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확 外 3편

유강희  

 

돌확

감나무가 있는 빈집 

이슬의 집 

귀 한 잎 


 돌확

 자식 일곱을 뽑아낸 이제는 폐문이
 
되어버린 우리 어머니의 늙은 자궁 같은 
 오래된 돌확이 마당에 있네 
 귀퉁이가 떨어져나가고 이끼가 낀 돌확은 
 주름 같은 그늘을 또아리처럼 감고 있네 
 황학동 시장이나 고풍한 집 정원에는 제법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받아먹고 
 눈이 오면 또 그냥 눈을 받아먹으며 
 뿌리를 내릴 생각도 않네 
 뿌리 대신 앉은 자리엔 쥐며느리들만 
 오글오글 세월처럼 모여 사네 
 하지만 지금 돌확 속엔 
 내가 싸릿재 저수지에서 잡아온 새끼 우렁 하나 
 돌젖을 빨아먹으며 자라고 있네 
 돌젖에 눈물처럼 금이 가 있네


 감나무가 있는 빈집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놋화로 하나 들고 마당 모롱이에 서 있었네 
 봄부터 죽어라 마른걸레 물걸레 오갔을 
 그리하여 자루에 담긴 팥냄새 같기도 하고 
 할머니 비녀 냄새 같기도 한 것이 
 실꾸리처럼 스르르 풀렸다 감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정갈한 빈 사발을 보여주어 
 매미는 제 폭폭한 울음도 다 퍼내지 못하고
 서둘러 그곳을 떠나기도 했으나 

 여자는 열다섯에 시집을 와 일 년도 채 못 살고 소박맞은 색시같이 
 그 자리에 꿈쩍 않고 선 채 놋화로를 마치 커다란 꽃숭어리인 양 받들고만 있었네 

 그러다 무청이 처마 끝에 조기 새끼처럼 엮이어 말라가고 
 깊어진 제 눈망울만큼이나 소의 군것질도 점점 늘어가면서 
 여자는 낮으로 낮으로 가을볕도 가랑가랑한 놈만 골라 
 불씨를 만들기 시작했네 

 그러던 어느 아침 두드리면 금방이라도 텅, 텅, 울릴 것만 같은 놋화로 위엔 
 서글서글한 빨간 불씨들이 소보록이 담겨 있었네 

 하지만 그 여자 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뜨거운 놋화로 머리에 인 채
 다만 제 안의 슬픔을 누르듯 마당 모롱이에 오래도록 서 있기만 했네


 귀 한 잎

 이 세상 밖 또하나의 귀 한 잎을 가지라면 
 나는 서해 앞바다 저무는 심포의 풍경을 갖겠네 

 그래서 나는 울음이 약처럼 뼈끝에 박히는 
 새가 날아오면 갯벌 속에 숭숭 먹을 것을 넣어두었다 
 달디단 곶감 빼주듯 하나하나 꺼내주겠네 

 가난한 아낙들 귓밥처럼 바위에 달라붙어 
 굴을 따거나 조개를 캐기도 하겠지만 
 내 귓속은 오히려 애인의 무릎처럼 편안하겠네 

 그리고 지는 해를 받으며 돌아오는 작은 배에겐 
 물살도 가만가만 펴서 비단길을 만들고 
 멀리서 손 흔드는 그대에겐 뱃고동도 뿡뿡 울려주겠네 

 사람이 외로운 것은 귀가 있기 때문이지만 
 그 외로움 아니라면 그대에게도 가지 못하리 
 그대가 떠나도 떠나도 다시 돌아오는 포구가 되겠네 

 이 세상 밖 또하나의 귀 한 잎을 가지라면 
 내 마음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그대에게 주겠네


 이슬의 집

 달개비꽃 밑에 
 여인숙 치는 
 여치  
 숙박계도 안 쓰고 
 하룻밤 자고 가는 
 이슬
 하늘일까  
 지상일까 
 이슬의  
 집 

 

유강희 시인의 시는 미혹을 미혹으로 그냥 둔다. 홀리고 사는 생명은 홀리고 살게 그냥 놔둔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시금내도 안 나"는 시편들이다. 그것의 희한하다. 그의 시들은 세속의 우리 언어가 얼마나 고운지를, 젓갈처럼 감칠맛이 나는지를 새록새록하게 보여준다. 언어의 눈망울이 맑고 반짝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배에 주름이 꾸덕꾸덕한" 시들을 같이 묶어놓았다. 그들은 산맥이 솟은 북방의 기운이 있다. 새끼 우렁이 돌확에 다닥다닥 붙은 모습을 일러 "돌젖을 빨아"먹는다고 그가 말할 때, 그의 시들은 세상의 남루를 넘어 어떤 서러운 영원에 가 닿는다. 아주 오랜만에 펴낸 그의 이 시집은 그리하여 오래도록 큰 주목이 필요할 듯싶다. 차디찬 방에서 밤새 시를 받아냈을 그를 생각하니, 나의 잠도 멀어진다. –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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