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적다

 

 

이안

 

 

 꿈을 적다

 살구나무와 통하다

 연필을 깎는 동안

 유고시

 

 

 

꿈을 적다




꿈에서 나는 언제나 고향에 살았다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표준어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어머이' '아부지' '성'을 버렸다

순하디 순한

'그랬어유'와 '야'를 버렸다

오가 언년이 흥기 주덕이 용각이 형을 버렸다

고등학교까지 교과서에 충실함으로써

고향과 관련한

모든 것을 스무 살 전에 버릴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이었고

사람은 나서 서울로 가는 거였으므로

그 뒤 아버지 어머니도 가산을 정리해 상경하시고

젊은 아버지의

손수 지으신 고향집도 팔리고 헐렸다

그때부터

꿈에서 나는 언제나 고향에 살았다

아버지 어머니도 아니 계시고

들어가 살 집 한 칸 아니 남은 고향에서

아버지 어머니 대신 농사를 지으며

버리고 떠나온 고향을

뼈 빠지게 살았다

간혹 서울로 간 형과 누이, 아버지 어머니가 다니러 왔다간

돌아가신 날이면

나는 고향 집터처럼 외롭게 깨어났다

간밤엔 큰불이 나서

오가네와 흥기네와 주덕이네가 모두

잿더미로 주저앉았는데,

며칠 전 꿈에

오가네 두꺼비집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그예 큰일이 난 모양이었다




연필을 깎는 동안




연필을 깎는 동안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아내도 새끼도 없이

대구 뉘 집인지 모를 데를 기웃거린다

아주 오래 깃들여 산 듯이

마당부터 마루부터 부엌부터가

반질반질 눈에 익다

붉고 따뜻한 아궁이 불이 자서

부뚜막이 알맞게 식고,

불 켜진 방에는 인기척이 없다

그러나 무슨 심산가

정작 집에 닿아서는 집을 등지고

세상의 불빛 아득히 건너다본다

먼 어둠 너머

나를 등지고 내게로 돌아오는

연필을 깎는 동안




유고시 




마당 가 돌무더기에 흰 끄나풀 같은 것이 어른거린다

뱀 허물이다 머리를 땅에 박고,

이리로 저리로 요렇게 조렇게 들어가셨소

내가 그 증거요!

온 허물로 가리킨다

이건 단순한 허물이 아니라

뱀에 의한,

뱀이 썼던 허물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이 안에 뱀이 있었다는 것

저 안 어디쯤

진짜가 있다는 것

울고불고 마지막까지

뒤집어쓰고 살아온 시를 놓아주고

생것이 사라져간 쪽을 향해

입 꽉 다물었다




살구나무와 통하다




살구꽃 봉오리를 활짝 터뜨리는 건

살구나무가 아니다

살구나무는 꽃봉오리의 어느 절정에서

꽃을 향한 간곡한 기도를 내려놓는다

꽃봉오리와 꽃의 그

빛나는 순간에

들어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거두어들인다

한 상 가득 꽃봉오리를 차려놓고

몇 걸음 물러나

꿀벌과 나비와 방울새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고리까지만 따고

자기는 돌아가는 것이다




시?낭송 : 이안

출전 : 이안 시집 『치워라, 꽃!』, 실천문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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