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나비


검은 나비

 

이청해

 

 

 

 

   1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윗집 사내가 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까딱해 목례를 보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내는 휠체어를 접어서 앞에 방패처럼 세우고 있었다. 웬 휠체어를? 하는 눈으로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아, 예, 아내가 요양병원으로 갔어요. 사내가 복화술사처럼 말했다. 그의 입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고 소리도 괴이했다. 이제 필요 없어진 휠체어를 동사무소에 반납하러 간다는 말이 뒤이어 웅웅웅 들려왔다. 사내가 내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었지만 엘리베이터 안에 사내 말고는 소리를 낼 사람이 없었다. 단아했던 그의 아내가 떠올랐다. 이사 오자마자 욕실에 물새는 일이 생겼고, 윗집에 올라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오랜 병중이었는데, 암녹색 안색 속에 해말갛고 아리따웠을 지난 이 남아 있었다. 그 뒤로 사내와 나는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아, 그렇군요…… 나는 더 이상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드디어 요양병원으로 갔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오랜 병구완으로 사내의 얼굴은 저승사자가 물어가다 시원찮아 뱉어버린 꼴을 하고 있었다. 사십대 후반일 테지만 백년은 늙어보였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멎었다. 사내가 휠체어를 세로로 돌리며 우물쭈물하는 바람에 내가 먼저 내렸다. 발 하나를 복도에 내놓는 순간 화다닥 무엇인가가 등짝에 달라붙었다. 검은 나비 떼였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그것들을 몸에서 떼어냈다. 걸음을 빨리해 아파트 마당으로 내려섰다. 햇빛이 환하게 내리쪼이고 있었다.

 

 

   2

 

   오전 내내 배달을 했다. 주문량은 작년보다 늘었다. 앨캐피탄 사료상회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축산 농가들과 함께 자폭하지 않아도 되니까. 올해에는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이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작년처럼 넋 놓고 하늘만 바라보는 사태는 면한 것이다. 매일매일 조마조마하긴 했다. 사료 값은 올해만 해도 30퍼센트나 올랐고, 앞으로도 계속 오를 전망이었다. 소 값은 폭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키우던 소들을 생짜로 굶겨 죽이고 문 닫는 축사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발 빠른 행보인지도 몰랐다. 모두들 작년에 불행을 당한 집들을 부러워했다. 구제역으로 벼락을 맞은 집들은 보상을 받았으니까. 키우던 동물들을 떼로 생매장시키고 정신이 홱 돌아 축산을 떠난 이들이야말로 행운아 중의 행운아였다.
   트럭을 가게 앞에 붙여 댔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자동응답기를 점검했다. 주문서와 계산서들을 정리해 서랍에 넣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송이네 식당으로 갔다.
   된장국 냄새가 풍신하게 코를 감싸 왔다. 내장이 위산을 분비하며 맹렬하게 요동쳤다. 우거지 갈비탕을 대짜로 시켰다.
   뚝배기가 나오자마자 급하게 퍼먹었다. 언제나 이 순간만 되면 내가 완전히 노동자가 되었구나 하고 느끼곤 한다. 부두노동자들처럼 하루 종일 사료포대들을 가대기치는 일이 내 일이니까. 25킬로그램짜리 포대를 두세 개씩 어깨에 메어다 트럭에 싣고, 또 트럭에서 내려 축사의 창고에 쌓아주고……. 오른 손 검지와 중지, 약지가 젓가락 사이로 눈에 들어왔다. 손등 쪽으로 손을 뒤집었다. 손톱이 이리 배틀 저리 배틀 쭉정이 말라붙듯 아물었지만 그래도 이제 손 비슷하게 되었고, 기능도 거의 살아났다. 재작년에 다른 손가락들에서 손톱을 부분적으로 파내다 뿌리째 이식한 것이 잘 심어진 것이다. 이제 살아가는 데 장애요소는 없었다.
   노동은 신성한가, 나는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대답할 수가 없다. 내가 선택한 일이기는 하지만 스포츠와는 달랐고, 아직 한 움큼의 비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순전히 몸만을 움직여 오직 그것만큼만 보상을 받는 단순 정직한 직업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노동을 하면서도 항상 앨캐피탄 상회의 영업을, 수지타산을 헤아려야 하는 상인이었다. 순수한 노동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송이가 커피를 뽑아 가지고 왔다.
   “엄마는?”
   “배달 가셨어요.”
   모녀 둘이서 하는 식당이었다. 나는 크림과 설탕이 듬뿍 든 자판기 커피를 훌훌 마셨다. 걸쭉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달고, 텁텁했다. 찬 물을 한 모금 삼키는 것으로 텁텁함을 가셔넘겼다. 블랙커피나 에스프레소를 즐기던 시절이 떠올랐다. 해외 원정에서 비롯된 버릇이었으리라. 매킨리에서, 요세미티에서, 알프스에서……. 극한 도전의 시간들은 끓어오르던 열망과 함께 한꺼번에 스러져 버렸다. 영광이 아니라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건 날아간 다섯 개의 손마디보다 더한 불구가 되어 오래오래 나를 옭죄었다. 나는 그 세계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부끄러워 구경꾼으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는 잠적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연기처럼 아예 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곳으로 왔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주무르다가 이 사료가게를 인수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남기신 작은 시골 집 하나가 밑천이 되었다. 인수금이 부족했던 내가 ‘횡성 사료’라는 멀쩡한 간판을 떼어내고 ‘앨캐피탄 상회’라는 새 간판을 해 단 이유를 나는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도 일금 100만 원이나 들여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사람이, 아는 사람 모두를 피해 이곳으로 내려온 사람이 왜 과거를 상기시키는 상호를 지어 마빡에 붙였는지 내 자신도 알 수가 없다. 어언 8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커피 마시는 게 꼭 원숭이 같아.”
   송이가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원숭이? 내가 그렇게 요망스러워?”
   “아니, 귀엽다고.”
   “욕이냐, 칭찬이냐?”
   “오물쪼물 손 놀리는 게 너무 웃겨서……”
   송이가 윗잇몸을 내보이며 환하게 웃는다. 딴에는 호의의 표시인 모양이다. 요즘 아이들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나는 송이를 건너다본다. 스물 세 살의 젊음이 꽃처럼 피어 있다. 그랬던가……. 남에게는 내 손놀림이 오물쪼물 이상해 보이나……. 노란 스웨터 때문인지 송이가 앉아 있는 부근은 개나리 울 같고 유채꽃밭 같다. 어질어질하다. 나보다 20년 가까이 어린 젊음. 나는 시선을 비낀다. 나는 저 시절에 무얼 했던가?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가슴으로 솨솨 지나간다. 20년 후의 삶이 이런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오직 한 곳으로 향하던, 암벽에만 미쳐 지내던, 하루하루 더욱 난이도 높은 바위벽에 도전하던, 나날이 고산거벽으로 향하던……. 다른 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미래를 위해 일상을 전부 바칠 때 나는 비현실적인 허공의 길을 걸었다. 그만큼 그 세계가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그 매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식당을 나가 가게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추동리의 한씨네 축사에만 다녀오면 되었다.
   트럭 짐칸에 사료포대들을 실었다. 150개 세어 가지런히 쌓은 뒤 다시 확인했다.
   시동을 걸었다. 뷰웅 하며 차가 정다운 대답을 해왔다. 중고지만 예상 밖으로 오래 타왔고, 이제 수명이 다 돼가고 있었다. 그래도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려고 덜덜덜 움직일 채비를 하는 것이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운전만 했다. 겨울이 가고 있었고,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 전선줄 흔들리는 소리가 가속페달을 밟을 때마다 귀에 먹먹하게 울었다. 뼛속을 콕콕 찌르는 듯한 초봄의 바람에 사람들이 웅크리며 지나갔다. 들판에서는 아낙들이 머리를 머플러로 잔뜩 싸매고 나물을 캐고 있었다.
   축사에 한씨는 없었다. 여윈 소들만 뚜릿뚜릿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한참동안 녀석들 앞에 서 있었다.
   소의 눈망울처럼 순수한 것이 있을까.
   커다랗게 쌍꺼풀 진 눈이 촘촘한 속눈썹 아래서 사심 하나 없이 물기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순하고 겁 많은 눈동자들…….
   포대들을 가대기 쳐 창고에 쌓았다.
   오며 가며 녀석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의 먹을거리를 위해 태어난 놈들이었다. 언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보았다. 인도적이라는 말을 어디까지 사용해야 할까? 인간에게 잡아먹히기 위해 태어났지만 살아 있는 동안 쾌적하게 살게 하는 게 우리의 도리일까? 굶기지 않으면 인도적일까?
   조곡리 쪽으로 나왔다. 산비탈 아래, 하천부지 옆에 둥그스름한 둔덕들이 보였다. 작년에 생긴 둔덕들이었다. 짐승들의 혼이 달려들까 봐 둔덕 부근을 지날 때마다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다.
   송림을 지나 다리를 건너 가게로 돌아왔다.

 

 

   3

 

   윗집 사내를 두 번 더 보았다.
   한 번은 아파트 마당에서였다.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사내가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냥 지나쳤다.
   말끔한 양복차림이어서인지 약간 젊어보였다.
   또 한 번은 상가 앞에서였다. 그는 두툼한 성경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상가 3층에 있는 교회에 가나? 그런 생각을 했고, 그가 교회에 다니던가? 떠올려 보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사내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었다. 아니, 한 번도 성경책을 끼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뭐 보지 못할 수도 있긴 하지만.

 

 

   4

 

   눈을 떴다.
   고즈넉한 어둠이 방안에 균등하게 퍼져 있었다. 안온함에 잠겨 나는 어둠을 들이마셨다. 친근하고, 부드러웠다. 평생 입던 옷 같았다. 암막 커튼 롤러 위로 노란 햇살이 금색 띠를 이루며 들어와 있었다. 커튼을 치고 잤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쳤다고 하기에는 커튼이 너무 얌전하고 완전하게 내려져 있었다. 묘선이 왔다 간 모양이군. 자리를 살펴봤지만 이부자리에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았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아무리 늦게 일어나도,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눈이 정말 편하다고 암막커튼을 권한 것은 묘선이었다. 어두운 시절을 견뎌온 그녀다운 발상이었다. 그녀는 폭력적인 남편에게서 심야에 벌거벗겨진 채 쫓겨나 여러 해 숨어살면서 지독한 불면증과 신경과민에 시달린 것 같았고, 밤새 잠을 못 이루다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어 환한 대낮에 깨어났을 때를 가장 고통스러워했다. 갑자기 눈을 찌르는 햇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채 맞는 그 빛을 그녀는 유리파편 같고 면도칼 같다고 했었다. 그녀처럼 햇빛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암막커튼을 치고 나자 아침에 깨어났을 때 마음이 안온하고 너그러웠다. 시야가 편안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 정도면 한 인생 견딜 수 있다고까지 생각되었다.
   아홉시가 넘었겠어.
   나는 이불을 걷어내며 일어났다.
   세수를 한 뒤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묘선이 차려놓고 간 아침상이 상보에 덮여 있었다. 보자기를 벗기자 된장국과 갈치조림, 김치, 나물들이 서로를 아우르며 정답게 나를 기다렸다. 아무리 말해도 데워 먹지 않는 것을 알기에 국까지 퍼놓고 갔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 울컥 밀려들었다. 3년이 지났건만 나는 아무런 확언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가게 안을 청소했다. 종업원 없는 가게이니, 모든 걸 혼자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피워 물고 달력을 바라보았다. 벌써 23일이었다. 이 달에는 수지타산을 간신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달력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23일인데, 그림은 의식에 처음 들어온 것이다. 나는 조금 미안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
   짙은 강 안개 속에 배가 한 척 떠있다. 뗏목 같기도 하고 작은 바지선 같기도 하다. 중국인가? 동남아 오지인기? 우리나라 배는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림이 아니라 사진인 듯. 뿌연 안개 때문에 얼른 식별이 되지 않지만 배에는 세 남자가 타고 있다. 앞에 한 사람, 뒤에 두 사람이 있는데, 뒤편 사람들은 밧줄을 끌어당기고 있고 앞사람은 짙은 강 안개 속을 바라보고 있다. 이 사람에게서 뭔가 느낌이 묻어난다. 일상의 여느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사색적이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강안개가 아니라 검은 심연, 즉 그 자신의 심상인 것 같다. 저녁은 아니고 새벽인 듯. 사진 위쪽으로 여명이 비쳐들고 있다. 여명에 드러난 강 건너편은 온통 하얀 상고대 숲. 하얗고 동글동글한 나무들의 정수리를 새벽햇살이 연분홍색으로 아름답게 비추고 있다. 한 그루 한 그루 솜사탕 같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앞쪽의 남자가 나인 것 같다. 나는 피식 웃었다. 철학적으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가? 아니지. 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남자들이 나겠지. 혹시 둘 다인가? 내 자신에 침잠해 사막 속을 헤매는 나와 일상의 노동을 하는 나.
   짙은 강 안개와 강 건너의 아름다운 상고대 숲.
   분홍색 햇살이 눈 덮인 나무들을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비추는 곳.
   안개를 헤치고 강을 건너 저 피안으로 가고 싶다.

 

 

   5

 

   멜로디언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세웠다. 분명 윗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아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오신다더니…….
   아내가 가버리자 적적해서 멜로디언을 샀나? 아니면 친척 아이들이 놀러왔나?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오다가……. 서투르긴 했지만 멜로디가 곧잘 이어졌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윗집에서는 계속 멜로디언 소리가 났다. 올해도 과아꽃이 피이었습니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모두가 단조의 조금 슬픈 느낌이 묻어나는 동요들이었다.
   윗집 사내에게는 아이들이 없었다. 어디에 위탁해 놓았는지는 몰라도. 그랬다고 해도 그토록 오래 단 한 번도 집에 데려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가 아는 한 사내는 아내와 둘이 살았고, 아이를 갖기 전부터 아마 아내가 병마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니 병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이들이 부는 거라면 친척 아이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무지 아이들 기척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이라면 뛰든지 쿵쾅대든지 까르르 웃든지 무슨 티가 날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사내가 멜로디언 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앉아서? 서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안방에서 부는 모습도 우스웠고, 베란다에서 부는 모습도 코미디 같았다. 복화술사처럼 괴상한 소리를 내는 입으로 저런 노래들을 연주한다? 백 살 노인 같은 사내가 초등학교 앞에 가서 멜로디언을 사는 장면도 연상되지 않았다. 나는 내기를 거는 마음이었다. 얌전한 아이들일 거야. 그런 아이들도 얼마든지 많잖아. 수줍은 여자아이인지도 모르지……. 악보를 보고 연습을 하는지 멜로디언 소리는 군데군데 멈추어 서서 잘 안 되는 소절을 반복하기도 하고 사이 음이 매끄럽게 넘어가도록 곱게 다듬기도 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멜로디에 열중한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섬세하면서도 감성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6

 

   사내와 나는 안개 속에 서 있었다. 장사는 잘 됩니까? 사내가 물었다. 그는 여전히 복화술을 쓰고 있었다.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괴상한 저음이 땅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울림이 워낙 커서 땅에 쩌억 금이 갔다. 그저 그렇지요, 뭐. 나는 뒷말을 삼켰다. 금 간 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발밑까지 균열이 왔다. 나는 온전한 땅으로 골라 짚었다. 그곳도 갈라져서 다시 온전한 곳으로 뛰어 건넜다.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사내가 서 있는 카펫만한 땅은 갈라지지 않고 온전했다. 나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는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아내가 죽은 뒤 점차 제 나이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사내 옆으로 건너뛰려고 했다. 그가 마술사처럼 엄지와 검지를 퉁기며 내 행동을 제지했다. 그러자 그의 양복 깃 안에서 검은 나비가 기어 나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검은 나비는 검은 넥타이 위로 올라가 더듬이를 사방으로 움직거렸다. 그러는 사이 또 한 마리의 검은 나비가 검은 양복 안에서 기어 나와 검은 넥타이 위로 올라갔다. 먼젓번 나비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두 번째 나비가, 세 번째 나비가 연이어 날아올랐다. 검은 나비들이 팔랑팔랑 하늘로 날아갔다. 분홍빛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나비들이 날아가는 모습은 불안을 배태하고 있으면서도 환상적이었다. 사내가 나비들이 날아간 하늘을 향하여 입김을 후우 불었다. 호응이라도 하듯 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졌다. 무서웠다. 땅들이 번개 형상으로 갈라지고 둔덕들이 여기저기서 열리며 아비규환의 사체들이, 숨넘어가는 절규가, 낭자한 피가 세상을 뒤덮었다. 지옥도가 거기 펼쳐져 있었다. 입에 흙을 문 짐승들의 단말마는 구덩이를 빠져나와 공기와 만나자마자 검은 나비로 화했다. 검은 나비 떼가 무더기 지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엄청난 숫자였다. 천수만의 새떼들보다 많았고, 중국의 메뚜기 떼보다 많았다. 끔찍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지구 최후의 날이었다. 검은 나비 떼가 까무룩 하늘 저쪽으로 사라지는 듯하더니 다시 까아맣게 날아와 설원 위에 내려앉았다. 흑백의 대조가 너무나 선명해서 섬뜩했다. 검은 나비들이 움찔움찔 크레바스(빙하의 균열로 생긴 틈이나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아아……. 나는 신음을 토해냈다. 나는 크레바스 안에 쿵 떨어져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검은 나비 떼가 폭풍처럼 날아와 나를 덮쳤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에도, 코에도, 귀에도 온통 검은 나비 떼였다. 검은 나비 떼가 내 몸을 사정없이 뜯어먹었다. 나는 검은 나비 떼를 떼어내려 몸부림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검은 나비 떼는 더욱더 그악스럽게 내 몸을 파고들었다. 뻘건 내장이 보였다. 허연 정강이뼈가 보였다. 악, 아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으으윽, 으으윽……. 나는 반벙어리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온몸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천정을 쳐다본다.
   언제나 분홍은 빨강이 되고, 빨강은 자주가 되고, 자주는 검정이 된다.
   분홍은 내 불안 같고, 빨강은 선혈 같고, 자주는 선혈이 굳은 죽음 같고, 검정은 죽음에 대한 내 죄책감 같다.
내 꿈은 언제나 분홍과 빨강과 자주와 검정 언저리에서 색깔로 맴돈다.

 

 

   7

 

   멜로디언 소리가 계속되었다.
   바아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끊일 듯 끊일 듯 어설픈 연주였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사안에 사안에 진달래꽃 피이었습니다……. 보오리이밭 사아잇길로 거얼어가면……. 아이는 언제나 음계로 불었지만 나는 가사로 새겨들었다. 나는 밤마다 멜로디언 소리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상하다는 생각에 젖었다.
   숨차지도 않나? 어떻게 저렇게 오래 부나?
   친척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주 놀러오는 것 아닌가?
   사내가 외로운 처지가 되어 가까운 친척이 아이들을 위로 차 보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말은 물론 매일 저녁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멜로디는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되곤 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구슬픈 가락에 내 마음도 가라앉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린이라면 저런 노래들을 연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교본이 있다 해도. 그렇다면 저 소리는 사내의 것이리라. 사내가 멜로디언으로 연주를 한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초등학교 적에 저런 걸 불었을까? 그것이 그리워 무료한 어느 날 동네 학교 앞에 가서 멜로디언을 샀을까?
   그래도 그렇지 날 저무는 하늘에 따옥 소리라니 너무하잖아? 외모만 삭은 게 아니라 마음까지 완전히 늙어버렸네. 나는 훗훗 웃었다. 그러나 엊그제 보았을 때 사내는 외모가 많이 살아나 있지 않던가. 백 살은 더 먹은 듯 추레하던 모습에서 사십대 후반의 제 나이로 거의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병구완하는 게 엄청 힘들었구나, 하고 나는 깨달았다. 중병의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가버리자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어디에다 부릴 데가 없어 멜로디에 자기 존재 전부를 싣는 것 같았다.
   사내의 연주 솜씨는 나날이 늘어갔다.
   그러더니 어느 날 플루트 소리가 들렸다. 웬 플루트? 나는 깜짝 놀랐다. 플루트는 진짜 악기가 아닌가? 누가 놀러왔나? 아니 클라리넷 소리잖아? 그러고 있는 사이 색소폰 소리가 되었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건반악기였다. 버튼만 누르면 모든 악기의 소리가 다 나는……. 아, 그거였구나! 그러면 그렇지 멜로디언을 그렇게 오래 불 수 있나?

 

 

   8

 

   그 날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그 순간.
   떠올리기조차 두렵다.
   나는 지난 8년간 그 일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오직 그걸 잊기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잊어지지 않았다. 끔찍한 꿈들로 형태를 바꾸어 지금도 나를 얽어매고 있다.
   8년은 긴 시간이다. 나는 서른세 살에서 마흔하나가 되었고, 겉으로는 평범해졌다. 이 작은 고장에서 사료상회를 운영하는 중년이 된 것이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이제 내 얘기를 객관적으로 해볼 수 있는 시점이 된 것 같다.

 

   나는 2004년 초에 중기 형과 함께 남아메리카 파타고니아로 원정을 떠났다. 피츠로이 산군의 세로토레 봉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클라이머들에게 세로토레 봉은 가장 매혹적인, 언젠가는 꼭 올라야 할 마지막 도전지 같은 곳이었다. 세로토레는 높이가 3133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 옆의 피츠로이 봉보다도 3백 미터 가까이나 낮았고, 다른 고봉들에 비하면 높이로는 전혀 견줄 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로토레가 클라이머들에게 그토록 인기 있는 이유는 산 윗부분의 수직 벽이 동면루트로는 2천 미터 가량, 서면루트로는 8백 미터 가량 우뚝 솟아 있기 때문이었다. 또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부분은 독수리 부리처럼 휘어져 있어 부리 아래의 눈 처마를 매달려 등반해가야 했다. 평균 1100 미터가 넘는 수직 벽과 맨 위의 독수리 부리는 실력을 연마한 클라이머들에게 군침을 삼키게 했다. 그것은 히말라야 등반에서 촐라체가 가지는 위상과 비슷했다.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해발 8848미터였지만 촐라체는 6440미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촐라체 북벽의 경우 등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4900미터 지점부터 정상에 이르기까지 무려 1500미터에 이르는 수직 벽이 도도한 모습으로 클라이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하얀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매혹적인 자태로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아 잠을 잘 수 없었다. 그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하면 할수록, 무엇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더, 더,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욕구. 더 어려운 곳으로, 더 난이도 높은 곳으로 온몸의 힘을 쥐어짜내 오르고 싶은 욕구.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 내 발자국을 찍고 싶은 욕구……. 클라이머들에게는 이렇게 촐라체나 세로토레가 인기 있었지만 등반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후원자를 구하기 힘들어서였다. 스폰서들은 일단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높은 봉우리를 선호했다. 에베레스트에 간다고 하면 후원자들이 줄을 섰다. 높이만으로 우선 광고효과가 크니까. 사람들은 산이 높을수록 오르기 어려운 줄 아니까. 그러나 중기 형과 나 같은 벽 등반가들에게는 트레킹피크인 에베레스트에 다시 오르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다. 스폰서들이 꺼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등반 성공도 때문이었다. 난이도 높은 봉우리들은 등정 성공률이 매우 낮았다. 40일, 50일, 혹은 두 달에 이르는 기간 동안 드는 경비가 상당액인데, 등정에 실패하면 후원 행위 자체가 실패하는 것이라 여겼고, 후원금이 아예 날아가 버린다고 생각했다. 도전하고 실패한 경험은 클라이머들에게는 소중했지만 후원자들에게는 마이너스 영수증일 뿐이었다.
   그런데, 2004년에 중기 형과 나는 운 좋게도 등반의 의미를 새길 줄 아는 스폰서를 만났다. 아웃도어 신생업체에서 우리 두 사람을 눈여겨보고 후원하기로 결정했고, 세로토레에 가고 싶다는 우리들의 의사를 존중해 준 것이다. 장애를 가진 그 회사의 오너가 대학시절 암벽등반을 했었다고 했다. 형과 내가 자일파트너가 된 지 13년째였고, 우리는 남들 못지않은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형과 나는 히말라야 8천 미터 급의 7개좌와 6, 7천 미터 급의 다섯 개 봉우리에 올랐고, 몽블랑의 동벽과 남벽을 올랐으며, 타궐 동벽과 프앙트 라쉬날에 오른 뒤 겨울철에 에귀 드 플랑 북벽에 올랐다. 또 알래스카의 데닐리 남벽과 맥킨리봉, 파키스탄의 트랑고 타워에도 오른 뒤였다. 바로 전 해인 2003년에는 요세미티의 앨캐피탄과 하프돔을 각각 열두 시간대에 돌파했고, 미들 캐시드럴을 두 시간 반 만에 올랐다. 요세미티에서의 한 달간은 내 인생의 꿈같은 나날들이었다. 이제는 세로토레만 남았다고 생각되었다. 지구상의 모든 봉우리들을 다 오른 건 아니지만 형과 나의 기분은 최후의 도전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걸핏하면 세로토레에 먼저 가느냐 촐라체에 먼저 가느냐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말다툼을 벌이는 내내 온몸이 달아올랐다. 우리는 젊었고, 젊음이 우리의 피를 들끓게 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원정길에 올랐다.
   2월 초였고, 서울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세력을 펼치고 있어서 꽁꽁 언 한겨울이었다. 빙하기가 닥친 거냐고, 삼한사온이 없어졌다고들 야단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엘에이로, 엘에이에서 파타고니아로 날아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복잡하게 바꾸어 타는 방법도 있었지만 산 밑까지 가는 데 힘을 빼기 싫었다.
   비행기 안에서 형과 나는 처음 자일 파트너가 된 날처럼 흥분해서 떠들었다. 엘에이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거의 시간을 잊었다. 내가 형을 만난 것은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산악부에 가자마자 3학년이던 형과 완전히 대통해버린 것이다. 형은 키가 크고 걸대도 좋고 목소리가 바리톤 급이어서 남자다웠다. 선인봉 거미길(일명 하늘길)에서 로프를 같이 묶고 크럭스를 통과하는 순간 나는 아, 이 까마귀라면 하고 마음을 헐었다. 그만큼 형의 동작은 정확하고 미더웠다. 형은 이미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삼촌 따라 암벽등반을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대학 3학년이던 그때 벌써 암벽 경험이 11년이 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여름 날 동네 아저씨에게 급보를 전하러 갔다가 우연히 병풍암에 올랐고, 그것을 본 암벽꾼들의 박수 세례에 떠밀려 암벽등반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해 봄에 나는 나를 데리고 재혼하셨던 어머니를 잃은 터였다. 나는 암벽을 만나자마자 밥 먹는 것도 잊고 빠져들었다. 나의 한 달은 어른들의 2년, 3년에 버금간다고 칭송들이 흘러넘쳤고, 나는 그런 말들에 고무되어 내 삶을 통째 바위에 걸었다. 그렇게 암벽에서 산 지 5년째에 형을 만난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때 형은 이미 거인이었다. 거미길에서 내려온 이래 나는 형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미친 듯이 선인, 인수에 올랐다. 형은 내가 군말이 없어서 딱이라고 또 좋아했다. 우리는 다른 파트너와 암벽에 오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우리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지만 암벽 이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꿈같은 사시사철이 흘러갔다. 졸업을 한 게 신기했다. 형과 나의 파트너십은 산악인들과 연맹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고, 그때부터 해외원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2월 11일에 브리드 웰 캠프에 도착했다. 세로토레를 공략하기 위해 모여든 산악인들이 베이스켐프를 치는 곳이었다. 텐트를 치며 형과 나는 짐 브리드 웰에 대해 주고받았다. 그는 미국의 천재적인 거벽등반가로, 이 캠프지를 개설하고 세로토레를 완등했으며, 요세미티와 알래스카 고봉의 수많은 루트들을 개척했고, 사람에게 명성은 양날의 칼 같아서 찬탄과 비방의 족쇄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기피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형과 나는 짐 브리드웰이 올라간 루트로 그대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마에스트리 루트라고도 하고 콤프레셔 루트라고도 하는데, 세로토레의 동남면 벽으로서 2천 미터 가량 수직으로 높이 솟아 있었다. 파타고니아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 거벽 중에서 가장 길고 험난한 코스였다. 초등은 1959년에 마에스트리와 에거가 했지만, 하산 도중 에거가 카메라와 함께 굴러 떨어져 사망하는 바람에 완등을 증명할 길이 없어 숱한 등정시비에 휘말렸다. 10여 년간 시비에 시달린 마에스트리가 1970년 콤프레셔를 짊어지고 신경질적으로 볼트들을 박으며 재등, 시시비비를 끝냈지만, 맨 위의 독수리 부리, 즉 눈 버섯은 진정한 세로토레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오르지 않았다. 마에스트리는 세로토레를 재등정하고 내려오며 맨 위 피치에 박았던 볼트들을 뽑아버림으로써 다른 클라이머들이 세로토레 정상에 접근하는 것을 봉쇄했다. 자기만 우뚝 서고 싶은 인간의 심리가 등반 세계에서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짐 브리드웰이 고난도 인공등반 기술을 구사해 그 피치를 통과, 결국 세로토레 정상에 올랐다. 이후 수십 년 동안 겨우 네댓 팀 정도가 세로토레 정상을 밟았을 뿐이다.
   형과 나의 생각으로는 우리 실력으로 충분히 오를 수 있는 곳이었다. 만약 신이 우리 편이라면.
   짐을 푼 뒤 다른 텐트 주변을 기웃거렸다. 스위스 팀과 오스트리아 팀, 미국 팀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텐트들을 쳐놓고 있었다. 스위스 팀의 공격조는 오늘 새벽에 출발했다고 했다. 우리 팀에는 서포트조가 따로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아르헨티나는 지구상 가장 멀어 비용 때문에 여러 사람이 올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형과 내가 모든 걸 조달하고 해결해야 했다.
   형이 버너를 켜고 밥을 지었다. 형은 밥 짓는 솜씨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고도가 높아서 물이 끓지도 않는 7천 미터 고봉의 바위틈에서도 촉촉한 밥을 지어냈다. 형은 밥을 지으면서 몇 가지 원칙을 고수했는데, 그 첫 번째가 다 지어진 밥이 코펠의 반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두 번째는 불의 조정에 관한 것으로 처음에는 센 불로, 끓은 다음에는 아주 약한 불로 줄여 뜸을 들여야 하고, 이때 뚜껑을 절대로 열어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삼사십 분 이상의 절대시간을 투자해야만 제대로 밥이 된다고 했다. 산에 같이 다니는 파트너로서 최고의 자격은 아마도 밥 짓는 솜씨였다. 그것은 희한하게도 등반력과 비례했다. 그래서 일단 그 사람의 밥을 먹어보고 따라다닐지 말지 결정하면 된다는 말까지 있었다.
   포장 사골탕을 뜯어 데웠다. 김치까지 꺼내서 마지막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즐겼다. 이제 산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간단한 인스턴트식이 되고, 마지막에는 목축임이나 입맛 다심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는 피츠로이 강가로 나가보았다. 빙하가 녹은 물이 에메랄드빛으로 흐르고 있었다.
   형과 나는 세로토레 봉을 올려다보았다. 중단에 구름이 끼어있을 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 고요하기까지 했다. 웃음이 났다. 저 멋진 벽을 오르기 위해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던가? 클라이머들에게는 운이 아주 중요했다. 기상과 하늘에 계신 분의 뜻.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산이 저절로 품을 내주지 않는 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번 원정은 처음부터 조짐이 좋았다. 후원도 그렇고 계절도 그렇고 더구나 이렇게 기상이 좋은 때에 도착하다니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군침이 돌았고, 가슴에서 북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형과 처음 만난 날부터 우리는 저 봉우리를 입에 올렸다. 어느덧 13년이 흘러 우리는 삼십대가 되어 있었다. 형은 서른다섯, 나는 서른 셋……. 나는 매혹적인 여인을 빨리 안아보고 싶어 마음이 조급해졌고, 그 기분이 경박스런 말로 튀어 나왔다.
   “저까짓 거 잘하면 하루에도 가겠다! 그치, 형? 저길 왜 그렇게들 못 올랐을까?”
   “1박 2일이면 충분해!”
   형도 자신 있게 말했다. 형이 1박 2일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계속 오르는 것을 의미했다.
   “빨리 해치우고 칠레로 꽃게 먹으로 가자!”
   나는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을 지경이었다. 이건 사실 병이었다. 너무 흥분하면 내 자신을 제어 못 하는 병. 막상 암벽에 붙으면 지나치게 침착하다는 말을 듣곤 하지만 나는 평지에서의 기분을 잘 조절하지 못했다. 그런 걸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나 할까.
   “아이구, 이 웬수야!”
   드디어 형이 내 어깨를 밀었다. 나도 형의 어깨를 밀었다. 형은 내가 한심하게 굴 때 ‘웬수’라는 애칭을 썼다.
형과 나는 마주보고 웃었다. 우리는 정말 1박 2일이면 모든 걸 끝낼 줄 알았다.
   이튿날 새벽에 노르웨이지언 비박지로 향했다. 노르웨이 클라이머들이 좁은 산간에 조성한 비박지인데, 우리는 그곳을 ABC(advanced base camp)기지, 즉 전진기지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1차 공격에 실패하면 내려와서 2차 공격의 거점으로 삼고, 2차 공격에 실패하면 또다시 내려와 3차 공격을 시도할 근거지로. 위치상 그런 지점이었고, 때문에 지고 가는 짐이 엄청났다. 우리는 밭은 숨을 토해내며 설원을 걸었다. 현지 사람들이 토래 강이라고 부르는 피츠로이 강을 티롤리안 브리지(tyrolean bridge: 참봉 사이의 협곡이나 급류가 흐르는 계곡, 빙하의 크레바스를 건널 때 로프를 타고 공중으로 횡단하는 기술)로 건넜다. 강에는 이미 와이어가 매여 있어 쉽게 건널 수 있었다. 형이 먼저 카르비나를 걸고 건너가고, 짐들을 건너보내고, 내가 출렁출렁 거꾸로 매달려 건너갔다.
   다시 설원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앞서 간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어제 새벽 스위스 팀이 출발했다고 했는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발자국이 없었다. 말이 루트지 사실 이런 거산에서는 눈에 보이게 길이 나 있는 게 아니었다. 대개 시즌 첫 등반 팀의 발자국을 따라가기 마련이었고, 자기 팀이 가는 노선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을 스스로 확인하며 가야 했다.
   눈보라가 심했던 탓일까.
   형과 나는 좀 당황했다. 세로토레에는 알프스나 히말라야처럼 등반 팀이 많지 않았다. 문제는 GPS수신기였다. 기온이 떨어져 먹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미 국방성이 쏘아올린 24개의 인공위성에서 신호를 받아 현재 우리가 있는 위치를 15미터 오차 범위로 알려주는 놀라운 기기였지만 기온이 영하로 심하게 떨어지면 무용지물이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지도의 등고선 모양을 지형과 비교하며 걸었다. 능선과 협곡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완경사인지 급경사인지를 가늠했다. 고도계를 보며 절벽이 나오면 아, 저거구나 하고 위치를 짐작했다. 그렇게 노르웨이지언 비박지를 찾아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의외의 결과였다.
   허탈했다.
   계획대로라면 여섯 시간이면 올라올 거리였다. 시간이 너무 많이 경과되었고, 체력도 소모되었다.
   더구나 노르웨이지언 비박지는 상상 이상으로 척박했다. 돌벽을 쌓아놓긴 했는데, 텐트를 칠 만한 곳도, 칠 수도 없었다. 무서운 돌풍이 비박지를 뿌리째 뽑을 듯 불어대고 있어서 이름 그대로 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형과 내 몸으로 바람을 막고 황급히 컵라면을 끓여먹었다. 촘촘한 돌벽에 의지해 침낭을 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돌벽 틈새로 파고들어와 침낭에 구멍이라도 낼 듯 달려드는 바람과 돌가루 때문에 눈도 뜰 수 없었다. 해는 세로토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빙하 건너편의 피츠로이 서벽이 아름답게 석양에 이글거렸다. 경치 감상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지퍼를 머리 꼭대기까지 올리고 잠을 청했다. 불안이 넘실거렸다. 설마 이 미친바람이 내일까지 불진 않겠지……. 토레 봉 밑은 괜찮을 거야…….
   새벽 일찍 일어나 짐을 꾸렸다. 네 시였다. 2차 공격, 3차 공격에 대비한 식량을 두고 가야 했다. 바람이 너무 심해서 짐 위에 텐트를 덮고 커다란 돌들로 단단히 눌러놓았다.
   등반장비와 이틀 분의 식량만 지고 랜턴을 이마에 켠 채 출발했다.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태양은 어느 곳에서나 아름다운 주황빛을 선사했다. 마음이 밝아져왔다. 다행히도 바람은 잔잔해지고 있었다.
   장비를 차고 엘모초 연봉 아래의 가파른 설릉을 올랐다. 기온이 더욱 떨어져 눈 사면이 알맞게 빙결되어 있었고, 빙벽화에 장착한 크렘폰 앞날로 킥스텝하며 오르기가 쉬웠다.
   설릉을 지나자 광활한 설원지대가 나타났다. 형과 나는 서로 로프를 묶고 걸어갔다.
   드디어 세로토레 하단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그슈른트(Bergschrund:빙하의 상부 한계선에서 빙하의 빙설과 산 쪽의 방설이 갈라져서 생긴 거대한 크레바스)의 균열이 우리 앞에 강처럼 놓여 있었다. 설산에 오를 때는 언제나 이 빙하의 균열이 산 밑 부분에 커다랗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올라가는 중간 중간에도 이런 균열이 있는데, 더러는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베르그슈른트 안의 왼쪽 빙탑은 심하게 붕괴되어 있었다. 하단 벽으로 진입하기 위해 부서진 빙탑들로 뒤엉긴 스노브리지를 조심스럽게 건넜다.
   하단부를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감개무량해서 눈물이 났다. 첫 피치는 설벽이었다. 형이 먼저 올라가고, 내가 따라 올라갔다. 나는 울먹울먹함을 참지 못했다. 형도 눈가가 발개져 있었다.
   설벽 위는 암벽과 암벽설벽의 믹스지대였다. 암벽지대에서는 암벽화로 바꾸어 신어야 했고, 설벽에서는 다시 빙벽화를 신고 크램폰(경사가 심한 얼음이나 단단한 설사면, 빙하지대를 오르내릴 때 등산화 밑창에 부착하여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금속제 장비)을 장착해야 했다. 로프에 매달린 채 추위에 언 손으로 이 작업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를 한 짝이라도 떨어트리는 날이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형과 나는 선등을 교대로 바꾸며 다섯 피치를 올랐다.
   날씨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심상찮게 불었다.
   우리는 바람소리를 무시했다. 어떻게 온 세로토레인가? 형이 먼저 오르고 다시 내가 따라 올랐다. 60미터 빙벽을 반쯤 올라가 벽의 능선 부분에 이르렀을 때 퍽 소리가 나면서 내 몸이 공중으로 날았다. 바람이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오른쪽으로 집어던진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스피켈을 재빨리 설벽에 박아 넣었다. 착, 하고 피켈이 박히는 소리가 났다. 눈으로 확인하자 아이스피켈이 얼음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간신히 추락은 면한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바람이었다. 히말라야에서도, 알프스에서도 이런 바람은 맞아보지 못했다.
   “괜찮아?”
   형의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응.”
   나는 제자리로 복귀하면서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토레 강가에서 이곳을 올려다보며 경박스럽게 까불던 것이 기억나서 뒷골이 서늘했다. 세로토레 봉이 얼마나 비웃고 있었을 것인가. 너, 요놈, 어서 와봐라, 하고. 내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형이 다시 올랐고, 우리의 등반은 계속되었다.
   날씨가 더욱 나빠지면서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평온해 보이던 봉우리 가운데의 구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나는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마에스트리는 산에서의 희망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했다. 오르고자 하는 알피니스트의 희망과 결코 품을 내주지 않는 산 사이에서 선배 클라이머들은 좌절하곤 했겠지. 더구나 세로토레는 자연 조건이 최악이라고 정평이 나 있었다. 새삼 공포가 몰려들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믿을 수 없는 눈과 얼음, 젖은 암벽, 가파른 설사면, 변덕스런 날씨, 휘몰아치는 광풍……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우리는 10피치까지 올라가서 하단부가 끝나는 숄더에 올라섰다.
   저녁 무렵이었다.
   고도가 높아지자 바람은 거대한 공룡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어디에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왔다.
   우리들은 기다시피해서 숄더의 끝부분에 도사리고 있는 베르그슈른트의 균열, 즉 설동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몇 년 전에는 이 설동이 무너져 등반 팀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바람은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거꾸로 쓸려 올라가게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중력도 작용하지 못했다.
   내려가려면 하강을 해야 하는데, 하강이야말로 지금은 너무 위험했다.
   “일단은 여기서 시간을 끌자.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형과 나는 배낭을 벗어 그 안에 다리를 집어넣었다. 조금도 따듯해지지 않았다. 초코바를 한 개씩 씹어 먹고, 웅크리고 앉아 잠을 청했다. 바람과 추위에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와중에도 잠이 들었던가 보았다.
   문득 눈을 뜨니 바람이 그치고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새벽 두 시였다. 다시 가슴이 뛰놀았다.
   “형! 정상 가려면 지금 일어나야 해!”
   나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형과 나는 급히 일어나서 설동을 나갔다.
   랜턴을 켜고 등반을 시작했다.
   이제 세로토레 중단부였다. 형이 암벽을 두 피치 선등한 뒤 그 위부터 시작되는 믹스지대는 내가 맡기로 하였다. 상단 끝까지는 아직도 28피치나 남아있었다. 그 위의 헤드 월이 5피치 쯤 된다고 짐작되었다. 헤드 월 위는 눈버섯, 즉 독수리 부리였다. 세로토레는 정복한 팀이 몇 없어서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우리가 실제로 올라가보지 않는 한 난무하는 말들을 믿어서는 안 되었다. 형과 나는 하루면 갈 수 있다는 희망에 젖었다. 잠도 자지 않고 밤까지 이용해 간다면, 짐을 대폭 줄여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빼고 간다면 가능할 것 같아 이미 설동에 여분의 짐을 두고 나온 터였다. 일단 짐이 가벼워야 속도가 나고 체력도 절약되는 것이다.
   멋진 암벽등반이 지속되었다. 차디찬 바위에 반사되는 새벽 햇살이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시렸다. 앨캐피탄과 하프돔, 미들 캐시드럴을 오르던 때가 떠올랐다. 형이 올라가는 한 동작 한 동작이 환상 속의 그림 같았다.
   순서를 바꾸어가며 아홉 피치를 더 올랐을 때, 다시 날씨가 나빠지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삽시에 얼굴을 때리며 승냥이로 변했다. 은빛 볼트(bolt:크랙과 홀드가 없는 반들반들한 바위 면에 구멍을 뚫고 박는 인공적인 확보물)들이 내 눈 바로 앞에서 반짝거렸다. 마에스트리의 볼트 트래버스(traverse:가로지르며 오르는 횡단등반) 시작 지점이었다. 적어도 서너 피치는 되어보였고, 볼트를 따라 백 미터 이상 오른쪽 옆으로 이동해야 했다. 44년 전에 박은 캐신(cassin) 사의 은빛 볼트들이 조금도 녹슬지 않고 거의 수평으로 반짝반짝 박혀 있었다.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정상까지 가지 못한다면 정복도 못 한 처지에 이 지점의 하강이 무척 난감할 것 같았다. 옆으로 이동하며 오르는 지대이므로 내려올 때도 한 걸음 한 걸음 클라이밍다운(climbing down:암벽에서 로프나 용구를 쓰지 않고 맨몸으로 내려오는 기술)할 수밖에 없었고, 시간이 엄청 걸릴 거라는 계산이 섰다. 상단까지는 아직도 19피치나 남아 있었다.
   “내려가야 할 것 같아……”
   형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어쩐지 승복할 수 없었다. 13년간, 아니 17년간 고대하던 꿈이 이루어지려는 찰나가 아닌가?
   그러나 사정없이 후려치는 눈보라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능력이 닿는 한 최대한 높이 올라가고! 위험이 닥치면 주저 없이 돌아선다!”
   형이 위에서 선창했다.
   “능력이 닿는 한 최대한 높이 올라가고! 위험이 닥치면 주저 없이 돌아선다!”
   나도 따라 소리쳤다. 이건 우리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충실하게 올라왔고, 이제 내려갈 수 있을 때 신속히 후퇴해야 했다.
   하강을 시작했다. 하강 중 로프가 엉키면 고역이었다. 시간이 몇 배로 들고 잘못하면 바로 조난이었다. 로프가 잘 내려갈 것 같은 구간에서 로프 두 동을 이용해 60미터 하강을 시도했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번번이 엉켜서 곤욕을 치렀다. 차라리 로프 한 동을 30미터로 접어 하강하기로 했다. 셀 수도 없이 짧게, 짧게 하강했다. 드디어 설동 입구가 나타났다.
   우리는 다시 설동으로 돌아왔다.
   베이스캠프를 친 지 사흘 만에 세로토레의 중단까지 올라온 팀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때 몰랐다. 악천후 때문에 그 해에는 단지 한 팀만 등반을 했고, 그들도 숄더 위로는 4피치까지밖에 올라오지 못했다고 했다. 19피치까지 간 우리가 그 해의 신기록이었다.
   설동에서 목을 축이고 계속 하강을 하려고 숄더로 나왔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몸을 세울 수가 없었다. 형은 하강 포인트로 기어가고 있었다.
   “너무 위험해! 지금 하강하기 어렵잖아!”
   나는 소리쳤다.
   “너무 추워서 비박도 할 수 없는데 뭘. 죽으나 사나 내려가야지.”
   형은 약간 포기한 목소리였다.
   “지금 당장 죽고 싶어? 휙 날아가다가 동태고드름 될 텐데!”
   나는 급하게 형 옆으로 가서 로프를 빼앗았다.
   “하여간 조금 더 설동에 있어보자고. 죽어도 나중에 죽는 게 낫지. 우리 체력으로 이삼일은 버틸 수 있을 거야.”
   나는 형을 데리고 비틀거리며 설동으로 돌아왔다.
   형도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눈보라가 얼마나 시끄럽게 쳐대는지 이 세상 악마들이 전부 모여 날뛰는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틀어막았다.
   이 상태가 얼마나 계속될까?
   침묵 속에 밤을 새웠다. 덜덜 떨며 손과 발을 계속 문질렀다. 운명의 신에게 우리의 내일을 묻고 또 물었다.
   새벽녘에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그쳤다. 잠시 뒤에 해가 떠올랐다. 바람마저 고요했다. 우리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형과 나는 재빨리 하강했다.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10피치였으므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고산 거벽에서는 생사가 늘 그렇게 붙어 있었다.
   전진기지로 돌아가 작전회의를 하고 2차 공격에 대비한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세로또레에 원체 혼이 나서 기상이 좀 더 나은 피츠로이 산군으로 목표를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들은 노르웨지언 비박지를 찾지 못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올라올 때는 베이스캠프에서 노르웨이지언 비박지를 찾기 어려웠는데, 노르웨이지언 비박지에서 세로토레 봉까지는 설릉을 거쳐 곧바로 왔는데, 내려갈 때는 반대로 세로토레에서 노르웨이지언 비박지를 찾아갈 수 없었다. 심한 안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로프 하강을 마쳤을 때 바람대신 안개구름이 짙게 우리를 휩쌌고, 몇 걸음 걸어 내려가자 1미터 앞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자 지도가 소용없어졌다. 오직 나침반과 고도계만으로 비박지를 찾아가야 했다. 경험상 아주 빗나가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크레바스가 벌집처럼 도사린 빙하지대를 만났고, 거기에서 비극을 연출했다.
   그리고 모든 게 끝이 났다.
   히든크레바스.
   그게 문제였다.
   빙하는 항상 변화하고, 산악지방에서는 흐른다. 압축된 거대한 눈덩어리인 빙하가 산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려가면서 수많은 틈과 구멍, 즉 크레바스를 만드는데, 여기에 눈이 덮이면 히든크레바스가 된다.
   형의 한 발이 히든크레바스에 빠진 것이다.
   그때 6미리 로프를 썼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10미터 간격으로 서로를 묶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한 사람이 자치 잘못 크레바스에 빠지거나 굴러 떨어져도 나머지 한 사람이 버티어 구할 수 있는 등반 방식으로 안자일렌이라고도 하고 러닝 빌레이라도 했다. 우리는 조심조심 발을 떼놓았다. 스키 생각이 절실하게 났다. 알프스나 맥킨리 같은 산들은 설원 지대가 대부분이어서 산악스키를 타고 등반하기 때문에 이동도 빠르고 크레바스에 빠질 염려가 없다. 그러나 세로토레는 돌무더기 지대였고, 눈 속에도 돌무더기가 산재해 있어 우리는 아예 스키를 가져오지도 않았다.
   “조심해라! 큰놈들 많다!”
   그런 소리가 들리는 찰나 우두둑 소리가 귀 안 가득 울리며 내 몸이 앞으로 확 고꾸라졌다. 피켈은 이미 내 손에서 날아가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나는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남은 하나의 피켈로 눈 사면을 내려찍었다. 그러나 내 몸은 사정없이 끌려 내려갔다. 불과 2초나 3초 사이였다. 악마의 블랙홀이 바로 내 밑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3미터, 2미터, 1미터……. 악! 아악……. 나는 정신을 놓았다. 나는 내가 크레바스에 빠진 줄 알았다. 아니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로프는 끊어져 있었고, 형은 보이지 않았다.
   “형! 혀엉!”
   나는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다. 온몸이 도끼로 찍히는 듯 아파서 손가락 하나 새끼발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형, 혀엉, 형……. ”
   나는 엎어진 채 형을 불렀다. 제대로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힘이 없었다. 혀엉, 형, 혀엉……. 형, 혀엉, 혀엉……. 나는 고개를 들려고 애를 썼다. 그때 자주색 작은 물건이 눈에 띄었다. 가로 1센티미터 세로 5센티미터 정도의 길쭉한 물건이 내 어깨 앞 눈밭에 폭 파묻히듯 떨어져 있었다. 저게 뭐지? 나는 한참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내 비상용 칼 같았다. 저게 왜 저기 떨어져 있는 거야? 나는 칼을 차고 있던 목걸이를 만져보았다. 목걸이 줄이 끊어져 있었다. 의식을 더듬었지만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악마의 구멍으로 빨려들기 직전 빨려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쓰던 순간만이, 그 무시무시한 공포만이 온몸에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자주색 길쭉한 물건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쪽 끝에 칼날이 펴져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나는 눈을 좁히고 칼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칼날이 반쯤 펴진 채 눈 속에 처박혀 있었다. 칼날은 햇살에 빛나기까지 하면서 눈을 찔러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나 이곳엔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대뇌를 최대한으로 활성화시켜 상황을 해석해보려고 애썼다. 눈 속에 사는 설신이 와서 칼로 나를 구해주었나? 그의 요정이나 천사가 한 짓이겠지? 헛웃음이 나왔다. 요정이나 천사가 어디 있어? 그런 것들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눈 괴물이 왔다 갔을까? 나를 살려 종으로 써먹으려고? 그런 존재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어떻게 이토록 번개처럼 칼을 떼어내 로프를 자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했다. 도대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가 않았다. 불과 2초, 3초 사이가 아니던가. 그러나 로프는 끊어져 있었고, 그 절단면은 아무리 봐도 칼의 솜씨였다. 잡아당겨지다가 힘에 의해 끊어진 게 절대로 아니었다. 나는 뎅강 잘린 로프를 잡아당겨 보았다. 힘없이 대가리를 수그리며 달려 왔다. 내 몸은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고 자유로웠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통증 때문이지 로프에 당겨서가 아니었다. 내 이성은 차갑게 작동했다. 내가……. 정말 내가……. 혀엉, 형……. 형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나는 크레바스를 내려다보았다. 50센티미터쯤 아래에 그것은 흉측하게 악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까지 기어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내 몸은 세로로 뒤집어져 크레바스를 지나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사오십 미터나 떨어져 내렸고,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나는 영하 20도의 추위에 노출되어 그대로 드러누워 있었다. 하늘이 파아랬고, 새털구름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한국의 하늘과 다름없었다. 나는 까무룩 날아가 허공에, 허무에 부딪쳤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구나……. 의식이 가물가물한 가운데서도 손끝 발끝이 저릿저릿해왔다. 나는 동상에 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눈 위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아니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한 바퀴, 두 바퀴……. 몸이 또 굴러 내려갔다. 돌무더기 사이로 마구 휩쓸려 내려갔다. 팔에서,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나는 피투성이가 되어 평평한 눈 지대에 떨어졌다. 거기에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모른다. 누군가 나를 가까이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환영에 떠내려갔다. 머리가 긴 여자였고, 흰 옷을 입었고, 아름다웠다. 신비한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어떻게 일어나 베이스캠프까지 갈 수 있었는지 하느님만이 아는 일이었다. 초인적인 힘이라는 말로는 어떻게 설명해도 모자랐다.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 있었다. 히든크레바스에 빠진 형은 그 안에서 대롱거리다 내가 줄을 끊는 순간 툭 떨어져 좁다란 얼음 테라스 위에 얹혔다. 입구는 작았지만 굉장히 큰 크레바스였던 모양이다. 순간 형은 정신을 잃었으므로 내가 밖에서 끙끙대는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뒤에 정신을 차렸고, 얼마 뒤인지는 몰라도 ‘헬프 미’라고 소리쳤고, 마침 세로토레로 오르고 있던 스페인 팀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형은 얼음구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외부 바람이 없어 동상에도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좀 더 경과했더라면 냉동되었겠지만. 형은 멀쩡한 몸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나는 비겁한 배신자가 되어 만신창이 몸으로 돌아왔다.

 

   내가 못내 서운했던 것은 형의 다문 입이었다.
   형은 굳게 침묵했다.
   물론 엄청난 배신감에 몸을 떨었으리라. 내가 단박에 줄을 끊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그건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급박했고, 도리나 양심을 떠올리며 고민하고 망설일 사이가 없었다. 아니 없었을 것이다. 모르겠다. 8년이나 지난 지금 내가 나를 변명하고 있는 꼴이니까. 형은 아마도 나라는 인간 자체에 혐오를 느꼈으리라. 내 얼굴을 보는 것조차 끔찍했으리라.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믿었던 놈이, 13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목숨을 더 아꼈던 상대가 저 살자고 번개처럼 자기를 죽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형은 떨어지면서 살려달라고 외쳤다고 했다. 나는 잡지에서 나중에 그 얘기를 읽었다. 다른 얘기들도 많았다. 나는 형이 평소 내게 그토록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줄 몰랐다. 요는 내가 고아처럼 매사에 구저분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신사다운 형과는 애초 맞지 않았다는 것. 살려달라고 외쳤다는 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넘어질 때 그 외침소리가 났고, 나는 큰 부상을 당하면서 넘어졌으므로 우두둑 내 뼈다귀 부러지는 소리만 귀 안 가득 들었을 수 있다. 맹세하거나와 나는 형의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들었다 해도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달라지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당시 갈비뼈가 다섯 대나 부러져 있었고, 다리뼈까지 부러져 있었다. 형은 몸무게가 75킬로그램이었다. 장비 포함 90킬로가 넘는 무게였다. 그런 무게가 6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는 나를 급경사 아래서 그것도 구멍 안으로 떨어지며 갑자기 낚아채는 바람에 내 몸의 골대가 부서져버린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크레바스 가까이로 다가가려다 2차로 굴러 떨어졌을 때는 엉치뼈가 부서졌고, 3차로 굴러 떨어졌을 때엔 팔꿈치와 귀와 코가 으스러졌다. 어쨌거나 형은 나 때문에 살았다. 결과적으로 내가 줄을 끊었으므로 얼음테라스에 떨어졌고, 결국 살아난 것이다. 산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살았기 때문에 형은 지금 승승장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감히 형에게 야속함을 품는다. 우리는 살았고, 그 상황 안에 같이 있었고, 내 부상을 모르지 않는 형이 한 마디쯤 해주었어야 한다고. 인간의 도리를 말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도리가 아니냐고.
   나는 넉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형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형만이 나를 인간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는데, 형은 끝내 외면했다. 사고의 성격은 형의 침묵으로 정해져 버렸다. 나는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한 인간이 되어버렸고, 짐승만도 못한 야차로 낙인 찍혔다. 아무도 내 이름을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2005년에 박정헌 최강식 조가 전 국민을 감동시키며 귀환했다. 그들은 촐라체를 정복했고, 하산하던 중 우리와 비슷한 사고를 당했지만 부상당한 박정헌이 필사의 힘으로 최강식을 구조해 살려냈다. 그들은 믿음과 우정, 아름다운 동지애를 증명하며 빛나는 인간으로 돌아왔다. 박정헌의 달아난 손가락조차 아름다움의 화신이었다.
   형과 나의 이야기는 추잡한 전설로 사라졌다. 우리는 세로토레를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사고를 당하자마자 동지를 배신한 사악한 인간이었다.
   형은 지금 새 파트너와 알프스를 누비고 있다.
   나는 재활하는 데 1년 7개월이 걸렸다. 동상에 걸린 손가락 발가락의 살을 다 발라내고 새 살을 돋게 해 손톱까지 심는 데는 그 뒤 여러 해가 걸렸다. 다행히도 나는 손가락 발가락을 자르지는 않았다. 불구는 면한 것이다.

 

 

   9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피인 장미화……. 사내의 선율은 이젠 제법 들을 만해졌다. 달빛 밝은 고요한 바다로 오시오……. 머나먼 저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 가끔은 찬송가가 연주되기도 했다.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하고 격앙된 가락이 들려올 때도 있고, ‘가지마다 잎마다 은구슬이 달려서……. ’하고 조용해지는가 하면,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하고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다. 사내의 기분에 따라 바이올린 선율이 되기도 하고, 오보에 소리가 되기도 하고, 색소폰 연주로 변하기도 했다. 사내는 참 열심히도 건반을 사랑했다. 오직 낙이라곤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사내의 곡을 감상하는 유일한 청중이었다. 사내의 선율을 듣는 사이 나는 어느덧 들소들이 뛰노는 언덕에 가 있었고, 그리운 고향으로 감미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묘선에게도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미솔솔 미레도 레미솔미레…….
   나는 선율을 따라 흥얼거렸다. 음악 책에 있던 곡이었던가. 저 계명으로 노래 시험을 치던 기억이 났다. 아, 그래 신세계 교향곡이라고 했지. 그 2악장인 ‘꿈속의 고향’이었다. 드보르자크라는 작곡가가 미국에서 보헤미아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작곡한 곡이라고 했다. 오보에보다 조금 낮은 음역의 잉글리시 호른이 주 멜로디를 연주한다고 음악선생은 진짜 잉글리시 호른을 가져와서 첫 소절을 연주해 보였다. 잉글리시 호른은 길다랗게 생긴 목관악기고 프렌치 호른은 나팔꽃이 핀 듯한 금관악기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음악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임해왔던 음악선생의 열정이 그립게 떠올랐다. 저렇게 재미있는 음악시간, 미술시간, 국어시간이 있었건만 참 지독히도 산에만 다녔지……. 사내의 건반에도 호른 버튼이 있는지 음악선생에게서 들었던 것과 거의 흡사한 애조 띤 선율이 계속해서 연주되었다. 고잉 홈 고잉 홈 앳 더 고잉 홈……. 조용하고, 슬펐다. 검은 나비가 한 마리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부드럽게 날아다녔다. 섬뜩하거나 끔찍하지 않고, 애틋했다. 그건 나의 것이었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사내의 연주는 오 대니 보이로 넘어갔다.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쌓여도……. 부드러운 선율이 아래층인 우리 집으로 내려앉았다. 산골짝마다 눈이 쌓여도……. 산골짝마다 눈이 쌓여도……. 하얀 눈이 쌓인 설원이 떠올랐다. 울컥해졌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어머니의 슬픔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감상이 나를 휩쌌다. 지난 8년간 수없이 내게 물었던 물음들이 또다시 꿈틀거렸다. 네가 사람이냐? 도대체 왜 그랬느냐? 그렇게도 살고 싶었느냐? 남을 죽이면서까지? 너는 본성이 애초 나쁜 놈이 아니냐? 언제부터 나빴느냐? 태어날 때부터 그랬느냐? 조상 대대로 나빴느냐?…… 수많은 대답이 터져 나왔다. 나는 모른다. 내가 나쁜 놈인지 아닌지. 다만 한 가지는 생각난다. 사람 평가에 그토록 인색했던 의부가 내게 본성은 괜찮은 놈이라고 했었다. 나는 자라면서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들을 때리지도 않았고, 이용해먹지도 않았다. 나는 착한 아이였다. 우리 어머니는 반듯하고 정갈한 분이셨다. 내가 아는 한 털끝만큼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솜씨 좋은 목수였다는 것만 알 뿐. 하여간 나도 보통은 되는 사람이다. 양심이나 도의심, 동정심은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자부한다. 나는 나 자신 의리가 강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날의 일에 대해서 변명하려는 게 아니다. 확실한 건, 형이 죽었다면, 형이 살아 돌아와 저렇게 자기 입장만 옹호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내 행동은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되었을 것이다. 똑같은 행동인데, 형이 살아옴으로 해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되었는데도, 나는 인두겁을 쓴 철면피가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주절거리고 다니는 것보다 형이 한 마디쯤 해주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 웃기는 놈이네. 중기가 왜 너를 변호해? 그 앤 피해자인데. 굵은 목소리가 호통을 쳤다. 형이 피해자라고? 저토록 꿈같은 삶을 살면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게 가능한 거 아니야? 또 말하기로 든다면 크레바스에 빠진 건 형이잖아? 모든 일이 거기서부터 비롯되었고. 이 먹통 같은 놈! 산에서 그런 걸 따져? 굵은 목소리가 버럭 성을 냈다. 이번에는 나도 맞받아쳤다. 내가 가해자라고? 내 의식이 한 일이 아닌데, 나도 몰랐는데 어떻게 잘못이라고 할 수 있어? 그건 아마 내 무의식이 한 짓일 테지. 무의식은 의식보다 몇 만 배나 강하다잖아? 그런 본능이 나만의 것일까? 사람의, 인류의, 생명체의 것이 아닐까?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행위를 이기심이라고 몰아붙여 심판할 자격이 당신에게 있어? 아무리 엄격한 도덕주의자라 해도 나를 비난하기는 어려울 텐데? 새꺄, 입 다물어! 뭘 말하려는 거야? 뭐냐 하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난 8년간 나 스스로를 중벌하고 회의하고 번민한 끝에 이른 결론은……. 일이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것뿐이야.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물리적으로 상황이 그랬어. 내가 즉각 줄을 끓었다고 하지만 내게도 끌려 내려가는 시간이 있었어. 2초인지 3초인지 아무튼 그런 시간이 있었다니까! 그 시간이 너무나 짧았고, 워낙 찰나여서 이성으로 판단해 어쩌고 할 짬이 없었고, 바로 악마의 아가리가 나타났던 거야. 그걸 말하고 싶어. 그러니 제발 다른 팀과 단순 비교하지 말아줘. 고산거벽에 갔다 와서 말해지는 등반기로는 당시의 진실을 알 수가 없어. 극한상황을 벗어나면 곧 자기합리화되고 미화되거든. 암벽에서의 일들은 너무나도 직감적이고 본능적이야. 말이나 글로 옮겨지지가 않아. 그러니 제발 기사 따위를 너무 믿지 말라고!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자 속이 후련해졌다. 수년간 엉킨 거미줄이 사라진 듯 머릿속도 가뿐했다. 윗집 사내의 연주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사내의 손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 애틋했다. 낮고 깊은 첼로 선율이 절실하게 사내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검은 나비가 무한대 기호를 그리며 천천히, 둥글게 방안을 날아다녔다. 사내는 사랑을 떠나보냈지만 나는 사랑을 잃었다. 사내는 천천히 준비하며 자기 사랑을 보냈지만 나는 갑작스럽게 내 모든 것이 결집된 사랑을 잃었다. 나는 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이토록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내가 형에게 계속 서운한 감정을 품는 것은 아마도 외로움과 그리움 때문이리라. 원망과 시샘, 복잡한 감정들은 희미해지다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응석 같은 기대, 가느다란 끈, 부드러운 분위기만 남았을 뿐이다. 서로 어깨를 비비적거리고 싶은,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은 되돌려지지 않고, 인생은 흘러간다.
   이리 와 앉으렴.
   나는 나비에게 말했다. 검은 나비는 그 동안 내게 푸대접 당하고 적대시당해 쉽게 내려앉지 않았다. 첼로의 선율이 부드럽게 다시 떨리며 내려앉았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아아았네……. 나는 허밍으로 따라 불렀다. 드디어 나비가 내 손등에 앉았다. 검은 비로드 같은 날개가 파들파들 떨렸다. 죽음에 대한 내 죄책감의 화신인 녀석은 가엾었고, 또한 아름다웠다.
   나는 녀석을 내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 맞추었다.

 

 

 

   * 소설 중 세로토레 등반 부분은 정승권의 ‘세로토레 등반기’(2002, 눈버섯까지 등정)와 주영의 ‘99 세로토레 등반기’, 기타 세로토레 등반기들을, 크레바스에 빠지는 부분은 박정헌의 『끈』(1995, 열림원)을 일부 참작했음.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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