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하기

 

바위 하기




이진명




작년 10월 하순 문예지 겨울호 원고로 ‘바위’ 시 6편을 써 넘겼다.

이상스럽게도 그즈음 느닷없는 ‘바위’ 시가 6편씩이나 써졌다. 바위에 대해 특별히 작정한 일도 없고, 관심을 기울여 오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갑자기 바위가 불려나와 써지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비주얼과 환상, 신경증적이고, 쿨하다 못해 쿨쿨해야 하는 오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웬 구닥다리 무겁고 딱딱한 바위란 말인가. 난 역시 쉰 세대, 뒤로 가는 세대인가 싶어 스스로가 좀 안 되게 생각되기도 했다.

원고를 보내놓고는 바로 11월 첫째 주 아는 선생님께서 주선하신 산행을 즉흥적으로 따라나섰다. 그 산행의 리더는 아는 선생님의 친구분으로 암벽등반가였다. 난 그저 간단한 옷차림과 간단한 배낭만 메고 한 달에 한번 친구와 하는 소박한 걷기 산행인 줄만 알고 나섰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날로 바로 암봉 암릉을 따라 걷는 릿지 산행을 밤늦도록 했다. 리더 선생님은 준비해온 장비로 우리 모두를 바위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끌어올리고 내리고를 거듭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 주 우리 모두는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이동 등산용품점에서 암벽에 필요한 기본 전문 장비를 구입하게 됐고, 1주일에 한 번씩 겁 없는 등반이 시작됐다. 바위 시가 뜬금없이 6편씩이나 써지더니 정말 진짜 바위를 제대로 만나게 된 것이다. 즐거운 우연이었다.

12월과 1월, 2월이면 얼마나 추운 겨울인가. 하필이면 하도나 추운 한겨울에 우리 나이 많은 왕초보 여자들의 암벽 동계훈련이 무작정 시작된 거였다.

암벽의 ‘암’자도 모르던 내가 세상에 50리터짜리 배낭을 풀고 싸기를 7개월.

안전벨트, 헬멧, 확보줄, 퀵도르, 카라비너, 프렌드, 미니트랙션(오름기), 8자 하강기, 피피, 슬링줄, 자일, 암벽화, 릿지화, 헤드랜턴 등등을 메이커를 따지며 알게 되고 만지게 된 거였다. 그뿐 아니라 한번도 써본 적 없는 용어인 빌레이, 슬랩, 크랙, 홀더, 피치, 트래버스, 리딩(선등), 후등, 페이스, 오버행 등등의 새로운 낱말을 외우는 거였다. 이 새로운 물건들의 경험과 이 새로운 언어의 경험은 어린아이들의 신기함 그것과 같았다. 막 던져진 새 장난감의 기쁨, 막 배우기 시작한 말의 기쁨은 바로 어린아이의 신기함 그것이었다.

또 다 죽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던 내가 출발! 완료! 낙자! 낙석! 등의 말을 고함치느라 그동안 목소리가 커진 것도 소득이며 감흥이었다.

처음 밟아보는 그 숱한 산길과 능선. 암릉, 암봉을 걷고 만지고 기고 끌어안고 냄새 맡았던 경험은 감각을 살아나게 했다. 한 발짝 오를 때마다 풍경은 신세계처럼 펼쳐지는 것이었으니 비가 와도 좋았고 바람 몰아쳐도 좋았다. 손이 시려도, 춥고 추워도, 먹을 시간 없어 속이 비어도 바위에 붙어 있는 동안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좋았다. 사방 벽 없고 뚜껑 없는 높다란 자연 속에서의 호흡이 그렇게 배짱에 맞을 수가 없었다(나는 벽과 뚜껑으로 막힌 데를 못 견뎌하는 편이다).

인수봉 정상을 처음 올랐던 그 추운 날은 12시간은 족히 바위에만 붙어 있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산행이 하루해를 꼬박 넘기고 불빛이 별처럼 돋아났다 꺼져 가는 밤 12시쯤에야 끝났으니. 밤 바위에 붙어 한밤중의 마을을 내려다보려니 고독하고 아름다운 외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진공 상태에 싸인 듯했고 이런 채로 바위에 매달려 자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산봉에서는 추위가 제일 괴로운 일. 추운 채 잠 오면 그 다음은…….

어쨌든 언제고 사고가 도사리고 있을 이 위험한 암벽을 내가 왜 한다고 했는가, 무서워 도로 내려가고 싶은 적도 몇 번 있었고, 미끄러질 때마다 습관이 된 엄마야! 엄마야! 외마디 소리를 내질러 뒤에 오르는 분의 가슴을 같이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리더를 턱 믿고, 장비를 믿고 이르는 대로 따라 하니 인수봉 3번, 백운대, 만경대, 숨은벽, 의상능선, 도봉산 선인봉 등등 주요 암벽을 7개월간 거의 맛볼 수 있었다.

취미활동이라곤 달리 없었던 내가 적지 않은 나이에 다이내믹한 암벽등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절대적 믿음을 주는 훌륭한 실력의 리더 선생님을 만난 덕분이었다. 그 선생님의 헌신과 철저함으로 어려운 코스도 두레박처럼 끌어올려지며 끝까지 무사히 해낼 수 있었던 것. 물론 내가 고소공포증을 가지도 있지 않고, 산을 좋아하고, 모험심도 좀 있고 한 점도 플러스로 작용했을 거다. 사실 장비를 믿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혹자는 그랬다. 암벽등반이란 게 따로 있냐고. 샐러리맨은 직장에 잘 붙어 있는 게 암벽등반이고, 백수는 백수생활 잘 하는 게 암벽등반이라고. 그래, 맞다, 그 말. 인간은 어쩌면 모두  이 생이라는 암벽을 기어오르느라고 땀을 흘리고 벌벌 떠는 중일지 모른다. 시인이 시 쓰려면 책상 앞에, 컴퓨터 앞에 앉아 언어와 붙어야지 바위와 붙으면 시 나오겠는가. 직장, 백수, 시, 이런 모든 암벽등반도 암벽등반이지만, 순수하게 말 그대로 50리터 배낭을 메고 산에 있는 고봉, 거봉을 몸을 밀며 한 발씩 올라가는 암벽등반이 암벽등반이라 다시 나는 말하리라.

 


사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부터 선생님의 사정으로 바위를 못 하고 있다. 바위의 얼굴 그 눈 코 입 너무 그립고, 냄새 맡고 싶고 살결이 만지고 싶어 애닳는다. 쭉쭉 손과 발 늘여 나를 한껏 붙이고 밀고 싶어 애닳는다, 지금은.


제대로 기념될 만한 사진은 찍지 못했다. 그럴 여유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원고 관련한 사진을 삽입해야 한다기에 다행히 어느 날 한 분께서 찍어주신 몇 장의 사진은 있어 그  하나를 여기 내놓는다. 암벽 시작 초기 미숙하고 엉거주춤한 자세이긴 하지만 인수봉 3피치 구간을 오를 때쯤 찍힌 것이지 싶다. 다시 암벽을 시작한다면 다이내믹한 멋들어진 사진을 찍어놔야겠다.문장 웹진/ 2007년 8월》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