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슬픔이 담긴 조그만 유리球’ 수집가

 

‘달’과 ‘슬픔이 담긴 조그만 유리球’ 수집가




유형진




취미에 대한 원고를 써 보란 이야기를 받아 놓고도 한참 만에 이 글을 쓰게 된다. 이렇다고 말할 만한 취미가 없는 이에게 ‘취미’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건 무척 공교로운 일인 것이다. 나는 세간의 취미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취미를 생활에 끌어와 ‘취미생활’을 할 만큼 여유롭지도 못하다. 게다가 나에게 ‘취미’라는 말은 이런 인상을 준다.


어색하게 처음 만난 남녀가 어두컴컴한 카페 조명 아래 홀짝홀짝 다 마신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딱히 더 이상 이어 나갈 대화 꺼리가 없을 때 건네는 멘트. “취미가 뭐예요?”

 

 

그래서 한심하게도 인터넷 검색 창에 ‘취미’를 쳐 본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趣味, taste’에 대한 요약 글은 이렇다. ‘미학적으로 일정한 감각적 사물에 대해 그 미적 가치를 쾌, 불쾌의 감정과 관련시켜 받아들이거나 판정하는 능력’.

이러한 능력이라면 나는 꽤 여러 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피아노도 심심할 땐 더듬더듬 내 마음대로 칠 줄 알고, 초콜릿칩 쿠키나 사과파이 같은, 오후에 차와 함께 마시면 좋을 디저트도 종종 만들 줄 안다. 남들은 재미없어 하고 몇몇만이 열광하는 음악들도 많이 안다.

그러나 그중 내가 가장 집중하고 골몰했던 취미. ‘달’과 ‘슬픔을 담아 두는 조그만 유리구’에 대해서 이야기 할까 한다. 이것은 ‘취미생활’ 이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야말로 불운한 취미인데, 이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다 못해 끝까지 읽지 못 할 정도로 감동적이어서 이 글을 읽는 중에, 독자들이 각자의 독자적인 취미세계로 빠질까 우려하는 건, 내 작은 마음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다.




달을 처음 본 게 언제였던가? 아마도 큰집에 명절인지 제사인지를 지내러, 온 가족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어린 동생은 엄마가 업고 나는 아버지 등에 업혀 자는 척하며 바라보던 기억이 최초의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게 몇 살적인지 모르지만. 달을 바라볼 수 있는 아버지의 시골 고향집으로 이사 온 이후이니 네 살이나 다섯 살쯤이겠다. 큰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멀지 않았다. 선득하니 추운 밤공기를 가르며 차고 맑게 흐르는 달빛 아래에 일가가 오종종히 걸어 집으로 돌아가던 밤이었다. 나는 안자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등에 업힐 자격이 되려면 ‘자는 아이’ 여야 해서 나는 자는 척을 했다. 그때 아버지 등에서 실눈을 뜨고 바라보던 달은 보름달이었다.

 

 

달 위의 아른아른한 그림자는 토끼도 아니고 계수나무도 아니고, 그저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달과 나와의 비밀그림 쯤으로 생각했다. 그 후로도 나는 달과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애인과 심한 말다툼을 하고 토라져 혼자 오던 밤에도 나와 함께 동행 해 준 이는 언제나 달이였다. 달에 대한 나의 취미는 달을 바라보며 걷기나 달을 보며 공상하기, 달에 관련된 텍스트 모으기 따위로 점철되며 불면의 밤이 늘어가게 하였고 그러한 밤이 늘어 갈수록 달에 대한 취미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다 이 달에 대한 취미가 정점에 이르게 되는 사건이 생겼는데 바로 이탈로 칼비노의 『코스미 코미케』를 읽게 된 일이다. 요새는『우주 만화』라는 번역 된 제목으로 나와 있다. 칼비노의 『달에 대한 이야기들』속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역시 <달의 거리>. 달이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던 시절. 사람들은 달의 치즈를 얻으러 코르크로 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달의 중력으로 바다가 언덕같이 높아진 ‘아연의 암초’가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다.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자진해서 달 속으로 빨려 들어간 ‘나’의 귀머거리 사촌과 그 귀머거리 사촌을 사랑한 선장의 ‘하프 켜는 부인’과 선장의 ‘하프 켜는 부인’을 사랑하던 ‘나’의 울지 못할 사랑 이야기이다. ‘나’의 귀머거리 사촌과 선장의 ‘하프 켜는 부인’을 삼킨 채 달은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이후로 사람들은 다시는 바다에서 달의 치즈를 채취할 수도 없게 된다. 그 후로 보름달을 보면 개들이 울부짖고 개들이 울부짖을 때마다 함께 울게 되는 ‘나’의 이야기가 나에겐 가장 아름다운 달에 관한 텍스트이다. 칼비노의 달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시 느끼기 힘든 달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달에 대한 나의 취미도 점차 사라져 갔다.



그리고 슬픔이 담긴 조그만 유리球


나에겐 친구가 많다. 친구들은 저마다 하나같이 슬프다. 슬픔은 그 친구들의 개성만큼 다양한 빛깔과 모양을 하고 있다. 친구들은 나에게 와서 슬픔을 이야기한다. 나는 친구의 슬픔에 내 슬픔을 섞어 유리에 담아 둔다. 어떤 경우엔 지나치게 밝은 어조의 톤으로 어떤 경우엔 아주 비통한 어조로. 그들의 조근조근한 이야기엔 마개가 없다. 그래서 나의 슬픔은 친구들의 슬픔에 마개 역할을 한다. 친구들의 슬픔이 액체라면 나의 슬픔은 고체였으므로. 나에겐 그런 친구들의 ‘슬픔이 담긴 유리구’가 많다. 나는 심심할 때마다, 혹은 외로울 때마다, 사는 일에 절절매며 속상할 때마다. 어린 시절 내가 사는 지구에서 비치는 태양의 각도에 따라 초승달, 보름달, 그믐달로 달리 보이는 달을 바라보듯 슬픔이 담긴 유리구들을 바라본다. 그 유리구들은 나의 위성이다. 이것은 이탈로 칼비노 이후에 사라진 달 취미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유리구들은 밀봉된 슬픔을 간직한 채 날마다 내 주위를 빙빙 돈다. 빙빙 돌면서 그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프랙탈 도형을 만들어 내게 보여 준다. 유리구와 나와의 자전과 공전을 생각하며 그 슬픔의 무늬를 감상하며 나도 움직인다. 천천히. 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움직인다. 나에게 와서 슬픔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에게 그 슬픔이 또 다시 당도하질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친구들의 새로운 슬픔을 볼 때면 그들이 나에게 미처 다 쏟아 내지 못했던 슬픔의 찌꺼기가 새로운 슬픔으로 진화한 것을 알게 된다. 슬픔들은 어디서 그렇게들 퐁퐁 솟아나오는지. 언제 그렇게 자라나는지. 나는 새로운 슬픔들을 다시 유리구에 넣어 둔다. 나는 이제 슬픔이 담긴 조그만 유리구를 수집하는 수집가가 되어 버렸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생활에 허덕이게 되거나, 남과 다른 내 모습에서 벌어지는 괴이한 낯설음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늘 곤란해진다. 그 곤란함은 삶을 그 전과 같은 모습으로 살지 않도록 하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나의 이 ‘슬픔이 담긴 유리구’ 취미는 내 삶에서 빚어지는 슬픔을 남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마냥 슬픔에 빠져 지내게 할 수 없게 한다. 슬픔에 빠져 있다가는 언제 또 다시 달을 바라보며 개가 울부짖듯이 달을 보며 울부짖을지, 달에 대한 없는 텍스트를 찾아 헤매게 될지 모르는 일이므로.《문장 웹진/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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