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한국 소설의 표정과 편향성

 

4. 가사(假死)의 젊음과 이미지라는 운명


소멸이 도처에 편재하는 생의 평범한 사실일 뿐이라면, 죽음에 서열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2005년의 소설에서는 자유의지로 죽음의 신(神)에 맞섬으로써 남다른 족적을 남기거나 타자와의 연대 속에서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는 인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어려움에 당대의 젊음이 겪는 불행이 있지 않겠는가.

시간의 선조성에 저당 잡힌 중년의 허무나 생에 대한 초연함과 달리, 우리 시대의 청춘은 지상에서 방 한 칸을 얻을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하다. 그들에게 생은 황무지일 뿐이다. 생의 황량함은 기억의 공동화(空洞化)로 인해 더욱 악화된다. 젊은 작중인물들은 공동(共同)의 역사를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와의 길항을 전제한 내면적 성찰도 부재하다. 그들에게 공동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궁핍, 박탈, 좌절, 환멸, 권태의 공동성이다. 이런 공동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동의 행동이나 사회적 유대로 전진하지 못한다. 공유하는 역사적 기억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이 부재하듯이, 이들의 가족은 해체되거나 해체의 위기에 놓여 있다. 특히 그들은 증오하거나 숭배할 만한 아버지를 갖지 않는다. 자식들 못지않게 무기력한 아버지는 부재나 실종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래서 김애란의 「스카이 콩콩」(《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에서 작중인물은 훌륭하거나 위대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전무한 상황에 놓이며, “두 발이 땅에 닿기 전 내가 사라져”버리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추락하는 형의 고무동력기처럼, 현실의 장력은 초월을 허용하지 않는다.

탈주 불가능한 세계에서 가난에 능멸당한 젊음은 모멸적인 삶을 견딜 뿐이다. “저는 쥡니다.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박민규의 작중인물처럼, 그것은 가사(假死) 상태의 존재 방식이라 할 것이다.


졸업을 하고 일흔세 곳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일흔세 곳이었다, 일흔, 세 곳.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장난 기계 때문에 머리를 못 내미는 두더지의 기분이랄까, 아무튼 이 나라는 고장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심각하다. 누구나 살기가 힘든 건 알겠는데, 꼭 머리를 내미는 한 마리가 있다. 그리고 그 한 마리가 일흔세 번의 망치질을 독식한다. 뿅 쿵딱 뿅 쿵딱, 어둠 속에서 그 소리를 듣다 보면, 누구라도 바보가 된 기분이 든다.

―「아, 하세요 펠리컨」(《문학과사회》 2005년 봄호)


‘저렴한 인생들’에 대한 연민에도 불구하고, 작중인물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사사화(私事化)된다. 만화적 발상으로 삶의 고통을 날렵하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현실을 변화시킬 아르키메데스의 지점을 지구 내측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점에서 영악하지만, 이들은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하던 아버지 세대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 세계는 대중문화 속을 떠도는 기호와 이미지들의 세계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운명을 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징표로 여긴 시절이 있었다. 또 계급이나 제도, 관습과 이데올로기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의 원인으로 이해된 시대도 있었다. 그때 운명은 인간의 표정을 한 것이었고, 그 운명에 맞서 싸운 자의 비극적 결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에게 운명은 사회계급이나 이념이 아니라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헛것들, 곧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이다. 그래서 ‘영웅본색’ 세대임을 천명한 바 있는 김경욱에게 문화소비는 그들 세대의 탈출구로 여겨진다. 구체성의 세계는 사라졌고, 그곳은 ‘온갖 문화적 기호들’로 충만하다. 따라서 자아와 세계의 교감은 불가능하며, 중요한 것은 문화상품의 기호를 향한 ‘나’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성별과 나이와 계급과 신분에 상관없이 고객들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균일한 맛의 햄버거를 먹고 역시 성별과 나이와 계급과 신분에 상관없이 뒤처리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했다. 햄버거를 먹고 나면 빌 게이츠도 실업자인 아버지도 스스로 쓰레기를 처리해야만 한다. 맥도널드의 상징인 황금아치 아래서 이런저런 ‘차이’는 무의미해져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기꺼이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된다.

―「맥도널드 사수 대작전」(《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맥도널드라는 대중문화의 기호는 “인종과 언어를,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 단일한 과정으로 ‘표준화’”된 세계를 암시한다. 모든 차이가 소멸한 세계에서 누구도 사회적 자아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 인격은 성별, 나이, 계급, 신분이라는 차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인 세계에서 우리는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직한 아버지는 “좀체 원망의 대상을 찾을 길 없”고, 이런 막막한 사정은 일흔세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력서’의 효용을 찾지 못하는 박민규의 인물과 다르지 않다.

사회적 자아가 부재하기 때문에, 작중인물들은 역사나 사회 대신에 사물 혹은 대중문화의 산물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 박민규의 소설에서 너구리, 오징어, 개복치, 기린, 펠리컨, 카스테라 등이 작중인물 개인의 시선을 매개하며, 이런 매개를 통해 인물과 작가는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글을 쓴다. 이와 같은 전횡성을 세계의 주인이 되어가는 주체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게임의 가상공간에서 절대적 전능을 행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5. 세 가지 편향성


지금까지 2005년 소설에서 지역의 구체적 현실에 근거한 변두리 인간과 삶에 대한 긍정의 태도, 두렵고 남루한 일상을 견디면서 시간의 파괴적인 힘을 견디는 기억, 존재의 동물적 운명과 근원적 허무에 대한 성찰, 사회적 자아를 결여한 젊은이의 우울한 일상을 훔쳐보았다.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진 피상적 관찰에 덧붙여 세 가지 편중 현상을 지적하고 싶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작가들은 소설가의 남다른 운명에 대한 예리한 자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또 기존 리얼리즘 소설을 창조적으로 갱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비교적 폭넓은 공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은 사실의 차꼬에 갇히기보다 상상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고, 삶의 반영 못지않게 개성적인 해석을 드러내었다. 구체적인 삶은 안이한 해석에 저항하고 세계의 진실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작가의 예리한 안목이 요구됨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혹은 ‘누구의 관점에서 본다면’과 같은 전제를 달고, 우리 시대의 소설은 반영에서 해석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이 같은 일방적인 이동을 해석의 편중 현상이라 하겠는데, 그 결과 우리 소설은 내용의 차원에서 관념적인 언술로 일관하거나 현실 경험의 제한을 일거에 돌파해버린다. 이제 소설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작가의 감성적?주관적 해석에 근거하며, 이에 따라 작가 개인의 특수한 체험은 외부의 기준에 구애받지 않는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현실은 장력을 잃어버리고 역사는 우연이나 농담으로 여겨지며 진실은 이해할 수 없고 표현 불가능한 것으로 평결된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으로부터 독립한 현실이 위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소설가의 몽상이 자유의 최대치를 향유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몽상은 급진적이지만, 현실과 절연된 환영이다. 이러한 환영은 특정한 관계 내에서만 타당성을 확보한다. 평론가 김영찬이 박민규의 소설을 두고 ‘일인용 가치 기준의 가정법’에 근거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통어할 수 없는 해석과 몽상에서 우리 소설가의 개성적인 생명이 발현되는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두 번째 편중 현상은 미적 전략 혹은 서술 방식의 새로움이다. 소설의 내용에 관한 한 현실 조회가 필요 없고, 사사로운 맥락 속에서만 이해되는 까닭에, 최근의 소설가는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듯 자기 식으로 소설을 쓴다. 중층적?비인과적?비선형적으로 축조되는 경험, 분열적이고 매체잡종적인 글쓰기가 그러하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강화와 함께 일탈적?유희적인 글쓰기가 그러하다. 이들 새로운 글쓰기는 세상을 냉소하는 헛소리거나 반어의 가시를 품은 농담이자 허풍이며, 소설의 전통적인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미적 자율성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미적 자율성은 일정한 사회적 동의를 포함하는가? 참고 사항으로 올해의 각종 문학상 수상자를 보면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대산문학상(김연수), 동인문학상(권지예), 신동엽창작상(박민규), 한국일보문학상(김애란), 현대문학상(윤성희) 등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개성적인 묘사와 서술기법, 새로운 미적 인식을 동반한 뛰어난 비유와 직관이 없지 않다. 이들의 소설 가운데 현재의 전위문학뿐 아니라 심지어 미래의 문학이 잠복되어 있음직도 하다. 그러나 수상자의 세대적 편향과 함께 새로움에 대한 비평의 무장해제가 놓여 있지 않은가 우려된다. 평론가 홍기돈이 지적했거니와, 비판의 차안에서 보면 그 새로움은 현실과의 긴장을 상실한 채 아이가 되고 싶은 어른의 환상이 아니겠는가.

작가의 변덕스런 감수성에 근거한 서술 전략의 새로움이 분배의 규모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 해도, 그것이 완미한 작품을 창조하기 위한 장인의 치열한 노력보다 더 우월할 이유가 없을 터이다.

세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지역적 편중 현상이다. 생태(ecology)라는 말에 하나의 전체적인 집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면, 한국 문학의 생태는 얼마나 건강한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난 1년간 추진되어온 문학회생프로그램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2004년 겨울에서 2005년 가을 사이에 발행된 문학도서와 문예지 수록 작품 가운데 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결과를 보면, 한국 문학의 생태가 상호연관?상호작용?상호의존 속에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문예지 게재 우수 작품은 24개 문예지에 발표된 80편이다. 그 가운데 《문학동네》(9), 《문학수첩》(9), 《한국문학》(8), 《창작과비평》(7), 《문예중앙》(6), 《현대문학》(6), 《문학과사회》(5), 《실천문학》(5) 등 8개 문예지에서 55편이 선정되어 전체의 약 69%를 점유하였다. 우수 문학도서의 경우, 30개 출판사의 91개 작품집이 선정되었는데, 문학동네(12), 문이당(10), 문학과지성사(8), 창작과비평사(8), 랜덤하우스중앙(6), 실천문학사(6), 현대문학사(6), 이룸(5), 민음사(4), 열림원(3), 한겨레신문사(3), 푸른사상(2) 등 12개 출판사의 73권이 선정되어 전체의 80%를 차지했다.

이러한 자료로 볼 때, 문예지와 출판사의 소재지가 특정 장소에 편중되어 있으며, 양자 사이에 깊은 연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회생프로그램이 일종의 국가 후원제도라 한다면, 국가의 후원제도와 시장의 제도가 긴밀하게 맞물려 있으며, 특정 지역이 문학 생산의 중심지인 반면 다른 지역은 그 소비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정된 작품의 우수성을 폄하하는 데 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뻔한 정치적 수사를 걷어내고 말하자면 이렇다. 문학상의 편향과 다른 맥락에서, 일부 출판사와 문학 매체에 재능 있는 작가와 우수한 작품이 집중되는 것은 특정 경로(經路)의 일방적 우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문제는 선정된 결과가 경로 의존성을 더욱 강화하고, 경로 의존성은 작가의 재능을 한 곳에 집중시킴으로써 승자 독식이라는 문화의 블랙홀을 형성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면 우리의 문학 생태는 일차원성의 궁핍을 면할 수 없고, 작가의 재능 또한 상품화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작가의 자연스런 목표가 여전히 국가적 중심지라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편협한 지역주의는 불식되어야 하지만, 문학을 ‘회생’하려는 기획도 주변부 지역의 ‘희생’을 강요하는 수준일 수는 없을 것이다.《문장 웹진/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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