방법론상에서만 아니라 인식론적인 의미에서 보았을 때에도 알레고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의미망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전체적으로는 방법적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재즈』는 금기와 위반의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아내’는 금기의 알레고리이며, ‘그’는 관계적 주체의 알레고리이며, ‘처제’는 위반의 알레고리며, ‘재즈 교회’는 지속적인 위반의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관계적 주체의 알레고리인 ‘그’는 이 소설의 대부분의 인물과 같이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이름이 자신의 동일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름이 불리지 않는 것은 타자에 의해 의식되는 나를, 즉 나의 타자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당신’이며 ‘처제’의 ‘형부’이며 ‘직장 후배들’의 ‘선배님’에 불과하다. 동일성을 가진 인물로서 ‘그’가 아니라 관계 속에 놓여진 ‘그’이다.


하나님의 명칭들이 신적인 본질을 표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부여하는 이름들도 하나님이 아닌 것을 말하는 한에서만 하나님의 명칭이 된다.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인식하고 말로서 부를 수 있는 모든 명칭 위에 머물러 있다.(91면)


여기서 하나님을 ‘그’, 혹은 이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로 보면, 근대적 주체로서의 개인과는 상당한 인식차가 있다. ‘그’는 규정될 수 없고 차이와 연기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타자성으로서의 ‘그’는 행위하지 않고 욕망할 뿐이다. 그래서 무기력하다. ‘그’는 단지 “아무 존재도 아니며” “無”(149면)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기존의 선거판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행위하지 않고,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또한 ‘금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아내의 폭력에 무기력하다. 그러나 ‘그’는 금기를 깨뜨리기를 욕망한다. 즉 위반을 꿈꾼다. 그것이 없으면 ‘그’는 죽을 것이다.

‘아내’는 금기의 알레고리이며 ‘처제’는 위반의 알레고리이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금기의 세계는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동일성을 인식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금기는 이성으로 치환할 수도 있으며 노동으로 이룩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상태, 즉 본능에서 벗어나 자연과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한 이래 금기는 존속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금기, 이성, 노동의 세계가 인간적인 삶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의 세계는 우리를 완전히 몰두하게 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위반의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위반은 자연의 세계와는 다르다. 자연의 세계가 금기 없는 위반만의 세계라면 위반은 금기와 긴장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금기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죽음에의 금기와 성적 금기가 바로 그것이다. 죽음의 금기는 시체를 땅에 묻는 것에서 드러난다. 동물은 시체를 땅에 묻지 않는데 반해 인간은 시체를 땅에 묻음으로써 그 금기를 지킨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개체의 불연속성을 극복하고 연속성에 이르게 되는데 그에 대한 두려움은 노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체를 보았을 때 느끼는 개체간의 연속성은 성적 희열의 상태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죽음에 비해 강도가 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두 개체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이며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노동의 세계에 의해 통제된다. 노동 시간에 이루어지는 성적 결합, 무분별한 성적 결합 등은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재즈』에서 성적 금기의 위반을 통제하는 이러한 사회는 아내를 통해 알레고리적으로 표현된다. 아내는 ‘그’가 ‘처제’(위반)를 꿈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아내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을 허용하면 아내가 죽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아내에게 죽을 것이다. 아내는 항상 그에게 금기나 의무만을 지운다. 이는 아내의 말투를 잘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는데 아내는 ‘그’에게 명령법을 써야 할 곳에 당위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당신, 빨리 세수하고 준비해야 돼”(38면)는 보통 어법으로 하면 “당신, 빨리 세수하고 준비해”가 되어야 하며 “당신은 청소부나 되었으면 좋았을 사람이야. 그걸 알아야 해”(12면)에서 “그걸 알아야 해”는 전혀 필요 없는 허사에 불과하다. 아내는 또한 그를 옥죄는 일상의 역할도 맡고 있다. ‘그’는 항상 아침에 아내의 거짓말에 깨어 일어나 저녁까지 일하고 돌아와 비디오를 보는 동일한 생활을 반복한다. 그러한 일상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는데 『재즈』에서는 그러한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 변주된다. 『재즈』의 삼분의 이 가량까지도 “일곱 시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버스로 회사로 내달려가는 일”이 오늘이나 내일이나 “반복될 것”(111면)이라는 것이 뒤바뀌리라고 상상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는 오직 일상과 금기만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그’에게 벗어날 수 없는 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재미있어요. 그 좀벌레에겐 볼펜으로 그려진 얇은 원이 넘을 수 없이 높은 장벽이었던 거예요.”

“그래…… 그러고 보면 우리도 그 좀벌레보다 더 나을 게 없어. 보라구. 이 가게에 복작대는 사람들을.”

“맞아요. 우리 주위에도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져 있어 집과 회사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거예요. 아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해요.”(251면)


아도르노가 제2의 자연이라고 명명한 이러한 일상이 지속되는 것은 권태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억압에 가깝다. 그러나 이 때 억압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생활세계를 침범하는 도구적 이성의 억압을 의미한다. 생활세계가 물화되고 왜곡되는 이유는 과학의 영역인 도구적 이성이 여기에 침입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도구가 되는 경험적?분석적 이성이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만 그것이 절대 원리로 등장할 때 이는 억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편의적으로 설정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압도하여 인간마저 교환가치로 환원하는 현상에서 잘 드러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척도는 교환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는 종교도 소비자를 모으기 위해 하얀 색깔의 십자가를 붉은 네온사인으로 바꾸고 스티커로 만든 광고를 뿌려댄다(130-131면). 또한 소비자를 세뇌시키기 위해 자연의 영역인 음향을 조작하기도 한다(127면). 그러나 『재즈』에서 해방의 가능성도 부정된다. 왜냐하면 억압하는 권력과 거기에 저항하는 해방적 인식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쓰레기더미 같은 유세장 가운데서 오늘 새벽 또 한 사람의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리고 쓰레기에 대한 결벽으로부터 투표에 불참했던 그는 회사에서 정치 무관심자로 조롱을 받았다. 어쩌면 부장은 나를 사회 부적응자 혹은 공동체 정신이 부족한 자로 낙인찍었을 지도 모른다.(37면)


억압하는 권력이 퍼뜨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일사불란한 전체주의는 해방적 인식도 또한 가지고 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후보단일화라는 입장으로 그것을 주장했기 때문이다(29면). 더군다나 환경문제나 여성 문제 등에 있어서는 지배 권력이나 저항 권력이나 마찬가지로 억압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은 “아무것도 되지 않는 곳이다”(324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이곳에서 가능한 유일의 저항 방법은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다. 금기는 항상 위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만 금기는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위반은 금기를 느끼게 해주며 그것을 완성시킨다. 『재즈』에서는 ‘처제’가 위반의 알레고리를 구성하고 있다. 위반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위반이며 그것은 개체를 죽임으로써 완성된다. 동물의 위반은 무엇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무차별적 위반이며, 동물의 죽음은 신성의 대상이 아니라 물화된다. 위반은 결코 동물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노동의 세계가 동일자인 주체가 타자를 억압하는 세계라면 위반의 세계는 타인과의 불연속성을 극복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타자의 인정이다. 이는 아도르노에게 있어 객체에 동화되는 미메시스의 세계이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동일성의 신화에 빠져 있는데 이는 자연을 정복하고 객체인 자연을 주체 속에 동일화시키려는 노력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미메시스적 노력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인간이 그의 타자에 관계하는 방식이며 무엇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직접적으로 되풀이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몰두시키는 것이다. 근대의 계몽적 이성은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억압시켜 왔다. 이것에 의해 억압된 것은 비단 위반에 의해 달성되는 에로티즘뿐만 아니라 광기, 신성과 같이 이성의 외곽 지대에 존재하면서 이성에 의해 비도덕적 혹은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억압된 타자는 무의식, 즉 하수구 속으로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속시원하게 처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갈대밭을 찾았으나, 아무래도 마땅한 곳이 없어 화장실의 변기 뚜껑을 열고 거기다 얼굴을 박은 채 처제의 이름을 수십 번이고 호명했다. 그리고 무슨 완전 범죄를 시도하는 흉악범처럼 변기의 손잡이를 눌러 탕- 하고, 물을 흘려보냈다. 그리하여 처제의 이름은 갖가지 욕망으로 캄캄해진 서울의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120면)


바타이유는 노동에 의해 성적 금기가 행해져 왔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일정한 규칙과 제한 속에서만 성행위를 해왔으며, 성기를 노출하는 시대나 장소는 있었지만 발기된 성기는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남녀의 성적 결합은 은밀한 곳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금기를 어기는 것은 노동을 혼란에 빠뜨리는 폭력이다. 위반은 근친상간의 금지를 깨뜨리는 데에서 에로티즘의 극치를 이룬다. 이는 금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의 위반에 따르면 쾌락의 양이 증가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인데 『재즈』에서의 위반은 이러한 근친상간의 금기에 대한 위반이다. 근친상간의 금기는 『재즈』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즉 “처제는 나의 애인이었다, 따라서 나에게 이 금기는 터무니없고 폭력적이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금기의 폭력적인 탈취에 의해 이것의 위반은 억압된 것이기는 하지만, 원초적으로 이 금기는 무효이기 때문에 ‘그’의 위반은 정당하다. 그러나 『재즈』에서 금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금기는 위반의 쾌락을 배가시키기 위해 전면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것이 ‘그’가 폭력적인 결혼에 반대할 수 없었으며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금기를 버리면 위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자극하는 부분은 신비와 낭만이지 노출은 아”(64면)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재즈 교회’에 적극 가담하지 않는다.

재즈 교회는 금기를 전면 부정하는 지속적인 위반의 알레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재즈는 “나를 버리고 더 넓은 나를 얻는 것으로 보편 체험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인류의 원초성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며, 자기 정체성, 즉 동일성의 신화를 완전히 떨쳐 버리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원죄니 윤회, 구원이니 해탈 따위가 모두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에 물들어 있다는 수작 아니야? 그들은 나약하고 비천한 인간의 심리를 담보로 잡고서 이성과 금제의 규율을 하늘 높이 세우지. 교회의 첨탑과 불탑을 봐. 거기에 반해 ‘재즈 교회’는 지하에 근거를 틀고, 죄책감에 억눌린 인간들에게 쾌락과 자유를 풀어주지.”(340면)


이는 데리다의 언어인 산포 혹은 차연이라는 필명을 가진, 전직 작가이자 재즈 교회의 크신 선생님의 말인데 여기서는 노동의 세계, 금기의 세계는 완전히 부정된다. 샤머니즘과는 달리 기독교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원죄를 가지게 된 창세기에서 비롯된다면 하나의 금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샤머니즘에서는 희생양(이것은 동물이 주였지만 사람도 그 대상이 되었다)을 죽임으로써 죽음에의 금기가 위반되는 신성이 있었고, 성기에 대한 숭배가 있었음에 비해 고등 종교는 그러한 의식이 없거나 미비하다. 이는 그러한 종교들이 금기의 작용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원시 종교가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노동의 세계를 정당화시켜주는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하는 고등 종교에 통합되었을 때 그러한 위반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게 되고, 원시종교를 통합하여 위반을 배제한 종교는 지상의 논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단의 열매가 없이는 원죄의 쾌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의 금기가 없이는 살인이 위반이 될 수 없다. 동물의 세계에서 종족살해는 위반이 아니라 본능에 불과하다.

신성은 감정의 무제한적 폭발이 아니라 금기의 위반을 통해 달성된다. 샤머니즘에서 희생양은 금기의 위반을 통해 신성에 도달하는 의미를 지녔다. 살인은 금기인데 그것을 일 년에 한번 내지 두 번 정도 그 금기를 사회 전체가 위반하는 식을 거행함으로써 신성을 맛보았던 것이다. 죽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신성은 성적 금기의 위반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쾌락과 다른 것이 아니다. ‘재즈 교회’가 지향하는 바는 이러한 위반이 일상화되는 세계이다. 이것은 모든 금기가 사라지는 축제와도 같다. 축제에서는 소비와 위반만이 존재하며 위반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노동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제한이 가해진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재즈 교회’는 하나의 가능성, 즉 신성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제시되며, 끝없이 동일화의 논리에 시달리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지루한 현실에서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의 의미를 가진다. ‘재즈 교회’가 출현하기 전까지 위반의 역할을 했던 처제마저 잊어버릴 정도인 것이다. 처제가 일회적인 위반이라면 ‘재즈 교회’는 지속적인 위반이 가능한 세계, 곧 위반이 일상화된 세계이다. 그러나 ‘그’는 ‘재즈 교회’에 참가할 수 없는데 이는 ‘그’가 노동의 세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에게 처제에 대한 욕망이 늘 작동하고 있듯이 재즈 교회에 대한 욕망, 즉 지속적인 위반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


얕은 낮잠에 빠지거나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던 중에 ‘재즈 교회’에서 들었던, 곡명은 모르지만 인상 깊던 재즈의 악절이 그의 뇌리를 가만가만 스치고 지나갔는데, 들릴 듯 말 듯하고 알 듯 말 듯한 그 가락들은, 왠지, 몹시 그리운 것들이었다.(348면)


그러나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였던 위반의 가능성이 모두 부정당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노동의 세계이다. 그에게 그리운 것으로 느껴지는 ‘재즈 교회’는 이성의 세계로부터 “사교집단”, “미성년자 강간, 학대와 사기, 공갈, 심야영업 지시”, “시한부 종말론, 카리스마적인 교주 숭배, ‘나만의 구원’ 선민사상 주입, 치병강조와 헌금 종용, 배타적 성격의 공동체 형성”(345-346면) 등으로 구분되어 거부되고 거짓으로 판정을 받는다. ‘재즈 교회’의 강렬함에 의해 잊혀졌던 또 하나의 탈출구마저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처제가 백화점에 취직함으로써, 즉 그녀가 자발적으로 금기의 세계로 진입한데 대한 “배반감”(348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처제가 ‘그’에게 순수하고 순결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오직 위반의 의미가 있을 때뿐이다. 그러나 ‘그’가 탈출하려는 세계로 처제가 편입된다는 것은 하나의 위기감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쓰레기에 대해 화를 낼 뿐”(256면)인 것처럼 그의 존재 이유는 처제를 욕망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엘리베이터 걸이 된 처제에게 쓰레기에 대해서 화를 낼 때처럼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렇게 처제에의 욕망마저 무산될 때, 이제 ‘그’의 탈출구는 없는 셈이다.《문장 웹진/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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