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의 접도(蜨道)를 따라서, 이생(異生)의 접도(接道)를 위하여

 

이 생의 접도(?道)를 따라서, 이생(異生)의 접도(接道)를 위하여 

– 윤후명 소설에 대한 단상들




양윤의




윤후명의 소설은 펜이라는 오래된 주구(呪具)로 받아 적은 창세기이다. 윤후명은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삶의 전 여로(旅路)를 존재의 영점(零點)으로 삼는다. 길과 길이 맞붙어 있듯이 이생과 저생은 맞닿아 있다. 현재 속에 겹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경이로운 순간’은 근작 『새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 2007 – 인용 시 면수만 표시)에 수록된 소설들 속에서도 생략된 적이 없다. 여기서 인물이 느끼는 ‘교감’의 순간이나 ‘빙의’의 체험은 윤후명의 소설 문법으로 종합될 수 있는 구성 요소들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윤후명의 소설 ‘자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나는 신비주의자라도 된 양 신비한 교감(交感)을 누려 보려고 노력하곤 했었다.”(「處容나무를 향하여」,『원숭이는 없다』, 민음사, 1988) 이러한 작가의 고백은 소설 속에서 중단된 적 없는 미적 체험을 세속 도시에서 되살려야 할 존재론적 요청으로 삼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금 당겨 말하자면, 신앙처럼 품고 있는 소설적 ‘믿음’을 작가는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부른다. 

표제작인 「새의 말을 듣다」와 「나비의 소녀」(2001년 발표당시 원제는 「나비의 전설」)는 인물이 ‘교감’의 순간을 통해 다른 세계(異界)와 만나는 각성의 계기를 소설화 한 ‘발견’ 서사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특히 두 작품은 ‘새’의 말을, ‘나비 떼’가 내준 길을, 세계 속에 ‘숨은’ 의미를 깨닫는 서사의 급전(急轉)이 ‘여행’이라는 여로 구조 속에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윤후명‘식’ 레퍼토리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다.

「새의 말을 듣다」의 주인공은 독도에서 알타이어를 전공하고 있다는 한 언어학도를 만나게 된다. 그 언어학도는 “모든 사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괘액괘액’ 소리를 내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알타이어”로 들린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 청년학도가 예의 지적 자의식이나 인식욕으로 세계를 진단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일종의 감동을 받는다. 세계와 공명하는 자는 분석적 이성을 넘어서는 ‘충일’의 상태 속에 있다. 그가 믿는 세계의 질서는, 듣고 보고 만지는 동시적인 감관과 더불어 서로 느낄 줄 아는 감정적인 감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멸종한다는 말은 내게 다가붙은 빙의 같았다.”(26면)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영혼의 진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언어학도의 얼굴에서 “알타이 샤먼”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것은 접신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화 된 영매의 얼굴이 아니라 “진정한 영매(靈媒)”의 눈빛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이 경험한 내밀한 ‘일체감’은 결국 자신의 모국어인 ‘한국어’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것은 소설 속에서 공들여 서술하고 있듯이 광신도적 열광으로부터 전염된 일시적 동요가 아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진동하는 그 에너지는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적 ‘전율’의 재확인일 터이다. 자신의 근거를 확인하는 존재론적 울림을 확인하는 지점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에 속한다.

마르틴 부버의 말처럼 사람들이 상상하는 3인칭의 ‘그것’은 한 사람이 진정으로 ‘너’라고 부르는 생생한 인간성과는 별개의 것이다.(『나와 너』) 그렇다면 윤후명의 소설은 3인칭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2인칭인 ‘그대’가 되는 위상학적 전환을 통해 ‘나’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삶이 만남이 되고 그것이 문학이 된다. ‘새의 말을 듣’는 능력이 영매가 내림받은 영특한 청력이라면, 그것은 소멸하는 것들을 불러낸 ‘사랑’의 능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이는 합리적 해명이나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서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다. “나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실체를 알 수 없는 대책 없는 요동 속에 거하는 것이 사랑의 증상일 터이다. 사랑은 어쩔 수 없는 ‘내맡김’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 점에서 윤후명의 소설 속에 마련된 또 하나의 통로인 ‘환(幻)’의 길은 사랑의 도상(途上)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세계와 인간 사이의 본래적 관계가 다름 아닌 연인 관계라고 한다면 소설 속에서 인물이 경험하는 환상이나 환청은 예외적인 체험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비의 소녀」에서 주인공 ‘나’는 교외를 지나는 길에 눈앞을 가득 메운 검은 ‘나비 떼’를 보고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 근처 한 음식점에서 ‘나빌레라’라는 이름의 소녀를 보게 된다. ‘나비 같은’ 몸짓을 가진 소녀는 ‘나’가 일생 동안 만났던 소녀들의 이미지로 변하다가 결국에는 몽골의 초원을 뛰노는 소녀의 뒷모습으로 화한다. 소녀의 이미지가 다시 만날 수 없는 순수한 존재의 표상이라면 그것은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그리움이 만든 화신일 것이다. ‘나’는  몽골의 광활한 산야에서 맛보았던 일체감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신과 소녀와 초원의 풍경이 한 덩어리가 되는 듯한 충만감, 그것은 세속 도시의 일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성한 충만감이다.

이 소설에서 소녀와 몽골에서 만난 소녀, 이들 두 소녀에 대한 기억은 나비의 이미지로 반복되면서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주인공이 ‘나비 떼’의 장경(場景)을 떠올리면서 “그 골짜기의 나비는 단순히 그냥 나비가 아니라 뭔가 내 삶에 의미를 던지는 나비로서 받아”들인 것은 결국 “여기어 어디이며,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나’ 스스로 그것을 “몹쓸 상징”이고 “몹쓸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듯, 그가 두 소녀의 이미지를 나비의 이미지와 겹쳐 읽고, 자신의 삶을 허공에 길을 내는 ‘나비’에 빗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풍경의 비밀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과 상통하는 삶의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세계는 결국 어디에도 없는지 몰랐다. 세계는, 즉 우리의 삶은 그렇게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게 옳은 판단일 것이었다.”(89면) 요컨대 “나도 뭔지 모를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입몽(入夢)의 관문을 통과하고 다시 환의 뒷문을 걸어 나오는 각몽(覺夢)을 통해서 현재적 삶의 의미를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비가 낸 길(?道)은 현실과 꿈의 위계를 허물어서 통념적 가치를 의문에 부치는 소설적 장치라기보다는 세계의 문턱을 허무는 ‘열림’의 순간을 보여 주는 시적 계기라고 말하는 편이 온당할 듯하다. 그것은 목적을 수행하는 소설적 전략보다는 운명적으로 귀납되는 시적 효과에 가깝다. 하여 소녀-나비를 만나는 환상적 순간들은 “곳곳에서 모세혈관처럼 인연이 이어져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각성의 연속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이 ‘한몸’이었던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점에서 회고적 뉘앙스를 갖는다.

소설 속 세계는 <만남-헤어짐>이 교차하는 세밀한 접도(接道)이다. 또한 그 매듭의 다발들이 모여 거대한 ‘상징’을 완성하는 서정적 우주이다. 윤후명이 말하는 ‘환멸(幻滅)’의 형이상학은 현실 속에 미만해 있는 외로움을 껴안고 사는 구도자의 마음가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이별한 존재(離生), 소멸하는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중하게 여기는 도저한 예술가적 자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알베르 베갱은 ‘인격(personne)’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를 내는 연극적 인물의 이미지로 한정하는 데 반대한 바 있다. 알베르 베갱에 따르면,  ‘인격’은 ‘~를 통해서 울려 나온다(per-sonare)’는 어원이 보여주듯이 ‘내부의 신성한 목소리’가 투명한 관념을 통해 표현되는 개인의 정신을 의미한다.(『낭만적 영혼과 꿈』) 윤후명의 소설 속의 서술자가 유독 1인칭에 한정된다는 점과 인물이 여행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심오한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 소설 속 무수한 1인칭들을 작가의 예술가적 인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단적 자아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유기성 속에 있되 “대화를 나누는 길은 결국 자기 언어”로 가능할 것이라는 작가적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태평양의 끝」에서 주인공이 떠올린 한 구절처럼, “우리 만남의 울음소리”(282면)로 압축될 수도 있다.

끝으로 윤후명의 ‘여행하는 인간’은 소위 탈 국가적 상상력이 강조하는 무차별적 다양성이나  극단적 상대주의적 관점을 경계한 의식적 소산이라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삶은 매끈한 지구본(global)의 퍼즐 조각처럼 완전한 하나(one)를 이루는 부분들이 아니다. ‘나’의 삶은 완전하게 닫히지 않는 세계(world) 속에 거하지만, 동시에 그 삶의 단 한 장면이 세계 전체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지구적 자본주의와 세속적 지구화(globalization)가 묻지 않는 것은 인간의 덧없는 기억(「나비의 소녀」)이고 소멸하는 것들의 행방(「새의 말을 듣다」)이다. ‘고도성장’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소설 속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런 소박한 고백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멸종하지요.” 그리고 그 고백을 향해 “자신을 숨김없이 깡그리 맡기고 싶”은 작가적 욕망이다.   

윤후명은 “우리의 삶이란 만남과 헤어짐을 나란히 놓는 과정”(273면)이라고 말한다. 만남의 시작과 헤어짐의 귀결이 한데 모여 있다는 것은 초연한 깨달음이라기보다는 생의 아이러니에 가깝다. 소설 속 1인칭‘들’이 경험한 환각의 세계 역시 쓸쓸한 회고담과 맞물려 있다. 작가의 근원적 그리움은 나비가 허공에 낸 길(?道)을 따라 “서글픈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면서  ‘나’의 삶 속에 접혀 들어가 있는 ‘그대’의 궤적을 발견하는 길(接道)이기도 하다. “내 목숨이 몇 천만 년, 몇 억만 년을 환생을 거듭하며 이어온 것”으로서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범부(凡夫,異生)가 “이 이승을 하루하루 늘 새로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길을 걷는 것은 현실을 초월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노력임이 분명해 보인다.《문장 웹진/200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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