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의 어려움

 

포기의 어려움

– 남미 여행기(4)



                                      

권리


 


칠레 북부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San Pedro de Atacama)는 인구 50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볼리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그곳과는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 마을 전체가 나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새하얀 건물은 이곳의 명물인 산 페드로 교회(Iglesia San Pedro)다.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단지 가죽 끈, 어도비 벽돌, 선인장, 진흙 등으로 지어진 이것은 내가 본 교회 중 가장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낮에는 독특한 레스토랑과 바에서 맛있는 스파게티 향이 풍긴다. 그리고 별빛을 가려 버릴 정도로 눈부시게 빛나는 달이 까만 밤하늘에 떠 있다. 코카 차를 한 손에 든 채 해먹 위에 매달려 하늘을 보는 외로운 여행자를 상상해 보라. 코카 차가 식어도 오리온의 전투는 계속된다.

 

 

이곳의 여행자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마을 주위를 떠돈다. 나 역시 5시간 반 동안 엉덩이를 쪼개 버릴 것 같은 비포장도로를 달려 ‘악마의 파편(Quebrado del Diablo)’까지 갔다. 그곳은 화산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동굴들이 모인 곳으로 언뜻 봤을 때는 요르단의 페트라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 인간은 바둑판에 놓인 까만 돌로 보인다. 이곳은 정교하게 짜인 자연의 예술품이고 인간은 모래 알갱이에 지나지 않는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의 진수는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에 있다. 달의 표면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서 불과 19km 떨어졌음에도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보인다. 바람에 의해 형성된 날카로운 언덕들은 이천만 년 전의 화산 활동에 의한 것이다. 그때 바위와 재 등이 옮겨지는 바람에 이곳에는 소금, 석고, 염소산염, 붕산염 등이 마구 섞여 있다. 소금의 하얀 결정이 쌓인 땅과 바위는 눈이 내린 것만 같다. 습기도 부족한 이곳에 동식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스타워즈>의 R2D2라면 모를까.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샌드 보딩’을 할 수 있다. 거대한 모래 언덕 위에서 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스포츠다. 모래는 엄청나게 달궈져 있어서 맨발로 서 있다가는 발이 데일 정도다. 나는 보드 바닥에 초를 칠하고 아찔한 경사 위의 모래를 천천히 내려갔다. 하지만 스노보드만큼 유연하게 움직일 수는 없는데다, 한 번 넘어지면 모래에서 발을 빼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이것을 한 번 타면 바로 중독이 되어 버려 몇 번이고 50미터도 넘는 경사면을 따라 힘겹게 올라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보드 타기에는 좀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샌드 보딩 만큼은 탄 것보다 구른 일이 많다고 실토해야겠다. 어쨌든 남미 여행 두 달 만에 찾아온 휴가는 모래판 위에서 뜨겁게 끝났다.

나는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갔다. 안데스 산맥에 가로막혀 칠레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국가가 되었지만, 여행자들에게는 안데스만큼 좋은 구경거리도 없다. 창밖에 우아하게 펼쳐진 아이맥스 영화가 없었다면 아마 10시간의 버스 여행이 고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안데스를 넘었지만 살타(Salta)와 멘도자(Mendoza)라는 작은 도시에서는 별로 인상적이랄 만한 것이 없었다. 날씨마저 희한하게 나빴다. 나는 또 다시 안데스를 넘어 칠레 남부로 계속 내려갔다. 칠레 입국 스탬프만 벌써 7개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다시 칠레에 돌아온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일명 ‘이스터’라고 불리는 라파 누이(Rapa Nui) 섬 때문이었다. 나는 4월 말에 라파 누이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곳은 남미 여행에서 가장 기대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아직 떠나기 전까진 며칠의 여유가 남아 있어서 나는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20km 떨어진 발파라이소(Valparaiso)에 들렀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곳은 칠레산 밀수출 선박과 포경선이 드나드는 국제적인 항구이자 칠레의 문화 수도였다. 하지만 멀리 태평양이 보이는 조그만 광장은 마을 전체를 아담한 해안 도시로 보이게 할 뿐이다. 하지만 벽마다 그려져 있는 그래피티(심지어 드럼통 모양의 쓰레기통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작고 예쁜 액세서리로 가득한 아트 숍과 달동네처럼 비탈진 마을 풍경은 홍대와 아현동이 섞인 듯한 묘한 감상을 준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혀 놓은 채 캔버스 위에 열심히 붓질을 하는 화가의 모습은 이곳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나는 발파라이소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 미국인 셋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 역시 다른 남미 여행자들처럼 장기 여행을 하고 있었다. 음악, 영화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여행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한 명이 볼리비아와 브라질에 관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들 나라에 미국인이 입국하려면 비자 비용만 백 달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이 미국에 가려면 백 달러도 훨씬 넘는 돈과 함께 엄청난 양의 서류를 제출하는 것도 모자라, 지루하게 긴 줄을 기다려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정확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볼리비아와 브라질의 조처는 일종의 ‘복수’인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은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난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산티아고에 돌아온 것은 두 달 반만의 일이었다. 산티아고는 이제 가을이었다. 서머 타임이 해제되어 한국과는 시차가 13시간으로 벌어져 있었다. 여기서 이제 고대하던 라파 누이로 떠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왜냐하면 섬에서 두 가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내 여동생의 결혼이고 또 하나는 내 생일이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포기할 일이 많이 생긴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이밍과 예산 탓이다. 돈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시간이 부족해 여행지를 포기하는 일만큼 억울한 것은 없다. 그래서 때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동생이 결혼 발표를 했을 때는 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어떻게든 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여행을 강행했다. 결혼식 즈음에는 되도록 한국과 가까운 아시아 지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여행은 생각보다 느리고 예정일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다. 나는 여행의 템포를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없었다. 나는 동생의 결혼식 참석 대신 여행을 선택했다. 

 

 

라파 누이는 남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섬이다. 남미 대륙에서 서쪽으로 3400킬로미터, 산티아고에서는 약 5시간 떨어져 있으며 한국과는 15시간의 시차가 난다. 남미 대륙을 거대한 코끼리 코에 비유한다면, 라파 누이는 마치 코끼리가 재채기를 했을 때 밖으로 튀어나간 콧물처럼 보인다. ‘세계의 배꼽’이란 별명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생뚱맞은 위치에 똑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라파 누이는 다양한 별명을 갖고 있다. 폴리네시아어로 ‘세계의 배꼽’을 뜻하는 ‘테 피토 테 헤누아(Te Pito o te Henua)’ 말고도 1888년에 칠레 령이 되고 나서 붙여진 ‘파스쿠아’, 그리고 가장 유명한 별명인 ‘이스터’까지. 하지만 ‘이스터’라는 이름이 붙게 된 유래를 알고 보면 ‘인디안’이란 말만큼이나 폭력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1722년 네덜란드의 로헤벤 제독이 이곳을 처음 발견했을 때가 마침 부활절(이스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양인의 발견 이전부터 이곳에는 3천여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모아이’라 불리는 거대한 석상을 세울 정도로 문명이 발달한 부족이었다. 폴리네시아인으로 추정되는 그들이 화산 주변에 세운 모아이의 개수는 자그마치 1000여 개다. 모아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씨족의 신앙물, 즉 수호신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수호신은 오히려 원주민의 멸망을 부채질했다고 한다. 석상을 옮기기 위한 나무를 베느라 숲이 파괴되면서 원주민도 함께 멸하고 만 것이다.

 

 

라파 누이에는 인구 3800명이 한가롭게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한가로아(Hanga Roa)’다. 그곳에 도착한 날에는 날씨가 참 좋았다. 하지만 다음날, 자전거 타고 나가야지 하고 마음먹기 무섭게 무지막지한 비가 쏟아졌다. 5월도 아닌데 이토록 비가 많이 오는 것은 이상하다고 주인이 얘기할 정도였다. 바람도 무척 강해서, 파도에 맞았다가는 그대로 100미터 전진할 것처럼 바다가 심하게 흔들렸다. 주변에 키가 3미터를 훌쩍 넘는 모아이 석상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바람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는 다른 모아이를 찾으러 해안 근처까지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춥고 비가 철철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3단 파도에 맞서 서핑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종일 나를 따라다니는 개와 함께 비를 맞으며 그것을 구경했다.

나는 미친 듯이 오는 비를 뚫고 아후 아키비(Ahu Akivi, Ahu는 제단이라는 뜻)에 가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험한 돌산 위를 두 시간 가량 달려, 마침내 모아이들 앞에 서니 비가 보란 듯이 그쳤다. 마침 자동차로 투어를 온 유럽 관광객들이 말끔한 옷을 입고 유유히 모아이 곁으로 들어섰다. 아후 아키비에 있는 일곱 개의 모아이는 바다(정확히 말하면 바다 아래의 마을)를 바라보고 있다. 일반적인 모아이들이 바다를 등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다. 이것은 마을을 보호하는 의미라고 한다.

 

 

모아이 덕분에 스릴 만점의 산악자전거 여행을 하긴 했지만, 그 뒤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사흘간 숙소에만 있어야 했다. 날씨가 개기를 기다리며 숙소에서 밥을 해먹는 일은 여간 심란하지 않았다. 치명적인 물가 때문이었다. (계란 한 알이 우리 돈으로 400원, 큰 양파 하나가 1200원이라니!)

그 사이 내 동생은 결혼을 하고, 나는 생일을 맞았다. 미리 산티아고에서 사온 고추장과 미역국으로 생일상을 차려 먹고 있는데 뉴욕에서 온 여자애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1년간 남미를 여행 중이며 그 중 절반은 아르헨티나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의 고추장 밥을 보며 ‘이게 김치냐?’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저으며 어떻게 김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뉴욕에서 한국 음식이 유명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두 바’도 많고, 아무튼 자기는 한국 음식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으므로 그런 이야기가 신기하게 들렸다. 그녀는 저녁 때 크레페를 만들 건데 같이 들지 않겠냐고 물었다. 난 그녀의 호의가 고마웠지만 사양했다. 그날 밤, 나는 천둥과 번개, 폭우 소리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깨고 나면 동생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 나는 집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밤은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악마 같았다.

다음날 아침, 날씨가 처음으로 환하게 갰다. 나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에 감사하며 섬을 한 번에 완주하기로 결심했다. 총 4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였다. 먼저 북쪽에 있는 아나케나(Anakena)의 모아이를 향해 자전거를 달렸다. 한 시간 가량 힘겹게 달리자 드디어 내리막길이 나왔다. 30분간 아무도 없는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은 나는 새가 부럽지 않았다. 그야말로 나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어이없게 놓쳐 버린 동생의 결혼이나 혼자 먹는 미역국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더구나 아나케나 주변의 바다는 수영복을 가져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할 만큼 아름다웠다. 불과 몇 사람만이 수영과 스노클링으로 한적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평화로운 바다였다. 아나케나를 지나 좀 더 가니 ‘세계의 배꼽’이라 불리는 둥근 돌이 나왔다. 백인 남녀 다섯이 돌에 손을 댄 채 엎드려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거대한 모아이 하나가 엎어져 있었는데, 갈색의 모자 크기만도 2미터 가량 되었다.

 

 

거기서 6킬로미터 쯤 더 달리자 아후 통가리키(Ahu Tongariki)가 나왔다. 여기에는 15개의 모아이가 늘어서 있는데 멀리서 보면 모아이 축구팀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무참히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1960년에 쓰나미가 해안의 200미터를 덮쳐서 모아이들이 100미터 사방으로 마구 흩어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타다노라는 일본 회사가 많은 돈을 들여 모아이 15개를 일으켜 세워 준 것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모자를 제대로 갖춰 쓰고 있는 모아이는 단 한 개뿐이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역시 거대한 모아이가 누워서 잠을 자고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섬을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한가로아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무지개를 보았다. 그 아래의 목초지에서는 두 마리의 말이 교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무지개가 하나 더 생겼다. 나도 모르게 ‘파란 나라’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숙소로 발길을 재촉했다.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진 가운데 자전거를 빨리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8시간 동안 달렸던 자전거 여행은 남미 유랑 가운데 가장 잊지 못할 체험 중 하나가 되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250일째 되는 다음날, 나는 다시 산티아고에 돌아왔다. 이로써 두 달여에 걸친 상반기 남미 여행은 끝이 난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틀 만에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벌써 여행 중에 하는 열여섯 번째 비행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아침 산티아고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초저녁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적도 바로 위에 위치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였다. 베네수엘라는 칠레와 시차가 30분이 났다. 하지만 문화적인 차이는 30광년 쯤 되는 것 같았다.

베네수엘라는 여행하기 힘든 3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살인적인 더위, 살인적인 물가, 그리고 살인적인 분위기. 수도인 카라카스의 사바나 그란데(Sabana Grande)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낮엔 덥고 부랑자가 여기저기 누워 있고, 밤이 되면 얼굴만 겨우 보이는 창만 내놓고 물건을 파는 약국이 나타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카라카스에서 도망치듯 나와 간 곳은 베네수엘라 동부의 산타 엘레나(Santa Ellena)다. 그곳은 로라이마(Roraima) 산에 등반하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로라이마는 전형적인 테푸이(Tepuis)의 형태를 띠고 있다. 페몬 인디언 말로 ‘산’을 뜻하는 테푸이는 위가 평평한 테이블 모양의 산을 말한다. 이곳은 공룡 멸종 이전의 세계를 다룬 코난 도일의 책 『잃어버린 세계』(1912) 때문에 ‘로스트 월드’란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산타 엘레나는 잃어버린 세계를 방문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야 했다. 하지만 내가 간 5월 초는 완벽한 비수기였다. 적어도 네 명이 모여야 5박 6일의 투어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흘을 기다렸지만 가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모이지 않았다. 이틀을 꼬박 걸려 동쪽 끝으로 왔으니 로라이마 때문에 허비한 시간만 무려 5일이다. 나는 매일 밤 빈대에 온몸을 뜯기는 바람에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배와 팔 주변이 가려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밥 먹고 글만 썼다. 하지만 그렇게 기다린 시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서쪽 끝에 있는 메리다로 가야 했다.

 

 

다행한 일은 베네수엘라의 차비가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하면 놀랍도록 싸단 점이다. 특히 버스로 20시간을 여행하는 비용은 브라질보다 세 배나 쌌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석유 때문이다. 베네수엘라는 1940년대 이후 석유가 발견되며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가입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뒤, 지금까지도 경제의 80퍼센트를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남미 최고의 석유 강국이다. 

산타 엘레나에서 메리다(Merida)까지는 꼬박 36시간이 걸렸다. 버스에 하도 오래 앉아 있었더니,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몸이 앞으로 고꾸라져 어떤 아저씨와 몸을 부딪치기까지 했다. 메리다는 여행자들이 가장 많은 도시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긴 케이블카도 있고 아름다운 산도 있다. 나는 캐녀닝(Canyonning)이라는 스포츠에 도전했다. 이것은 잠수복을 입고 캐년(개울이 흐르는 깊은 협곡)을 걸어가는 스포츠다. 중간에 험한 골짜기와 폭포가 나오기 때문에 산악 장비 또한 필수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온 여행객 다섯 명과 함께 산 근처까지 차를 타고 간 뒤, 삼십 분여를 걸어 출발지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약 5시간 동안 개울과 폭포를 건너는 것이다. 캐녀닝을 하면서 나는 드디어 나의 실체를 발견했다. 내가 못 말리는 겁쟁이란 사실이다. 캐녀닝 도중에 나는 미끄럼틀을 몇 번이나 만났다. 하지만 돌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5미터 아래의 물에 빠지는 것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또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협곡 위를 아무런 장비 없이 뛰어내리기도 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10미터짜리 폭포에 자일을 걸고 내려가는 일이었다. 가이드가 위에서 줄로 조종을 해주었지만, 나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폭포 밑을 무릎으로 기어내려 갔다. 하지만 줄이 흔들리는 바람에 나는 트림이 연속으로 다섯 번은 나올 정도로 폭포수 물을 마신 것도 모자라, 절벽에 손등을 긁혀 버렸다. 마침내 폭포수 아래로 첨벙했을 때는 손등에서 피가 철철 나고 있었다. 여행하면서 좀체 살 만한 기념품을 발견하지 못하던 차에, 기념품 하나를 제대로 얻은 셈이다. 마지막으로 갑작스레 내린 비를 맞으며 38미터짜리 폭포를 탔는데, 어찌 내려갔는지 기억도 없다. 그저 지금 무사히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내가 폭포를 탔었나 보다, 할 따름이다.  

메리다를 끝으로 나는 마라카이보에서 국경을 넘어 콜롬비아로 갈 예정이었다. 그 사이 군인한테 여권 검사를 받은 횟수만 다섯 번이 넘고, 매번 알 수 없는 이유로 돈을 갹출당해야 했다. 나는 베네수엘라 국경을 통과하는 내내 끝까지 불편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베네수엘라를 여행하기 전만 해도 나는 현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에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의 일방적인 외교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지도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남미의 좌파 정권 도미노(볼리비아, 쿠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브라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도 바로 그였다. 차베스는 19세기 초 남미 독립을 이끈 시몬 볼리바르 장군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남미의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다. 1992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체포된 적도 있지만, 6년 뒤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헌법을 새로 제정하는 등 합법적 정권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줄곧 이라크 침략,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미국과 자본주의의 양극화를 규탄하면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펴고 있다. 그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악마’, FTAA 지지자인 멕시코의 비센테 폭스 전 대통령을 ‘미국의 애완견’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연대하고 있다. 그는 합법적 정권 아래,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그는 촘스키와 같은 지식인들의 지지도 얻고 있다. 그는 빈민을 위한 강력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2006년 선거에서도 승리, 3선에 성공하였지만, 과연 그가 자본의 힘을 이기고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21세기 초에 들어서면서부터 그의 장기 집권 야욕에 맞서는 반차베스 파의 각종 시위와 쿠데타, 높아 가는 범죄율, 사회 비리, 빈곤율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에서 실패한 독재자와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의 그늘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베네수엘라는 차베스의 목표와는 달리 다수가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다수가 못 사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여행자 이전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불안을 안고 콜롬비아를 향해 갔다.《문장 웹진/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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