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나의 안데르센

안데르센 나의 안데르센

권오영
1. 그림 없는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큰 새 살고 있지. 종횡무진 비행을 꿈꾸며 알 낳고 있지. 황금 알 속에서 속성으로 자란 것들이 움직이고 있어. 달리고 있어. 하나의 콩꼬투리에서 튀어나온 다섯 개의 콩알처럼 여물지도 않은 내가 튀어 다녀. 오늘 화서에서 금정, 금정에서 혜화, 다시 화서역으로 오기까지 전철문을 자동적으로 열두 번 통과했어. 가고 오는 동안 남자들이 음악처럼 흘러다녔어. 요술지팡이를, 깜빡 떴다 감는 눈동자 같은 손전등을 팔고 사라졌어.

2. 미운 오리새끼

역마다 낯선 길 떠나는 열두 명의 나, 일 년 열두 달 수천 번 전철 속에서 태어나지. 불 켜 논 상자 속에서 자라고 죽지. 숲 속처럼 고요한 그 속에서 잠들고 말지. 모래언덕에서 미끄러지는 백조엄마. 언덕에 버팅기고 서서 엄마를 굴려대는 오리꿈을 꾸는 동안 백팔십 번 겨울이 왔어. 혜화역 2번 출구로 들어가는 동안 백팔 번의 봄이 갔어. 지하와 지상 사이를 들락거리는 동안 들켜 버린 나 좀 봐. 두꺼운 책 펼쳐 들고 졸고 있는, 관을 뚫고 날아오르는 새끼벌들처럼 자동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잠의 문.

3. 엄지 공주

안데르센은 꿈을 건설하지. 신이 나. 신나는 나라야. 독화살보다 빠르게 독사과보다 달콤하게 둥글둥글한 일곱 난쟁이보다 더 작은, 엄지만큼 작은 왕자와 공주가 되어 작은 제국을 꿈꾸지. 매일 손톱만큼 작아져. 작아진 것들은 잠 속으로 숨어들지. 꿈은 늘 그런 식으로 파고들곤 해. 다리와 목소리를 맞바꿔 거래를 튼 마녀와 인어 사이에 물의 나라를 건설하는 그런 꿈. 고리대금으로 빌린 꿈을 찰랑찰랑 고리에 고리로 되돌려주는 지독한 꿈. 진땀 나.

4. 꿈의 궁전

밤마다 보도를 횡단해. 열두 개의 가판대가 끝나도록 걷다 보면 대낮처럼 간판들이 환하지. 아라비안나이트와 꿈의 궁전,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간판 속 작은 그림들이 불빛을 뚫고 나와 씽씽 날아다니는 것 좀 봐.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오네. 벽은 온통 거울. 쇼핑 봉지를 손가락마다 걸고 하품하고 있는 여자. 총천연색의 내가 줄 서 있어. 25시 마트 쇼핑을 요리와 세탁과 청소를 자동적으로 끝냈어. 잠들고 깨는 동안에도 홈쇼핑은 계속되지. 졸음 속에서도 네비게이션은 자동적으로 길을 열어 주지. 잠의 꿀맛.

5. 과자로 만든 집

달디 단 독 품고 수만 개 입과 귀와 눈을 깜빡이며 꿀맛의 잠을 찍어 먹고 있어. 꿈속 과자로 만든 집에 털썩 주저앉아 어금니 상하도록 과자 지붕을 뜯어먹고 있어. 되돌아갈 길도 사라지고 내가 버린 젊은 엄마도 사라지고 펄펄 끓는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닫기를 여러 차례. 그러다 보면 어느 새 하얀 노파가 되어 앉아 있는 새벽.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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