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바위

 

이은봉

 

 

 

 책바위

 우울

 지렁이, 슬픔

 내 안의 외뿔소



책바위




바위는 제 몸에 낡고 오래된 책을 숨기고 있다

바위 위에 앉아 그냥 벅찬 숨이나 고르다 보면 책의 흐릿한 글자들 보이지 않는다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갈피도 찢겨져 나가 자칫하면 책이 숨겨져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지금은 일실된 옛 글자로 씌어진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자꾸만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홍당무처럼 낯을 붉히는 참식나무들의 마른 잎사귀들이나 귓가에 다가와 글자들의 뜻을 겨우 속삭여 주기 때문이다

더러는 멧새들이 날아와 하나씩 글자들을 짚어 가며 재잘재잘 뜻을 설명해줄 때도 있다

제 몸에 숨기고 있는 이 낡고 오래된 책의 내용이 대견스러워서일까 바위는 가끔씩 엉덩이를 들썩여 가며 독해를 재촉하기도 한다

내 둔한 머리로는 뽀얗게 형상을 그려가며 읽어도 간신히 몇 마디 뜻 정도나 깨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앞단추를 따고서는 거듭 제 젖가슴을 열어 보이는 바위의 부푼 엉덩이 위에 철썩, 손바닥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문득 정신을 차리는 바위는 때로, 너무 서두르지는 마세요 벌써 겨울이 오고 있지만요, 은근히 다짐을 주기도 한다

바위는 명년 가을이 와도 내가 제 몸에 숨기고 있는 책을 다 읽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나는 끈질기게 그녀가 치맛자락 속에 숨기고 있는 이 낡고 오래된 책을 계속 읽어나갈 작정이다

옛 글자들을 읽고 일실된 진실을 복원하는 일을 나 말고 누가 또 할 것인가

애써 궁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바위의 숨소리만을 듣고도 그녀가 제 속살에 감추고 있는 책의 내용을 다 알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으리라.




우울




우울은 지금 제 가슴 쫘악, 찢어대고 있다

책상 위에는 복잡한 서류들 마구 흩어져 있거늘, 그것들 무어라 자꾸 지껄여대고 있거늘

거기 엇갈려 포개져 있는 두 손 위, 우울은 제 머리 칵, 처박고 있다


21층 드높은 사무실

어쩌다 보니 저 혼자 내팽개쳐져 있는 우울은 시방 이빨 앙다물고 아그그,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얼굴 찡그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을성 없는 놈이라니!

우울은 잔주접이나 떨고 있는 저 자신이 싫다 까짓것 청명과 한식 사이이거늘, 도갑사 산벚꽃처럼 타오르면 그만이거늘

화르르 흩날리면 그만이거늘……


우울은 지금 제 팔다리 쫘악, 찢어대고 있다

책상 위에는 금방 터질 듯한 은행통장들 함부로 흩어져 있거늘, 통장들 뭐라고 거듭거듭 지껄여대고 있거늘

거기 엇갈려 포개진 두 손 위, 우울은 제 얼굴 칵, 처박고 있다


앙다문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

우울은 너무 싫다 그만 세상 하직하고 싶다 산벚꽃처럼 가볍게 몸 흩날리고 싶다

바람은 그걸 알고,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거늘!




지렁이, 슬픔




슬픔은 본래 밖에서 안으로 기어들어온다 땅강아지처럼 발발거리며, 장맛비처럼 구질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온다

운명처럼 며칠을 두고 온몸을 적셔대며 밖에서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슬픔!

더러는 바늘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화살이 되기도 하며

슬픔은 기어코 몸 안으로 파고들어온다

울컥, 물비린내 뿜어대며 마음까지 다 적셔버리고 나면 슬픔은 금세 거슬렁거슬렁 핏줄을 타고 내 작은 별 속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저 징그러운 슬픔이라니!

서울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도

고속전철 역방향에 앉아 눈을 감고 있을 때도

지렁이 슬픔은 내 작은 별 속을 헤매며 붕어즙이라도 삼킨 것처럼 쓰디 쓴 표정을 짓는다

내 작은 별 속을 떠돌아다니며 고통을 만드는 저 딱한 연체동물이라니!

지렁이 슬픔은 제석산 무명 선사들의 묘지 앞 푸른 잔디밭 위에 편하게 몸 눕히고서도 거듭 제 마음 뾰쪽하게 갈아댄다

세상 차츰 어두워 오는데

아픈 별 자꾸 빛 잃는데

뾰쪽한 핏덩어리 따위나 만들고 있는 지렁이 슬픔을, 쉼 없이 꿈틀거리는 검붉은 심장을 어쩌지?

심장은 내 작은 별의 하느님, 하느님을 어쩌지? 마침내 밖을 향해 핏덩어리 내쏘고 있거늘, 검붉은 지렁이 퍼붓고 있거늘!

이제는 아무한테나

제멋대로 바이러스를 감염시키고 있는 지렁이 슬픔을!

이미 마음 밖에서도 검붉은 핏덩어리 제멋대로 재생시키고 있는  징한 심장을, 쓰디쓴 붕어즙을 어쩌지

때로는 칼이 되고, 총이 되고, 폭탄이 되는 저 지렁이 슬픔을!

아직도 내 작은 별은 채 길들여지지 않은 아랫도리의 열기에 쫓기느라 정신이 없거늘! 그럴수록 남은 생의 나날들, 맑은 연못 속으로 깊고 그윽하게 저물기를 빌 수밖에……,

더러는 그늘 넓은 느티나무 따위 가슴 한 켠에 키우기도 하면서.




내 안의 외뿔소




내 안에도 남들처럼 여러 놈의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몇 마리의 나, 몇 놈의 나, 몇 개의 나, 몇 포기의 나, 몇 자루의 나…… 심지어는 낯 뜨겁게 몇 새끼의 나까지도 내 안에 살고 있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내 안의 저 많은 나들 가운데 어느 놈이 진짜 나인지 알기 어려웠다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나를 지켜볼 때마다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무슨 카멜레온이라도 되는가 함부로, 제멋대로, 뻔뻔하게, 아무데서나 얼굴을 바꾸게!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나를 내가 크게 미워하지 않으며 잘 살고 있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다

대견하다니? 정작 대견한 것은 내 안의 또 다른 나 가운데 외뿔소라는 놈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뿔을 들이밀며 제 생의 평원을 향해 불쑥불쑥 걸어 나가는 외뿔소라는 놈!

이놈은 인내심과 성실을 상표로 삼아 제게 주어진 역사를 향해 언제나 뚜벅뚜벅 잘도 걸어 나갔다

너무도 느려터진 이놈으로 하여 나는 내 안의 수많은 나와 크게 다투지 않으면서도 그런 대로 잘 살 수 있었다

가끔은 어디서든 불쑥불쑥 제 주둥이를 열어젖히는 놈이 있어 마음이 상할 때도 있기는 했다

내 안의 나와 심하게 다투고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목에 동아줄을 걸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내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나는 끝내 고통을 견디지 못해 훌쩍 이 세상에서 저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어 우울해하고는 했다

그러니 내가 어찌 내 안의 수많은 나와 잘 놀기 위해 서로를 다독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안의 저 싸가지 없는 나들을!

시간의 불수레를 타고 종종대며 달려가다 보면 더러는 꽤 괜찮은 나를 만날 때도 있기는 했다.




시?낭송 : 이은봉

출전 : 이은봉 시집 『책바위』, 천년의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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