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곁 외 1편

김중일

 

 

구름의 곁

 

 

 

1. 오답 노트

 

갸륵하게도 여전히 지구는 구름에 얽매여 있습니다. 지구는 얼마나 더 오랫동안이나 구름에 붙들려 있어야 할까요?

얼마나 더 아교풀 같은 구름에 들러붙어 우주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걸까요?

검은 시험지에 인쇄된 지문 옆에는 푸른 눈물처럼 지구가 그려져 있고

시험지가 나붙어 있는 어둑한 교실 뒤에는 둥근 압정처럼 낮달이 떠 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기운 햇볕이 오려 놓는 처마 아래 기우뚱한 툇마루에 앉아, 지난 기말고사 시험지에 머리를 파묻고 틀린 문제 풀이에 몰입하고 있다.

소년은 어두워져도 아빠를 기다리며, 틀린 문제를 마저 풀고, 내일까지 오답 노트에 정답을 백 번씩 써 가야 한다.

소년은 대문 밖 키 작은 나무 길게 자란 우듬지 그림자를 발끝으로 툭툭 걷어차며 저녁이 가까웠음을 알아챈다.

 

 

2. 세 번째 수수께끼

 

유진― 아직 듣고 있나, 달나라 불법 노점상 루나 프로스펙터에서 구입한 구름무늬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이 촌 동네 최초로 구름의 곁에 묻힌 사람. 당신이 깊이 잠든 구름의 곁으로 푸른 눈알 같은 두 개의 운석이 낙하한다. 구름은 아무리 여러 번 몸을 뒤척여도 불편해 보이는 특유의 자세로 누워 있다. 코앞에서 본 당신의 얼굴에는 커다랗게 부릅뜬 두 개의 크레이터가 있고, 당신의 텅 빈 눈 속에는 구름의 파고가 높다. 우리는 이제 고철이 된 니어 슈메이커(NEAR Shoemaker)호를 당신의 눈 속으로 밀어 보지만 당신의 눈 속은 요즘 무척 거칠고, 유진, 그래도 우리는 민다. 다시, 우리는 오늘 밤 일생일대로 구름의 가장 가까운 곁으로 근접할 예정에 있다. 날씨는 좀 어떤가. 구름을 폐종양처럼 키우며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세상 모든 저녁 허공의 자세. 우리는 다 늘어진 북을 찢듯, 그 허공을 찢었고, 유진― 아직도 구름에 얽매여 둥글게 자전만 반복하는 네 눈물 속의 서울에서 난 전혀 잘 지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결국 아들에게 수수께끼에 가까운 숙제만을 남겨 주고 말았다. 대상 없는 절망, 구름에 대한 막연한 증오 따위들, 오늘 밤은 땀복 같이 척척한 중력을 벗어 버리고, 진공의 링을 빠른 스텝으로 떠돌고 있을 마지막 세 번째 수수께끼처럼, 누구도 내 기분을 풀지 못한다.

 

 

3. 진공

 

하얀 천에 둘러싸인 채 들것에 실려 나오는 구름의 잔해들

우주의 진공 속으로 썩지 않고 영원히 부유하는 정답

 

 

4. 청동 레테를 돌리는 밤

 

쉼 없이 북쪽으로 걷는다고 해서 구름에 가까이 이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녹청이 잔뜩 낀 아스트롤라베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서울 한가운데의 폐건물 옥상 위로 점거 농성 중인 불길들, 열기구처럼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한 꽃송이 검은 구름도 보인다.

물대포처럼 커다란 구렁이가 사람들의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휘감고, 탈출을 위해 그들은 열기구 위로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 속에는 소년의 아버지도 있다.

헌신적인 아버지는 소년의 시험 문제를 온몸으로 풀고 있는 중이다. 팽창할 대로 팽창한 열기구가 서서히 이륙한다.

폐건물 옥상은 불길에 휩싸인 함선

그들이 항해할 방향을 지시해 주는 아스트롤라베의 레테는 긴박하게 돌고, 적도의 자표선과 특정 위도의 지평선, 회귀선 등이 공중의 전깃줄처럼 뒤엉킨 채 표기되어 있다.

지상도 천상도 아닌 옥상은 끊는 피죽처럼 뜨겁게 용솟음치고, 소년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태운 열기구가 구름의 가장 근접한 곁으로 멀어져 갈 시각,

다 늦게 엄마도 황급히 어딜 가고 없는 빈집, 소년은 아직 비정형의 고독과 싸우며 틀린 정답을 아흔아홉 번 썼고, 한 번을 마저 쓰다가 잠들어 버렸다.

잠에서 깨면 바야흐로 점성술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Channel Chaser

― 중력의 도주

 

 

 

1. 채널 크로키

 

블랙 슈트를 입은 그가 걸어간다. 그가 지나간 궤적에서, 약 사십오 도쯤 기울어진 궤적을 그리며 하얀 재킷을 걸친 그가 뛰어간다. 그와 그는 옷깃이 스치고, 그는 그의 지갑을 훔친다. 버스가 건조한 공기 속에 커다란 터널을 뚫으며 정류장 앞에 선다. 새벽엔 전직 지도자가 절벽 밑으로 투신했다. 돌산의 그 허공은 주로 새들만이 이용하는 채널로 알려져 있다. 공중파에서는 과거 그가 몸담았던 채널들을 서둘러 요약 편집했다. 한동안 전국이 같은 채널에 주파수를 맞췄다. 서울역 앞에 설치된 임시 분향소에서 조문을 마치고 나오던 그의 손을 그가 잡아챘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군요. 감색 점퍼를 입은 그가 택시에 오른다. 덕수궁이요. 그와 택시 기사인 그는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잠시 작은 채널을 공유한다. 고궁 앞에서 늙은 그와 젊은 그는 어깨를 부딪치며 반대편으로 엇갈린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뒤돌아서, 그를 쫒는다. 쫒기는 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군중 속에 뒤섞인다. 작전 속에서 그의 이름은 리키. 그의 직업은 도주다. 변장술의 천재 리키. 그는 늘 도망중이지만 뛰어난 변장술이 그를 그들 가까이 있을 수 있게 한다. 도시의 모든 그가 리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도시 곳곳엔 몽타주 대신 거울이 나붙어 있다. 번번이 내 손을 빠져나가는 그는 그렇다 사실 나이기도 하다! 저녁은 중력의 푸른 멍이다. 중력 속에서 우리는 그라는 이름으로 쉽게 뒤섞인다. 거리에서, 우리는 안테나처럼 뻣뻣하게 셔츠 위로 목을 뽑아 올리고, 목 위로 무표정한 얼굴을 마저 뽑아 올리고,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며 거리를 활보한다. 리키의 가족들은 저마다 불량한 채널 속을 떠돌다가, 질 나쁜 주파수로 매일 밤 다시 희미하게 접속한다.

 

 

2. 임시 채널

 

거의 증발 수준의 도주 실력을 발휘하는 리키는 매일 저녁 내게 전화를 한다. 우리 각자의 채널 속에서 잠시 빠져나와 임시로 설치된 채널에서 몰래 만난다.

전화 수화기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소음, 제발 리키 목소리를 좀 낮춰, 나는 소리친다. 나는 빛보다 집요했던 불세출의 추격자 하지만 이제 늙었다. 나를 대신해 풀어놓은 밤의 인공광은, 대낮의 도플갱어들. 그들의 추격은 좀처럼 따돌릴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갖게 된 직업은 일상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다양한 도주 행위이다. 신출귀몰한 리키.

 

 

3. 가상 채널

 

알았으니 진정해요. 그렇다고 갑자기 조용하니 무서워요. 그냥 숨만 크게 쉬세요. 네 좋아요. 내 말 좀 들어 봐요. 요 근래 묵고 있는 호텔의 창문들은 매일 조금씩 손톱처럼 자라나 밤마다 내 목울대를 도려낼 기회를 틈틈이 노리고 있답니다. 오직 나만 눈치 챌 수 있도록 조금씩만 자라는 건 창문이면 으레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고독 때문일까요. 두려워진 나는 창문을 끝까지 열어젖히고 매일 둥글게 손톱을 깎는답니다. 점점 손끝은 생인손의 기미를 띠며 빨갛게 달아오르고 전 독감에 걸렸습니다. 코를 풀 때마다 티슈를 뽑듯, 창문 한 장씩 한 장씩 다 뽑아 씁니다. 조금씩 창문이 자랄 때마다, 당신의 권총이 어서 빨리 내 몸에 또 하나의 완벽한 채널을 뚫어 주길, 당신의 수갑으로 인해 항상 반대쪽만 가리키던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하곤 합니다. 가상의 채널 속에서만 우리는 이렇게 같은 주파수로 겨우 존재하지요. 희미하고 잡음도 많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이것은 저와 당신께 동시에 전하는 인사입니다.

 

 

4. 화면 조정

 

통화가 종료되었고, 가상 채널은 해체되었다. 내일부터 나는 다른 리키를 쫒게 될 것이다.

기억 속으로 영영 도주한 리키의 목소리엔 우울한 중력이 거미줄처럼 뒤엉켜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대도 떨어지지 않는, 징그럽도록 붉디붉은 사과를 무수히 매단 수화기 속을, 리키의 흐느낌과 마지막 인사만이 겨우 빠져나와, 이제 늙고 무능한 추격자 된 내 발등에 뚝 떨어져, 모래주머니처럼 질질 끌리는 저녁이다.

서울 광장에서 꼬마 리키가 헬륨 풍선을 놓치곤, 풍선이 무섭도록 순식간에 허공 높이 아득하게 그려 놓은 궤적을 올려다보며, 울음을 터뜨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두커니 서 있는 사이

풍선을 삼킨 하늘이 그만 몸이 무거워져 손톱만 한 땅거미에 이끌려 땅바닥까지 끌려 내려온다. 대낮의 전원이 내려지자 지구는 밤의 채널을 송출하기 위한 화면 조정 시간, 방전된 리키와 나는 꺼진 우주 브라운관의 칠흑 속에서 미정형의 미립자처럼 채널을 잃고 멈춰진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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