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 외 1편

 

  잉크

 

 

 

   뾰족한 글씨가 담겨 있는 잉크병

   뚜껑이 있는 글씨들이 들어 있는 파란 유리병

   어쩌자고 이 밀교 같은 병을 집어 들었을까

   생제르맹 거리 뒷골목 백 년도 더 된 문구점에서 사온 파란색 잉크 한 병

   며칠간 배낭에서 물결처럼 찰랑거렸다

 

   청자갈 같은 질서가 묻어나는 색

   파란 보석 같은 잉크병

 

   산의 꼭대기 끝으로 올라가는 봄

   뾰족한 산 봉오리에서 파란 잉크를 흘리던

   비행기 안에서 본 하늘

   나뭇가지들마다 높은 색을 풀어내던 파란색 잉크

 

   백 년도 더 된 문구점에서 보았던

   잉크가 가득 담긴 파란 눈들

   다국적 책들 사이에서 물감처럼 섞여 있었다

 

   살짝 묻히기만 해도 한 페이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던 한 병의 잉크

   병 속에 들어 있는 수천 마일의 물길들 압축되어 이파리처럼 돋아날 것이고

   마름질을 기다리는 신생의 원단들

   물결 원단들이여

   책을 사려고 들어간 그곳에서 파란색 잉크 한 병을 들고 왔다

 

   책장의 빈자리를 더듬어 잉크병을 놓아 둔다

   영원히 열어 보지 말아야 할 밀서 같다

 

 

 

 

 

   상현달

 

 

 

   컴퍼스를 놓고 도형의 반을 그리다 보면

   밤이 없는 빈 상현달이 생긴다

   그곳에 무엇을 넣을까 탐닉해 본 적이 없다

   부르르 떨며 부풀리는 풍선처럼

   어쩌면 빈곳으로 향하는 자유의지와 무의식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두 개의 다리로 작도의 각을 세우니

   한 점이 다른 점을 물고

 

       커졌다

                 작아졌다

 

   되풀이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엔

   풀이 돋아나고

   세상 끝나는 날까지 자란다

 

   점에서 출발한 오장(五臟)들은

   원의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 없다

   비어 있는 공간의 힘으로 자생하는 것들

   심장과 붉은 간의 모서리는 각이 없다

   나뭇가지에 폐의 모양으로 걸려 있는 상현달

   회화나무는 숨을 쉬는 듯했다

 

   날개를 펼치도록 내놓은 저 회화나무 어깨

   황백색 괴화(槐花)가 오르내린다

   문득, 그 위에 손을 걸어 보고 싶어진다

   건다는 것은 목숨을, 말을, 전화를, 시비를, 희망을 모든 것의 중심에 집중하는 일이지만

   마침내 예약 주문을 받지 않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팽창한다

 

 

   《문장웹진 11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