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창단

 

이민하

 

 

 합창단

 빈 상자

 가면놀이

 묘지 위의 산책



합창단




우리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장과 허공 사이.

저녁과 아침 사이. 지금은 새벽 두 시입니다.


전쟁과 고요 사이를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소리의 약탈에 눈떴습니다.


소년들은 우측으로 소녀들은 좌측으로.

배급표를 받으려면 줄을 서세요.

행렬은 내일과 모레, 아빠들의 월급날까지


그리고 달의 빙벽까지 계속됩니다.

소년들은 소녀들의 샴푸 냄새를 채취하려고 발꿈치를 듭니다.

너무 자라서 죽은 언니들은 차가운 보름달 아래 안부를 적어 보냅니다.


편지를 읽기 위해 우린 문맹퇴치학교에 모이지만

말의 시취가 새지 않도록

이빨을 재갈처럼 물고 있습니다.


어둠의 도시락을 까먹는 무말랭이 같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죽은 언니들은 부장품을 빼돌립니다.

우리들 목숨의 절반은 그녀들 것입니다.


무기거래상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다듬었지만

우리는 안전핀처럼 비명을 착용합니다.


메트로놈처럼 빠르게 왕복하는

아침마다 저녁마다 한쪽으로 기우는 척추에

비누를 문지르세요.


단단함과 거품 사이에서 흔쾌히 태어나겠습니다.

우리의 독창은 귓속말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비만한 음표와 지루한 오선지 사이.




빈 상자




팔색조 한 마리를 상자에 담아 그에게 보낸다. 상자를 열자 새는 공기를 휘젓고 사라지고 그는 상자를 버린다. 꽃나무를 담아 상자를 보낸다. 그는 꽃나무를 정원에 옮겨놓고 상자를 버린다. 책을 담아 상자를 보낸다. 그는 책을 책꽂이에 꽂아두고 상자는 버린다. 책을 읽던 그는 짓무른 눈알을 따서 정원에 버린다. 팔색조가 돌아와 눈알을 쪼아대자 키가 자란 꽃나무가 두 팔을 공중에 매달고 몸을 푼다. 나는 벽시계를 담아 상자를 보낸다. 그는 시계를 벽에 기대놓고 계절이 흐르기 시작한 정원에 상자를 버린다. 그가 벽시계를 꽝꽝 벽에 박아 넣는 동안 그림 연습을 하던 나는 실물보다 더 진짜 같은 무지개를 그려 상자에 담아 보낸다. 무지개는 벽에 걸려 코가 자라고 상자는 버려진다. 그는 장마철에도 우산 대신 무지개를 펼친다. 벽에서 넘친 무지개가 뒷마당까지 덮는다. 통조림처럼 꽃나무와 새들이 썩지 않는다.


나는 빈 상자를 그에게 보낸다. 뚜껑을 열고 닫고 이리저리 살피다 그는 잠든다. 나는 빈 상자를 자꾸 만든다. 그가 저녁마다 산책하는 공원에도 가지 않는다. 내 방은 빈 상자로 꽉 찬다. 수소문한 그가 전화를 걸어온다. 나는 대답 대신 빈 상자를 자꾸 보낸다. 빈 상자를 넣을 빈 상자를 만든다.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상자를 넣어 작은 상자 큰 상자 자꾸 보낸다. 뚜껑을 열며 뚜껑을 열며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그는 그 속에서 잠을 잔다. 상자 모서리에 매달려 커다란 상자를 두르던 나도 잠을 잔다. 어김없이 찾아온 트럭이 커다란 상자를 운반한다. 흔들림에 잠을 깬 내가 그에게 도착한다. 상자 속에 상자 속에 잠든 그는 내가 온 줄 모른다. 나는 상자를 뚫으려 두 팔을 휘두른다. 상자를 빠져나오자 낯익은 이불이 납작하게 접혀진다. 낯익은 벽들이 각을 세우고 천장을 덮는다.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트럭이 내 방을 싣는다.




가면놀이 




정거장도 없는 기찻길처럼 팔이 자라요

어디 갔니 얘야, 엄마는 백 년 전부터 찾고 있지만

소용없어요 다람쥐통에도 끼일 만큼

나는 너무 자라버렸고 지상에서 노는 게 시시해

공중에서 놀고 어둠 속에서도 놀지요

롤러코스터를 타고 호수 위를 빙글빙글 건너는 레일 끝

튤립 꽃밭엔 의붓아이들이 와글와글 피고 있어요

보여줄까요? 유령의 집으로 몰래 숨어들어

귀신처럼 멈춰 서 있는 나의 특기

사람들을 놀래키는 재주가 있지요

그들이 무심코 스쳐지나는 관 속에

아흔아홉 개나 되는 가면을 나는 가지고 있어요

흉내 내는 꼬마들을 나무라지 마세요

나는 이곳에 잠시 머물 뿐

겁주거나 괴이한 분장을 즐기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나도 한때는 비누 같은 엄마 손을 놓치고

어둠 속의 악마들 틈에서 발을 못 뗀 적 있지요

유아를 보호하라는 수칙을 어기고 어른들은 벽에 붙어

눈을 너무 가늘게 떠요

하늘도 자전거도 아닌 하늘자전거를 끄는

공중운행이 유랑도 탈주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후

시시한 손잡이를 버리고 두 발을 묶는 긴 고무줄처럼요

저길 보아요, 회전목마가 지겨운 사람들은 딱딱한 말을 버리고

외마디 비명을 챙겨 번지점프대로 오르지요

날개를 일찍 포기한 그들이 날고 싶어 하는 건

추락하는 순간에도 믿음을 주는 공포 때문이에요

그들의 왕복은 믿음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움직이죠

안전벨트가 없으면 불안한 상상의 지지대

가면을 수십 개 바꿔 쓰는 나는 그들의 상상 속에 이미 없어요

나는 너무 끝없이 자라고

해가 지고 있다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당신이 보채는 사이에도

몇 개의 가면이 내 얼굴을 스쳐갔는지 몰라요

입을 맞춰도 소용없어요

가면을 버리고 당신은 너무 빨리 늙어버렸는걸요

벽돌처럼 굳어버린 얼굴엔 악몽조차 기웃거리지 않는걸요

물론 이건 사라지는 고백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하는 말이지요

어둠 속에서 가면을 고르는 동안 내 무릎에 손을 얹는 사람마다

손등을 문질러보며 나는 묻곤 하죠

당신이 내 엄마인가요?




묘지 위의 산책




복사꽃처럼 발그레 흉터가 피는데 뜬금없이 약상자는 왜요. 붕대를 풀어 친절한 표정을 꺼내더니 불쑥. 꽃삽을 휘두르는 손목일랑 성냥개비처럼 똑 똑.


고무손을 만들어줄게. 주먹질도 노동이라고

다크서클이 가득하구나. 쿨하게 자란 어른답게 담배를 나누듯

마술봉을 쥐어줄게. 부메랑처럼 흐르는

백비둘기 떼.


깔끔하게 커팅 가위를 들키며 혈관을 찌른 건 아니잖니! 웃음을 까르르 날려봐요. 윙컷을 한 날개나 비둘기를 감췄던 모자의 내부 따위는 당신 입가의 사마귀보다 관심 밖인걸. 쇠양파 같은 살가죽을 뚫고 빨랫줄처럼 핏줄을 널어 말릴게.


입을 단정히 꿰매고 손뼉을 쳐줄게. 마리오네트처럼 팔이 빠지도록

나는 쓸모없는 이빨을 낭비합니다.

정액을 누던 손가락을 추켜올려

이빨을 긁어내며 하품하는 개미들처럼 날아갈 듯합니다.


당신은 소나기처럼 질투한다. 왼발 다음엔 오른발. 질퍽거리는 풀밭에 엎드려 각이 진 군복 같은 표정으로 눈치를 보며 포복한다. 진흙병정들의 항문을 더듬으며


전투화에 몸을 말아넣고 뻐끔뻐끔 어둠을 숨쉬는 저녁

굴뚝 속의 몰골에 대고 가슴을 치지만, 우발적인 난도질보다 더 치명적인 후회는 내 수염다발을 훔쳐 배꼽에 심어놓고


안절부절 과거에 손대는 버릇.

금관을 쓴 백조들이 우리의 묘지 위를 날아갈 때

쐐기풀이 당신 몸을 덮고 있는데 뜨개질은 왜 멈추었니. 침묵은 왜 그만두었니.


피를 깨끗이 담아서 밤새 만든 술잔을 선물해줄게.

우린 잠시 하나가 될 거야. 레드와인처럼 붉은 자궁을 치켜들고

토할 때까지 전쟁과 구름의 러브샷.




시?낭송 : 이민하

출전 : 이민하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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