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론적 상상제국의 아이들

 

  

                                                                     김영찬(문학평론가)


 

1. 상상하는, 포스트모던 오이디푸스


그는 지금 논쟁 중이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조자룡이며, 쟁점인즉 이렇다. 장판파 전투에서 조자룡의 활약을 전하는 ??삼국지??의 기록이 의심할 바 없는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지어낸 거짓말인가. 온갖 희한한 사료와 문헌은 물론이고 각종 치사하고 비열한 ‘논쟁의 기술’이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총동원된다. 문제의 장면이 ‘사실’이라 확신하는 그는 논쟁술의 현란한 비급신공으로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으나, 상대는 의외로 만만치 않다. 그러니 “아버지를 능가하는 사람,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거대한 사람”이라는 탄식이 나올밖에. 의표를 찌르는 그 상대의 교활한 논쟁술 앞에서 참혹한 패배와 굴욕을 뒤집어쓰기 직전, 무언가 돌연 나타난다. 놀랍게도 다름 아닌 조자룡이었던 것. 조자룡은 타고 온 말 위에서 벽력같은 사자후를 토하며 논쟁 상대인 현 교수를 꾸짖은 후 두 토막을 내고 사라진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이야긴가.

이것은 박형서의 소설 ?논쟁의 기술?이 전하는 사연이다. 우리는 피범벅 내장을 쏟으며 떡볶이처럼 나동그라진 논쟁 상대의 시체 앞에서 몸을 떨며 경악하는 그가 앞서 논쟁 도중 드문드문 들었던 뜬금없는 환청을, 그와 함께 수차례 들은 바 있다. 그 환청이란 이런 것인데, “내 뒤통수에서는 자꾸만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1) 더불어 스치듯 처리되어 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경찰에 전화를 돌리는 그의 손에 그도 몰래 들려 있던 “더럽게 무거운 칼” 한 자루를, 그리고 이 장면의 앞머리에 시치미 떼고 붙어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소제목을 무심히 흘려버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전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기 이전에, 멀리로 눈을 돌려 잘 알려진 오래된 장면 하나를 잠시 떠올려보는 것도 유익할 수 있겠다.

이 목숨을 내건 말싸움의 유명한 선조가 출연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스핑크스는 묻는다. “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알다시피 ‘인간’이라는 오이디푸스의 대답에 스핑크스는 패배를 자인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이는 한낱 ‘말(言)’로써 상대를 살해한 희귀한 사례이기도 하거니와, 또한 문제의 답안을 빚어낸 언어적 상상력이 그 자체로 적을 물리치고 상황을 돌파하는 놀라운 물질적 힘을 발휘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참으로 그것은 말 그대로 ‘상상력’인데, 왜냐하면 오이디푸스의 답안은 수수께끼사전은 물론 신(神)이나 현자의 귀띔과 보증 없이 오직 그 자신의 머리로 그려보고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논쟁의 기술?의 ‘나’는 말할 것이다. “흡사하군요.”(275면) 무엇이?

조금 더 나아가 덧붙이자면, 오이디푸스는 당시 몰랐겠지만 몸소 창안한 상상력 가득한 그 대답은 놀랍게도 아버지와의 경쟁에서 끔찍하게 승리하는 그 자신의 운명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베르낭(J. P. Vernant)이 명민하게 일깨워주듯 아침에는 네 발로(자식), 낮에는 두 발로(나), 저녁에는 세 발로(부모) 걷는 존재란 곧 어머니와 결혼함으로써 세 세대 모두를 한 몸에 응축하게 될 하이브리드 괴물로서 오이디푸스 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 까닭이다. ‘나’는 ‘나 자신’이면서 어머니와 결혼해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의 자식들과 형제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또한 말(言)의 결과다. 말로써 거둔 승리의 보상으로 그는 이오카스테/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내뱉은 말의 치명적인 물질적 결과를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오이디푸스는 예의 ‘오이디푸스’가 된다. 결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지 않았던 오이디푸스는, 이후의 세대를 위해 그것을 ‘창조’한다.2)

물론 신탁의 예언을 피하려는 와중에 나온 그 ‘창조’는 거꾸로 예언을 그 스스로 실현하는 치명적인 비극을 향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도를 돌려보면 전통과 이념 같은 보편적인 참조지점이나 (큰)타자의 보증이 부재하는 상황에 내던져져 오직 자기 자신이 고안한 상상/말의 규칙으로써 문학과 현실의 질문의 험로를 헤쳐가야 하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와 ‘나’의 문학적 운명을 창조하고 있는 이즈음 젊은 작가들의 정황은, (거친 아날로지이긴 하나) 스핑크스 앞에서 오이디푸스가 처했던 예의 문제적 정황과 나란히 놓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박형서의 ?논쟁의 기술?에서 온갖 사료와 문헌으로 상징되는 권위 있는 참조지점이 도무지 무력해지는 바로 그 지점, 그리고 피나게 습득한 고래(古來)의 온갖 논쟁의 기술조차 먹혀들지 않는 바로 그 순간, 상대를 거꾸러뜨리는 ‘마지막 수단’이 그 자신의 욕망이 은연중 불러들인 ‘언어’ 혹은 ‘환상’의 믿기지 않는 물질적 힘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측면에서 흥미롭다.

그렇게 환청과 상상이 살아 움직여 자신의 놀라운 위력을 실연(實演)해 보이고 있으니, ‘나’의 숨은 욕망을 ‘나’ 대신 작동시키고 실현해주는 이 상상/환상/언어의 즉각적인 물질적 힘의 실체에 경악하는 ‘나’의 표정은 멀리 오이디푸스의 그것을 저도 몰래 알레고리적으로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이디푸스와는 정반대로 ‘나'가 자신의 상상력/말의 결과를 체험하는 데 오랜 시간의 경과와 오인(誤認)의 맹목은 필요치 않았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를 통해 ?논쟁의 기술?의 ’나‘는 상상적 아비와의 경쟁에서 피비린내 나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점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때 오이디푸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답안/언어가 종국에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지시하는 메타적 발화였듯이,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환상의 놀라운 물질적 위력을 상연해 보여주는 박형서의 소설 ?논쟁의 기술?은 메타적 차원에서 자기 자신의 소설쓰기를 작동시키는 원천과 발상을 극화(劇化)하는 천연스런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그처럼 상상의 권능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 그것을 주제화하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소설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유독 의식적으로 표출하는 소설적 경향은 비단 박형서 소설만의 특징은 아니다. 방향과 방법은 각기 달라도 그것은 이즈음 몇몇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하나의 특징적인 경향이다. 그런 가운에 그들은 전통과 이념, 규범과 권위의 바깥에서 나름의 상상/언어의 규칙을 창안하면서 펼쳐놓고 있으며, 그들 문학적 자아의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은 바로 그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



2. 자기창조 상상박물지


가령 “나는 상상한다”3)로 특화되는 자아의 제1원리를 소설 속에서 변주하면서 주제화하는 김애란의 소설이 그렇고, 소설 곳곳에서 “제발 상상 좀 하고 살아라”4)라고 대뜸 일갈하는 이기호의 소설이 그렇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시야가 굉장히 좁지만 눈을 감으면 공간은 끝없이 넓어진다”5)는 식의 상상의 역설적인 이치를 반복적으로 변용하면서 거기에 소설쓰기에 대한 알레고리적 여운을 걸쳐놓는 김중혁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소설이 공통적으로 역설하는 것은 지지부진하고 관습적인 현실의 제약을 초월하는 ‘상상’의 자율적 가치다. 거기에는 각기 제 나름 현실과 문학의 관습을 심문하는 상상의 효과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만) 구성되는 문학적 자아의 자의식적 연출이 있다. 이 자유로운 젊은 상상의 속사정과 맥락을 들춰보기 이전에, 살아 움직이는 그 상상‘들’의 행로를 조금만 더 엿보자.

다시 박형서다. 그의 소설 ?날개?도 따져보면 그런 맥락에 있는 것인데, 소설을 지탱하는 것은 물론 리얼리티를 위반하는 상상의 가능성과 가치에 대한 옹호다. 2005년의 ‘나’는 상상한다. 170년 후 2175년의 미래, 교육기관에서 정규 문장보다는 문장의 감정적 변용을 주로 가르치던 거인과 만나 사랑에 빠졌던 여자가 있다. 거인은 어찌어찌 사고로 죽고 그 뒤 오십년의 오랜 기다림 끝에 거인의 시체에서 추출한 DNA로 얻은 클론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여자, 그녀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날아서 집까지 왔다는 아들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빨리 어미를 보고 싶다는 간절한 그리움과 소망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는 아들의 말은 과학 신봉자인 그녀에게는 믿을 가치도 없는 황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아들은 말한다. “왜 안 믿으세요? (……) 이상해요? 뭐가요?”

결국 여자의 눈앞에서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해 보여주는 아들의 이 반문은, 당혹스럽게도 먼 옛날 여자가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늘을 날아왔다는 옛사랑 거인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뿐더러, 그것은 또 이 가상 SF 소설의 앞머리에서 먼 미래를 보여주는 작중 소설가인 ‘나’가 일찌감치 독자를 향해 내놓았던 발언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170년 후의 미래를 본다. 미래를 본다는 게 이상한가? 뭐가? 그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원한다면 어느 장소든 어느 시대든 갈 수 있다. 정말로 간절히 원한다면 말이다. 눈을 감고, 팔을 벌리고, 간절히.6)


이 세 겹의 반복과 상호반사 속에서, 이 소설은 현실의 제약을 넘어서는 상상의 물질적 가능성에 대한 옹호 위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의 발상과 방법 자체를 소설의 무대에 올려놓는 자기 지칭적(self-designating) 소설로서의 울림을 얻는다. 눈까지 감아버리면서 눈앞의 진실을 한사코 믿으려 하지 않는 여자는 이 무대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상상의 논리와 역능을 의심스러워하고 당혹해하는 완강한 독자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긴 세월 “불가능이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이쪽과 저쪽 사이의 망설임조차 받아들일 수 없게”(146면) 되어버린 그 여자의 불신을 문제삼음으로써 효과적으로 부각된다.7) 작가는 그를 통해 상상/환상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불신 혹은 거부 사이의 쉽게 해소될 리 없는 긴장을 놓치지 않고 상징적으로 부조(浮彫)하면서 현실/사실과 상상/환상 사이의 고착된 경계와 리얼리티의 관습을 문제화한다.

이 가엾은 여자의 항변대로 과연 “하늘을 난다는 건, 다른 시대로 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146면) 이에 대해 소설은 보다시피 “정말로 간절히 원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식의 반박을 내어놓고 있는 것인데, 물론 그 반박은 의외로 상투적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 상투(常套)는 현실의 굴레를 초월하는 문학의 상상이 꿈과 소망 등등의 버릴 수 없는 소박한 인간적 가치와 결코 무관한 것일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만큼 쉬 잊기 쉬운 기본과 진실의 환기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 박형서의 소설이 그렇듯이 포스트모던 문화환경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문학이 그 탈전통적인 외양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오래도록 견지해온 보편가치에 그 나름의 방식과 태도 속에서 결코 무심하지 않다는 점만은 여기서 간단히 확인해두고 넘어가자.

앞서 ?날개?의 여자가 눈을 감는 것은 ‘상상적인 것’에 대한 강한 거부의 표현이었지만, 김중혁 소설의 주인공이 눈을 감는 것은 반대로 상상을 활성화하고 그 속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조용한 육체적 제스처다. 그들은 눈을 감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사물과 교신하며(?무용지물 박물관?), 눈이 아닌 촉각으로 느끼면서 소리와 기억으로 상상하는 지도(?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를 더듬는다. 그런 그들은 또 생각하길, 눈을 피해 몸속 어딘가로 숨어들어간 기억은 반드시 눈을 감아야만 보인다.(?그녀의 무중력 진공관?) 이들이 그렇게 시각을 불신하는 까닭은 이렇다. “눈은 말이죠, 느낌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미묘한 색을 아주 단순하게 축소해서 본대요. 정말 게으른 녀석이죠?”(?무용지물 박물관? 32면.)

근거 있는 이 집요한 시각 불신증은 과연 사물과 세계의 다양하고도 미묘한 종차와 변이를 단순한 것으로 환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착하려는 방법론적 자의식에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겠다. 이는 물론 기억과 상상의 가치에 대한 옹호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것은 어느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각기 나름으로 특별한 자율적인 개인의 가치에 대한 은근한 옹호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그 개인이란 가령 “A도 B도 아닌, 나 같은 사람”, 혹은 이를테면 “구닥다리 빈티지 오디오로 벨벳언더그라운드를 듣는 사람”8)일 것이며, 세상의 기준에서 미묘하게 벗어나는 “좀 다른 비트”와 “이상한 리듬”(?펭귄뉴스?)의 섬세(纖細)를 제 몸에 장착한 별종 아닌 별종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펭귄뉴스?에서 “모든 주파수를 차단해버리고 오직 하나의 주파수만을 볼 수 있게 만드는” P-칩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이나 정규전파들 바깥의 “선택받지 못한 전파들”을 불러모으는 심령술의 의지는 그 자체 미묘하고 섬세한 개체적 차이와 다양성의 가치를 펼쳐놓는 김중혁 소설의 문학적 창조의 알레고리로서 손색이 없다.

김중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온갖 무용지물(無用之物)은 바로 그 알레고리에 동원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전혀 쓸모없거나 용도를 다한 사물들은 기억과 상상에 매개되는 ‘나’와의 내밀한 관계 속에 들어오는 순간 깊숙이 묻혀 있던 나름의 존재가치를 발하기 시작하고 생각지 못한 의외의 용도를 입증한다. ?회색 괴물?의 고물 타자기가 그렇고, ?무용지물 박물관?에 모여 있는 온갖 사물들이 그러하며, ?비닐광 시대 Vinyl狂 時代?의 창고에 버려진 중고 LP 판들이 예외 없이 그렇다. 보다시피 그것은 대부분 폐기되고 사라질 운명에 처한 문명의 골동품들이다. 그 각종 잡다한 사물들은 이제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불필요한 것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한에서 나름의 필요를 입증하는 것들이다. 김중혁 소설의 상상은 대부분 그렇게 비(非)가치의 가치를 조용히 발산하는 사물들에 실마리를 얹고 펼쳐진다. 그 상상은 이를테면 제각기 흘러나오는 그들 무용지물과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비트와 노이즈를 그러모아 믹싱 편집하고 연주하는 이른바 디제잉(DJing)을 통해 그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새로운 자기창조의 상상이다.

이쯤이면 쉬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때 그런 각종 별스런 사물에 의식적으로 투사되고 있는 것은 물론 쓸쓸한 주변화와 비주류의 고독을 감내하면서도 바로 그 속에 존재하는 제 나름의 자신이 그 자체로 가치임을 잊지 않는 특이한 개인의 차이와 섬세의 정신이다. 그리고 그 점은 김중혁의 소설에서 빈번히 언급되는 다종 다기한 언더그라운드 대중문화의 산물들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야기다. 기억과 상상의 가치주장에 매개된 이 마니아적 무용지물 상상력의 박물지가 대부분 자기 자신의 문학적 상상의 근거와 토대를 연출하는 자기 지칭의 알레고리로 읽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언더그라운드 무용지물의 정체성과 문학적 자아의 정체성, 그리고 소설의 정체성이 그렇게 한 몸이 되는 곳에서, 김중혁의 소설은 묻고 있다. 무엇을?



3. 전환과 전도의 상상전략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94면)이 잠정적인 대답일 텐데, 아마도 이기호라면 그래도 그 방식은 너무 심심한 것 아니냐고 되물을 것이다. 과연 이기호 소설이 견지해온 상상의 기본전략은 제도와 정규 바깥의 비주류 언더그라운드에 가볍지만 진지하게 몸을 싣는 김중혁 소설의 그것과는 달리 발랄한 입놀림으로 제도문화의 틀과 형식을 희화적으로 비틀면서 야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집중적인 비틀기와 희화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예컨대 푸코(M. Foucault)와 고진(柄谷行人) 이후 근대 내면성의 문화의 핵심으로 유명해진 ‘고백이라는 제도’다. ?버니?와 ?옆에서 본 저 고백은?告白時代? 등이 특히 그렇거니와, 거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고백의 목적과 주체, 상황과 진술방식 등을 완전히 엉뚱하게 틀어버림으로써 발생하는 우스꽝스러움을 등에 업은 희극적 비판의 효과다. 그 비판은 대개 이기호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인 밑바닥 마이너리티의 입을 통해 엉뚱한 방식으로 발설되는데, 그 덕분에 발생하는 희극적 부조화와 아이러니 또한 이기호 소설이 겨냥하는 효과일 수 있겠다.

가령 ?옆에서 본 저 고백은?告白時代? 에서 조폭회사 입사를 위한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나 글을 모르는 ‘나’와 시봉은 평소 깔보고 괴롭히던 팔대이에게 억지로 대필을 맡기고는 내용 작성(다소 외설적이라 여기서 일일이 밝히기엔 그리 적절치 않은 내용이다)을 위해 그에게 자기의 지난 삶을 ‘고백’해야 할 참인데, 그들은 그 순간 몸으로 깨닫는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자꾸만 상황이 역전되는 것만 같다. 왜 우리가 팔대이한테, 저 비루하고 힘없고, 개 같은 인생을 산 놈에게 주눅이 들어야 한단 말인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느냐 말이다.(?옆에서 본 옆에서 본 ?옆에서 본 저 고백은?告白時代? 96면)


점잖은 말로 바꾸면 그들이 깨닫는 것은 이를테면 무언가를 고백해야 하는 상황에 놓임으로써 발생하는 권력효과에 힘입은 위계의 전도일 터다. ‘솔직한’ 고백을 위해선 애초부터 없었던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그리움까지도 억지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객전도의 논리에 말도 안 된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한편에서는 근대적 제도문화에 대한 이 삐딱한 조롱이 별 새롭지 않은 비판의 코드임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먼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이기호의 소설에서 이런 종류의 소극(笑劇)이 독특하게도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한 자의식에 의해 시종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기호의 소설이 취해온 랩, 취조와 자술, 성경 문체, 요리강좌, 판소리, 소설 강독 등의 잡다하고 별스런 언술방식은 그 하나하나의 성패 여부를 떠나 근원에서는 근대적 내면성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기존 소설문법과의 의식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흥미로운 방법적 실험이다.

크게 보면 그것은 그의 소설 대부분의 구어적(口語的) 발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인데, 이기호 소설을 일관되게 지탱하는 이야기/소설의 자의식적 대립구도는 그 입말의 형식을 이리저리 변주하는 발랄한 소설적 실험 속에서 사뭇 다기한 모습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예컨대 그런 소설적 구도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의 현실적?문학적 맥락과 존재방식의 간단치 않은 의미까지도 고스란히 무대에 올려 실연하는 ?나쁜 소설?에서도 보듯이 ?과연 이 소설은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렇게 소설로 쓴 소설론을 즐겨 펼쳐놓는 작가의 방법론적 의식은 더없이 자각적이다.

이기호 소설이 강조하는 새로운 상상은 그런 바탕 위에서 펼쳐진다. 이때 그 상상은 세상의 규범과 표준에 대한 반발이나 일탈과 직결되는, 발상의 탈관습적 전환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가령 이런 것인데, 어려서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너 그렇게 공부 안 하면 나중에 굶어죽는다”라는 어른들의 근거 있는 협박에 이기호 소설의 화자는 답한다. “괜찮아요, 전 그냥 흙 파먹고 살래요.”9) 화자의 이 태연스런 대답을 떠올리면서 흙 요리법을 진지하게 설명해주는 친절한 강의를 듣다 보면, 문득 깨달을 것이다. 짐작대로 그 대답은 문학이나 현실의 관습과 통념, 기준과 규범을 일순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엉뚱하지만 도발적인 실험으로서 이기호 소설의 상상이 시작되는 원천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저 그런 것이 바로 상상이 아니겠냐고 이기호는 말할 것이다.

그러면 김애란도 지지 않을 텐데, 왜냐하면 그런 발상의 전환과 상상의 전략이라면 그의 소설에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김애란 소설의 경우 그 상상의 이면에 도발보다는 긍정이, 유쾌보다는 슬픔이 더 짙게 배어 있는 것이 다를 수 있겠다. 그것의 중심에서 작용하는 것은 이를테면 전도(顚倒)의 상상전략이다. 그에 따르면 아버지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이며(?사랑의 인사?), 도망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지구 곳곳을 뛰고 있는 것이다.(?달려라, 아비?) 그리고 상황의 이 상상적 전도는 단지 부재하는 아비와 관련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데, 예컨대 거기에는 가로등도 가담한다. 실제로 “잠시 깜빡하고 꺼졌다, 켜졌다” 하는 가로등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렇다.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거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스카이 콩콩? 79~80면)

이 전도가 일어나는 속사정은 어디에 있는가? 달리 말하면, 가로등은 무엇을 눈감아주기로 결심하는가? 해답의 실마리는 바로 남루한 결핍의 삶에 자아를 결정하는 주도권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의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달려라, 아비?에서 선연하게 드러나듯, 그것에서 비롯되는 상황의 자기창조적 재구성과 전유를 위한 산뜻한 안간힘이 김애란 소설의 상상공간을 열어놓는다. 그 안에 스며있는 것은 알다시피 (자기연민이나 원한과 같은) 수동적 정념에 물들지 않고 그 모든 삶의 무게와 심지어 타자의 결핍까지도 제 안에 녹여 소화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탱하려는 발랄한 고투의 흔적이다. 그 속에서 언어가 탄생하고, 커뮤니케이션과 교감이 일어나며, 상상이 펼쳐진다. 김애란 소설의 화자는 그것이 “가로등이 눈감아주는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비유컨대 그 사건은 실은 거꾸로 자아에 얹혀 있는 세계의 무게와 결핍의 집요한 응시를 작은 손바닥으로 잠시 순진한 척 가려줌으로써 열리는 그 한 순간의 틈새를 딛고 번져가는 긍정적 자기창조의 사건이다.

하지만 세계가 계속 눈을 감고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 김애란의 소설은 대개 상상의 자기만족적인 완결을 간섭하는 그 이면의 결핍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의 소설의 상상은, 상상을 간섭하고 침식하지만 거꾸로 애초 그 상상을 키운 근원이기도 한 부정적인 실체로서 현실과의 피할 수 없는 긴장 자체를 바로 그 상상의 무대 한가운데로 불러들인다. ?달려라, 아비?와 ?사랑의 인사?가 그러하며, ?영원한 화자?,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종이 물고기? 등이 또다른 방식으로 그러하다. 그것은 상상 혹은 소설의 존재방식과 그것의 현실적 맥락을 감지하고 언어로 건져내는 명민한 감각에 뒷받침되어 있는 것인데, 이 소설들이 근원에서 자신의 소설에 대한 메타적 발화로서의 울림을 갖게 하는 원천도 바로 거기에 있다. 특히 자신의 소설쓰기의 맥락과 방법을 언표하는 메타소설로 읽히는 ?종이 물고기?에서, 상상에 대한 예의 방법적 자의식은 과연 한층 선명하게 표현된다. 그 중에서도 가령 이런 구절.

 

한참 후 그는 시멘트 가루가 묻은 그 포스트잇을 소매로 닦았다. 그런 뒤 그가 기대앉아 있던 옥상의 낮은 담벼락에 붙였다. 포스트잇은 담에서 금방 떨어졌다. 그는 포스트잇을 주워 접착면의 시멘트 가루를 털어낸 뒤 다시 담벼락에 붙였다. 포스트잇은 다시 떨어졌다. 그는 포스트잇을 자기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포스트잇이 바람에 파르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가쁘게, 그러나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종이 물고기」219-220면)


소설쓰기의 대리 표상이라고 할 포스트잇에 묻어 있는 시멘트 가루는 남루한 결핍의 삶을 누설한다. 털어내기 힘든 그 현실의 간섭을 무릅쓰고 잘 붙지 않는 포스트잇을 그래도 담벼락에 붙이기를 반복하던 그, 종내는 시멘트의 반발에 맞서 엄지손가락으로 포스트잇을 누르고 있다. 상상의 언어는 그렇게 탄생한다. 그러니 결핍에 겨워 가쁜 숨을 힘겹게 몰아쉬면서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속에서 팔딱팔딱 생명의 긍정을 표출하는, 모순으로 약동하는 이 놀랍도록 감각적인 이미지는 그 자체 김애란의 소설이 결핍의 현실 위에 눌러 붙여놓은 그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가. 아마도 결핍 속의 자신을 응시하는 김애란 소설의 상상은,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4. 상상의 거울, 아비 없이


계속될 테지만, 잠시 이것만은 물어보자. 이들의 저 방법론적 상상의 근원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대답은 간단치 않지만, 그 이전에 먼저 이들의 소설에서 현실이 어떤 모습 어떤 방식으로 비치고 있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소설에서 현실이란 한마디로 “잘해야 비길 수밖에 없는 시간”(?종이 물고기? 194면)이 지배하는, “사막 같다는 생각”(?나쁜 소설? 49면)을 절로 갖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백번 양보해봐야 “따분하고 따분하고 따분한 것”(?펭귄뉴스? 261면)일 따름이다. 마침 이들의 선배격인 박민규는 이에 동조해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렇고 그런 곳”10)이라는 명쾌한 정의를 내린 바도 있다. 이들의 상상은 그처럼 현실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어 어떤 변화나 개전(改悛)의 여지도 없고 그래서 지루하기 그지없는 불변의 함수가 되어버렸다는 인식 위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이들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현실이 더 이상 상상을 조율하는 유력한 참조지점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전혀 변화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듯한 현실의 책임도 크지만 아예 그러리라 체념하고 전제하는 작가들의 인식과 태도도 적잖이 그에 가담한다.

소설의 상상이 그 바깥의 현실에 진지한 탐구의 시선을 주기보다 그것을 단정적인 혹은 선언적인 태도로 외면하거나 밀쳐버리면서 그에 반하는 스스로의 자족적인 자율성을 강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며, 이들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소설에 대한 방법론적 자의식도 그런 맥락에 놓여 있다. 그러니 이 상상의 방법론이 자기 충족적일 수밖에 없는 사정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다. 그 점은 이미 김중혁 소설의 화자도 의식한 듯 이렇게 말해놓았으니, 이것은 (다소간의 편차는 있어도) 이즈음 젊은 작가들의 상상의 특성을 표현하는 자기 이미지의 알레고리에 가깝다. “그의 눈은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비춰주는 거울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 63면)

가령 박형서의 소설이 어느 면 상상(력)에 대한 직접적인 동어반복의 알레고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나, 김중혁의 소설이 개인의 취향과 취미의 세계를 미학화하는 마니아적 반복의 회로에 갇힐 위험 앞에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관습과 규범을 야유하며 어긋나가는 이기호 소설의 일탈의 세계와 김애란 소설의 슬프도록 발랄한 상상의 소우주가 안고 있는 한계지점 또한 크게 보면 그와 다르지 않다. 이들 소설의 그런 특성은 자아 정체성의 확인과 정립을 위해 필히 자아에 대한 상상적 판본을 만들어내고 그에 애착하는 과정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던 개인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이들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바로 그 위에서 그것을 딛고 넘어서는 문학적 창조의 다양과 깊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하나만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제 아이는 스스로 이야기하려 한다.”(?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190면) 그리고 그들 아이의 이야기는 이렇다. “제발, 눈으로만 보지 말고요, 제발, 제발, 제 말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야채볶음흙? 238면) 이것은 눈에 비치는 고착된 현실의 관습적 허구만을 믿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 다른 세계를 상상해보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그럴 테지만, 지금 그 상상을 내부에서 제약하는 한계를 이후 깊이 있는 창조의 원천으로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소설에 대한 자기응시 위에 ‘바깥’의 역동과 우연성을 향한 응시를 겹쳐놓는 두꺼운 겹의 시선이 또한 필요할 것이다. 그럴 때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도 깊어갈 이 상상의 길 어디쯤에서 아비의 결핍과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결정적인 문턱을 어느 순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눈으로만 보지 말고, 아비의 목소리가 사라진 곳에서 스스로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그럼으로써 새로운 소설의 길을 더듬고 있는 이 아이들의 상상에 귀 기울여보기로 하자.《문장 웹진/ 2006년 4월》


1) 박형서, 「논쟁의 기술」, 《세계의문학》, 2006년 봄호, 275면.

2) 알렌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칸트와 라캉』,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4, 제8장 참조.

3)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48면.

4) 이기호,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최순덕 성령충만기』, 문학과지성사, 2004, 309면.

5) 김중혁, 「무용지물박물관」, 『펭귄뉴스』, 문학과지성사, 2006, 40면. 이후 『달려라, 아비』와 『최순덕 성령충만기』, 『펭귄뉴스』 등에 수록된 해당 작가의 작품을 인용할 때는 작품명과 책의 면수만을 부기한다.

6) 박형서, 「날개」, 《문학과사회》, 2005년 가을호, 128면.

7)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존중해 그런 ‘망설임’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환상문학서설』의 저자 토도로프(T. Todorov)의 목소리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8) 김중혁, 「그녀의 무중력 진공관」, 《문학판》, 2002년 여름호, 160쪽.

9) 이기호,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문예중앙》, 2005년 봄호, 218면. 이후 「야채볶음흙」.

10) 박민규,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10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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