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惡記) 5~10


악기(惡記)

 

조연호

 

 

 

 

   5

 

   “자상(刺傷)과 화상을 비교한다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그것은 둘 다 반사운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왜 자통(刺痛)은 불처럼 존중과 외경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통에 관계되는 사회의 여러 가지 금지가 불과 관계되는 여러 가지 금지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중)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편이 낫다. 지옥의 벌레는 죽지 않으며, 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마가복음』 9장 43~44절.)
   두 개의 불 사이, 차이점은 이러한 것이다; 박무 속의 태양이 오래도록 주장해 비로소 우리의 눈에 사물에 대한 적응이라는 익숙한 빛을 건넬 때의 불과, 명백한 윤곽을 향할 때의 우리의 눈이 가진 명징이 달의 건너편에 의해 명징의 원천을 도움 받을 때의 불이 단지 사실의 행위 속에서도 그 행위의 중심이 자신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회상자의 의지에 의해 분별된다는 것. 가령 눈부신 플라타너스 잎이 더 잃을 것 없는 자에게서조차 마음이라는 하나의 동경(憧憬)을 빼앗듯이,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없는 자가 세상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쓸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결국 행하게 될 파국적이며 음울한 저술 행위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 자신에 의해 이미 저술된 것이었음을 깨닫듯이, 혹은 잘 정리된 목록의 도서를 다 읽고 ‘뭘 더 읽어야 되는지요?’라고 묻는 아이의 집요처럼, 악이 선을 반영한다는 믿음으로부터 기나긴 작고(作故)가 발생한다.

 

 

   6

 

   내게 혼신을 다해 인간이고자 할 때 나의 신들은 현자의 불운한 정신을 따를 적에만 오로지 가르침을 벗어난다. 지옥에 대한 승리가 인간의 전망대 아래 외쳐지고 있는 것이야말로 이 전쟁에서의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획득의 상서로움일 것이다. 비록 공포로, 자기기만에서 자기 확신으로, 모든 싸움의 흔적을 자신의 화원으로 되돌린 선(善)의 방도가 그러한 것처럼, 악(惡)은 좀 더 간결한 방식의 선(善)이다.

 

 

   7

 

   누군가는 편의를 위해, 또 누군가는 자신의 반조(返照)에 더 이상 벌을 내리지 않는 침소를 위해 이 작은 재앙을 꿈의 형상에 묻어 둔다, 언젠가 그토록 극렬히 거부했으나 서서히 잊혀 이후 긍정으로써밖에 아주 짧게 시인되어야 하는 그것을. 인간에겐 자신이 신의 한 방편이며 동시에 그 신의 대가이기도 한 대지로부터, 모든 것보다 월등하여 한 닢의 보상물도 인간에게 요구하지 않는 하늘에게까지, 또한 월등하게 그 둘 사이에 놓인 금언(金言)으로부터 외면되어 왔다. 우리는 그런 낮에, 오로지 드물고 오로지 숯의 숨결인 그런 낮을 통해서만 검을 수 있다. 이빨을 검게 칠한 짐승이 동절(冬節)의 무늬에 젖어 비로소 밤의 난숙기(爛熟期)에 족적을 찍을 수 있게 될 무렵이면, 하루의 정점을 향해 맑아져 가는 모든 것은 우리의 말과 달리 사람의 목이 아니라 신의 목구멍에서 나와 뇌성(雷聲)의 유사음이 되어 퍼져 간다. 이 악천후는 인간이 바란 가장 극명한 대비의 보람과 재앙을 원한다. 악필(惡筆)을 거둔 나뭇가지 사이로 책은 잉태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어머니의 지위로써 나를 간병하리라.

 

 

   8

 

   전번제(全燔祭)의 날에 애인의 마녀들은 짐승의 얼굴을 닮아서 산을 오르고 논쟁을 한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었던 땅에 우리가 살았던 땅이 있다.”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며 그러나 다시 오지 않는 시간으로부터 시간은 온다. 그리고 시간은 모든 것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있으며 명칭으로 함께 있지 않다. 무한은 반복되는 긍정이 자신을 반대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를 탈간(脫簡)한 온역자(瘟疫者)로부터 옮아붙은 불길을 끄고 사람의 영혼이 영혼의 합리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두 손에 혹자(或者)를 묻고 나서야 채도(彩度)는 검조(檢潮)를 바다에 떨어뜨릴 수 있다. 적구일지(謫咎日誌)에 적혀 아주 오래 굳어진 불변의 색으로, 시간은 비로소 거울의 고요한 윤리를 맞이한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럽다.”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타살로는 안심할 수 없었던 밤이 물레에 찔린다.

 

 

   9

 

   파우스트나 돈키호테의 예처럼 악과의 첫 만남이 서재에서 시작되는 것은 그다지 생경한 일이 아니다. 악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기회는 전적으로 자료와 같은 구실로만 가능하다. 그 비슷한 예가 무덤에도 있다. 무덤은 우리 성실함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현실에 기반한 것처럼 보이는 이 허상도 기억이 현상된 것일 뿐, 또한 거기로부터 들려오는 것은 우리의 말일 뿐, 흙을 얹어 만든 하나의 독백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고독과 관련된 어떤 것도 침묵하지 못하게 하는 이 성실성은, 내면이 적게 표현되거나 글이 적게 쓰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성실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불성실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로, 누군가의 시 쓰기가 계속되는 한 누군가의 복수가 계속된다. 고요히 밝아 오는 아침놀에 내 목이 잘려 걸리는 상상이 가능하려면 의혹은 질문이 믿음 편에 설 때 그 대답으로서 생기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먼저 나의 미래를 발견해야 하리라. 기나긴 틈 사이 쥐들의 적요 속에, 나의 두뇌는 만유(萬有)와의 몽유(夢遊)를, 인간에 의해 내려진 판결이 인간에 의해 번복되는 형벌을 떠돈다. 그 어떤 자연의 재능도 그 재능이 멈췄을 때만큼 활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순혈의 악은 우리가 한때 정념을 부여하며 내보냈던 목소리가 우리의 감각에서는 사라졌지만 어딘가 남아 떠돌다 다시 우리 귀에 들려오는 낯선 메아리처럼 현재를 부인하고 타인의 것이 된 자기 소유품을 박탈의 감정이자 후회의 감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악한 것이다. 그리하여 열광적이었던 정념은 지금의 열광에 의해 충분히 헛된 온도가 된다. 구체적이지 않은 것은 의미를 갖지 않고 그것을 위한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므로 의미가 적재되고 확산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사람을 분노로 만들 뿐 아니라 미래를 현재의 악행에서 되쓰게 한다.

 

 

  10

 

   시인의 시간은 언제나 자정이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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