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한국 소설의 표정과 편향성

 

황국명(문학평론가)


1. 주변부의 삶과 리얼리즘


한때 아직도 문학이냐는 비아냥거림이 없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낙원의 도래가 임박하였으니 문학 따위가 왜 필요하겠느냐는 희극적 전망의 산물이 아니었다. 문학위기설을 유포하는 데 일조한 그 조소는 문화산업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분배의 규모, 문학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동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른 한편 형식 문제를 고민한 한 리얼리스트의 경우처럼, 소설의 객관성은 회의적인 범주가 되고 리얼리즘의 반성은 당면한 과제로 여겨졌다.

2005년의 소설문학을 일견하면, 이런 조소와 회의가 사실로 확인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을 고민하기보다 삶을 고민한 작품도 적지 않다. 이들 소설의 사실적인 풍경 속에서 생의 낭떠러지에 선 주변부 인간과 그들의 쓸쓸하고 억눌린 삶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의 비정한 현실을 겪어내는 남루한 인간들, 폐광이 되어버린 추억의 갱도를 낭만적으로 더듬는 진폐증 환자, 상실과 적막감에 사로잡힌 농어민, 삶의 가파른 경사로 내몰린 탈북자나 불법체류 이주 노동자 등을 감싼 따뜻한 시선에서 우리는 문화권력의 재편성이 아니라 현실의 재구성에 대한 열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풍경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구축된 사회적 장면이다. 그런데 중심으로부터 먼 주변부의 생태적?지리적 특성에 뿌리를 내린 소설에서 이 같은 사회역사적 풍경이 보다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부조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오경훈의「어선부두―제주항 6」(《제주작가》 2005년 여름호)이 보여준 것처럼, 제주라는 지리적 특성은 지역 사회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뿐 아니라 역사의 폭력과 상처도 기억한다. 상처의 기억을 통해 지역구성원은 자신의 사회적 자아상을 확인하는 인식 효과, 통합적 실체로서의 집단적 통일을 이루는 동의의 효과를 얻지 않겠는가.

이러한 기억과 함께, 지역의 생태적 특수성은 지역민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로 작동한다. 그것은 삶의 텃밭을 지탱하는 기반인 동시에 사회적 박탈의 기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주변부는 중심부의 원격지인 까닭에 수입과 분배에서, 혹은 직업의 기회나 거주 영역에서 극심한 결핍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창훈의 「나는 여기가 좋다」는 어장이 황폐화됨에 따라 선장의 꿈을 실었던 어선의 매각이 불가피하게 되자 도시로 떠나려 하는 아내와의 갈등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갈등은 도시의 기획된 공간과 섬과 바다라는 물려받은 공간의 양극화를 암시한다. 바다를 포기하려는 아내에게 섬은 배타적인 거주 지역, 곧 게토와 다를 바 없다. 양극화의 파괴적인 결과는 섬을 태생지로 하는 작중인물들의 감정구조 속에 외부의 자극이 내면화된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도시적 자본주의 가치의 내재화가 그것이다. 따라서 섬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은 박탈의 경험에 기초하며, 동시에 도시의 물신에 대한 선망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양극화의 더욱 치명적인 측면은 주변인의 내면에 형성되는 자기모멸이다.


그는 아내가 토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섬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일까를 잠깐 생각한다. 한 번도 불만을 품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모두 사라지는 날을 앞두고 있자니 혹 자신도 아내처럼 무슨 죄 때문에 태어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여기가 좋다」(《창작과비평》 2005년 가을호)


“죄를 지어 벌을 받”아 섬에 태어났다는 아내의 말처럼, 지역의 지리적?생태적 특수성은 지역 간의 개성적 차이와 다양성의 토대가 아니라 부정적 가치로서 열패감의 원천이 된다.

물론 주변부의 삶이 오직 자기모멸을 되새기는 함정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창훈의 소설이 그러하고, 이상섭의 「수평선, 그 가깝고도 먼」(《실천문학2005년 가을호) 또한 지역의 텃밭에서 수평 세상을 꿈꾸는, 원시적인 생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작중인물이 삶을 긍정하게 됨은 살아가는 장소가 가상현실이 아니라 실체들이 관계를 맺는 자리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 자리는 낯선 타자를 기꺼이 포섭하며, 타자와의 소통과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생의 끝이라고 여겼던 곳에서 세상의 낮은 목소리들끼리 만나 자기 몫의 삶을 인정하고 수평적 연대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지역의 구체적인 삶에 밀착하고 주변부의 상처와 박탈을 세밀하게 살핀 결과라면, 이 결과는 리얼리즘의 촌스러움 혹은 문학 자체의 주변성을 입증할 뿐인가.


2. 비루한 일상과 기억의 힘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점은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도시나 가정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도시의 일상에서 타자와의 만남은 악몽의 경험이 되기도 한다. 2005년의 작단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익명의 타자가 만들어낸 소문이다. 이러한 소문은 실체가 없는 헛것이다. 헛소문은 집단의 그늘에 숨은 타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생산 유통 소비된다. 헛것인 까닭에 소문의 진위는 불확실하고 모호하지만, 집단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우월한 권위를 지닌다. 그러나 소문은 정신적 심리적으로 무책임하다. 임철우의 「나비길―황천 이야기 2」(《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 정이현의 「익명의 당신에게」(《문학판》 2005년 여름호)가 보여주듯, 익명성의 소문은 표적에 대해 집단적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 형식이다. 소문이 실체가 없는 기표의 무한증식이라면, 소문의 기원인 집단과 이들 집단의 군집이라 할 일상도 헛것이 아닐 수 없다.

터무니없는 헛것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은 태연하게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일상의 교활한 사기에 불과하다. 포장을 걷고 보면 일상의 삶은 역겹고 불안하며, 사소한 우연으로도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킨다. 그래서 가정도 안정된 중심이 아니며,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김인숙의 「빨강풍선」(《실천문학》 2005년 여름호)이 보여주듯, 일상의 삶은 남루한 현재를 거쳐 전락으로 예정된 미래로 흘러간다. 잘나가던 성우는 베이비시터가 되고, 은행의 대리는 대출회사의 직원으로 변신하여 비굴한 삶을 견딜 뿐이다.

일상의 남루를 묵인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이제 불가능한 꿈을 향한 열정을 갖지 않으며, 변절과 교조 사이에서 내면의 지옥을 경험하지도 않는다. 은희경이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에서 드러낸 것처럼, 이미 결정되어 ‘변수’가 있을 수 없는 삶 앞에서 작중인물들은 “잘 가라, 내 청춘.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이여”라고 말할 따름이다. 과거를 향한 절박한 그리움도, 미래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도 없음은 그들이 세월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지닌 중년인 까닭이다.

희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은 젊은 날의 혼곤한 꿈인 듯이 잊힌다. 이런 망각을 두고 이남희는 ‘시간의 풍화 작용’이라 말한 바 있다. 한때 더없이 빛나던 가치도 무화시키는 시간은 피할 수 없는 타자이며, 그렇지만 우리 생의 한가운데 허용할 수밖에 없는 힘이다. 이런 시간의 힘에 맞서 싸우는 방법의 하나는 존재의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겪어낸 삶의 과정을 추적한 구효서의 「소금가마니」(《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는 역사의 광증 속에서 생명을 지켜낸 모성의 위대함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어머니는 현재의 전사이며 존재의 썩지 않는 기원이라는 것이다.

함정임의 「곡두」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모성이 결여된 인간의 슬픔에 접근한다. 결혼을 앞둔 작중인물은 어머니로부터 난데없는 오빠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녀에게 오빠는 “외계의 행성처럼 멀고 낯설기만” 하다. 이 같은 낯섦은 어머니를 ‘노인’이라 지칭하는 심리적 거리와 상응한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반항이 연민으로 바뀌어 온 것처럼, 그녀는 모성의 결핍을 지닌 오빠에게서 동질감을 확인한다.


그날 오빠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누구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일은 없어졌지만 오빠는 이후 그녀의 가슴 한켠에 들어와 있었다. 엎드린 소년, 엎드린 사내. 그 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야릇한 슬픔을 야기했고 떼기 힘든 발걸음처럼 그녀를 한 자리에 오래 서성이게 했다.

―「곡두」(《문학과사회》 2005년 봄호)


웅크린 자세로 불안한 일상을 견디는 오빠는 작중인물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만날 수 없는 오빠는 ‘곡두’와 같지만, 그 헛것의 근원을 따져 가면 그녀 또한 동일한 근원의 쌍생아라는 것이다.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정신적 외상을 넘어서되, 아버지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발견한다는 데 이 소설의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시간의 난폭함을 이겨내는 또 하나의 방향은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강동수의 「금발의 제니」에서 순결했던 청년 시절은 채색사진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삭아가는 나뭇등걸처럼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수 없는 중년의 작중인물에게 추억은 권태로운 일상을 견디는 힘이 된다.


그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오래전 책갈피에 넣어둔 마른 야생화 같은 묵은 그리움이 살아나는 것을 나는 느꼈다. 민들레의 한살이를 연속 촬영한 속사필름처럼 그 그리움에서 싹이 트고 대궁이 솟고 씨앗 주머니가 동그랗게 돋아났다. 나는 그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금발의 제니」(《작가와사회》 2005년 봄호)


되살아난 추억의 장면은 현재의 일상에 포섭되지 않은 낯선 무엇이다. 그것은 남루한 일상을 데우는 온기일 뿐 아니라, 평탄한 의식에 파문을 만들어내는 무엇이다. 왜냐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작중인물 자신인 까닭이다. 그리움이 초라한 일상에 되먹임되고 그리하여 작중인물의 내면에 동요를 만들어낼 때, 기억은 일종의 유토피아가 아니겠는가.


3. 존재의 운명과 근원적 허무


시간의 선조성과 싸우는 작가는 인간의 동물적인 운명, 곧 죽음에 대한 성찰에 이른다. 2005년의 소설적 성과 가운데 인간의 실존에 대한 시간의 엄정한 표시, 달리 말해 인간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두드러진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건강하고 오래 살수록 죽음은 오히려 천박해지는 현상을 염두에 두면, 인간의 동물적 한계에 대한 관심은 죽음의 아우라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찬의 「야윈 몸」에서 삶은 죽음에 이르는 자연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가 특별히 신선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삶의 시선이 아니라 죽음의 관점에서 살핀 것은 각별하다.


갠지스는 죽음이 흐르는 강이다. 죽음이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 삶이 그림자로 보인다. 한바탕 그림자놀이가 삶이다. 갠지스는 그렇게 삶과 죽음의 자리를 바꾸어놓는다. 삶이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삶을 바라본다. 인간이 갠지스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갠지스가 인간을 바라본다. 갠지스의 시선에 관통당한 인간의 육신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외로이 펄럭이는 한 조각의 천에 불과하다.

―「야윈 몸」, 《문예중앙》 2005년 봄호)


죽음의 관점에서 본 삶은 한바탕 그림자놀이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생명은 죽음의 일부인 셈이다. 그렇다면 죽기 위해 산다는 생명의 모순을 승인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정지아는 “생은 소멸과 소멸 사이의 한 토막”이라고 명제화한다. 물론 작중인물은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거나 채울 수 없는 상실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상실의 고통은 삶을 산술적으로 측량할 때 유발되는 여한과는 다르다. 그것은 몸을 지닌 개별자가 오로지 홀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슬픔, 각자의 몫으로 겪게 되는 동통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삶의 세부에 있어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생명은 그 자체 우주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 생명이 그 탄생을 인정하듯 저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것이 두려워 도망치거나 장식을 덧붙이지 않는다면, 즉 소멸에 저항하여 불멸을 꿈꾸지 않는다면, 생명은 스스로의 소멸을 감당할 만한 힘을 갖게 된다고 여자는 믿었다.

―「소멸」(《문학수첩》 2005년 가을호)


삶의 궁극적 진실은 죽음에 있다고 하는 데서 허무의 독한 기운을 느낄 수 있지만, 생의 허무에 대한 자각은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우주적 화해처럼 이해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소멸은 ‘우주의 본질’에 합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큰 질서에 포섭되기 때문에, 어떤 개인의 죽음도 다른 죽음보다 남다를 수 없고 특별한 시선을 받을 수 없다. 죽음 앞에서 혁명가의 몫과 속물의 몫이 다를 수 없다는 인간조건을 이해할 때, 우리는 모든 존재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품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모두 같은 운명인 까닭이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으로서의 삶이라는 명제는, 존재의 운명을 참되게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을 왜곡시킬 가능성도 적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삶을 헛것이라고 평가절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지아의 작중인물에게 기억은 불확실하고, 사물에 잠재하는 추억은 고역으로 경험된다. 부모 또한 낯선 존재이기는 매일반이며, 집이란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이다. 그렇다면 작중인물은 외로움이라는 인간적 감정조차 경험하지 못하는 셈이다. 외로움은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할 때 성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의 호흡이 자기에로의 몰입을 방해”할 뿐이라면, 작중인물의 삶은 평생 도망자로 살았던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한, 생존을 위한 몸부림조차 남루한 욕망으로 간주되기 쉽다. 존망이 엇갈리는 산멱통에서 삶의 구체성에 직면하지 않는 한, 존재의 소멸도 그 비장감을 잃고 천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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