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도 백수 일지(제4회)

   꿈꾸는 것 같은 순간이 있다

   – 쿠바와 남미의 나날들(제4회)

 

베다도 백수 일지

 

김성중

 

 

 

 

 

   1. 카리브해의 기적

 

   아바나의 베다도를 벗어나 히론과 시엔푸에고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쿠바의 연인〉이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진 정호현 언니가 이곳에서 한-쿠바 협회 일을 하고 있다. 그곳 직원들이 관광 상품 개발차 떠난 여행에 나도 묻어간 것이다. 덕분에 일 년의 마지막 며칠을 그림 같은 바다와 한적한 지방에서 보내게 되었다.
   봉고차 한 대에 여자 넷과 다섯 살짜리 남자 아이로 이루어진 우리 일행은 악어농장에 들러 점심을 먹고, 중국단체관광객의 서슬에 밀려 결국 보트 타는 것을 포기한 채 곧장 ‘히론’이라는 해변으로 왔다. 아바나에서 세 시간쯤 떨어진 바닷가인데 가는 길부터가 환상적이었다. 예전에 이집트에서 시와 사막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사막을 찾아가는 길은 그 중간부터가 이미 사막이어서, 도착 전부터 이미 압도당한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히론으로 가는 도중의 해안도로는 ‘카리브 해가 바로 이런 곳’이라고 웅변하는 듯 근사했다. 초록빛 바다와 멋진 야자수에 넋을 잃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는 방갈로처럼 독채로 떨어진 방들과 중앙 센터로 이루어진 ‘플라야 히론’이었다. 하루에 우리 돈 삼만 오천 원 정도 내면 핑크색 팔찌를 끼워 준다. 이 팔찌는 해변은 물론이고 깨끗한 방과 바다가 보이는 수영장 두 개, 세 끼 식사, 저녁의 밴드 공연, 아무 때고 갖다 먹을 수 있는 술과 음료수와 닭튀김을 비롯한 간식들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분홍 팔찌의 위력에 매료된 나머지 하루 더 연장했다.
   해변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외려 덤덤할 정도로, 달력에서 오려낸 모습 그대로였다. 고운 모래를 뚫고 야자수가 치솟아 있고, 그늘을 만들어 줄 오두막 파라솔과 선 베드가 놓여 있다. 미지근한 바닷물은 수영을 즐기기에 딱 좋았다. 그러나 나는 사막 한복판의 오아시스에 갔을 때도 발만 담그다 온, 수영 못 하는 천하의 바보가 아닌가. 바다에 들어가 아쿠아 에어로빅 비슷하게 허우적대고 있으려니 원통하기만 한데, 히론은 내게 기적을 베풀었다. 삼십대가 끝나 가는 마당에 난생처음으로 물에 뜬 것이다!
   “등을 쭉 펴고 겁만 먹지 않으면 돼.”
   지금껏 수없이 들어온 이 말을 드디어 해냈다. 뒤로 누워 귀까지 물에 잠기게 하고 바다가 시키는 대로 둥둥 떠 있는 일, 이 감격은 최초로 자전거를 탈 때의 긴장과 환희의 다섯 배쯤 되는 것 같다!

 

   밤이 되자 다들 일찍 곯아떨어져 버린다. 작가답게 일몰을 혼자 감상하고(으음? 이게 뭔 소리인가) 음악을 들으며 바닷가를 휘적휘적 걷다가 돌아와 보니 내 침대는 이안(호현 언니의 다섯 살배기 아들)이에게 책을 읽어 주다 같이 잠들어버린 여진 씨가 차지하고 있다. 살그머니 문을 닫고 몇 걸음 더 걸었다.
   어디로 갈까? 저 멀리 클럽에서는 가벼운 음악소리가 꿍딱거리고 반대편에는 젊은 엄마와 젊은 처녀, 어린아이가 깊은 숨결을 토해 내고 있다. 해변에서 얻어 온 피곤 때문에 방에는 세 사람의 숨소리가 밀림처럼 우거졌는데,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온통 ‘젊은’ 생명의 육체성 같은 걸 실감했다고 할까.
   결국 두 번째 수영장 가장자리의 파라솔에 앉았다. 숨결과 음악, 어디로도 갈 수가 없지만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야자수 잎 끝이 달빛에 젖어 장검처럼 빛나고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하다. 나는 무언가 간절한 마음이 되어 주머니를 뒤적였다. 종이, 종이를 밝힐 작은 손전등, 볼펜,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마련되었다. 탁자 위에 이것들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낮의 흥분과 오후의 멜랑콜리 같은 것들이 뒤섞이며 지지직거리던 마음의 주파수가 일정해질 때의 평온함.
   결국 부서진 글자 몇 개 끄적이다 말았지만 종이 위에 빛나는 동그라미를 만들던 손전등의 온기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사물은 독특한 방식으로 생명력을 얻는데 이 순간이 그랬다. 모닥불 같은 손전등. 오늘은 너를 기억할게.

 

 

   《문장웹진 2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