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실현된 욕망을 축복하며(제6회)

   사유의 드로잉(제6회)

 

반쯤 실현된 욕망을 축복하며

 

강수미

(미학,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 교수)

 

 

 

 

   1.

 

   상황 A: “당신을 사랑해요.” “네.” “그럼 우리 결혼합시다.” “네.”
   상황 B: “당신은 조만간 귀인을 만나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행운을 얻게 됩니다.” “네.” “가만히 있어도 일이 저절로 이뤄지고 남들 보기에 원하는 모든 걸 얻습니다.” “네.”
   상황 C: ‘A가 꼭 됐으면 좋겠지만, 안 되면 차선으로 B라도 되면 좋겠다.’ “B가 됐습니다.” “네.” “좋으시죠.” “네.”


   위에 설정한 상황 A를 통해 내가 독자들의 상상 속에 그렸으면 하는 정황은 이런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결혼을 하고 싶어 하고, 지금 자기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 어떤 여자(이 여자는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해왔고, 그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믿어 왔다고 치면).

   다음, 상황 B의 경우는 점쟁이 앞에 앉아 앞으로 자신의 운명을 듣고 있는 한 남자. 살면서 아주 특별나게 고생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점쟁이의 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상상도 못 할 행운이 날아들 것이라고 기대한 적도 없는 한 남자(이 남자는 삶에 어느 정도 냉소적이지만 생의 특별한 의미를 추구하는 열정을 지녔다고 치면).
   마지막으로 상황 C에서는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과 그보다는 못하지만 어쨌든 얻기만 하면 타인의 부러움을 살 만한 두 개의 기회 중 결론적으로 후자를 얻게 된 누군가(이 사람은 주어진 두 기회에 당연히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스스로 자꾸 둘의 무게를 잴 수밖에 없었다고 치면).
   여러분이 위와 같이 상황들을 상상했다면 다시 한 번 제안하건대, 그 각각의 상황 속 인물들이 과연 진심으로는 어떤 감정을 느낄지도 상상해 주었으면 한다. 상황 A에서 결혼을 원해 왔던 여자는 어쨌든 결혼을 하게 됐으니 행복할까? 상황 B의 남자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운명이 자신의 인생을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원하는 모든 일이 저절로 되는 삶’으로 만들어 준다는 얘기에 느긋해졌을까? 상황 C의 누군가는 최선은 아니되 누구나 부러워할 차선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자는 기분이 될까? 이 같은 질문에 모르긴 몰라도 간단히 ‘그럴 것’이라고 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세 경우 모두에서 주체의 욕망은 욕망하는 ‘바로 그것’으로 실현되지 않고 그것과 비슷한 것, 그 욕망 대상의 언저리에 있는 것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또 양적으로 따져서 절반쯤만 실현되는 것이거나, 질적으로 따져서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로 그것’을 원하는 주체가 ‘바로 그것’을 향해 의지를 발휘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상황이기보다는 일말의 피동성과 나태함이 동반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외관상으로는 원하는 걸 얻었고, 만사가 잘 됐으며, 통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고,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정작 당사자인 자기 자신만은 속일 수 없는 일들과 맞닥뜨린다. 그럴 때 우리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 저 깊숙한 곳은 불안, 미심쩍음, 회의로 살짝 구겨져 있다. 구름 한 점 없고, 주름살 한 자락 없는 상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성취했지만 내밀한 곳에서는 어딘지 석연찮은 구석이 남아 있는 일들, 다가올 미래가 어떻든 지금 여기의 답답함이 해소되지는 않은 일들은 우리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없는 고통으로 고립시킨다. 축하의 꽃다발 속에서 ‘사실은 꼭 좋지만은 않다’는 속내를 꺼낼 경우 욕심이 과하다는 평을 들을 것이며, 행운의 예언이 불행의 전조로 바뀔지도 모르고, 그나마 얻게 된 차선조차 떠내려 보낼 수도 있음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것이 불충분하게 실현될 때 우리는 분명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은 애초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 고통, 뭔가에 확실히 실패했을 때와도 다른 고통, 현실일 때 겪는 고통과는 다른 고통이다. 그런 고통을 뭐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우리는 사태를 이분법으로 파악하는 데 익숙해 있다. 해서 불행의 반대말을 물으면 금세 행복을 대고, 슬픔의 반대말에는 기쁨을, 실패의 반대말에는 성공을 대입한다. 그렇다면 고통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고통’을 검색하니, 그 단어와 관련된 어휘에서 반대말은 ‘쾌락’ 딱 하나다. 반면 흥미롭게도 비슷한 말은 ‘고초’ ‘곤란’ ‘쓰라림’ ‘화’ ‘고난’ ‘괴로움’ ‘신산’ ‘아픔’ 이렇게 여덟 개나 뜬다. 또 고통을 뜻하는 영어 단어 ‘pain’을 한 온라인 사전(http://dictionary.reference.com/)에서 검색해 보니 반어는 ‘joy’ ‘delight’와 ‘please’ 셋뿐이고, 동의어는 ‘torture’ ‘misery’ ‘torment’ ‘pang’ 등 꽤 많다.
   왜 국어에서든 영어에서든 고통을 뜻하는 말들은 이렇게나 많은 반면, 고통의 반대말은 상대적으로 소수일까?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인류에게 그만큼 더 많이, 더 자주, 더 다양한 고통이 부과돼 왔다는 사실을 언어가 반증하는 것일까? 아니면 실제야 어떻든 인간 자신이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 언어는 곧 그 의식 또는 무의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 그렇게 많이, 자주, 다양하게 고통을 받는다고 느껴 왔다는 반증일까? 심정적으로만 생각해 봐도 둘 다 가능성이 있는 이유다. 한편으로, 인류는 (성경에 빗대 말하자면)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 오만 가지 고통에 노출된 삶을 사는 벌에 처해졌다는 점에서 그만큼 다양한 고통의 어휘가 발명됐을지 모른다. 다른 한편,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감정, 심리, 지각상태를 되비춰 보는 존재라는 점에서 수천, 수만 년 이어진 그 반성의 역사에서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 또한 증식하고 분기시켰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가정해 본 상황들에서 주체가 느끼는 미묘한 고통 또한 그에 적절한 이름이 있을 터인데, 현재 나는 그 이름을 찾지 못했다. ‘곤란’만으로는 좀 부족하고, ‘신산’은 너무 강렬하다.

 

 

   2.

 

   여기서 문득, 글을 쓰는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사태를 너무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도록 끌고 왔다는 반성이 든다. 물이 반쯤 채워진 컵을 보며 누군가는 ‘물이 아직 반이나 있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다른 누군가는 ‘물이 겨우 반밖에 없네’라고 부정적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내 말의 관점은 얼마쯤 후자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 입장을 뒤집어서 상황을 긍정적으로 비춰 볼까? 요컨대 욕망이 반쯤 실현된 상태가 내포한 긍정성에 대해서 말이다.
   요즘은 사람들의 욕망이 소위 ‘비싼 명품 가방’이나 ‘돈 잘 버는 ○○ 취업’ 등으로 놀랄 만큼 분명해졌다. 현실이 그런 와중에 이제는 좀처럼 찾기 힘들어졌지만, 한때 사람들은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소설 속 ‘개츠비’나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속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상징하는 인물상을 멋지다고 여겼다. 남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정작 자신은 ‘뭔가가 결여됐다’고, ‘내가 원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바로 그것은 아니라’고 느끼는 인물상 말이다. 그래서 항상 어딘가 모르게 우울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상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것들에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상황을 봉합하지 않고, 스스로의 균열에 철저할 정도로 침잠하는 삶을 택함으로써 몰락이든 성장이든 삶의 시계추를 한 눈금이라도 움직이는 인물상을 언젠가의 우리는 꿈꿨던 것이다.

 

   “여기에 남자와 여자가 있고, 저기에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모든 조건 ― 뛰어난 외모, 매력, 부(富), 얄팍하지만 다양한 재능 ― 을 갖춘 짝들이 있다(이미 하나의 운동, 즉 二項의 과정으로서 정의된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면 왜 짝이 제시되겠는가?). 그리고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 이들로 하여금 마치 접시나 병이 깨지듯이 무너지게 만든다. 그리고 분열증과 알코올 중독이 죽음이 둘 모두를 앗아갈 때까지 끔찍한 동석(同席)을 이룬다. 이것이 유명한 자기 파괴인가? 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은 능력을 넘어서는 그 어떤 특별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에게는 너무 큰 전투에 의한 것처럼 부서진 몸뚱아리, 으깨진 근육, 식어버린 영혼과 더불어 깨어난다.”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pp. 267-268.)

 

   너무나 통렬해서 아름다운 문장. 위 문장은 들뢰즈가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 인물들이 철학적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논변하면서 쓴 말이다. 즉 “모든 인생은 물론 몰락의 과정이다.”(피츠제럴드, 『균열』, 1936)라는 피츠제럴드의 명제가 어떻게 세속적/피상적 행복의 모든 조건을 부여받은 이들의 삶의 운용 속에서 문학으로 형상화되는지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의 글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그는 결코 피츠제럴드의 인물들이 ‘자기 파괴’로 몰락했다고는 결론내리지 않는다. 그런 결론이야말로 성공의 반대말이 곧 실패라고, 행복의 반대말이 곧 불행이고, 쾌락의 반대말이 곧 고통이라고 편리하게 규정지어 버리는 빈곤한 사고다. 들뢰즈가 그 삶의 문학적 형상들에서 추출해 내는 것은 균열을 포옹하는 힘, 균열을 없는 것처럼 봉합하는 안락한 인생이 아니라 균열을 껴안고 그로 인해 부서지고 으깨지며 차갑게 식어버리더라도 깨어나는 몸과 영혼이다. 그것이 그 철학자가 ‘인생은 물론 몰락의 과정’이라는 소설가의 파괴적 명제로부터 끌어올리는 커다란 긍정성이다.
   나는 앞서 이제 반쯤 채워진 물, 반쯤 실현된 욕망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말하겠다고 썼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어느 독자는 반쯤 채워진 물이 진정한 갈망과 여하한 노력을 통해 완전히 채워질 것을, 반쯤 실현된 욕망이 우리의 열정과 실천을 통해 결여 없이 실현될 것을 말하리라 예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그 반쯤의 비워져 있음, 그 반쯤의 결여가 바로 긍정성 자체라고.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그 비상한 경계 상태, 뭐라 이름 붙이기 매우 까다로운 그 결여의 고통스런 감각이 바로 축복받을 만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에서 인생의 진자 운동이 벌어지니까. (연재 끝)

 

 

   《문장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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