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에 대한 보고서

 

‘이름값’에 대한 보고서




 기 정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인데요?


“ <남극의 발견>이요? 네? 아, <남북의 발견>이라구요?”

“아니……시를 낭독하다, 할 때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입니다”

“아~ <낭.독.의……발.견>! 이라구요?”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섭외전화 한 통에 긴 설명이 필요했다. 제목을 제대로 알아차린 후에도 전화기 너머에선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흐르곤 했다. 텔레비전에서 낭독을 한다구? 도대체 정체가 뭐지? 낭독으로 뭘 발견한다는 거야? 현란한 볼거리로 넘쳐나는 텔레비전에서 정적인 낭독을 통해 뭔가를 발견하라니…….  분명 시작부터 낯설고 무모한 도전이었다. 게다가 방송 시간은 점점 밀려나 밤 12시를 훌쩍 넘겨 자릴 잡았으니 태생적인 불리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우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낭독의 발견>은 100회 고지를 넘어 마침내 200회를 맞이했다. 노래와 춤과 영혼의 문장이 어우러진 축제 한마당에 수백 명의 관객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2003년 가을, 첫 전파를 탄 이후 4년 반을 쉼 없이 달려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 자릿수를 넘지 못하는 시청률 사각지대에 머물면서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감성파 제작진이 모여 앉으면 과연 우리가 100회 고지를 달성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느림의 미학에 마음을 기대는 조용한 움직임은 제작진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인터넷엔 ‘낭독의 발견’이란 팬 카페가 생겨나고, 녹화가 있는 날엔 불원천리 멀리서 찾아온 관객들로 북적인다. 좋아하는 소설가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까지 내고 달려온 광주의 119대원이 있는가 하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신사는 종종 메모지와 펜을 들고 나타나 낭독 무대를 빠짐없이 기록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수백 편의 시를 줄줄 암송하는 오십대 아주머니는 녹화 전 막간을 이용한 즉석 낭독회로 박수 갈채를 받기도 한다. 재밌는 토크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껏 풀어져 즐길 수 있는 음악회도 아닌 오붓한 낭독 무대에 이렇듯 마음으로 이끌리는 건 아마도 ‘진정성’의 발견이란 찬 우물 같은 매력 때문이리라.

하지만, 아무리 공들여 만든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일회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방송의 한계는 늘 아쉬움으로 남는 법. 제작진도 감회가 새로운, 200회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다시 음미해 볼 수는 없을까? 이런저런 궁리 끝에 얼마 전 『인생낭독』이란 제목의 책을 한 권 펴냈다. 말하자면, 4년 반 동안 낭독 무대를 채웠던 잊지 못할 구절들과  뒷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낭독의 울림을 입체적으로 만들었던 무대 사진과 함께 육성으로 마음의 무늬를 전했던 주인공들의 에필로그도 함께. 준비하는 동안, 긴 여운을 남겼던 각계각층의 주인공들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출판 동의를 구하는 절차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대치를 넘어 깊은 울림을 전했던 그들의 일상이 여전할까? 하는 궁금증도 컸다.

 


 

거절의 미학(美學)


“ 아? 네 벌써 200회나 됐나요? 축하합니다.”

“ 제 글을요?  아유……많은 사람들에게 낭독할 기회를 주는 건데  승낙하고 말고가 어딨습니까? 책 나오면 꼭 한 권 보내주세요!”

특별했던 낭독 무대의 추억을 되살리며 대부분 흔쾌히 출판에 동의를 해 주었고, 더러는 10년 20년 장수하라는 부담스런(?) 격려 인사까지 곁들여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기치 못한 데서 발생했다. ‘추천사’를 써 주십사 요청한 세 분 명사 중의 한 사람, 명쾌하고 빠른 말씨로 알려진 그녀가 단호하게 ‘노(no)!' 거절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추천사를 쓰려면 반드시 원고를 읽고 나서 써야 하는데,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사람이니 어떤 내용인지……읽지 않아도 짐작이 가지만, 그렇다고 읽지 않고 쓴다는 건 <낭독의 발견>에도 심각한 결례이며, 혹여 자기 이름의 추천사를 보고 책을 사는 이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심히 미안한 일이라는 거였다. 빠른 속사포식 말투를 애써 느릿느릿 늘려가면서 거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0.001초 동안의 배신감(?)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느닷없이 ‘감사합니다’라니. 하지만, 지구촌 재난 현장에서 구호의 손길을 펴는 그녀의 숨 가쁜 일상을 들여다 본 나는 어쩔 수 없이 즐거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출연자 선정을 할 때마다 가장 엄격한(!) 잣대로 가늠해 보는 ‘진정성’. 역시……우리는 그녀를 제대로 보았던 거다.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꿔 주세요!


마지막 교정을 보고 출판사로 원고를 넘기기 직전, 각각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031로 시작되는 낯선 번호가 액정 화면에 뜨더니, 예의 조심스런 말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 왔다.

“저…… 기정 작가시죠? 저는 가수 아무갠데요…… 원고 잘 읽었어요, 그때 녹화 때 제가 너무 울어서 민폐를 끼쳤는데…… 이번에 무대 사진이 나간다는데 혹시……우는 장면이 나가나요? 그리고…… 문장 중에 몇 군데만 고쳐 주셨으면……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주저 없이 대답하긴 했지만, 내용에 문제가 있었나?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그러나, 그녀의 요청은 단 하나,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꿔 달라는 주문이었다.

‘나는 너희들보다 상황이 더 나빴거든? 형편이 더 안 좋았거든? 그런데 이만큼 성공했거든? 나는 하는데 너는 왜 못해?’

말하자면, 이 인용문의 마지막을 물음표 대신 점(마침표)으로 바꿔 줄 수 있냐는 거였다. 책을 읽는 독자층은 다양할 테고, 문자로 정리된 어감이 자칫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그녀는 전국 투어 공연으로 정신없이 바빴고, 밀려드는 출연 요청에 즐거운 비명을 지를 만큼 분주한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녀의 주문이 떨어지자마자 의문형 문장은 마침표로 명쾌히 정리되었다.



신(神)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출연한 지 얼마 안 된 낯익은 전화번호가 액정 화면에 떴다.

“감사합니다. 저희 생각을 너무 잘 정리해 주셔서…… 근데요, 단어가 좀 걸려서요, ‘신’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제가 믿는 신은 하나님이거든요. 물론 특정 종교라서 일부터 그렇게 표현하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제 얘기를 써 주신 거니까 제 믿음대로 ‘하나님’으로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정중한 신앙 고백처럼 나직하게 들려 온 남자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물론, 대답은 "오케이(ok!)" 본인이 쓴 원고를 고쳐 달라는데 좋아라 여길 사람 없겠지만, 예기치 못한 두 통의 전화는 <낭독의 발견>의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기 충분했다.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전화기 속의 남자는 아리따운 아내와 함께 낭독 무대를 장식했던 힙합가수였고, 녹화가 끝난 후, 객석을 돌며 빳빳한 만 원짜리를 살포한 느닷없는 이벤트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만 원짜리 한 장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도 있겠지만, 이 돈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 행복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겁니다”

나눔의 행복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그들 부부가 객석을 돌며 지폐를 나눠 주는 동안 중년의 관객은 뜨거운 포옹으로 답례했고, 누군가는 집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아들과 의논한 끝에 아프리카 난민 돕기 계좌에 이름을 올렸다는 후기가 날아오기도 했다. 역시, 그의 주문대로 ‘하나님’이란 단어가 추가됐고, 며칠 후 『인생낭독』은 화사한 나비 모양이 내걸린 무대 사진과 함께 출간됐다. 책을 만드는 동안, 정중하면서도 까칠한, 그러면서도 결 고운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며 행복했다. 최소한 자기 이름을 걸고 행하는 모든 일들에게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 반향에 대해서도 미리 배려하고 책임지려 하는 삶에 대한 진정성. 그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체험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낭독의 발견>은 kbs 문화 예술팀에서 만들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이제 5년차, 210회 녹화를 준비하고 있고, 또 다른 주인공의 목소리가 빚어낼 삶의 무늬에 주목하고 있다. 꾸며지지 않은 은밀한 속살의 살가움, 특별하지도 도드라질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인생의 울림을 나누고자 한다. 수요일 밤 12시 45분, 가끔은…… 단잠의 유혹을 뿌리치시라.《문장 웹진/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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