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冬至) 외 1편

   박홍점

 

  동지(冬至)

 

 

 

 

   어둠이 하나 둘 깃털을 꺼내기 시작할 때
   손길이 닿지 못한 들판의 구근들이 한 겹 단물을 보탤 때
   번쩍, 마른하늘 번개처럼 튀어나온 칼 한 자루
   전의가 되살아나듯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새것인 채로 상자 속에 담겨 서랍 밑바닥에
   늙을 줄 모르는 사진 속의 얼굴처럼
   푸르게 반짝이는 오월의 잎사귀를 본떠 만든 에메랄드처럼

 

   첫 칼질이 시작되고
   무엇이든 앞으로 앞으로 불러낸다
   끊고 맺는 솜씨가 깔끔하다
   뭐 또 다른 게 없을까
   나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좋아해
   군더더기 없이 선명한 순간 순간을
   칼질이 칼질을 부르고

 

   수많은 사선들이 손가락 끝에 떨어진다
   칼질이 펼쳐 놓은 왁자지껄한 세상
   겹겹의 깃털 속으로 사선들이 사라진다

 

 

 

 

 

 

  눈 먼 노파에게 길을 묻다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밤낮으로 뒤집어져 궁리하다가
   길을 알려준다는 눈 먼 늙은 노파를 찾아간다
   그녀는 나에게 꼭 시집만 한 빈 공책 두 권을 건네며 돌아가란다
   답을 얻으러 갔다가
   질문만 받아 온 셈
   도대체 뭐라는 거야?
   석 달 열흘 누워 생각하다가
   햇빛 쨍한 봄날 날 잡아 다시 갔더니
   이번에는 손잡이가 있는 막대기 하나 건네며 돌아가란다
   어쩌라고 도대체?
   그때 느닷없이 마른하늘에 빗방울이 두 두 두 둑
   횡단보도 앞 애꿎은 한련화 수북한 화분을 내리쳤는데
   글쎄 막대기가 활짝 펴져 우산인 것이다
   한 손에 우산 들고
   한 손에 펼쳐 보지도 못한 공책 두 권 감싸 안고
   이제 우산이 펜이 될 차례인가?
   공책과 공책을 잇는 다리가 될까?
   교환 일기를 쓰듯 너와 나를 잇는 사랑이 될까?
   묻고 또 묻는 사이
   손톱이 자라고 머리카락이 자라고
   밤낮으로 올빼미가 째각거린다 나는 여전히 살고 있는 중이다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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