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흐름


나쁜 흐름

 

이주란

 


 

 

이주란-소설삽화

 

 

 

 

   1

 

   지난여름 내내 나는 집 밖엘 나가지 않았어.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말이야. 갇혀 있는 기분이었어.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어. 거실에서 방으로, 방에서 거실로 장소를 옮겨가면서 누워 있었어. 남편하고도 같이 자지 않았어. 그래도 작년엔 가끔 하긴 했는데.
   남편은 혼자 일어나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출근을 했어. 밥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식사라고 하긴 뭐 하고 끼니쯤이 맞는 것 같아. 오후나 저녁쯤 나간 남편은 새벽에 들어와 조용히 잠들곤 했어. 우린 이제 겨우 서른 살인데 마치 일흔 살처럼 행동했어. 작년부터 남편은 종종 장롱 안에서 발견되곤 했어. 왜 거길 들어갔느냐고 하면 자기도 모르겠다는 거야. 처음엔 답답했는데 금세 포기했어. 뻔하잖아, 어둡고 좁은 곳엘 스스로 들어가는 사람 심리란 게. 나? 난 그래도 거실이나 방을 왔다 갔다 하잖아. 늘 누워 있긴 하지만 책상 밑에 숨는다거나 쌀통 안에 들어간다든가 하지는 않잖아. 이 정도면 잠시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보통의 인간쯤 되지 않겠어?

 

 

   2

 

   작년 여름엔 남편하고 특히 돈 문제로 걱정이 많았어. 그래서 여름이 끝나 갈 무렵에 임신을 당분간 미루기로 하고 취직부터 하기로 결정했어. 생각보다 임신하는 것도 어렵더라구. 3년간 피임도 안 했는데 임신이 되지 않았어. 취직을 하기로 결정하고선 작은 세무서에 지원을 했어. 경력이 좀 있었어. 면접을 보러 갔는데 창문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어. 손바닥 두 개를 붙인 것만 한 창문 하나. 그게 전부였거든. 세무사는 50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는데 안구가 엄청나게 돌출된 사람이었어. 코도 크고 입도 크고 그런 사람. 그래서 호탕해 보이긴 했는데 무섭기도 했어. 허리 둘레는 42인치쯤 되려나. 그래서인지 여름인데도 어두운 색 양복을 입고 있었어. 어디 다른 데 면접 보고 있나? 세무사가 말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어. 사실 당시로선 다른 곳에 면접을 볼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대답이 그렇게 나왔어. 그럼 몇 분 시간을 줄 테니 지금 결정하도록 하지. 내일부터 나올 건가, 말 건가? 세무사가 물었어. 나는 당황했어. 그런데 사람 마음이 웃긴 게, 갑자기 결정을 하라니까 왠지 오케이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거야. 여기서 일하게 되면 제자리가 어딘가요? 하고 물었더니 세무사가 구석 자리를 가리켰어. 보니까 컴퓨터가 15년은 되어 보이더라구. 제 컴퓨터가 저건가요? 하고 물었더니 왜, 낡았나? 좋아, 바꿔 주지. 세무사가 말했어. 나는 내일부터 출근하겠다고 대답했어. 세무사가 웃었어. 나는 집에 와서 옷 정리를 했어. 아무리 작은 세무서라도 집에서 입는 옷을 입고 갈 순 없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던 거야.

 

 

   3

 

   나는 다음날 출근을 했어. 나 외의 직원은 둘뿐이었어. 오전 11시쯤 되었을까. 젊은 남자가 와서 내 컴퓨터를 새 컴퓨터로 교체하는데 김 부장이란 사람이 너무 심하게 놀란 티를 내는 거야. 왜 그런가 싶었어. 그때 세무사가 한마디 했어. 미스 리가 학벌도 좋고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아무튼 마음에 든다 이 말이야. 저 미스 아닌데요. 내가 말했더니 세무사가 말했어. 그냥 미스 리로 하지. 나는 아침 9시까지 출근했고 저녁 6시가 되면 땡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을 했어. 가끔 두통이 오면 타이레놀을 먹었어.

 

 

   4

 

   세무사를 제외한 직원 둘, 그러니까 김 부장과 미스 홍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인간관계란 어딜 가나 뻔한 것 같아. 며칠 지내 보니까 미스 홍의 얄미운 구석을 금방 알겠더라구.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김 부장이 한 업체를 개인 명의로 신고해 주고 18만 원을 받았는데 그걸 셋으로 나눠 나랑 미스 홍에게 6만 원씩 나눠 준 거야. 사실 우리에겐 그 돈을 나눠 줄 필요가 전혀 없잖아. 워낙 세무서가 박봉이니까 김 부장이 격려금 차원에서 우리에게도 호의를 베푼 거지. 이목구비가 뚜렷해 배포가 클 것 같았던 세무사는 100원 한 푼은커녕 수고했단 말 한마디도 잘 안 하는 사람이었거든. 수고했단 말이 나와도 늘 김 부장 입에서 나왔어. 아무튼 김 부장이 6만 원씩 챙겨줬는데 그걸 미스 홍이 세무사한테 일러바친 거야. 나는 세무서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그 돈을 끝까지 받지 않았는데 미스 홍은 희한하게 돈은 돈대로 받고 고자질은 고자질대로 했어. 김 부장이 세무사에게 추궁을 당하면서 질책을 받고 있을 때 미스 홍이 내게 말했어. 미스 리, 이 기사 봤나요. 라면 값이 100원이나 올랐대요. 이제 비싸서 라면도 못 사먹겠다, 그렇죠? 그 일로 나는 미스 홍이 완전히 싫어져 버렸어.
   세무사는 돈을 정말 안 써. 그는 종종 내게 간식 심부름을 시키곤 했어. 옆 건물 일층에 있는 떡집에서 떡을 사오라고 하거나 세무사 일층에 있는 패스트푸드 전문점에서 햄버거를 사오라고 하곤 했지. 그런데 떡도 한 팩, 햄버거도 하나. 세무사는 그렇게만 사오라고 했어. 직원이라고 해봐야 달랑 셋인데 세무사는 자기 것만 사오라고 했어. 그러니 내 컴퓨터를 바꿔 준 게 얼마나 놀랄 일이었을지 알겠더라구. 종종 김 부장이 자기 지갑에서 10,000원을 꺼내주면서 우리 것도 사오라고 하곤 했지. 나는 김 부장이 사주는 간식이 왠지 먹기 싫었어. 미스 홍은 사정이 달랐지만.

 

 

   5

 

   남편은 집 근방에서 가장 큰 마트의 정육 코너에서 일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계속했으니까 군대에 다녀온 2년을 제외하면 8년을 꼬박 고기만 썬 거야. 처음에 사귀기 시작하고 데이트를 할 때 남편에게선 늘 생고기 냄새가 나곤 했었어. 희한하게 그는 하루 종일 고기를 썰면서도 퇴근하고 또 삼겹살을 먹으러 가자고 하곤 했었어. 우리는 늘 묽은 쌈장을 주는 싸구려 수입 삼겹살을 먹었어. 내 생각에 남편은 정육점에서 일하는 게 천직인 것 같았어. 근데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남편은 누군가가 직업을 물어 오면 마트 직원이라고 대답했어. 내가 정육 코너라고 첨언이라도 하면 어쩐지 싫어하는 것 같았어. 왜인지는 모르겠어. 물어봤다가 전에 없이 짜증을 크게 낸 적이 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굳이 그러지 않았어.

 

 

   6

 

   우리는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어. 그때가 둘 다 스물일곱 살이었으니까 사실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어. 그냥 첫눈에 반해서 했어. 첫눈에 반했어도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지. 전혀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래. 그런데 그때는, 모르겠어. 눈에 뭐가 씌었는지 삼천만 원짜리 원룸으로 그를 따라 들어가 그냥 살아버린 거야.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빌라의 반지하 방이었는데 다섯 평쯤 되었던 것 같아. 처음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물론 거기엔 내가 부모님을 떠나고 싶어 했던 심리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알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부모님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리고 커서도, 결혼을 해서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거. 사실 신혼집이랄 것도 없었지. 새로 산 것도 없었어. 달랑 그릇 세트 하나만 사서 들어갔어. 가지고 간 내 옷들도 그냥 남편의 행거에 걸었어. 제대로 된 옷장도 없었어. 잘 안 입는 옷들을 반쯤 정리해 상자에 넣었는데, 눈에 안 보이니까 입을 수 있는 옷들도 안 입게 되었어. 상자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잘 안 들더라구. 집들이도 못 했어. 지인들이 놀러오면 집 구경을 시켜 주고 밖으로 나가 삼겹살이나 탕수육을 안주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갔어. 난 돈 욕심 없잖아. 이이만 있으면 정말 행복해. 나는 집에 놀러온 친구들에게 쿨한 척하면서 말했어. 말하자면 집 구경이라기보단 방 구경인 셈이었지만. 거기서 일 년 반을 살았어.

 

 

   7

 

   전세 자금 대출을 받아 집을 옮기기로 했어. 작은 방 두 개와 거실이 있는 집이었어. 공항 근처의 이주단지였어. 1층은 작은 유통회사였고 2층부터 5층까지는 살림집이었어. 우리는 4층으로 작년 가을 이사했어. 냉장고와 텔레비전, 세탁기와 장롱을 새로 샀어. 이제 우리에겐 더 행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어. 집들이를 새로 했어. 남편도 나도 집들이를 하고 또 했어.

 

 

   8

 

   이사를 한 지 일주일도 안 됐을 때였어. 나는 위층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치기 시작했어. 5층엔 이 근방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중년 부부가 살고 있었어. 그들은 밤마다 집에서 마늘이나 생강을 찧거나 깍두기를 담갔어. 천장에서 자꾸 쿵쿵, 딱딱. 홍두깨로 바닥을 내리치거나 칼로 도마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리고 믹서를 돌리는 소리도 어찌나 큰지. 처음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어. 근데 남편은 그 소리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어. 내 생각엔 남편 성격상 위층 부부와 부딪치기 싫어서 그런 것 같았어. 이럴 때 남자가 올라가서 강하게 말 좀 해주면 좀 좋아? 남편은 퇴근 후면 라면을 끓여먹고 게임을 하느라 바빴어. 나는 세 번 중에 한 번쯤만 위층으로 올라가서 시끄럽다고 항의했어. 그러면 그들은 말했어. 우린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요.

 

 

   9

 

   그 즈음 남편의 야근과 회식이 잦아졌어. 새로 온 직원도 없었고 밤까지 왜 고기를 썰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렇다니까 그냥 그런 줄 알았어. 의심을 하거나 따지기 시작하면 남편이 너무 피곤해할 것 같아서 나는 쿨하게 남편의 직장 생활을 이해해 주고 싶었어. 쿨한 척을 한 거지. 실제로 사생활까지 눈 감아 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어, 그때는. 아무튼 남편의 야근이 잦아지면서 나 혼자 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많아졌어. 퇴근길에 순대나 튀김 같은 걸 사와서 술을 마시는 거야. 나 원래 술 좋아했던 거 알지? 술을 마시면 위층의 소음이 덜 들리는 것 같기도 했어. 물론 기분 탓이었겠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날, 술에 취한 채 위층으로 올라간 적도 있었어. 네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건물이잖아. 삽시간에 내가 술을 마시고 위층에 올라가 소리를 질렀다는 소문이 퍼졌어. 사과를 하기도 뭣 하고 모르는 척 지내는 것도 뭣 하더라구. 그때부터 집이 조금 싫어지기 시작했어. 차라리 출근을 하는 게 좋았어. 가을부터 겨울까지 그냥 그렇게 산 것 같아. 위층은 매일 밤 마늘을 빻거나 믹서를 돌렸고 우리는 다달이 대출 이자를 갚느라 골골댔어. 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캄캄하더라구. 물론 전세 기간이 만료되면 끝나겠지만 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또다시 집을 구해야 하고 또다시 돈을 빌려야 하니까. 청약? 넣으려고 했지. 그런데 그거, 되도 걱정인 거 몰라? 우린 예물도 없이 결혼했어. 구시대의 유물 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것 역시 척이 아니었을까 싶어. 생활에 쪼이니까 예물이라도 받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어. 팔려고. 다른 이유 없어. 팔 수 있어서야. 지하 3층까지 집 좀 지으면 안 돼? 반지하보다 더 쌀 거 아냐. 싸기만 하면 어디든 가서 살 수 있는데, 난. 왜? 반지하 이하에선 사람이 살 수 없나 보지?

 

 

   10

 

   서른 살이 되었다고 해서 뭔가 다른 인생이 펼쳐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어. 새해를 맞았고 1, 2월은 지난 가을, 겨울처럼 흘러갔어. 설날 같은 거? 평소와 다르지 않았어. 3월 신고를 앞두고 세무서가 바빠졌어. 5월 종합 신고까진 매일 야근이 예정되어 있었어.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스트레스는 없었어. 굳이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할 필요도 없었고. 남편의 야근과 회식은 여전했어. 시간이 날 때마다 남편을 의심해 보곤 했는데 피곤해서 오래 할 순 없었어. 돈이 없으니 바람을 피우기도 쉽진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어.
   나는 매일 자정을 넘겨 퇴근했어. 업체가 는 이유는 김 부장 덕분이었어. 망해 가던 세무서에 김 부장이 들어왔고 수십 개의 업체를 물어 왔대. 복잡한 업체도 다 김 부장 담당이야. 유령장부가 필요한 업체도, 늘 실수가 많은 업체도 다 김 부장이 맡아서 해결해. 내 생각엔 김 부장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세무사는…… 모르겠어. 어느 봄날의 황금 같은 금요일이었어. 세무사가 김 부장을 해고했어. 개인적으로 세무신고를 해주다가 또 걸렸는데, 김 부장도 순순히 그만두겠다고 했더라는 거야. 김 부장이 세무사와 얘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나는 점심시간을 틈타 병원에 가려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어. 김 부장이 내려놨던 인터넷 창을 올려 맞고 사이트에 접속하면서 내게 말했어. 이런, 지기랄. 미스 리, 올 때 벼룩시장 부탁해. 김 부장보다 내가 더 심란했어. 내가 알았다고 대답하자 김 부장이 말했어. 이런, 지기랄. 쌌네, 쌌어.

 

 

   11

 

   퇴근 후에 집에서 감자 과자를 안주로 캔 맥주를 먹고 있었어. 토요일 밤이었고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어. 남편은 그날도 전화가 되지 않았어. 프로그램에 한 남자가 나왔어. 카메라가, 앉아 있는 그의 하체만 비추고 있었고 음성은 당연히 변조되어 나왔어. 잘 좀 해주세요, 그 말은 곧 병원에서 못 나오게 해달라는 말이거든요? 그가 말했어. 보호자가 아들이니까 아들이 원하면 어쩔 수가 없어요.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죠. 아시잖아요. 다 돈 때문인 거. 하하하하하하. 그가 웃었어. 그는 길게 웃었어. 웃음소리를 듣는데 왠지 그가 내 남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말투도 그렇고 길게 웃는 저 웃음소리도 그렇고……. 그리고 저 바지 말이야. 몇 달 전에 없어진 거랑 똑같은 바지거든. 바지 세 개 중에 하나가 없어졌는데 내가 그걸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남편은 그날 새벽 4시쯤 들어왔어.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그냥 피곤해 보이기만 했어. 늦어서 미안하단 말도 없었어. 문득 우리 사이가 전 같지 않은 것 같은 게 신경 쓰였어.

 

 

   12

 

   일을 하던 중에 무의식적으로 귀를 후볐어. 귓구멍 전체를 막을 만큼 큰 혹이 났는지 새끼손가락도 안 들어갈 정도였어. 이틀 전에도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무실 옆 건물에 이비인후과가 있었어. 증상이 어떠세요? 데스크 직원이 물었어. 귓속에 손가락이 안 들어가요. 내가 말했어. 귓속에 뭐가 났단 말씀이세요? 직원이 물었어. 네, 하고 내가 대답했어. 그 년이 차트에 뭔가를 적는데, 이상하게 얄미웠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쩐지 나를 비웃는 것 같았어. 한쪽으로 살짝 올라간 그 주둥이를 찰싹 때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어.
   삼십 분 넘게 대기했다가 진료실로 들어갔어. 자, 어디가 많이 아프신가요? 의사가 물었어. 젊고 잘생긴 사람이었어. 향수 냄새가 났고 목소리가 좋았어. 말투가 사무적이면서도 다정한 게, 묘한 느낌이었어. 의사가 내 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어. 나는 끌려갔어. 그는 한 손으로 내 귀를 이리저리 움직였고 다른 한 손으론 카메라 위치를 조정했어. 뭔가 부끄러웠어. 화면을 보세요. 의사가 말했어. 화면 속엔 내 귓속이 비춰지고 있었어. 완벽하게 동그란 살구색 혹이 귓구멍을 거의 막고 있었어. 구슬 같았어. 동그랗고 예뻤는데, 그게 어쨌든 혹이잖아. 징그럽기도 했어. 심하시군요. 아플 거예요, 참으세요. 의사가 말했어. 아아…… 아…… 차라리 소리를 지를 것을, 잘못했단 생각이 들었어. 혹을 찢는 주사바늘은 굵고 날카로웠어. 간호사가 흘러내리는 피를 빨아들였어. 고마워요. 의사가 간호사에게 말했어. 나는 마치 생살이 빨려 나가는 것 같아 이를 꽉 깨물었어. 피가 계속 나올 거니까 솜을 좀 넣어 둘게요. 그는 강제로 섹스를 한 사람처럼 내게 말했어. 간호사가 소독약을 묻힌 솜을 의사에게 건넸고 그는 내 귓속을 솜으로 채웠어. 갑갑할 정도로 많은 양의 솜이었어. 꽉 끼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어. 간호사가 붕대를 건넸고 의사가 내 귀를 붕대로 감았어. 내일은 머리를 묶고 오세요. 반창고가 자꾸 머리칼에 달라붙자 의사가 다정함을 뺀 말투로 말했어. 나는 고분고분하게 네, 하고 대답했어. 주사를 맞고 가라고 해서 주사실로 갔어. 항생제라서 좀 아플 거예요. 간호사가 그렇게 말하고 엉덩이에 주사를 놨어. 그리고 주사를 놓자마자 주사실을 나갔어. 나는 엉덩이에 댄 소독 솜을 꾹 누르면서 주사를 맞은 자세 그대로 좀 있었어. 좁은 주사실은 약품 냄새로 가득했어.

 

 

   13

 

   음식을 씹는 소리나 말하는 소리 같은 건 그렇다 치고, 침 삼키는 소리나 습관적으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그렇게 큰 줄 몰랐어. 그리고 양치할 때 입안을 헹구는 소리.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만큼 크다니까? 그것뿐인 줄 알아? 세수를 할 때 콧속에 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소리까지 들리는데! 지금까지 나는 세수할 때 콧속에 물이 들어갔다 나가는 줄도 모르고 삼십 년을 살았던 거야. 알고 보니까 나 말이야, 굉장히 시끄러운 사람이었어. 귓구멍을 솜으로 막고 붕대를 감아 놨더니 위층에서 나는 소음 대신 내 안의 소음들이 날 괴롭히기 시작했어. 나는 대체 하루에 침을 몇 번이나 삼키는 걸까? 혼잣말처럼 묻긴 했는데 그래도 남편이 옆에 있으면서 대답을 안 해주니까 서운했어. 되도록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시끄러웠어, 너무.

 

 

   14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원에 가는 길이었어. 멀지 않은 곳에 남편이 일하는 마트가 있었어. 거기서 파는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할까 싶었어, 남편 얼굴도 볼 겸.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어. 마트에 가서 김밥을 사고 정육 코너로 갔어. 남편은 거기 없었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냐고 물었더니 마트라고 말했어.

 

 

   15

 

   상태를 보고, 괜찮으면 약만 드시면 될 거예요. 의사가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말했어. 나도 향수를 살까 보다 싶었어. 어제보다 괜찮아요? 의사가 물었어. 네, 괜찮아요. 내가 말했어. 혹이 다시 났는데 뭐가 괜찮아요. 의사가 말했어. 이거 어제보다 심각한데? 의사가 말했어. 이상했어. 어제보다 괜찮은 기분이었거든. 갑자기 ‘괜찮다’는 게 정확히 어떤 기분인 건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 의사가 다시 생긴 혹에 주사바늘을 찔러 넣었어. 나는 이를 꽉 깨물었어. 왜 이런 게 생기는 거죠? 내가 물었어. 아픈 것보다 더 아파 보여야 되니까, 오늘도 붕대로 감겠습니다. 의사가 말했어. 나는 그림을 그릴까 보다, 하고 생각했어. 나도 고흐 정도는 알아.
   시간을 가까스로 맞춰 사무실에 들어왔어. 아이 참. 달걀 값도 올랐어. 이제 라면에 달걀도 못 넣어 먹겠다. 어쩌지? 미스 홍이 혼자서 앓는 소리를 했어. 저 년을 어쩌지? 나는 생각했어. 그쯤 되니까 미스 홍 목소리도 듣기 싫었어. 아 참. 세무사님이 들어오시래요. 세무사의 호출이 날 기다리고 있었어.

 

 

   16

 

   이렇게 바쁠 때 꼭 그렇게 외출을 해야겠나? 세무사가 말했어. 아파서 병원에 간 건데요, 세무사님. 내가 말했어. 그럴 거면 미스 리는 그냥 간호사를 하지 그래. 세무사가 말했어.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사무실을 그만두고 싶어졌어. 그만두고 싶어졌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지. 죄송합니다.
   자리로 돌아와 새 컴퓨터 앞에 앉았어. 타이레놀 한 알을 먹었어. 맞은편 자리에서 미스 홍은 떡을 먹고 있었어. 떡이란 게 원래 쫄깃쫄깃하잖아. 근데 쫄깃쫄깃 소리를 내는 게 너무 얄미워 보였어. 모르겠어. 내가 이상한 건가? 이런, 지기랄. 또 쌌네. 옆에서 김 부장이 말했어. 우연히 뒤집은 패에서 김 부장이 자뻑을 할 가능성?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 너무 비관적인 것 아니냐구? 응.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니야. 그날도 아마 야근을 했을 거야. 1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처음부터 다시니까. 나는 여러 번 처음부터 다시 했어. 짜증나지 않냐구? 응, 짜증나지 않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

 

 

   17

 

   새벽 한 시쯤 퇴근했어.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어. 오랜만에 마주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어. 텔레비전에서 당신 같은 사람을 봤어. 모자이크가 되어 있는데도 희한하게 당신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말했어. 그래서 그 의사가 좋다고? 남편이 말했어. 향수 냄새 얘기라니까. 내가 말했어. 그러자 갑자기 남편이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으면서 따지기 시작했어. 누군가 따져야 한다면, 오늘 꼭 부부싸움을 해야 한다면 따질 사람은 내 쪽 아냐? 황당해서 오히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내가 침묵하는 동안 남편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어. 한참을 그러더니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났어. 저기. 나 아직 말 안 끝났는데. 내가 말했어. 시끄러워. 남편이 말했어. 남편은 정말 나를 오해하는 걸까? 정말 나를? 나는 오히려 그런 남편이 더 의심스러웠어. 우리는 오해를 했고 또 오해를 받았어. 하지만 오해는 누구나 하는 거고 누구나 받는 거잖아. 나는 나가는 남편을 잡지도 못하고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
   남편을 내보내고 약을 먹었어. 원래 하루에 세 번 먹는 건데 약을 먹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져서 잠들기 전 한 번만 먹었어. 나간 지 이십 분 뒤에 남편은 들어왔어. 나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어. 남편이 겉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왔어. 안심이 됐어. 나는 잠에 빠져들었어. 몇 시간쯤 잤을까.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설핏 잠에서 깼어. 소리의 진원지는 장롱인 것 같았어. 너무 놀라서 비명도 안 나왔어. 강도가 든 것 같았어. 이불을 움켜쥐고 주변에 흉기가 될 만한 게 있나 눈을 굴리는데 장롱 문이 쓰윽 열렸어. 남편이었어. 당신, 거기서 뭐 해? 내가 물었어. 잤어. 남편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어. 그때 남편의 휴대전화가 울렸어. 지금 나갈게. 남편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어. 이 밤중에 또 어딜 가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말했어. 버리러.

 

 

   18

 

   다음날 나는 해고를 당했어. 해고 사유는 내 몸이 약한 거라고 했어. 병원엘 너무 자주 가서 업무에 지장이 많대. 할 말이 없었어. 이제 사무실엔 미스 홍만 남게 될 거였어. 김 부장과 나는 5월 종합신고가 완료될 때까지만 나오라는 말을 들었어. 잘 됐다 싶기도 했어. 근데 남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다른 데 구하면 되긴 한데, 그래도 당장 한 달이 급하잖아, 우린.

 

 

   19

 

   퇴근을 하고 집에 온 게 밤 9시쯤이었나. 어쩐 일인지 그날도 남편은 집에 있었어. 저녁은? 내가 물었어. 라면. 남편이 말했어. 밥 먹지 그랬어. 내가 말했어. 밥 말아 먹었어. 남편이 말했어. 밥만 먹으란 뜻이잖아. 내가 말했어. 왜 또 그러냐? 남편이 말했어. 회사 다니기 싫어. 내가 말했어. 그럼 그만둬. 남편이 말했어. 누가 안 그만두고 싶어? 내가 말했어. 나 마트 그만두고 다른 데 알아볼 거야. 남편이 말했어. 왜? 내가 말했어. 돈 많이 버는 일 하게. 남편이 말했어. 모르겠어. 기분이 묘했어. 미안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어. 돈 많이 주는 일이 어떤 일인데? 내가 말했어. 그냥 사람들한테 잘 해주면 돼. 남편이 말했어. 사람들한테 잘 해주는 일? 내가 말했어. 응. 그냥 거기서 못 나오게만 하면 돼. 남편이 말했어. 거기가 어딘데? 내가 말했어. 넌 몰라도 돼. 남편이 말했어.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어. 아무튼 당장 사무실 그만둬.

 

 

   20

 

   며칠 병원에 못 갔어. 귀가 너무 답답해서 혼자서 붕대를 풀고 하루를 보냈어. 귓속을 볼 수가 없으니까 더 답답했어. 점심시간에 병원에 갔어. 진료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어. 그러곤 귓속이 잘 보이도록 미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어. 진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의사와 간호사의 발소리가 들렸어. 치료 몇 번 받으신 거죠? 낯선 목소리가 내게 물었어. 나는 네, 하고 대답했어. 의사가 내 귓불을 잡고 귓속을 소독했어. 소독약을 바르는 손길에서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어. 시원했어. 소독약 한 방울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갔어. 나는 침을 삼켰어. 치료 끝났습니다. 이제 약만 드시면 될 것 같군요. 의사가 말했어. 나는 고개를 돌려 의사를 바라봤어. 그 의사가 아니었어. 주사실에서 간호사가 내게 말했어. 항생제라서 아플 거예요. 이 병원 의사와 간호사는 모두 몹시 친절했어. 마지막이니까 괜찮아요. 내가 말했어. 진료비를 계산하면서 데스크 직원에게 물었어. 저 치료해 주시던 의사 분은 오늘 안 나오셨나요? 직원이 대답했어. 아, 안양에 있는 병원으로 가셨어요. 직원 말로는 그는 원래 심각하다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고 했어. 내 귓속에 난 작은 혹 말이야. 사실 그리 심각한 건 아니었대.

 

 

   21

 

   다음날 나는 출근을 하지 않았어. 세무서에서 전화가 12통 걸려왔는데 받지 않았어. 그리고 낮부터 다시 찾아왔어. 위층의 소음들이. 나는 자주 불면의 밤을 보냈어. 그렇게 이주쯤 지났을까. 남편이 아침에 출근을 하지 않았어. 내가 깨웠더니 벌떡 일어나서 말했어. 나 사실 일 그만둔 지 좀 됐어. 이미 다른 데 나가고 있어. 그게…… 밤에 하는 일이었나 봐. 오후까지 남편은 잠만 잤어. 중간에 깼을 땐 게임을 했고, 내겐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어. 남편은 전과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어. 그런데 이상한 건 그런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단 거야. 남편이 낯설었어. 궁금한 걸 물어보면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그에게 비밀이 생겼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어. 여름이었어. 그해 여름이 얼마나 더웠는지, 기억하지? 끔찍했어, 정말. 남편은 밤 9시쯤 나가서 새벽 6시쯤 들어왔어. 도대체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 건지 알아야 하잖아. 내가 알아야 하잖아, 우린 부부니까!

 

 

   22

 

   하지만 남편은 침묵을 택했어. 수십 번 싸웠어. 무서웠어, 남편이. 말을 안 하니까 너무 무서웠어. 어디 딱히 상의할 데도 생각나지 않았어. 그때부터였어.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기 시작한 거 말이야. 가끔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고 집안일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만 있었어.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을 때가 많았어. 남편은 혼자 일어나서 라면을 끓여먹고 게임을 하다가 출근을 했고 새벽에 들어와선 그냥 잤어. 어디서 끼니를 해결하고 오긴 했나 봐. 늘 집에 들어와서는 물만 한 잔 마시고 바로 잤어. 집 안이 엉망이 되어 가고 있는데도 나한테 별 말이 없었어. 여자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어. 그래서…… 그게 더 이상했어.

 

 

   23

 

   운전을 한다고 그러더라구. 무슨 응급차 운전을…… 한다고 그러더라구…….

 

 

   24

 

   몰랐어. 결혼기념일인지도. 수요일이었나, 목요일이었나. 아무튼 평일이었는데 남편이 출근을 했다가 한 시간 만에 들어온 거야. 국화꽃 한 다발이랑 목걸이. 14k 목걸이를 사왔어. 눈물이 났어. 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급하게 몸을 섞었어. 남편이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탕수육하고 고량주를 주문했어. 술을 전부 마시고 우리는 한 번 더 몸을 섞었어. 그리고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겠어. 깨보니까 또 남편이 없는 거야. 돌 것 같았어. 피우지도 않는 담배 생각이 나서 화장대 위며 창틀 위를 뒤졌어. 없었어. 진짜 돌 것 같았어. 위층에서 쿵쿵, 소리가 났어.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어. 현관문을 발로 차면서 소리를 질렀어. 위층에선 아무 반응이 없었어. 얼마나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어. 삼층에 사는 여자 둘이 올라와서 내게 진정하라고 말했어.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소리 질렀어. 그때 이층에 사는 중년 부부가 올라와서 내게 말했어. 지금 그 집에 아무도 없어요. 저기 식당 아직 영업 중인 거 안 보여요, 새댁?

 

 

   25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졌어. 남편이 장롱에서 나왔어. 나도 모르게 남편의 뺨을 쳤어. 맞자마자 남편이 내 뺨을 쳤어.

 

 

   26

 

   그러니까…… 아직 헤어질 생각은 없긴 한데…… 그게…… 뭐랄까. 싫지만 대안이 없는 선거 같은 거야. 흑인 대통령은 뽑아도 여성 대통령은 못 뽑겠다. 작년 겨울에 남편이 한 말이야. 내겐 남편이 그래. 이렇게 살면 살았지 혼자가 되는 것은 두려웠어. 어쩌다 이렇게 됐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우리에겐 각자 애인이 있었어. 우리는 첫눈에 반해 사귀던 사람을 매몰차게 차버리고 3개월 만에 결혼했어. 그게 고작 3년 전의 우리 모습이라니까? 믿겨지니?

 

 

   27

 

   오랜만에 거울을 봤는데 내 얼굴이 새까맣더라구. 나도 모르게 거울에 침을 뱉었어.

 

 

   28

 

   그러니까 그게 올 봄의 막바지쯤이었어. 오랜만에 외출 결심을 했어. 결혼 전에 살던 동네로 몇 정거장 버스를 타고 나갔지. 낡은 산책로를 지나 주유소를 지나 다시 시내로 나왔어. 땀이 너무 많이 난다는 게 느껴졌어. 꼴이 말이 아니었어. 씻고 나왔는데 희한하게 안 씻은 사람처럼 더러워 보였어. 나는 화장품 가게로 들어갔어. 내가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내게 휴지를 건넸어. 나는 휴지를 건네받아 에어컨 앞으로 갔어. 땀을 닦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낫더라구. 어느새 다가온 직원이 다짜고짜 내 손등에 로션을 찍어 바르면서 말했어. 화이트닝 효과가 아주 좋아요. 어떠세요? 향도 산뜻하죠? 나는 손등을 코에 갖다 댔어. 향이 마음에 들었어. 이걸로 주세요. 나는 화이트닝 효과가 있다는 스킨과 로션을 구입했어. 그리고 가게 문을 열고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서 에센스까지 구입했어. 기분이 좋았어.
   화장품 가게에서 나와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어. 뒤를 돌아봤어. 김 부장이었어. 여기서 뭐 해? 김 부장이 물었어. 네? 나는 놀라서 되물었어. 행색이 부끄러웠어. 아니 그냥…… 하고 말끝을 흐렸어. 김 부장이 내 손목을 잡아끌고 몇 걸음을 걸었어. 나는 끌려갔어. 힘이 없었어. 왜 작은 포장마차 같은 거 있잖아, 붕어빵이나 닭꼬치를 파는. 김 부장이 거기로 나를 데려갔어. 이거 하나 먹어. 김 부장이 떡과 햄이 순서대로 꽂혀 있는 꼬치 하나를 내게 내밀었어. 이거 파시는 거예요? 내가 물었어. 투잡. 김 부장이 말했어. 곧 비가 올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어. 미스 리, 특별히 떡 하나 더 꽂아 줄게. 김 부장이 내가 들고 있던 꼬치를 뺏어서 맨 위에 떡 하나를 더 꽂았어. 아니, 괜찮아요. 내가 말했지만 이미 늦었지 뭐. 비오는 날은 공치는 거야.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면 들어가려고. 김 부장이 말했어.
   그새 사거리의 신호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한 바퀴를 기다려야 할 판이었어. 나는 꼬치를 먹기 시작했어. 그냥 전형적인 떡과 햄의 맛이었어. 떡을 하나 먹고…… 햄을 하나 먹고…… 떡을 하나 먹고…… 햄을 하나 먹고…… 마지막에 끼워진 떡은 도저히 못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곧 신호가 바뀔 것 같았어. 버리고 싶었어. 김 부장은 새 꼬치를 만들고 있었어. 김 부장이 꼬치에 빨간 양념을 묻히면서 나를 보고 웃었어. 보고 싶었어, 미스 리. 김 부장이 말했어. 나는 마법에 홀린 듯 마지막 떡을 입안으로 구겨 넣었어. 김 부장이 내가 들고 있던 나무 꼬치를 받아 버렸어. 씹고 또 씹고, 씹고 또 씹었는데…… 입안에서 떡은 줄지 않았어.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그러자 사거리의 모든 빗방울과 먼지와 소음이 내게로 달려드는 것 같았어. 신호가 바뀌었어. 어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어. 걸음을 떼긴 했는데 채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나는 내가 평생 먹어 온 떡과 햄과 먼지를 모조리 길바닥에 뱉어내기 시작했어. 길을 건너려던 사람 몇몇이 짧은 비명을 지르면서 내게서 멀어졌어. 미스 리! 괜찮아? 김 부장이 내게 다가왔어. 나는 떡과 햄을 전부 뱉어내고도 계속해서 침을 뱉으면서 헛구역질을 했어. 죄송해요. 부장님, 한테, 침 뱉은, 거, 아니에요. 헛구역질을 하느라 띄엄띄엄 말했어. 그 와중에 빗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왔어. 초침소리처럼 일정했어. 일정하게 소리는 점점 크게 부풀었어. 비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도 내 눈에는 선명했어. 수많은 먼지들이 점점 제 몸을 부풀리면서 내 귓구멍과 콧구멍과 입안으로 달려들었어. 사람들은 모두 길을 건넜고 오직 나만이 그 자리에 멈춰 있었어. 나는 계속 침을 뱉었고 계속 사과를 했어. 온몸의 힘이 풀렸어. 화이트닝 효과가 있다는 스킨과 로션과 에센스가 바닥으로 뒹굴었어. 그때 누군가 소리쳐 물었어. 아가씨, 괜찮아요?

 

 

   29

 

   김 부장이 화장품을 주워 줬어. 나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인사도 안 하고 급히 길을 건넜어.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었어. 심호흡을 했어. 그러자 속이 조금씩 진정되는 것 같았어. 저 멀리 작은 포장마차 하나가 보였어. 그러자 또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어. 토할 것 같았어. 버스를 타려면 그 길을 꼭 지나야 했어. 빨리 집에 가고 싶었어. 그 작은 포장마차는 고구마빵을 파는 데였어. 너무 맛있어서 고구마를 현상 수배한다는 내용의 홍보 전단이 붙어 있었어. 그리고 홍보 전단과 함께, 비에 젖은 종이 한 장이 위태롭게 주황색 천막에 붙어 있었어. 계고장이었어. 수차례에 걸쳐 자진철거 지시를 하였으나 철거를 하지 않아 계고하니, 2013년 5월 1일까지 자진철거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위 기일까지 이행치 않을 시에는 시에서 도로법 제40조 및 도로 무단 점용자에 관한 과태료 징수 조례에 근거하여 과태료를 부과함은 물론 강제철거합니다. 강제철거는 붉은 글씨로 되어 있었어. 나는 마치 붉은색에 유혹당한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계고장을 떼어냈어. 손에 쥔 계고장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어. 나는 빠르게 걸었어. 버스가 곧 출발할 것 같았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었어.

 

 

   30

 

   완전한 여름이 왔어. 여름 내내 나는 집 밖엘 나가지 않았어.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다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화이트닝 효과가 있다던 스킨과 로션과 에센스는 개봉되지 못했어.

 

 

   31

 

   그제인가 어제인가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는 걸 느꼈어.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거 못 느꼈어? 확실히 여름하곤 달랐어. 왜 이러다가 또 추석 전쯤에 잠깐 더워지잖아, 여름처럼. 어떻게 아냐구? 그 정도는 나도 알지. 이제 몇 달 후면 서른한 살이 되고, 지금까지 서른 번의 가을을 겪어 왔으니까. 있잖아. 뭐 하나만 물어볼게. 아직 겪어 보지 못한 것들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어때? 나? 내가 왜? 난…… 아니, 잠깐만. 내가 이상한 건가? 이 정도면 그냥 잠시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보통의 인간쯤 되는 거 아니야?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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