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돋아난 흰 벌레가 혀를 차고 허물어지는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외 1편


  김기주

 

  처음 돋아난 흰 벌레가 혀를 차고 허물어지는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 꺼내들면 언제나 나머지 책들은 몸이 기울어졌다.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도 없는 책들. 서로 몸을 기대고 버티고 서 있다. 언젠가 자신의 몸뚱이를 해부할 손짓을 두려워하면서…….

   매일 밤 잠을 잔다는 것이 내게도 그러했다. 완전히 눕지 못하는 그 비스듬한 자세로 나는 잠을 잘 때만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이불에 둘둘 말아 두었던 살아 있다는 착각. 일어나 보면 땅콩껍질 같은 부스러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번호표를 떼어내고 독방에서 잠을 청하는 죄수처럼, 슬픔을 임대하고 있는 방. 펼쳐지지 않는 밤바다가 천장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고, 부표인 듯 바다인 듯한 먹빛이 눈썹 사이로 파고 들어왔다.

   기댈 곳 없는 밤바다가 내는 아픈 목소리. 밤새도록 그 소리를 듣다 왔는지 축축해진 온몸을 부르튼 빨래판에 문지른다. 구정물이라도 빠져나오길 기대하지만 흘러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속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밤, 가장 차가운 비판의 칼날로 내 목을 쳐내도 너의 피가 흘러나올 것이다. 어떤 책 한 권은 겁탈을 당해 신음소리를 낼 것이고 별들은 목을 버리려 달아날 것이다.

 

 

 

 

 

  희석

 

 

 

 

   사과로 리본을 만들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할머니 젖가슴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었을 때
뼈만 남은 그 사과
오물오물 잇몸으로 내어주던 리본을 매고
아버지, 조등 내걸린 골목을 빠져나갔었네
입속으로 부는 모래바람을 막을 길 없었네

 

  어제 TV에선 귀머거리 노인이 부인 노랠 듣는 것이 취미라던데

 

  귓속 바닥에서 반짝이는 정지된 음을, 불모지의 연기를 피워 올리며
피워 올리며

 

  그대여, 사과로 리본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새벽녘 덜 깬 나의 소변과 아버지의 소변이 섞일 때마다
변기 안에서 만난 아버지는 사과를 물고 계시네
내가 아직 만들 수 없는 작은 리본을 만들어
오물오물 목에 걸어 주시고,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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