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은 명랑하다

 

상상력은 명랑하다

?스페인, 칠레 편




권리




스페인하면 ‘열정’이란 단어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2시부터 5시까지 시에스타로 인해 상점들이 문을 아예 닫아 버리는 스페인의 모습은 ‘나른’이란 단어가 더 어울려 보인다. (도대체 9시에 출근한 사람이 세 시간 동안 사라지면 사장은 어떤 기분이 들까. 물론 그도 시에스타를 즐길 테지만.) 기대하던 플랑멩코 공연 역시 열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플라멩코 공연이 단순히 춤만 가리키는 것인 줄 알았다. 남녀 둘이 나와 캐스터네츠를 ‘딱딱’거리며 먼지가 날리도록 무대를 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은 얼마나 전형적인 모습인가. 하지만 전형적인 플랑멩코 공연은 무희, 가수, 연주가 3인이 기본이 되어 이루어진다. 나는 중저가의 공연을 두 개 보았는데, 둘 중 어느 것도 무희가 중심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오히려 노래와 기타 연주 사이사이에 춤이 서비스처럼 끼어든 것처럼 보였다. 집시 음악에서 유래되었다는 애절한 음악을 들으며 서양인이 판소리를 들을 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박자부터 멜로디까지 너무나 생소하고 노래의 내용 또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쩐지 나도 모르게 슬픈 분위기에 빨려 드는 것이다. 한편 여자 무희가 몸에 꼭 맞는 빨간 바탕에 검은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추는 춤은 그녀의 몸매만큼이나 군살 없는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 몸을 지배하는 리듬과 플라멩코의 리듬이 끝까지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좀 섭섭했다. 나를 울리는 음악은 보통 심장 박동이나 맥박과 함께 움직여야만 한다. 하지만 두 번의 공연 모두 갑자기 시작해서 영문도 모르게 끝나 버려서 공연 후에는 언제나 어리벙벙한 기분이 들었다.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바르셀로나였다. ‘가장 독창적’이란 말은 분명 모순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르셀로나에만큼은 가장 독창적인 예술의 도시란 말을 쓰고 싶다. 피카소 미술관, 미로 미술관처럼 유명한 미술관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거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미 유럽의 수많은 거리에서 박제된 퍼포먼스 예술가들을 보았다. 온몸에 은빛 칠을 한 채 중세의 법관 복장으로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 돈을 받던 이탈리아인, 마이클잭슨처럼 꾸미고 브란덴부르크 광장 앞에 있던 독일인처럼 부동자세로 있는 것이 거리 예술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거리 예술가들은 좀더 창의적이었다. 창의적인 존재는 언제나 유머가 넘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유머로 인해 작품은 더욱 명랑하게 빛난다. 거리에 나가면 유머러스한 예술가를 매일 만날 수 있다. 꼬마 자전거를 탄 채 거리를 굴러다니는 덩치 큰 사람, 악마 분장을 하고 있다가 관객이 돈을 주면 크게 재채기를 하고 코를 후비는 코믹한 응대를 하는 사람, 난파선을 모는 선장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는 사람, 거대한 비눗방울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한낮의 놀이터를 선사하는 사람 등등.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매일 다른 퍼포먼스를 준비한다는 사실이다. 또 나는 밤에 이 도시를 걷다가 재밌는 광경을 보았다. 한 거리 음악가가 탱고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음악에 맞추어 두 커플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한 커플은 70대쯤 되어 보였고, 또 다른 중년 커플은 둘 사이에 아기를 안고 있었다. 미로의 그림에 항상 등장하는 별, 시, 여자의 이미지가 그들의 모습에 겹치는 것 같았다.(아깝다. 내 지갑을 꺼내려 한 두 명의 소매치기와 머스터드소스를 내 몸에 발사한 악당만 빼면 나는 영영 바르셀로나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텐데.)

만일 건물의 천장이 나무줄기와 잎으로 뒤덮여 있고 곳곳의 수많은 구멍 사이로 빛과 별을 밤낮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건물 내부의 장식물이나 기둥이 나무, 조개껍데기, 벌집, 나뭇잎, 줄기, 가시 등을 닮았다면? 실제로 이런 혁신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설계를 생각한 사람이 있다. 그는 1882년부터 시작해 1926년에 죽을 때까지 건물을 지었지만, 아직도 건물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 건물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바로 내가 스페인에서 가장 창의적인 거리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안토니 가우디다. (나는 건축가도 거리 예술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그의 대표작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을 보자. 2020년 쯤 완공 예정이라는 이 성당은 높이가 100미터에 이르는 총 12개 중 8개의 종탑이 거의 완성단계에 있고, 지금은 트랜셉트(Transept; 교회당 좌우 익부(翼部), 수랑(袖廊))와 교회당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형의 부분)를 중심으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애초부터 ‘속죄’라는 콘셉트에 맞춰져 지어지기 시작한 이 성당은 공사비 전액이 기부금으로 충당되고 있다고 한다.

이 미완성 성당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공사에 바쁜 일꾼들이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바윗돌과 쇠톱, 그리고 아직 한 벽면도 채 메우지 못한 모자이크 창문이다. 모자이크는 마치 수 천 마리의 나비 그림자가 강물 위에 띄워진 것처럼 색색의 빛을 창 안으로 들이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75미터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거기서 밖을 내다보면 건물을 쌓아 올리느라 바쁜 건축기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올라 hola’(안녕)하고 외치자 그들은 내 쪽을 쳐다보고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다. 루이스 하인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노동자들 사진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가우디가 설계한 집 까사 밀라(Casa Mila 혹은 La pedrera)에도 가보았다. 1984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이 된 주택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옥상의 테라스에 사람처럼 생긴 환기구와 굴뚝의 모양은 가우디의 익살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가우디의 건물들을 보면서 훈데르트 바써의 건물이 자주 겹쳐졌다. 20세기의 건축사에서 가우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축가가 몇이나 되겠냐만은, 바써 역시 가우디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던 게 아니었을까. 이렇게 나는 타인의 영감의 계보를 슬쩍 이어 놓고는 칠레로 훌쩍 날아갔다.

마드리드에서 산티아고까지는 비행기로 12시간 30분이 걸렸다. 도착할 때 즈음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비행에 지친 사람들의 환호성일까. 아니면 불시착을 한 걸까. 비행기를 타 본 것이 족히 서른 번은 되지만 박수를 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활주로에 비행기가 닿아 기쁘다는 뜻이었다. 사소하기 짝이 없는 그 일이 나에겐 참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칠레에 머문 지 2주 정도 지나자 그 박수의 미스터리를 알아 가고 있다.

공항에서 내려 가이드북이 ‘천국 같은 곳’이라고 소개한 호스텔로 향했다. (그곳은 19세기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La casa roja’(붉은 집)란 곳인데 [라 까사 로카]라고 해야지, 잘못 발음하면 ‘La casa Loca’(미친 집)가 되어 버린다.) 그곳은 과연 천국이었다. 매일 소파 위에서 늘어지게 자는 달마시안 개 한 마리와 수영장이 있고 무선 인터넷 속도도 빠른 데다 금요일 밤마다 바비큐 파티가 열린다.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된 에딘버러 출신의 윌은 브라질에서 산 드럼을 갖고 다니며 여행 중이다. 내가 예전에 에딘버러에 갔던 일을 이야기하자, 윌은 가볍게 드럼을 연주해 주기도 했다.

 

 

도착한 날, 느지막이 나는 산티아고 시내를 구경하러 나섰다. 건물 곳곳의 에어컨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무더운 2월의 날씨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그만 트럭 한 대가 횡단보도 중간에 서 버렸다. 녹색 불로 바뀌자, 그 운전자는 행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앞으로 살짝 가 주었다. 나는 저마다 빨리 가려고 안달 내던 이집트의 운전자들을 떠올리며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슈퍼마켓에 갔더니, 계산된 물건을 다른 점원이 봉지에 넣어  준다. 그리고 칠레인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흘린다. 나는 한 나라의 ‘여유 척도’로 청소부나 구멍가게 주인처럼 이른바 3D 업종에 가까운 이들이 얼마나 잘 웃는지를 살피곤 한다. 칠레인들은 그야말로 살인 미소에 가까울 정도로 잘 웃는다. 나는 스페인에서 두 번이나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기 때문에 스페인어권 문화 앞에서 바짝 긴장한 상태였는데, 그 웃음 앞에서 슬슬 마음이 놓였다. (그때 내 주머니의 카메라 속으로 낯선 손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내내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거리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개들이 도로 한복판에서 죽은 것처럼 옆으로 누워 자는데도 아무도 깨우지 않는 곳이 바로 산티아고다.

산티아고의 중심가인 반데라(Bandera) 거리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낯익은 광경을 보았다. 목이 터져라 ‘할렐루야’를 외치는 외로운 전도사, 행인의 이목을 끄는 이색 장난감을 파는 상인, 한때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프리허그 운동을 하려고 서 있는 세 명의 청년, 그리고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에서 체스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대형 전자 상가에 가면 삼성 등 한국의 대기업의 5?10년 전 모델이 눈에 띄는 자리에 진열되어 있고 물가도 한국보다 약간 싸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탑골공원이나 보신각종을 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 칠레는 정확히 12시간 차이가 난다. 오전, 오후를 따지지 않는다면 양국의 시곗바늘은 똑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두 나라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 독일, 스페인 등 강대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점, 피노체트라는 군부 출신의 독재자가 나타나 1973년부터 1989년까지 국민들에게 정치적 억압을 했던 점(그가 재임한 17년의 기간 동안 수천 명의 사람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칠레는 부쩍 성장 추세에 있다. 빈곤율은 반으로 줄었고 교육수준은 25퍼센트 향상되었으며 2001년에는 사형제도 폐지되었다. 2005년 미셸 바쉴렛(Michelle Bachelet)이란 여성 대통령의 등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 권익도 향상되는 중이다.

나는 그날 저녁 숙소에서 만난 안나와 뚜이야라는 핀란드 여자 둘과 함께 술을 마시러 나갔다. 헬싱키에서 지리학을 함께 공부하는 친구 사이인 그들은 함께 스페인, 쿠바, 볼리비아, 페루, 칠레를 오랫동안 여행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잘했다. 특히 안나는 라틴아메리카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대학 졸업 후 칠레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산티아고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발파라이소가 색깔이 무척 예쁜 마을이니 꼭 한번 가보라고 말해 주었다. 약속시간인 10시보다 삼십 분 쯤 늦게 두 사람의 칠레인 친구 리나가 왔다. (여기 사람들도 삼십 분씩 늦는 게 기본이다.) 그녀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는데 일반적인 칠레인들과 달리 영어를 무척 잘했다. 우리는 리나의 차를 타고 갤러리에 바를 접목시킨 이색적인 곳에 갔다. 데미무어의 포스터 〈스트립티즈〉가 걸려 있는 테이블 앞에서 우리는 ‘악마의 성’이라는 칠레산 와인을 마셨다. 나는 얼마 전 한국에는 친미 성향의 대통령이 뽑혔는데 칠레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어떤 입장이냐고 물어보았다. 리나의 말에 따르면 미국에 대해 늘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언어의 한계에 부딪혀서 깊은 대화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와인을 마시고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스시바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서툰 솜씨로 젓가락질을 하며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피스코 사우어(Pisco sour)라는 칠레식 보드카를 마셨다. 원래는 투명한 색이지만 레몬을 타서 연노란색으로 보이는데 데킬라와 마찬가지로 잔의 주둥이에 소금을 발라서 마신다. 그리 독하진 않다.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며 나는 농담을 던졌다.

“난 여행하면서 아프리카 산타, 아시안 산타, 유럽 산타 다 봤는데 칠레 산타는 대체 어떻게 지상으로 내려오지? 썰매도 없는데 말야.”

그러자 안나는 “그래도 오리지널 산타는 핀란드인이야”라고 끼여들었고, 리나는 “썰매가 없으니까 서핑하고 오겠지”라고 받아쳤다. 우리는 오랜만에 까르르 웃었고 새벽 네 시쯤 숙소에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부지런히 순수예술 뮤지엄(Museo de bellas artes)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언제나 컨템퍼러리 아트에 관심을 갖는다. 현대 미술만큼 언어 제약 없이 현재의 예술계 상황을 즉각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분야는 없을 것이다. 나는 뮤지엄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희한한 상황을 보았다. 두 명의 남자가 교차로에서 교대로 저글링을 하고 있었다. 특이한 건 그들이 신호를 기다리는 차 앞에서 저글링을 벌인다는 것이다. 거의 30초의 시간 동안 그들은 전력을 다해 저글링을 선보이고 사라져 버린다. 그들은 곧 돈을 요구하며 차들 사이를 돌아다니지만, 그 아찔한 순간에 선뜻 지갑을 꺼내서 동전을 쥐어줄 만한 여유가 되는 사람은 얼마 없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힐끗 본 후 좀 더 안전한 예술지대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고 화려한 고전주의 양식을 본딴 듯한 미술관 안에는 이상한 전시가 하나 열리고 있었다. 천막처럼 허름하게 지어진 집 안에 더러운 개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다. 집 아래에는 모래가 깔려 있고 한 옆에서는 흑인 여자가 파라솔 옆에서 책을 읽고 있다. 사실 그녀는 진짜 흑인이 아니라 밝은 피부의 칠레인 배우 마리아나였다. 마리아나는 책을 읽지 않으면 개의 뒷바라지를 하거나 집 청소를 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 작품의 콘셉트가 뭐냐고 물었다. 그녀는 칠레의 신나치주의자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냐고 하니까 소수지만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리아나는 내게 그 작품을 설치한 아티스트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프란치스코 파파스 프리타스(Francisco Papas Fritas)라고 하는 24세의 남자로 까만 안경을 낀 자그마한 체구가 마치 ‘젊은 우디 알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양팔과 등에 문신을 하고 있었고 미술과 관련된 정규 교육도 받지 않아선지 자유분방하고 유쾌했다. 그리고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마침 그의 친구이자 또 다른 아티스트인 안드레아가 왔다. 그녀는 파파스 프리타스(스페인어로 ‘프라이드 포테이토’라는 뜻)가 칠레 내에선 이미 유명한 예술가라고 얘기했다. 작품 속의 개는 신나치주의자들을 상징하고 흑인 분장을 한 여자는 그들이 업신여기는 짙은 피부의 인종을 뜻한다고 했다. 신나치주의자들이 백인 그룹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한숨을 내뱉으며 ‘우리와 같은 색을 지닌 칠레인이니까 우스운 일’이라고 대답했다. 칠레에는 주변 국가, 특히 페루에서 불법 이민자나 노동자가 많이 들어와 있는데, 아마도 그 흑인 여인은 그 하층계급을 상징하는 듯 했다.

 

 

나는 좀 재미난 사람을 만난 느낌이 들어서 내일 다시 뮤지엄에서 만나 한 잔 하러 가자고 했다. 파파스 프리타스는 흔쾌히 허락했고 다음날 그는 두 명을 더 끌고 나왔다. 마리아나와 호세였다. 마리아나는 앞서 말한 대로 연극, 영화에서 활동하는 현역 배우로 김기덕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김기둑’이라고 발음했다.) 호세는 주로 건축에 관련된 미니어처를 만드는 일을 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호세와 파파스 프리타스 대신에 마리아나가 얼마 전에 일어난 황당한 해프닝을 들려주었다. 파파스 프리타스의 전시에 불만을 품은 윗사람이 내려와 작품의 콘셉트가 뮤지엄의 분위기와 맞지 않으니, 이곳저곳을 뜯어고치란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와 작가 자신 말고는 사실 이런 작품이 설치될 것이란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는데, 막상 일이 발생하자 큐레이터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고 했다. 파파스 프리타스는 이에 항의를 했고 각종 언론에 이를 공개할 뜻을 갖고 있었는데, 그제야 윗사람은 조용히 물러났단 것이다.

파파스 프리타스는 맨발 위에 아무렇게나 신은 회색 신발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WART’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은 ‘War’와 ‘Art’의 합성어라고 한다. 전쟁과 예술과의 관계가 자신이 다뤄 보고 싶은 주제라고 하는데, 그는 칠레 정부와 순수미술 관계자들을 그 전쟁의 대상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는 천 페소짜리 지폐의 인물의 얼굴에 수염을 찍찍 그리더니, 한쪽 위에 유창한 영어로 이렇게 썼다. ‘Fuck Chile Government’

그날 밤 호세는 자기 친구의 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호세의 친구는 마리아 호세인데 스물일곱 살의 비디오 설치 아티스트였다. 그녀는 일본 문화를 좋아해서 오타쿠나 일본 패션들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고, 집에는 소바용 숟가락과 젓가락 등을 구비해 둘 정도였다. 곧 있으면 학비가 싼 아르헨티나에 2년 간 사진과 영상을 공부하러 갈 예정이지만, 언젠간 일본에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어쩐지 말투와 표정에서 묘한 동심의 세계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리아’가 너무 흔한 여성 이름이라며 굳이 남자 이름인 ‘호세’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우리는 이야기가 잘 통해서 새벽 두 시에 뜬금없이 두 명의 아코디언 악사가 나타나 〈아멜리에〉의 주제곡을 연주하면서 거리를 지나갈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DJ이자 음악 프로듀서이기도 한 파파스 프리타스는 한국 노래를 알려 달라고 나를 졸랐다. 나는 어렵사리 아리랑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 파파스는 아리랑이 콜롬비아의 음악과 비슷한 데가 많다고 하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노래 실력은 엉망진창이었다. 다음 시간까지 연습을 더 해 오라고 하고 우리는 이틀 뒤 다시 만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한국의 구정 바로 다음날이었다. 우리는 오후에 아시아 교민들이 사는 파트로나토(Patronato)라는 지역을 찾아갔다. 큰 한국 교회가 두 개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대형 한국음식 가게에 가서 떡국용 떡과 고추장 등을 사왔다. 저녁에 마리아 호세의 친구이자 시나리오 작가 곤살로와 호세의 여자친구이자 미대생인 빅토리아, 그리고 파파스 프리타스가 찾아왔다. 다행히 파파스 프리타스의 아리랑은 〈도라지〉처럼 들리는 것 빼고는 좀 나아졌다.

나는 떡국과 떡볶이, 만두 등을 준비했고 그들은 매운 음식을 잘도 먹었다. 마리아 호세의 집에 빔 프로젝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작년에 만든 단편 영화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대사가 거의 없는 영화였기 때문에 대부분 작품을 이해했고 박수도 쳐 주었다. 작품 상영이 있고 나서 마리아 호세는 2007년 11월 MAC이라는 또 다른 컨템퍼러리 갤러리에서 봤다는 한국 작가전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을 희화한 듯한 선글라스 낀 장군이 다른 군인들과 함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설치 작품 등이 인터넷에 사진으로나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당시엔 모두 그 전시 얘기만 했을 정도로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리아 호세의 작품을 볼 차례였다. 그녀는 예전에 관객들에게 선보인 〈관찰 Observatorio〉을 보여 주었다. 집요하게 손톱을 뜯는 모습을 클로즈업한 3분짜리 영상물이었다. 나는 손톱의 반 이상이 잘려 나가는 장면에서 경악했다. 마리아 호세는 당시 관객들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면서, 자신은 그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입구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각뿔 모양의 공간 깊숙이 작품을 설치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같은 작품을 달리는 트럭에도 설치해서 행인들이 보고 소리 지르는 장면도 번외로 찍어 놓았다.) 그녀는 한때 너무 불안한 기분이 들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그녀의 자신감과 조르주 바타이유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관능적인 예술관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디오스 Adios’(잘 가)란 인사를 건네면서도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잊지 않았다.

냇킹콜을 들으며 쓰기 시작한 이번 여행기는 비올레타 파라의 노래와 함께 황홀하게 끝나간다. 오늘로 여행한 지 딱 6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여행에 대한 매너리즘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좀 쌓여 있었는데, 칠레에 와서 비로소 그것을 다 날린 기분이다. 피카소와 미로와 가우디, 파파스 프리타스, 마리아 호세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들 명랑하단 것이다. 나는 명랑함이 세상을 구원하며, 모든 창조적인 존재들은 명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신념이 있다. 내가 칠레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명랑성의 회복이다.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리테라트(Literart)이다. 리테라트는 Literature와 Art의 합성어로, 문학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을 종합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쉽게 말해 ‘명랑한 크로스 오버 예술’을 나는 꿈꾼다. 상상력은 모든 것을 이룬다. 상상력은 명랑하다. 그리고 명랑한 나야말로 가장 나답다.《문장 웹진/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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