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질의 ‘시선’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시

 

<작가와 작가>


육질의 ‘시선’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시



대담 김신용(시인)

진행?정리 이기인(시인)

 

 

intro

지금은 새로운 시의 여행을 기다리는 시간

수의를 만들면서 찾은 시

내가 ‘새롭게 발견됐다’고요 웃지요

교도소 감방에서의 시공부

빈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살아가지요

밑바닥 삶의 풍경을 보면 ‘피로’가 사라지지

상 못 받아도 좋아, 시 줄이고 싶지 않아

문단 몰라 난 혼자서 해

노동 지게꾼 품팔이라고 격하시킬 수 없잖아

아파할 수 있는 눈을 갖자고 쓴 시가 환상통

‘몸’과 ‘집’의 이미지… 내 등짝 하나 누일 공간이 없었지

무수한 파지를 내면서 ‘쓴다’

작살난 인생 시나 쓰고 죽자

비오는 날의 오후는 너무 쓸쓸해. 이 영원의 한 조각을 가지고 지금 뭘 하지

‘부랑’ 세계관에 의해서 떠도는 사람은 부럽지

시인이라는 얼굴이 내 마지막 얼굴이기를

 

 


‘섬말’ 여기로 흘러왔지


이기인  안녕하세요. 선생님 집에 와서 이렇게 인터뷰까지 할 수 있도록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신용  누추한 곳까지 오셔서 제가 더 고맙지요.

이기인  그동안 선생님께서 쓰신 시에는 선생님의 오붓한 생활 내용이 그대로 시에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 궁금한 마음이 있었고요. 선생님은 과연 어떤 분이며 어떤 모습으로 사실까. 궁금해 하는 시인과 독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와서 선생님 생활과 마주하고 보니 앞으로는 선생님 시로부터 더 많은 감동을 받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이 자리는 선생님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소중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습니다. 이에 앞서 사소한 질문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충주의 외딴 시골마을에 살면서 『도장골 시편』이라는 작품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언제 이곳 소래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인지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신용  도장골에서는 한 1년 살았지요. 그 집은 내가 아는 화가의 집이었어요, 그런데 그 화가가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바람에 집을 비워줘야 했지요. 마침 이곳 소래에 아는 이의 집이 있어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지요. 사실 이 집은 친척집이죠. 이 집 2층을 세놓는다고 해서 오게 된 거예요. 와서 보니까 여기도 벌판 한 가운데에 있는 시골이에요. 아마 도장골 시골 정서가 바로 여기까지 이어졌을 거예요. 저는 요즘도 도장골에 사는 듯한 느낌으로 살아요. 의도적으로 이 동네에 온 게 아니고 그냥 내 삶이 흘러가는 대로 여기로 온 거예요.



이제 변화가 오지 않을까?


이기인  선생님이 머물러 있는 삶의 공간이 선생님 시에 영향을 주었다면, 이제 도장골에서 소래로 이동하신 선생님의 삶과 시에는 곧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김신용  아마 그럴 거예요. 『도장골 시편』스무 편 가량은 여기서 완성했어요. 도장골에서 너무 일찍 나온 바람에 도장골에서 못다 쓴 시를 여기에 와서 썼지요.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이제 곧 시에도 어떤 변화가 오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섬말 시편』의 일부를 쓰다 잠시 제쳐둔 상태에 있어요. 또 다른 시에로의 이행 과정을 기다리고 있지요. 어떤 시가 나오겠다고 하는 단언은 현재로서는 못하겠지만, 아마 『도장골 시편』은 이쯤에서 끝내고 지금은 새롭고 강렬한 시의 이미지를 모색 중이에요. 그래서 원고 청탁이 와도 대부분 거절을 하고 있어요. 시 발표도 많이 안하고 있지요. 조금 새로운 시세계를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 세계가 어떤 시세계라고 구체적으로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아마 《작가세계》 봄호에 발표한 「수련에 대하여」라는 시와 이번 여름호 《시에》에 발표한 시「바위의 첼로」,「등나무 그늘」과 같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세계를 ‘섬말’이나 ‘자연 매개물’과 연관지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볼까 생각 중에 있어요.

 


지금은 새로운 시의 이행을 기다리는 시간


이기인  이곳 소래로 온 이후 생활의 변화는 어떤 것이 있나요.

김신용  변화는 없어요. 도장골에서도 텃밭농사 지으며 자급자족 하면서 살았어요. 여기서도 똑같아요. 저 앞에 아파트가 보여서 그렇지, 여기는 소래 벌판 한 가운데예요. 바로 옆이 다 염전이에요. 그래서 마을 이름도 ‘섬말’이에요. 여기는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서해안 오지였어요. 바로 옆이 오이도예요. 그래서 도장골 살 때나 지금이나 느낌이 똑같아요. 도장골이라는 자연 매개물만 갖고는 하고 싶은 이미지를 다 표현하지 못하니깐 이젠 좀 더 시적 감수성이 진하게 배어 있는 그런 시로 이행할 거예요.

이기인  이곳의 삶도 분명히 선생님 시에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고 기대를 하겠습니다. 그럼 요즘 시를 ‘자제’하고 계신 거네요?

김신용  한 번씩 이럴 때가 있어요. 어떤 이미지나 주제가 공허해질 때가 와요. 모색기일 때는 단어 하나의 의미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실어증에 걸린 듯. 그럼 책상 앞에 앉기가 싫어져요. 그럴 때는 분명히 내 자신이 뭔가 변화를 바라는 징조예요. 기존에 있던 시만 갖고는 내 가슴속의 뭔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달래지 못하니깐 그 욕구를 달랠 수 있는 어떤 의미나 이미지가 나타나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징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아마 지금이 그런 시기 같아요. 이럴 때는 시도 안 쓰고 일부러 나가서 술도 한 잔 먹고 그러지요. 허허허.(웃음)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이기인  선생님은 40초반의 나이에 《현대시사상》에 「양동 시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시력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꼭 20주년을 기념해서는 아니더라도 이즈음 하여 어떤 소회를 갖고 계실 듯싶습니다. 이미 5권의 시집을 상재한 분으로서 또 이순을 넘긴 자연인으로서 어떤 느낌을 갖고 계신지요. 

김신용  글쎄, 나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대해 큰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아요. 느껴본 적도 없어요.『버려진 사람들』,『양동 시편』쓸 때나 지금이나 느낌은 똑같아요. 시의 변화는 조금 있을지 몰라도 내가 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똑같아요. 나는 시간의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구애를 안 받고 살아요. 그러니깐 20년이 흘렀다. 이런 것에 대해서 조그마한 느낌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20년이라는 그 시공간이 어떤 큰 깊이나 굉장한 넓이로 내게 다가와야 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몸담고 있는 그 느낌이 똑같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의식 해본 적이 없어요.



‘수의(壽衣)’를 만들면서 찾은 ‘시’


이기인  단순히, 시력의 길고 짧음을 비교함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대체로 시를 오래 쓰다 보면, 혹은 자연인으로서의 나이를 채우다 보면, 처음의 그 창작열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게 일반적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헌데 선생님의 경우는 외려 그 반대의 경우라서 젊은 시인들과 비평가들이 많이 놀라고 있는 상황입니다. 시력이 ‘늘었다’ 혹은 차오를수록 더 많은 작품을 낳는 이 기현상은, 이미 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전의 작품보다도 더 집중적인, 면모를 보이는 작품을 그야말로 ‘공을 들여서’ 열심히 쓰고 계십니다. 이것은 2005년에 시집『환상통』이 나온 것과 멀지 않아서 작년, 2007년에 『도장골 시편』이 출간된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두 시집에 대한 평가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이전보다 창작열이 더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시죠?

김신용  사실 저는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을 낸 이후, 생활비 때문에 장편소설을 두 권 쓴 적이 있어요. 그게 장편소설『기계 앵무새』예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에 아이엠에프가 터져서, 저는 전라남도 완도 밑에 있는 신지도라는 섬으로 들어가야 했었지요. 그때 저는 굉장히 큰 슬럼프에 빠진 상태였지요. 조금 전에 말했듯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공허한 일이었으며 그것은 마치 실어증처럼 다가왔지요. 그걸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섬으로 들어가 살아야 했지요. 그런데 그때는 돈도 없었지요. 결국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했어요.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수의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몇 년 수의를 만들어서 돈을 좀 모아놓으니깐 마음이 놓여서 그 때부터 쓰기 시작한 게 『환상통』하고 『도장골 시편』같은 시집들이 나온 거예요. 지난 시간의 궤적을 가만 생각해 보면 결혼이란 걸 한 후로는 집사람 밥 굶길까 겁이 나서 생활에 대해서 큰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나 혼자면 굶으면 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었던 것이죠. 또 돈도 안 되는 시만 쓰고 있으니 가난의 무게는 자꾸만 더해지고 그러니깐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아요. 그런데 수의를 만들면서부터 그 스트레스로부터 조금 벗은 것 같아요. 그때부터 뭔가 쓰고 싶다는 욕구가 밀려온 것 같아요. 그러한 것이 젊은 사람들한테는 열정의 모습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새롭게 발견됐다’ 고요? … 웃지요


이기인  최근 2, 3년 전부터 선생님의 시에 대한 새로운 시선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뒤늦은 조명이라고 볼 수도 있고요. 한 비평가는 “김신용은 2000년대 시단에서 새롭게 발견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말을 듣는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겸연쩍은 표현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최초 시를 쓰기 시작한 시점에서 조금 떨어져 혹은 많은 시간이 흘러서 선생님 시에 대한 조명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뒤늦은’ 조명에 대한 느낌이 있을 것 같아요.

김신용  ‘나는 새롭게 발견됐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웃고 넘기지요. 창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암중모색기라는 것이 있잖아요. 글 쓴다는 사람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해나가기 마련이고, 새로운 것을 자꾸만 추구하다 보면 새로움에 도달하기 위해서 공백기도 필요하죠. 그러다 보니깐 공백기만 바라본 평자들에게는 새롭게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저는 그런 얘길 들을 땐 웃고 말아요. 그런 얘기는 내게 별 느낌도 없고 그냥 나는 나 나름대로, 내 삶의 궤적대로 흘러가는 거니깐. 그런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거나 구애받지는 않아요.

 


나의 ‘시부랑탕’ 시로써 못한 이야기를 했지


이기인  90년도에『개 같은 날들의 기록』이라는 시집이 출간되었고요. 이후에 『몽유 속을 걷다』가 98년도에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8년이라는 시간이 좀 길지 않았나 싶어서 그 두꺼운 시간을 살펴보니 두 권의 장편소설이 이 시간에 끼어 있더라고요. 이 기간에 선생님께서는 생계를 위해서 소설을 썼다고 하셨는데 다른 한 편 생각하면 이 시간은 시인이 아니라 소설가의 삶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시로 채울 수 없는 이야기를 생각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소설로써 붙잡고 싶었던 얘기들은 무엇이었나요.

김신용  『버려진 사람들』,『개 같은 날들의 기록』은 내 자신이 살아온, 그러니까 이 땅에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남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의식을 못한다거나 일부러 못 본 척하는 일부러 잊으려고 하는 밑바닥 세계잖아요. 우리가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눈을 감아버린 세계예요. 그러한 세계를 끄집어 올려놓으니까 시라는 행간 속에 묻혀버린 얘기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시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좀 더 깊은 발언을 하고 싶은데 시라는 장르의 한계성이랄까 속성이랄까, 그로 인해 묻혀버렸던 얘기들을 쓰고 싶었어요. 조금 전에 말했듯이 당시에는 생활비도 없었는데, 누가 생활비 도와줄 테니까 소설 좀 써달라고 해서 그 소설을 쓰게 됐어요. 사실은 내가 그 소설을 쓸 때 그 두 권의 시집 속에 묻혀있던 얘기들을 끌어올린다는 차원에서 쓴 거예요. 방금 말했듯이 소설가적 삶보다도 시인의 삶속에서 시로써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에세이 형식으로써 표현했다고 소박하게 이해해주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기인  시로써 접근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소설로써 풀어나가신 거군요.

김신용  시로써 형상화해야 할 부분이 있고, 소설이나 에세이가 담당해야 할 몫이 따로 있다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두 권의 시집을 내놓고 나니깐 그 속에서 진짜 말 못했던 부분들이 나오더라고요.

이기인  그 무렵에 나온 시들도 내용이 굉장히 현실 고발에 가까운데, 그것으로는 선생님에게는 성이 안 찬 것 같습니다.

김신용  『고백』이라는 장편소설은 밑바닥 세계의 ‘언어’ ‘속어’ 들을 과감하게 하나도 여과하지 않은 채로 쓰고 있어요. 그 밑바닥 세계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소설적 장치를 하지 않을 채로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지대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그런 기법으로 쓴 거예요.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시인이니까 또 소설가가 아니니까 그랬죠. 내가 전문적인 소설가 같았으면 소설적 장치를 밀도 있게 만들어서 넣었겠지만 그렇게 쓰면 밑바닥의 리얼리티가 죽는다고 생각했어요. 에세이와 소설의 중간지점이 그 세계를 얘기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형식으로 썼는데. 잘 됐는지 안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웃음)

이기인  어느 글에서 보니(장정일과 김신용 대담 ― 성자 김신용, 시부랑탕 김신용의 전무후무한 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1』) 그 이야기는 실제와 허구가 9대1 정도의 비율로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김신용  그 속엔 내가 겪고 본 얘기들이 ‘시부랑탕’이라는 인물, 나라는 1인칭 화자에 의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그것을 전부 내가 다 겪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사실 그 이야기는 그동안 내가 본 것들, 내 친구들, 또 함께 호흡한 사람들의 얘기들을 내 자신이기도 한 ‘시부랑탕’이라는 인물의 삶 속에 넣어버린 거예요. 하지만 남들은 전부 그것이 내 자신의 100%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중에 20%는 남의 얘기를 내 것으로 가지고 온 것예요. 그리고 나머지는 실제로 다 겪은 거예요.

이기인  90년부터 98년까지의 시간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시로써 이야기하고자 하였던 갈증이 풀리지 않아서 소설적 장르를 통해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얘기했던 시간이었던 같습니다. 또 이것은  선생님의 얘기처럼 ‘생계’와 관련한 글쓰기와 멀리 있지 않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요. 선생님 생활의 곤란은 이미 많은 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려진 듯도 합니다.

김신용  (끄덕)



교도소 감방에서의 ‘시공부’


이기인  분위기를 바꿔서 다음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선생님 등단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그때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선생님께서 《현대시사상》에 시를 발표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김신용  그 시절에는 대학로에서 보도블록 공사를 할 때였지요. 거기서 ‘노가다’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하루는 어떤 친구가 서울대학교 후문 담벼락에서 빨래집게로 그림을 걸어놓고 전시를 하고 있더라고. 우연히 화가의 프로필을 봤지요. 고향이 부산 영도다리 부근이더라고요. 그 친구는 가난 때문에 서울로 야반도주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처지였지요. 동향이고 해서 그와는 친구가 됐는데, 하루는 그 친구가 나를 데리고 인사동엘 갔어요. 그 집이 실비집이였는데. 거기 가니깐 문인들을 비롯해서 화가들, 도공들, 음악하는 사람들, 말 그대로 각 장르의 무명 예술가들이 거기 다 모였더라고요. 그때는 내가 노가다할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항시 몇 편의 시가 주머니에 들어 있던 그런 시절이었어요. 아, 서울에도 이런 데가 있었구나. 그동안 지게를 지고 인사동, 청계천 이런 데를 다 돌아다녔는데도 인사동이 이런 분위기인 줄은 잘 몰랐던 거예요. 내가 시를 쓸 때만 해도 아는 문인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냥 나 혼자서 공부했죠. 그 다음 날인가, 혼자 가서 술을 마시면서 주머니에 있던 시를 꺼내 읽는데 누가 옆에서 내려다보면서 그 시를 좀 보여 달래요. 시가 몇 편 있어서 마침 그거까지 보여줬지요. 그 친구 하는 말이 자기는 《현대시학》에 있었던 전봉건 시인한테 추천받은 시인인데, 인사동을 왔다갔다 하면서 많은 무명시인의 시를 봤지만 아, 형님 시처럼 좋은 시는 처음 봤다 그러면서 내 시를 좀 빌려 달래요. 그래서 그러마 하고 다음에 갖다 달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최승호 시인하고 알았던 사이였나 봐요. 최승호 시인한테 내 시를 보여준 모양이에요. 최승호 시인이 이 사람 좀 만나게 해 달라고 한 거예요. 그날 나는 아마 일은 안 나가고 양동에서 놀았을 거야. 주인집에 전화 한 대가 있었는데 거기로 전화가 왔어요. 시 써놓은 거 있으면 다 가지고 인사동으로 어서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학노트 한 권 분량의 시를 가지고서 최승호 시인을 만났지요. 최승호 시인은 나한테 어디에 사냐? 뭐하냐? 물었지요. 나는 지금 대학로에서 노가다하고 있고 양동에서 산다고 하니깐 두 말도 않고 내 시를 가져갔지요. 그리고 그 때는 《현대시사상》 창간호 인쇄를 앞둔 때였어요. 그때 윤전기를 멈추고 내 시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렇게 나는 생각지도 않게 시인이 된 거죠. 어디 투고하고 해서 된 게 아니고요.

이기인  재밌네요.

김신용  그렇게 됐어요. 대학로에서 노가다하다가 화가 놈 만나서 인사동이라는 곳을 알았고 그렇게 희한하게 됐어요. 그러고 나니깐 사람들은 절 보고 서울역 앞의 우리나라 최대 빈민굴이자 사창가인 양동출신이다. 그러면서 막 찾아왔죠. 특히 신문기자들이 찾아와서 제 얘기가 신문에도 나고 그랬어요. 그렇게 해서 문단에 데뷔를 하게 된 거예요. 나도 사실은 처음 문학 공부할 때는 양동 방에서 공부했으니깐. 그리고 처음 시 공부할 때는 교도소 감방에서 했거든요. 그러니깐 사람들은 이상한 놈이 하나 나왔다 했겠죠. (웃음)

이기인  선생님 표현에 ‘감방’이라고 하셨는데. 그 안에서 시를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김신용  내가 처음 16살 먹어 소년원에 잡혀 들어갔다가 나와서 다시 배가 고파 들어갔거든요. 그 때 처음으로 감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았거든요. 

이기인  이미 서울로 상경한 이후죠?

김신용  소년원에 잡혀 갔을 때는 부산에서 그랬지요. 그리고 나서 객지, 서울로 올라와서 잡혀갔지요. 그때만 해도 교도소 안은 인문학적 세계야. 교도소 안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내가 젊어서 학교 다닐 때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에서 학생부에서 시화전도 하고 그러잖아요. 내가 사실은 거기서 시라는 것에 대해 맛을 조금 봤어요. 그러다가 교도소에 들어가니깐 아무 할 일이 없잖아요. 거기서 책을 읽기 시작하고 혼자서 습작도 하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출감할 때보면 시집 한 권 분량이 나오고 그랬어요. 그러니깐 아주 희한한 놈이 하나 나왔다 이렇게 된 거죠. 

이기인  그 때 봤던 책들은 어떤 책들이었습니까. 

김신용  뭐 오 만 거. 저는 국민학교 2학년 때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어요. 하루에 세 권씩 막 읽고 그랬는지요. 그때 읽은 책들은 추리소설, 탐정소설, 소년소녀문고들이었는데 책방에 가면 다 읽어서 더 이상 읽을 게 없을 정도였어요. 어릴 때는 그렇게 책을 좋아했어요. 방금 말했듯이 교회를 다니면서 시라는 것을 조금 알다가 감방에 들어가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그 때부터 혼자 떠돌기 시작한 거지요. 그동안 써놓은 원고들은 다 잃어버렸지요. 그러다 지게를 지기 시작하면서 세 끼 밥과 잠자리를 구할 수 있었죠. 노동이라는 것을 하면서부터 즉 지게를 지면서부터 노동을 몸에 익히기 시작한 거죠. 세월이 그렇게 흐르더라고요. 지금생각하면 그때의 양동 방이 참 고맙다고 생각돼요.

이기인  힐튼호텔이 들어서고도 양동의 일부가 남아 있었고, 늦게까지 거기서 생활하신 거군요.

김신용  내가 89년도까지 거기 있었으니까. 내가 양동 방에서 첫 시집을 냈으니까.

 



빈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 살아가지요


이기인  선생님에게 있어서 ‘양동’은 어떤 동네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신용  6, 7, 80년대 초입까지 미국이나 유럽의 잉여농산물이 무분별하게 들어오면서 농촌경제가 파괴되잖아요. 그러면서 아주 급격하게 이농현상이 일어나잖아요. 소작농이라든지, 자기 땅 없이 농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도시빈민이 되어 가지고 전부 봉천동이나 양동, 남산골 아래에 판잣집 짓고 도시빈민화되잖아요. 그 때 돈 한 푼 없이 농촌이든 도시든 어디서든 돈 좀 벌기 위해서 도시로 도시로 몰려오는데, 서울역 앞에 돈 한 푼 없이 딱 떨어진 사람이 가장 손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양동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양동은 하룻밤 잘 돈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어요. 왜냐하면 한 달 월세나 전셋돈이 필요가 없어요. 하룻밤 방값만 있으면 다음날 새벽 남대문 떡전 골목 앞에 있는 인력시장에 새벽 4시에 나가면 공사판에서 인부들 데리러 오지, 엑스트라 모집하러 오지, 철거반 모집하러 오지, 하다못해 피 뽑으라고 채혈자들 모집하러 오지, 갖가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데리러 온다고. 그래서 나가면 노동을 팔든지 피를 팔든지 엑스트라를 나가든지 하면은 그 때부터 일당 벌어서 먹고 살 수 있었지요. 양동이 밑바닥 인생들한테는 그런 기능을 했어요. 단순히 창녀들만 모여 살던 그런 곳이 아니에요. 창녀도 양동의 일부분이에요. 창녀들이 30%정도라면 나머지 70%는 그런 밑바닥 삶이 살아가는 곳이에요. 창녀들도 마찬가지에요. 남자는 노동일이라도 하지만, 여자는 노동일을 못하니깐 몸을 파는 거예요. 그런 기능을 하는 곳이 양동이예요. 단순한 빈민굴이다 사창가다 이런 곳이 아니고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 밑바닥 사람들이 맨몸으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와서 삶의 공동체를 이룬 곳이에요. 그런 곳이 양동이란 곳이에요.

이기인  선생님의 「무지개」라는 시가 양동 어느 골목에서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요. 아이에게 콘돔 심부름 시키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암울한 시간, 암울한 공간의 역사를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살과 살이 맞부딪칠 때 쏟아지던 소나기 그친 뒤

거기 피어오르던 무지개를 보았나요


양동 뒷골목, 그 음습한 그늘에 웅크린 아이에게

콘돔 심부름을 시키는 어머니의 손짓 따라


약국을 향해 무지개의 다리를 건너가던

깡총 걸음을 보았나요


그 무지개 스러진 뒤, 사라져버린 아이를 찾아

미친 듯 거리를 헤매는 늙은 창녀의 몸부림을 보았나요


― 「무지개」 전문


김신용  양동의 한 풍경이에요. 양동에는 기상천외한 삶들이 존재했어요. 창녀가 아이가 있으면 몸 팔기 힘들잖아요. 그럼 그 창녀가 낳은 아이를 빌려가는 사람들, 구걸하는 사람들, 아주머니들이 있어요. 젖먹이 아이를 빌려서 업고 다니면서 자기 아이인 것처럼 해서 껌을 팔거나 볼펜을 팔았죠. 아기를 생활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고. 방금 전 이야기같이 창녀 어머니가 몸을 팔기 위해서 아이가 심부름도 하고 맹인 안마사의 지팡이를 잡아가지고 길잡이 노릇을 해주면서 일당을 버는 사람도 있었지요. 하여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모습이 존재해요. 그러니깐 밑바닥 사람들이 몸뚱이 하나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그 속에 존재해요. 거기가 바로 우리 사회 밑바닥의 축약지에요. 밑바닥 삶의 모델처럼 만들어진 곳이 양동이라는 곳이에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삶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곳이죠. 그래서 내 시로도 아직까지 표현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아요. 소설 『고백』에도 객지를 떠도는 내 모습만 들어 있지 아직 양동 풍경은 안 들어 있어요. 다음에 후편을 쓰면 양동 모습이 나오는데, 다음 부를 써야 하는데 아직 안 쓰고 있어요. 하도 가슴이 답답해서요. 『버려진 사람들』 시 속에서도 아주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이 묘사돼 있잖아요. 사실은 그곳이 밑바닥 사람들이 그곳에만 들어오면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나오는 곳이에요. 빈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그 속에만 있으면 살아가요.

 



밑바닥 삶의 풍경을 보면 ‘피로’가 사라지지


이기인  많은 분들이 선생님의 시는 사회적 고통의 세목들을 시의 세목으로 만들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 허기와 부랑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도 하구요. 정효구 선생님은 선생님 시의 해설을 쓰셨는데 당신의 표현에 따르면 선생님의 시는 “붓으로 창조한 것이라기보다 허기의 밥풀로 짓이긴 사실화”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반대로 묻고 싶은데요.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사실화하는 것에 있어서 체험한 것들을 기억해서 재생해내는 어떤 정신적인, 또는 감성적인 피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도 어느 글에서 몸 담았던 양동의 풍경들을 회상하면서 그곳 양동의 풍경을 마치 정육점의 붉은 불빛과 같이 생각하시는 것을 굉장히 후회스럽게 생각한다고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내가 서 있는 풍경 속에, 또는 우리가 서 있는 풍경 속에 그들에 대한 것들이 고발되어지면서 그들의 풍경이 사실화되어지면서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로해지는 그러한 것들을 더 이상 재생시키지 못하게 하는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시인이 기억을 재생할 수 있고 재생의 주체자라고 해서 모든 것들을 시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생각으로 보자면 자연스럽게 『환상통』과 『도장골 시편』으로 유의미하지만 그런 시의 전이가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는 『몽유 속을 걷다』가 이전의 두 시집『버려진 사람들』,『개 같은 날들의 기록』과 구별되는 하나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전 두 시집이 씌어지는 동안은 내내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요즘 들어서 그와 같은(『고백』) 소설 3부와 4부를 써야 하는데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 것인지도 궁금하거든요.

김신용  사실 ‘피로도’ 그런 의미보다도 처음 두 시집 시를 쓸 때 우리나라 다른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시세계를 표현해 놓은 시를 본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내가 살아온 궤적과 같은 그런 세계를 시화해 놓은 시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살아온 세계를 시로 한번 써보자 했죠. 그러면 아주 독특한 변별력 있는 시가 만들어지지 않겠나 했었어요. 시를 상상해서 멀리 가서 억지로 찾아낼 필요 없이 시와 시인이 일원화된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내가 살아온 세계는 나밖에 모르는데 다른 어떤 사람도 이를 시로 쓴 적이 없는데 그럼 내가 이것을 시로 쓰자.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의 시예요. 시인이면 누구나 처음에 내가 살아온 세계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해서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황홀한 결합으로 시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완결된 시를 써보자 하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렇게 쓰니까 내 자신의 시가 변별력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쓴 시들은 다 찢어버리고 나서 다시 시작한 게 『버려진 사람들』이예요. 차라리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세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 세계를 표현해보자. 그래서 만들어진 거예요. 거기에 있는 피로도라고 하면 그 세계에 너무 침잠하다 보니깐 오로지 그 세계 밖에 모르고 있는 듯한, 그 세계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듯한 자괴감까지 들더라고요. 나는 이 세계 밖에 쓸 수 없는 시인이면 내 자신의 창조적 능력이 일천하지 않는가. 시인의 자격이 있겠나 이런 생각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자문자답하곤 해요. 어차피 아직까지도 신자유주의시대라는 글로벌 시대, 오늘날 21세기 현재의 화두도 80대 20으로 만들어진 우리 사회의 구조를 뜯어고쳐서 중산층을 넓혀서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보자는 게 현재 우리나라 경제학자의 화두잖아요. 물론 지금은 내가 살아왔던 6, 7, 80년대와 같은 극한적인 상황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80대 20이라는 불건전한 구조적인 모순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잖아요. 그때의 이미지들, 가난, 밑바닥 삶이 주는 교훈을 간과해야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 때 그 당시 사회적 모순을 이 시대의 교훈적이라고 해도 좋고, 새로운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미지로 끌어올릴 수는 없는가 하고 요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깐 그 피로도가 사라지더라고요. 나도 왜 안 지겹겠어요. 내가 살아온 과거만 자꾸 되짚으면 내 자신도 방금 말했듯이 지겨워요. 하지만 그 속에서 아직도 우리 사회에 상존하고 있는 모순과 대립관계의 날카로운 각을 무디게 한다거나 융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래도 우리가 살아온 삶에서 엑기스를 뽑아가지고 그것을 이 시대의 좋은 영향이나 가치가 있는 의미로 만들면 나도 더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요.

 



시도 사회정치학적 상상력과 만나야지


이기인  선생님 시 「고사목」은 시로써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 하고 있다고 보여져요. 이전 방식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선생님은 여러 시 스타일을 고민하고 계시고, 이에 따라서 시 발표를 자제하고 계신 듯한데요. 먼 얘기일 수도 있고, 가까운 얘기일 수도 있는데 지금 시 쓰기 방법에서 시가 담고 있는 이야기, 궁극적으로 내 시는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다는 이러한 생각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선생님의 시는 처음부터 ‘극사실화’로 시작을 했다고 본다면, 궁극적으로 선생님께서 시를 통해 발언하고 싶은 부분들은 놓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후의 시의 변화, 궁극적으로 어떤 방향이 되길 희망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해요.


화산재에 묻혀버린 古代 폼페이의

무덤에서 발굴되는, 그 갖가지 형상의 시신을 닮았네

고사목들,

山頂의 절벽 끝에서 말라죽은 것들

절벽에 부딪친 생의 상승기류와 추락하는 삶의 하강기류가

서로 충돌하면서 빚어낸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숨이 끊어질 때

혹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의 주검의 몸짓을 그대로 간직한

저 나무 미라들

몸의 수분은 깨끗이 증발시키고

마치 뼈 같은 깡마른 섬유질만 남긴 것들

뿌리는, 박제가 되어 땅 속 깊이 묻혀 있어

쓰러지지 않는,

제 몸이 곧 나무의 관이고 무덤이 된

고사목들이

山頂의 절벽 끝에 서 있는 모습이-.


화산재가 덮쳐 올 때,

빵을 굽고 있었을까?

구두 수선, 또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을까?

침대에서 성교를 하고 있었을까?

도망치려는 모습을

기도하고 있는 모습들, 공포에 젖어

넋이 나간 모습들


그러나 절벽 아래도 투신하지는 못하고

박제가 된 뿌리로 악착같이 절벽을 움켜쥐고 서 있는


숨이 끊어질 때,

혹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주검의 몸짓이 고통스러울수록

노을 타오르는 山頂의 구름바다 위에서, 더욱 처절한 폐허의 美를 담아내는


몸은 살아 있지만, 영혼이 말라버린

저 지하도 시멘트 바닥의 사람들


―「고사목」 전문


김신용  이제는 내 시도 사회정치학적 상상력과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은 그런 생각도 하면서 사랑이라는 것의 의미,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삶이라는 의미, 또 우리가 예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자연과 인간관계가 주는 문화사적 의미… 이런 것들은 논리적으로 말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한 이미지들이 단편적으로 팍 팍 팍 떠올라요. 그래서 하나의 시론으로써 거기에 맞게끔 계획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그러한 것들은 일부러 던져버려요. 내 살아가는 궤적에서,『버려진 사람들』의 양동이라는 궤적의 이미지와 만나 그 이미지들의 연결이 상상력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도록 하고 싶어요. 의도된 플랜에 의해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계획해서 사회학적 상상력이나 세계관을 농축한 이론으로 시를 만드는 게 아니고 내 삶의 궤적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세계관이나 사회학적 상상력이 무르녹아 들어가도록 하고 싶어요. 그게 느낌에 좀 더 힘들지 싶어요.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시라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으면 읽는 나도 재미가 없더라고요.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다 보니깐 지금 약간 공백기가 와요. 지금 모색기예요. 사실 말로는 참 하기가 힘이 들어요.



상? 못 받아도 좋아 시, 줄이고 싶지 않아


이기인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속에 나온 에피소드, 정황, 풍경은 앞에 나온 시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김신용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상상력으로 시를 만든 게 아니고, 소설도 상상력으로 만든 게 아니잖아요. 내가 겪은 체험적 세계에서 길어오다 보니깐 그것이 어느 부분에 가서는 시에서 묘사한 부분과 똑같은 상황과 스토리에 놓일 때가 있더라고요.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이미 시에서 썼던 의미와 같이 가지고 갔어요. 그 부분을 처음에는 고치려고 하다가 일부러 안 고쳤어요.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겠나. 나는 하나도 겪지 않은 세계를 의도적으로 만든 게 없으니까. 내가 겪은 세계로부터 이미지를 추출했으니까. 결국 산문에 가서도 만나게 되더라고요. 그게 어떨 때는 일종의 창조적 능력의 한계가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요. 그 부분은 내가 충분히 수긍을 해요. 그래도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시집을 몇 번 내고 나니까 그런 부분이 없어지더라고요. 모르지, 지금도 또 소설을 쓰게 되면 내가 시에서 쓰던 이미지를 소설 속에서 또 차용해 올지. 안한다고 장담은 못해요. 그 부분이 너무 설득력이 있고 강한 액션을 지니고 있는 거라면 충분히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기인  『도장골 시편』, 『섬말 시편』과 같이 연작 형태의 시를 취하는 모티브가 있나요?

김신용  『도장골 시편』도 묶어놔서 그렇지 연작은 아니거든요. 하나하나가 독립된 것인데. 연작이라는 느낌으로 시를 써본 적은 없어요. 시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세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연작의 형태도 재미난 부분이 있겠지만 나는 아직 연작 형태의 개념을 갖고 시를 써본 적은 없어요.

이기인  『도장골 시편』에 붙어 있는 각 편의 시들이 다 독립적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김신용  다 독립적이에요. 흔히들 말하잖아요. 시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생명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 한 편 한 편이 개성 있게 살아 있어야 시집 전체가 생동감이 느껴지지, 그것이 비슷한 이미지로써 연관된다고만 한다면 지루해지잖아요. 똑같은 이미지의 반복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시 한 편 한 편이 가지고 있는 독립된 형태에 훼손을 주게 된다고. 재미가 없더라고. 시인한테는 연작형태가 손해더라고. 

이기인  근래에 낸 시도 그렇지만 선생님 시가 길어요.

김신용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안 줄여져요. 짧게 써놓으면 내 마음에 차지를 않아요. 좀 더 많은 이미지를 넣고 싶은데 짧게 만들어 놓으면 차포 떼고 팔다리 떨어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시가 길어지더라고요.

이기인  그래서 재밌습니다. 『도장골 시편』 연작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편편이 긴 편인데요.  선생님은 서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많은 게 아닌가 합니다.

김신용  맞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나는 시의 이미지만 탁 탁 탁 떠올려서 하나의 완결된 미를 가지는 것보다도 시 속에서 서사적 구조를 담아서 메시지를 담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에요. 시 한 편 한 편의 완결된 부분으로 보자면 손해 보는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좋다 이러면서 내 고집대로 밀고 나가고 있지요. 왜냐하면 한 편 한 편 시의 완결미만 추구하다 보면 정작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서사적 구조라든지 내 자신이 그 속에 담고 싶은 메시지가 죽으니까.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 보다 완결미의 훼손이 오더라도 내가 말하고 싶은 서사구조나 메시지가 살아있으면 읽는 나는 그게 더 좋아요. 그래서 시가 행간이 더 길어지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게 잘 안 고쳐져요.

이기인  고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것이 선생님 시의 큰 장점이고 맛이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김신용  그런데 우리나라 심사하고 그런 사람들 보면 다 길다, 길다 좀 줄여라 그러던데. 나는 상 같은 거 하나도 못 받아도 줄이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어요.

이기인  상 받으셨잖아요.

김신용  허허허. (웃음)

 



문단? 몰라? 난 ‘혼자서’ 해


이기인  문학은 혼자 하지만 사실 잠시 뒤돌아보면 다른 작가들과 함께 그 시대를 살고 있죠. 선생님에게 슬럼프가 오면 다른 누군가가 시대의 거울이 되어 주고, 그 시대의 발언을 작품으로 대신 해주고 있죠. 그래서 골방에서 혼자 쓰는 것이 시이고, 예술가의 삶 같지만 그 개인들이 그 시대에 있죠. 선생님과 함께 사는 동시대의 시인들, 예술가들 중에서 선생님과 가까운 동료 문인이랄까, 시인이랄까 이들의 작품 활동이나 창작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신용  내 자신이 과문해서 그런지 나는 우리나라 어떤 문학, 문인단체에 소속이 안 돼  있어요. 어떤 단체에도 가입해 본 적이 없고, 조그마한 에꼴이라든지 동인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문인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요. 그저 술 먹는 술친구는 있어도 내 자신이 모르는 유기적인 끈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내 자신이 실감해 본 적은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문인들과 친분을 맺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동시대적 상상력으로 공감한 부분을 서로 나누고 하는 것이 내 자신이 모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누구와 만나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면서 감정을 나눠본 적이 없어요. 문단에 친구라고 하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어요. 김상미 시인은 고향 부산 후배라서 좀 친하고, 몇몇을 빼면 없어요. 그래서 조금 전에 시인은 혼자서 글 쓰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기적인 관계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내 자신과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의식을 해서 유기적으로 서로 관계를 잇기 위해서 토의하고 토론하고 서로 시를 나누고 이렇게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나는 우리나라 문단이라는 개념도 없어요. 사실 공허해요. 문단이 어떤 곳이냐 이렇게 물으면 대답을 못해요. 왜냐하면 문단이라는 곳에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 글 쓰고 발표하면 이게 문단이라는 개념은 설정돼 있지만 구체적인 활동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으니까. 어떤 문인단체에라도 내 이름을 걸어본 적이 없으니까. 혼자서 떠돌아다니면서 혼자서 글 쓰는 그런 느낌에 고착돼 버렸어요. 나는 문인단체에 가입해 보고 싶은 적도 없고, 의도적으로 가본 적도 없고 그야말로 혼자서 글 쓰고 있어요. 



나도 감옥 벽, 낙서로 시를 썼지


이기인  다른 시인의 작품도 많이 보시죠.

김신용  물론 보다시피 여기 문예지들 많이 오잖아요. 여기서 이렇게 훑어보는 거지. 의도적으로 만나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한 가지 주제로 시인 둘이서 글을 쓰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여행 가본 적도 없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진 찍어본 적도 없어요. 모임이나 이런 데 가지를 않아요. 미당 문학상 후보에 올라 시상식 오라고 초청이 와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작년에 중앙일보에서 고창에 한 번 오라고 차를 우리 집 앞에까지 보냈더라고. 그래서 한번 따라 내려가 봤다니까. 따라 내려가다가 시 한편을 건졌지. 「바위의 첼로」라는 시야. 선운사 앞에 보니깐 바위 위에 나무가 자라는데 바위 색깔하고 똑같아. 그 이미지가 하도 가슴속에 박혀가지고 이번에 《시에》에 발표했는데 그 소득은 하나 있었어요.

이기인  선생님은 2000년대 젊은 시인들과 함께 이야기되면서 ‘소수자의 시 쓰기’라고 측면에서 부각되기도 하였는데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쓰는 방식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보고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김신용  그래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보면, 그 젊은 사람들이 살아온 세계가 그런 세계예요. 그러니까 그런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젊은이들의 시세계를 폄하하거나 가르칠 생각은 전혀 없고. 나도 한때 감옥에 있을 때는 감옥 벽에 있는 욕설, 낙서 이런 것으로 시를 썼어요. 밑바닥 세계의 언어로도 시가 돼요. 그것과 똑같이 젊은 사람들도 그렇게 시를 쓰는 거예요. 자꾸만 가르치려거나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노동? 지게꾼 품팔이라고 격하시킬 수 없잖아


이기인  선생님 초기 시에 대해서 노동시로 이야기되지 않고 도시빈민시라고 해서 노동시의 범주를 벗어나 있지 않은가 하고 얘기된 적이 있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김신용  나도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것은 굉장히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도시빈민은 노동이라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어요. 도시빈민은 노동 안 하면 굶어죽어요. 길바닥에 노점을 해도 다 노동이라고. 그 사람들은 몸을 팔지 않으면 못 살아가요. 내가 몸을 판다는 것은 곡괭이를 지고 공사판에 가서 일하는 것도 다 노동이에요. 그래서 품 파는 거라고 하잖아요. 노동이라는 개념이 도시빈민의 삶속에 자연스럽게 다 각인돼 있다고요. 노동이라는 개념은 공장노동자라고 따로 떼서는 안 돼요. 노동이라는 개념은 밑바닥 세계, 빈민들의 삶이 다 붙박여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로 따로 뗄 수 없어요. 살아가는 생활의 형태만 다를 뿐이지 노동이에요. 노동을 안 하면 못살아요. 나는 노동시라고 하는 장르가 따로 있다고 생각 안 했어요. 자연적으로 노동이라는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80년대는 의식화된 노동만 노동이라고 생각했잖아요. 의식화된 노동 이전에 노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잖아요. 의식화된 노동만 갑자기 튀어나왔지 의식화된 노동의 저변부를 이루는 기초가 되는 노동의 세계는 아무도 안 건드리고 있었잖아요. 밑바닥 삶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다 허깨비가 되든지 사라져요. 노동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삶속에 깊이 박혀 있는 옹이와 같은 것이어서 그 사람의 삶을 얘기하면 노동이라는 것은 자연히 형상화되는 거예요. 지게꾼이 지게지고 나가면 품팔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노동이잖아요. 그걸 지게꾼 품팔이라고만 격하시킬 수 없잖아요. 나는 한 번도 노동이라는 것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얘기하면 그 속에 같이 노동이라는 의미가 같이 존재하는 거예요. 노동문학이라고 따로 떼어놓고 하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기인  비평가들은 선생님이 초기에 낸 시집을 포함하여 두 번째 시집까지, 선생님은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노동문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선생님의 직업과 신분은 그들이 얘기하는 임노동의 관계조차도 안 되는, 그들보다도 더 힘든 위치에 있지 않았는가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80년대 의식화된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노동시에 대한 노동의 개념정립으로 인하여 선생님의 시의 규명이 늦춰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신용  옛날에 우리나라 국방부 군사 시설로 노동을 하러 갔을 때 거기 보도블록을 깔았어요. 거기는 신분이 확실하지 않는 사람은 일하러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때 난 주민등록증도 없어서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일하고 나오고 그랬어요. 일단 안에 들어가면 신분증이 없어도 되는데 정문으로 들어갈 때는 신분증 조사를 해요. 그 때 들어갔을 때 그 안에서 파업이 일어났는데 현대건설, 대우건설 중장비 기사들이 ─ 회사에 소속된,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파업을 일으켰는데 그 사람들이 파업을 하니깐 하루하루 품 팔아야 되는 우리가 다 놀아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중장비로 모래라든지 벽돌이라든지 건축자재를 제공해줘야 우리가 일을 하는데, 그 사람들이 파업을 하니깐 우리가 며칠 동안 손을 놓게 되더라고. 그러고 나서 파업으로 그 사람들 인건비가 올라 파업을 일으킨 자기들에겐 이익이 갔는데, 우리만 며칠 동안 일당을 한 푼도 못 버는 얄궂은 현상이 나타나더라고. 그때 노동조합, 노동단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회사에 소속돼 있는 임노동관계라는 것이 많이 부럽잖아요. 그들은 소속감이 있고 우리는 그것이 없는 잡부잖아요. 그 때부터 잡부라는 의미가 도리어 내게 더 진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아무런 소속감도 없이 품 파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더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의 삶을 시화해야 되겠다 해서 쓴 시들이에요. 나는 그 소속에 몸 담아본 적이 없었고 또 파업을 일으킬 수 있는 임노동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이미지로 시를 쓴다면 거짓말하는 거고 그걸 써놓고 나면 나 자신이 얼마나 공허하겠어요? 그런 시를 못 쓰겠더라고. 그래서 나는 고집스럽게 밑바닥 삶 가난한 삶을 이야기하면 노동이라는 이미지는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거니깐. 그렇게 쓴 시예요.

 


아파할 수 있는 눈을 갖자고 쓴 시가「환상통」


이기인  과거 지게꾼이기도 했던 선생님의 시상은 현재도 노숙자들에게도 눈을 못 떼는데 그러한 장면을 『환상통』이라는 시집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문재 시인의 말을 인용하자면 “환상통은 뿌리 뽑힌 자들이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는 꿈에 대한 변호이자 저들을 지하도 바닥으로 내몬 세계화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양동에서 보고 들은 것들이 시화되었다고 하자면 선생님은 『환상통』이라는 시집을 통해서 세계화의 바람 이것을 통해서 옳지 않은 불편한 이들의 삶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선생님 시에서는 어떤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 화법에 의하면 「바람의 입」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지금 사회를 살면서 불편한 시선들이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시의 역할과 그리고 선생님이 느끼는 이 사회의 불편함은 무엇입니까.

김신용  사실 『환상통』 시집은 아이엠에프 이후에 씌어진 거예요. 나는 아이엠에프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 사실 밑바닥 사람들에게는 아이엠에프라는 개념이 없잖아요. 맨 날 그 삶이 아이엠에프인데. 그런데 그게 터지자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그야말로 인간낙엽. 마르께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주제가 인간낙엽이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이 낙엽처럼 휩쓸려 다니는 모습을 ‘인간낙엽’이라고 그랬잖아요. 아이엠에프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전대미문의 사태가 터지자 우리나라 경제 기반이 얼마나 얕았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겠어요. 그 때 보면 또다시 서울역이고 공원이고 다 노숙자들이었잖아요.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뤘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많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줬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에서 아이엠에프의 사태를 아주 극명하게 고발한다거나 표현한 시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참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가 의문도 가졌습니다. 「환상통」이라는 시도 내 자신 지게꾼의 삶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시에 보면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 발자국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린다”는 시구가 있잖아요. 우리나라가 아이엠에프 이후에 얼마나 기반이 허약하면 나이 팔십 되신 할머니들이 리어카에다가 재활용 폐품을 싣고 그걸 고물상에 팔고 또 재활용품을 줍기 위해 다니시겠어요? 그러한 삶은 건강한 삶이 못되잖아요. 그 말을 하기 위해서 「환상통」이라는 시를 쓴 거예요. 내 자신이 지게꾼 출신이고 하다 보니깐 내 이야기인 줄 그러한 이미지에만 자꾸 초점을 맞추는데, 사실은 아이엠에프 이후에 건강하지 못한 사회상을 보여주기 위해 쓴 시가 「환상통」이예요. 그래서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그 가지 사이로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가는 거예요.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이 아프게 보이니까 가지마저 아프게 보이는 거예요. 그 이미지가 그런 건데, 지게꾼 삶과 자꾸만 연결시킨다고. 그 때의 아픈 삶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데,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니깐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못해도 아파할 수 있는 눈을 가지자는 느낌에서 쓴 시가「환상통」이예요. 아이엠에프 사태 이후 우리 사회의 취약한 면이 환부처럼 드러났는데 그것은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모습들이 똑같이 재연된 것이더라고요. 글로벌 시대에 나라의 많은 한탕주의 외국 투자자들을 내가 비판하고 있듯이 우리나라의 많은 모습들을 그렇게 담고 싶었어요. 『환상통』을 조그만 더 주의깊게 읽어보면 아이엠에프라는 말을 쓰지 않았어도 아이엠에프 이후의 우리 사회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하지만 그런 부분을 건드리고 있는 평론가를 본 적이 없어요. 알려진 세계인 내 삶만 도드라지게 할 뿐 조금만 더 주의깊게 그 시집을 읽어 보면 아이엠에프 이후에 우리 사회 곳곳에 내재돼 있던 아픔들이 다 몽돌 뭉그러지듯이 몽글몽글 맺혀 있는데 말이죠. 조금 있으면 눈 밝은 평론가가 나올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섭섭하기도 하고 그래요.  

 

 

이기인  「환상통」은 시인의 실재와 현실적 아픔을 이야기하고자 했는데, 그 아픔을 인문사회과학적으로 이를테면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하는 ‘환상통’ 쯤으로 이해하고 독해하려한 접근방식이 공허하네요.

김신용  그런 사람들은 그 책을 읽고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이지만, 나는 그 책을 한 번도 안 읽어봤어요.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요. 나는 의학적 용어로만 ‘환상통’을 접근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평론가들은 내 지게 뒤에 아픔으로만 접근했는데 그게 아니에요. 조금만 주의깊게 읽으면 당장 나타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를 왜 비유시켰겠어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쓴 시가 바로 「환상통」이에요.

 


‘몸’과 ‘집’의 이미지? … 내 등짝 하나 누일 공간이 없었지


이기인  선생님 문학세계에서 최근에 낸 시집들을 중심으로 몇 개의 키워드를 뽑아봤습니다. 개인적으로 뽑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대답해주실지 궁금한데요. 그 중의 하나가 ‘몸’입니다. 초기 시에서 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고 계시구나 생각했었고, 후기로 넘어가면서 내 몸을 뉘고 보호해줄 수 있는 ‘집’에 대해서 말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몸’과 ‘집’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생각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김신용  사실은 90년대 이후에 우리 시단에 ‘몸’이라는 이미지가 이론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나는 몸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시를 써 왔었잖아요. 왜냐하면 나는 철학적 접근이나 이론적 접근으로써 몸이라는 이미지를 쓴 게 아니고,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존재를 표현하자면 몸이라는 것 밖에 없잖아요. 몸을 이야기해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사회학적 의미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 사람의 내면이나 의식만 가지고는 안 되는 부분이잖아요. 왜냐하면 배고픔이라든지 즉, 나를 비유해서 말하면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내 피를 팔아서 밥을 한 끼 사먹고 다시 피를 만든다고요. 이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채혈의 의미를 만들지 못하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그렇게 나는 구체적인 삶에 의해서 몸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쓴 거예요. ‘집’이라는 이미지는 그동안 내 등짝 하나 누일 공간이 없었어요. 16세 이후 지금까지도 떠돌고 있잖아요. 이곳도 내 집이 아니니깐 셋방이니깐. 자연히 빈 집이라는 이미지가 굉장히 가슴에 와 닿지. 누가 버리고 가면 내가 저 빈 집에 들어가 살 수 있을 텐데, 저 빈 집 하나도 내 소유가 아니니까. 집이라는 이미지, 몸 하나 담을 광과 같은 방이라도 내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에서 집이라는 이미지도 시속에 많이 등장하지 않는가 생각돼요.

 



무수한 파지를 내면서 ‘쓴다’


이기인  선생님은 어제의 시보다도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요. 오늘 보니깐 시도 볼펜으로 A4 용지에 한 자 한 자 쓰시고 계신데. 어제보다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하시고 계신 게 있을 거 같아요. 최근에는 시 발표를 자제하고 계시지만, 이전에 시 쓴 편수를 봐도 엄청난 양이고요.

김신용  내 자신이 자꾸만 자극을 주기 위해, ‘예술가는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존재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욕망 욕구가 사라지면 그 때부터 늙는다’ 이렇게 생각해요. 사실 나는 내 나이도 의식을 안 하려고 해요. 자꾸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데 나이가 갭이 된다면 예술가로서의 생명이 끝이 난다고 생각해요. 어떨 때는 자다가도 시구가 떠오르기도 하고 시 생각을 하다 보면 길을 걷다가 내가 어떻게 걷는지 멍청히 잊어버릴 정도가 있기도 하고 그래요. 내가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되겠다 그게 없고 항상 시를 쓰고 발표하고 나면 그것이 늘 모자란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거보다는 좀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내내 들어요. 아마 그것이 좀 더 다른 시를 쓰게 하는 힘이 아닐까. 백지에 무수한 파지를 내면서 한 자 한 자 완성해놓고 나서 그게 마음에 들어서 발표를 하면 아…… 또 맘에 안 들어. 더 좋은 강렬한 이미지를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또 들고 그래요. 그래서 다음 시를 쓰게 되는 계기가 아닐까 해요. 

이기인  중학생처럼, 고등학생처럼 빼곡하게 적어놓으신 시를 보니깐 공부하듯이 쓰는 거 같아요.

김신용  나는 늘 내 자신이 모자란다고 생각해요. 학교도 중학교 3학년까지 밖에 못 배웠고 그 다음부터 객지로 떠돌아다니며 혼자서 독학을 해서 공부를 했으니까. 아무리 책을 읽어도 배움이 짧다 더 배워야 한다 하는 느낌이 강박관념처럼 늘 뒤통수에 매달려 있어요. 그래서 앉으면 책을 읽게 되고 신문지 쪼가리라도 보게 되고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대사 한마디에서 영감 같은 것을 얻고 막 그래요. 사실은 내가 별로 유식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맨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이라도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배우는 입장에 있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질 못해요. 내 자신도 배워야 할 게 많은데 내가 뭐 잘났다고 남을 가르치나 남 앞에 나서서 말하기가 어떨 때는 용기가 안 나고 그래요. 어떤 때는 어느 시인이 대학에 나와서 강의 좀 해 달라 하는데, 그것도 간곡히 사양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나는 학생들에게 설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그랬는데,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두 군데 붙들려 가서 강의를 해보기도 했는데 하고 나서 돌아서면 부끄럽고 그렇죠. 허허허.(웃음)

이기인  시에 대해 학생들에게 주로 어떤 점을 강조해서 얘기하셨나요.

김신용  나는 주로 얘기하면 내 ‘체험적 시론’이라고 할까. 내가 살아온 삶 속에서 시를 썼듯이 살아온 삶 속에서 시가 어떻게 씌어지는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면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그야말로 한 시인의 생생한, 구체적인 시 창작 방법을 얘기해주면 학교에서 못 배운 얘기여서 그런지 좋아하더라고요.



작살난 인생 시나 쓰고 죽자,


이기인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궁금해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거려 봤는데요. 다양한 직업, 다양한 삶을 살아오셨어요. 두려움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런저런 체험들을 다 하면 그게 다 자산이면서도 그것 때문에 또 다른 두려움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또 그와 같은 다양한 체험들은 선생님에게는 또 하나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도 같네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시를 보고 시에 대해서 평가하고 느껴야 하는데, 김신용이라는 개인의 극적인 삶을 관념화해서 선생님을 보다 극적 인물로 몰아서 평가할 것 같아요. 그동안 선생님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은 없었는지요.

김신용  그런 얘기들은 들어본 적도 없고, 나는 내가 왜 지금까지 시를 붙들고 쓰는가에 대한 답을 마음속에서 찾곤 해요. 나는 옛날에 피도 팔아 빈혈증 환자가 되고, 또 팔 피도 없어서 내 정관까지 두 번이나 잘라 팔았다고요. 그 때가 스물네 살 때에요. 팔 백 원에. 그 때 팔 백 원이면 남대문 시장의 사흘간 밥값이에요. 그 때 백반 한 상에 팔 십 원인가 할 때예요. 팔 백 원이면 밥이 열 그릇이에요. 열 그릇이면 사흘을 산다니까. 그 때 정관 두 번 자른 이후로 난 완전히 텅 빈 인간이 돼 버렸다고. 이제 내 몸에 내가 존재해야 할 아무런 건더기가 없더라고요. 그렇게 공허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어차피 우리말로 작살난 인간, 인생 까짓 거 내 쓰고 싶은 시나 마음대로 쓰고 죽자 이런 생각에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말했듯이 지게 지고 돈 한 푼 벌려면 그 돈 떨어질 때까지 일을 안 나가는 거예요. 왜? 돈을 모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내가 어떤 여자와 결혼할 것도 아니고. 사실 정관수술 두 번이나 하고 나서 빈 몸, 텅 빈 인간이 되고 난 이후에 어떤 여자에게도 같이 살자, 연애하자고 뒤따라 다녀본 적이 없어요. 물론 양동에 가면 여자들 많지. 아무하고도 연애를 안 했어요. 그 때부터 어차피 작살난 인생 시나 쓰고 죽자, 아마 그 힘이 나를 버텨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문득문득 소스라치곤 하지. 그 때 수술대 위에 누웠을 때 고환 밑으로 사타구니 밑으로 메스가 서걱거리는 소리, 그 가위질 소리, 정관을 자를 때 그 따끔하던 순간, 백열등 같은 것, 의사의 모습 이런 것들…… 두 번째 수술할 때 보니깐 옛날에 수술한 자국이 있거든. “이 친구 옛날에 했는데 또 하네”라고 말하던 의사의 번들거리는, 왜냐하면 의사는 날 수술해줌으로써 정부에서 보조금을 타니깐. 그리고 묶은 자리 또 묶고 그것이 일종의 내 머릿속에 비수처럼 꽂혀 있다고. 사회에서 돈 모으면 뭐하고 기술 배우면 뭐하느냐 하는 절망감에서부터 시작해서 뭔가 이뤄놓아야 할 이유가 없더라고. 어차피 작살난 인생이니까 시나 쓰다 죽자. 두 번 세 번 재론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고 책을 읽게 하는 나를 버티게 하는 힘 같아요. 하기 좋은 말로 하자면 일종의 절망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당신에게 내 몸을 잠시 빌려줄 수는 있어도 나를 줄 수는 없어요.”


이기인  선생님이 쓰신 어느 글에서 고다르 감독의 「비브르 사 비」에서 창녀의 독백을 인용하고, 양동에서의 삶을 회고하기도 하셨는데요. 영화도 많이 보실 것 같아요. 

김신용  그 영화를 우연히 보고 산문을 썼는데, 지금 그 산문은 버리고 산문 속의 일부를 가지고 긴 에세이를 쓰고 있어요. 「비브르 사 비」는 파리 뒷골목의 창녀들에 관한 영화인데, 그들이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게 너무나 내가 몸담고 있는 양동의 창녀와는 변별이 되더라고. 그 창녀는 자기의식이 뚜렷해. 내가 잠깐 읽어드릴게. 내가 딱 써놓았어. 거기 보면 “새를 아세요. 새는 겉과 속을 가진 동물이죠. 새의 깃털 속에는 몸이 있고 그 몸속에는 새의 영혼이 있죠. 나의 깃털…… 당신이 거리에서 나를 만나 4천 프랑에 나를 산다 해도 그건 깃털 속의 내 몸을 잠시 빌려갈 뿐이에요. 내 자신을 타인에게 빌려줄 수는 있어도 줄 수는 없어요.” 이 말 한 마디가 너무나 창녀로서의 자아의식에 딱 차 있는, 자기 철학까지 갖춰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내가 몸담고 있는 양동의 여자들은 다 못나고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다 보니까 다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해요. 자신이 창녀라는 사실을 내세우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자신이 창녀라는 얼굴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양동의 어둠 뒤로 숨곤 해요. 너무 그 두 가지가 대별되니깐 내가 충격을 느꼈다고. 그래서 떠오르는 내 마음속의 상념을 그렇게 적은 거예요. “당신에게 내 몸을 잠시 빌려줄 수는 있어도 나를 줄 수는 없어요.”  자기 확신에 딱 차 있는 발언이 내 자신에게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 자신도 양동에 살면서 그런 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충격을 느꼈죠. 결국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은 사회적 폭력, 남성 폭력에 의해 어이없이 희생되어 가지만 그래도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뚜렷한 자기의식이 너무 부럽더라고. 그래서 기억에 남기려고 산문에다가 인용을 했어요.

이기인  산문의 이야기 속에서 40대의 창녀가 신경안정제를 많이 복용한 어느 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죠.

김신용  그 얘기가 사실인데, 내가 처음 양동에 발을 디뎠을 때 제일 먼저 목격한 죽음이에요. 그 창녀의 신랑이 '소사박'이라고, 별명이 '소사박'인데 애까지 둘 있는 지게꾼이에요. 을지로 같은 동네에 살았는데, 아무리 남편이 지게꾼 일을 해도 못 먹고 사니깐 여자는 남편이 일을 나가면 낮에 몰래몰래 몸을 팔러 가곤 했어요. 맨 정신에 몸을 팔 수 없으니까 신경안정제 러미날인가를 먹으면 정신을 취하게 몽롱하게 해줘요. 양동 창녀들은 그런 약을 많이 먹어요. 그 약이 내성이 있어 가지고 처음에는 두 알 세 알만 먹어도 몽롱함 속에 잠겨들 수 있는데 자꾸만 반복되다 보면 열 알 먹어야 되고 스무 알 먹어야 되고 나중에는 좀 더 빨리 취하기 위해서 술과 같이 약을 복용해요. 그러면 나중에 심장마비도 오고 경련도 오고 그 여자처럼 갑자기 돌연사를 해요. 양동에 발 디디고 최초로 본 죽음인데, 너무나 비극적으로 느낀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여자가 죽었을 때 지게꾼은 장례를 치를 힘이, 돈이 없으니까 얘를 데리고 저 뒷골목에 숨어 있고 그 여자의 시신을 바깥에다가 가마니 위에 끄집어 내놓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경찰에 신고해요. 여기 행려병자 하나가 사망했다. 왜냐하면 길바닥에 내놓아야 행려병자 사망확인증을 달아가지고 국가에서 장례를 치러준다고. 대학병원 시체처리실로 가져가거나 화장을 해서 무연고로 뿌리거나 하는데, 행려병자 사망확인증을 받기 위해서 방안에서 죽은 시체를 일부러 바깥에다가 내놓는 거예요. 그게 양동 특유의 장례법이에요. 양동에서 죽으면 다 그렇게 한다고. 그래서 경찰에서 앰뷸런스 불러와 사진 찍고 신원 확인해가지고 아는 사람 없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여자다 이러면 무연고 시체처리 돼요. 그 모습을 내가 양동바닥에서 보고 나도 죽으면 저렇게 안 되겠나 이 생각부터 들더라고. 그러고 나서 무수하게 죽어나간 사람들을 내가 봤으니까. 청계천이고 을지로고 이런 데서 떠돌아다니고 노동하다 몸도 마음도 골병들고 술만 먹고 알콜중독사하는 사람도 있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그 죽음 가운데 하나예요. 그래서 그걸 내가 시로 쓴 거예요.



몸담고 있는 세계가 자신의 문학의 세계


이기인  선생님이 시를 쓰는 궤적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선생님과 똑같은 길을 통해서 시를 쓸 수도 있고 또는 다른 길을 걸어와서 시를 쓸 수도 있고 한데요. 시에 대한 열망은 그 출발이 틀리더라도 같을 수 있습니다. 문학을 하겠다고 하는 이들에게 혹은 후배 시인들에게 한마디해 주시죠.

김신용  내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자신이 서 있는 곳 자신이 있는 곳이 자신의 문학의 보고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문학은 먼 곳에, 하늘을 쳐다보면 있는 곳에 있는 게 아니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 그곳이 바로 자신의 문학의 세계라고. 그러니까 자신이 어느 곳에 있든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도, 기피할 필요도 없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곳 자신이 가장 익숙하게 체험화돼 있는, 육질화돼 있는 그러한 세계가 바로 표현해야 될 문학의 세계라고 나는 부끄럽지만 그 말을 해주고 싶어요.



 “비 오는 날의 오후는 너무 쓸쓸해. 이 영원의 한 조각을 가지고 지금 뭘 하지?”


이기인  선생님 나이는 잊고 싶다고 하셨는데, 과거 삶에 대한 반성이랄까 되돌리고 싶거나 후회하는 일이 있을 거 같아요. 선생님이 이야기 중간에 밝히셨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 이런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난 시간을 떠올릴 때 반성과 함께 다시 찾아오는 생각들이 있을 것 같아요.

김신용  사실은 우리 나이라든가 육십이 넘으면 과거는 점점 더 다가오고 미래는 멀어지는 거잖아요. 내가 얼마 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흑백영화를 봤는데, “지금 몇 시지?” “오후 세시지.” “비 오는 날의 오후는 너무 쓸쓸해. 이 영원의 한 조각을 가지고 지금 뭘 하지?” 이런 표현이 있더라고요. 테네시 윌리암스 희곡인데, 그 표현 “영원의 한 조각을 가지고 뭘 하지?” 하는 대사 한 마디가 참 가슴 찌릿하더라고요. 너무 시적이잖아요. 나이 먹으면 과거는 더 자주 회상되고, 미래는 멀어져가는 나이가 우리 나이인데, 그것을 일종의 백일몽을 꾸듯 과거를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과거 속에서 우리는 뭘 발견해야 하는가. 사실은 서구적 사고로 생각하면 과거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잖아요. 동양적 세계관으로서는 과거는 미래를 잇는 끈이잖아요. 과거는 일종의 거울이잖아요. 현재라는 얼굴을 거울에 비춰서 과거라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그런 유기적 관계 개념이지요. 서구적 시간개념은 토막 나 있지만, 동양적 시간개념은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고요. 그렇다면 과거라는 것이 흘러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광맥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그 속에 터널을 뚫고 들어가서 어떤 금맥을 찾을 것인가. 이것은 개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깐 터널을 파고 들어가서 힘들게 갱 속에서 채광작업을 하는 것이 힘들지는 몰라도 번쩍이는 광맥을 찾으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요. 지하 몇 천 미터 뚫고 들어가는 것이 바로 채광의 기술이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과거라는 것이 바로 동양적 시간개념으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면, 과거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광맥이라고 생각하면, 내 자신의 과거에서 어떤 새로운 에너지를 추출해낼 수 있다면, 시적 에너지 내지 삶의 에너지를 추출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내게 그런 힘이 존재한다면 아마 나는 행복한 시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부랑’ 세계관에 의해서 떠도는 사람은 부럽지


이기인  선생님 시에 언제부턴가 아내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저는 선생님 시의 독자로서 생각해도 시인은 외로울 것이다 생각하고 있다가 아내가 등장하는 시를 발견하게 되면 아, 선생님은 지금쯤 행복해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초기 시에서 발견되었던 배고픔이라든지 허기라든지 이런 것들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최근 시를 보면 선생님 행복해하는 모습도 보이고요. 선생님 시에서 가족 얘기랄까 좀 더 따뜻하게 묘사되는 주인공이 좀 더 나왔으면 좋겠어요. 오늘 와서 보니깐 사모님이 계신데. 가정을 이루게 된 사연들도 궁금해요. 사실은 그게 시의 변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김신용  사실 내가 아내에 대해서 시로써 쓴 게「아내의 재봉틀」, 「민달팽이」하고 몇 편 안 되는데요. 나는 집사람 생각하면 맨날 죄인이죠. 얘도 하나 못 낳고 생활력도 별로 없고 이랬는데 지금까지 내 곁에 있어주니깐 안쓰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 감정의 복합성이 나도 모르게 시로 한두 편씩 만들어지지 않았나 그래요. 이 얘기만 나오면 부끄럽고 진땀이 나서 말을 잘 안 해요. (웃음)

이기인  선생님 시가 보다 따뜻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신용  이 말만 나오면 곤혹스러워요. 내가 죄인이 된 것 같고, 죄스럽기도 하고 그래요.

이기인  다른 평자들은 선생님의 시를 부랑, ‘떠도는 부랑의 시다’라고 하는데요. 말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뜻을 찾아봤는데, 부랑(浮浪)은 일정하게 사는 것과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선생님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건 맞는데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요. (웃음)

김신용  그래요. 내 부랑은 살기 위해서 한 끼 밥을 구하기 위해서 늘 떠돌아다닌 거였어요. 할 짓이 없어서 막 떠돌아다니며 동가식서가숙한 게 아니고 한마디로 살아 있기 위해 떠돌아다닌 거예요. 그야말로 한 끼 밥을 찾아서 떠돌았어요. 오늘 부산 가 있으면 내일은 서울 가 있고 언제는 대구 가 있고 안동 가 있고 이렇게 막 떠돌아다닌 거예요. 어떨 땐 완행열차를 무임승차해서 저 곳에 내리면 어딘가에 밥 한 끼 있겠지 하면서 떠돌았어요. 그러다 내가 노동을 해서 내 자신이 밥과 등짝 붙일 방을 구할 수 있을 때 돼서는 일을 찾아서 품삯을 찾아서 떠돌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깐 내가 말하는 부랑은 할 일 없이 떠도는 게 아니라 그렇게 떠돌았어요. 그게 내 시 쓰는 데 더한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게 내 자신의 삶의 모습이었으니까. 거기서 더 진한 얘기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사실은 히피처럼 자신의 세계관이나 철학에 의해서 떠도는 사람들은 참 부러워요. 지금도 그런 책을 읽으면. 그렇잖아요.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에 의해서 떠도는 사람은 참 부럽다고. 자신의 의지대로 떠도는 거잖아요. 하지만 한 끼 밥을 위해, 살기 위해 떠도는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떠도는 것이 아니고 밥이 있다고 느끼는 곳을 찾아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옮겨가는 것이에요. 더 큰 비극적 정서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해요.

이기인  선생님은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노동력을 어둠의 가면처럼 쓰고 양동이라는 공간에서 팔 수 밖에 없었다면, ‘현재’인 지금은, 어떤 시에서 그렇게 쓰신 거 같은데 ‘아르바이트 하듯이’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와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은가요?

김신용  불과 몇 년 전까지 5년 동안 수의를 지었잖아요. 제가 수의를 재단하면서 허리가 비뚤어져 한 달 동안 허리를 못 펴고 기어 다닐 정도였어요. 맨날 허리를 굽혀 재단하다 보니까 허리뼈가 굽어서 허리병에 걸린 거예요. 그렇게 노동을 해가지고 돈을 조금 모아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거예요. 지금은 텃밭에다가 최소한도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푸성귀를 심고 반찬거리 다 심고 쌀만 있으면 될 정도로 살고 있어요. 지금 모여 있는 이 돈 떨어지면 또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소설을 쓰든 뭔가 돈 되는 것을 해야겠지. 하지만 죽을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아까도 말했듯 텅 빈 인간인데 한 번 마지막 승부 걸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또 이곳에 얼마나 오래 살 지 아무도 모르지. 텃밭도 넓고 이곳이 친척집이고 그러니깐 이곳에서 조그마한 전세 값만 주고 죽을 때까지 살아라 해서 마음 놓고 살 수는 있어요. 그래서 몇 년간 마음 놓고 더 살 수 있어요. 또 어디서 빈집이 좋은데 있다고 하면 가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내일을 나는 생각 안 하니깐. 어차피 내 집이 아니라 비워줘야 할 형편이 언제 올지 모르죠.



시인이라는 얼굴이 내 마지막 얼굴이기를


이기인  질문을 하나 더 드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죠. 선생님은 시 쓰는 일을 「드므가 있는 풍경」이라는 시 속에서 얼굴을 ‘비쳐본다’로 표현하신 바가 있는데, 선생님에게 있어 시 쓰기는 어떤 의미로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인지요.


드므는 

처마 밑에 빗물이 고이도록 놓아둔, 넓적하게 생긴 독.

화마(火魔)가 찾아왔다가 그 독에 비친 자신의 흉측하게 생긴 얼굴을 보고는

제풀에 놀라 도망친다는, 옛날의 화재 경보 장치인 그 독.


비가 내리면

처마 끝에서 떨어진 빗물로, 그 독에는 맑은 물이 고인다

그 물거울에는

하늘의 구름도 제 얼굴을 비쳐보고 가고, 새들도 날아와 앉아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거울을 쪼아보다가

부서지는 물의 얕은 파문에 놀라 날아갔다가 다시 내려와 앉는,

담장 너머의 나무들도 기웃거리고 있는

그 독,


비쳐진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얼굴로 맑게 떠오르는 그 물거울-.


지금 

그 드므에 내 얼굴을 비쳐보면 어떨까?

썩은 물웅덩이 같은, 생선 뼈다귀 하나 없는 늙은 사해(死海) 같은 얼굴을 보고

나도 놀라 도망칠까?


내 의식의

위장병이며 소화불량인, 그 정신의 유문 협착증세가 만들어낸

곰팡이 핀 빵이거나

노상방뇨의 오줌 자국 같은 얼굴들-.


지금 내 시 쓰는 일은

그렇게 드므에 얼굴을 비쳐보는 일

언제나 가시처럼 못 박혀오던 그 맑은 물거울에 몸 던져, 스스로 피 흘리는

일 


그것 또한 내 생의 돌연변이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공황장애증이라고 해도-.


―「드므가 있는 풍경」전문


김신용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지요. 소박하게 시 쓰기는 내 자신의 얼굴, 즉 얼굴이라는 내 자신의 이미지를 비쳐주는 존재의 거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이미지를 ‘드므’ (처마 밑에 빗물이 고이도록 놓아둔, 넓적하게 생긴 독_편집자)라는 장치를 가지고 어떤 시에 표현했어요. 내 얼굴이 하도 여러 개라 아까 무수한 직업을 거쳤다고 했는데 지금도 하나하나의 얼굴이 존재한다면 무수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을 거잖아요. 사실 시인이라는 얼굴이 내 마지막 얼굴이기를 바랐고 시인이라는 얼굴이 그 모든 얼굴의 합계였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혼자 생각해보곤 해요. 그런 의미에서 시에서 그동안의 얼굴이 추악했던지, 비천했던지, 더럽던지 간에 내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든지 간에 내 자신을 비추는 등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시속에 내 자신의 현재 모습이라든지 나도 모르는 숨겨진 무의식도 드러났을 수도 있고 숨기고 싶은 부분까지 드러나게 되고 그러다보니깐 어떤 ‘드므’라는 이미지하고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받곤 해요. 방금 말했듯이 시라는 것이 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솔직해지고 내 자신의 얼굴을 가감 없이 한마디로 분칠하지 않고 꾸미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장치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기인  오랜 시간 이야기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소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어서 더 유익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독자나 시인들도 선생님 시에 대한 자세한 이해를 돕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종 다른 지면을 통해서도 선생님 사시는 모습과 그에 얽힌 문학 얘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신용  별로 잘 나지도 못한 사람 집에 와서 수고가 많습니다. 저도 유익한 시간이 되어 고맙습니다.《문장 웹진/2008년 7월호》




김신용  194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천상병문학상,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개같은 날들의 기록』『몽유 속을 걷다』『버려진 사람들』『환상통』『도장골 시편』등이 있다. 소설 작품으로는 『달은 어디에 있나』(원제: 고백)『기계 앵무새』등이 있다.


이기인  1967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ㅎ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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