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 외 1편

 

도종환

 

 

빙하기

 

 

 

벌목을 하다 잠시 쉴 때면 자작나무에 등을 기댄 채 떨어진 자작나무 껍질 주워 편지를 쓰곤 했다 자작나무 껍질은 희고 얇아서 마음의 몇 조각을 옮겨 적기에 알맞았다 백 년에 이 백여 리씩 녹으며 후진하는 빙하가 남긴 영토를 따라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야크와 순록과 여우가 먼저 올라갔고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빙하기로부터 시작한 내 어린 날의 결빙이 언제 풀어질지 그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쪽방에 기거하는 동안 연탄불이 자주 꺼졌다 손도끼로 침엽수 도막을 잘게 부수어 십구공탄에 불을 붙이는 동안 삶은 매캐했고 문짝도 없는 부엌에서부터 일찍 어두워졌다 내가 눕는 윗목에는 그릇의 물이 바로바로 얼었고 내 몸도 밤새 달그락거렸다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나는 말이 없었고 한 마을에 사는 친구와도 졸업 때까지 두세 마디 짧은 말밖에 주고받지 않았다 말을 할 때도 눈을 내리깔거나 시선을 피하는 것은 영하의 숲에 사는 이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는 사람을 느리지만 끈질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흑야는 길었고 일찍 진 해는 늦게 떠올랐다 수렵을 그만둔 아버지도 정착할 곳을 정하지 못한 나도 각각 우울하였다 보드카는 추위를 이기기에 좋았다 고독한 늑대 한 마리 멀리서 측은하게 나를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때 고독한 것들에게 보낸 자작나무 엽서는 어느 숲과 바람 속을 떠돌고 있을까 생각하는 저녁이면 어둠과 칼바람이 친구처럼 찾아와 오래 곁에 머물곤 했다

 

 

 

폐교

 

 

 

시든 풀들이 운동장을 덮고 있었다 학교 이름이 걸려 있던 교문 기둥은 명찰이 뜯겨 나간 자국처럼 폐허의 실밥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이십여 년 전 나는 이 학교로 쫓겨 왔었다 눈빛 형형하고 목소리 큰 시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이 문제 된다고 조사를 받았다 암병동이란 시 여러 군데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고 희망 싸움 이런 시어들이 나보다 먼저 끌려와 오랏줄에 묶여 있었다 낳은 지 넉 달밖에 안 되는 딸을 두고 아내가 세상을 뜬 그 이듬해 봄이었다

 

교감은 월말 보고를 위해 내가 읽는 책 이름을 성실하게 적어 갔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 걸려오는 전화의 내용과 실랑이를 하곤 했다 그는 감시 비용으로 내려오는 몇 십 만 원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고 교장에게도 볼멘소리를 던졌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도 잡풀 더미에 덮여 묻혀 있었다 내가 부들부들 떨며 썼던 시들도 풀풀 날려가 버리고 적막만 거기 있었다 회색의 구름덩이 같은 것이 물감처럼 풀어져 내리며 학교 주위를 덮고 있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교정에서 붓꽃 잎에 편지를 쓰곤 했다 나도 내 어린 자식들이 보고 싶었다 저녁에 숙직실에서 혼자 라면을 끓이다가 육상부 종운이를 불러 나누어 먹곤 했다 종운이는 아버지가 없어도 씩씩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으로 갔던 계집애들은 애기 엄마가 되었고 보일러실에서 일하거나 중국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는 남자애들도 삼십대 중반이 되었다

 

강마을 아이들 그 애들과 글쓰기 공부를 하던 자리에도 휘적휘적 바람만 남아 있을 뿐 풀잎에 맺힌 이슬 같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글을 모아 책을 내기도 했건만 세상의 곳곳이 폐허로 바뀌는 동안 학교도 무너져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발끝을 적시는 찬 이슬뿐 다가와 아는 체하는 잡풀 더미뿐 아이들도 아이들과 함께했던 세월도 폐기 처분 되고 없었다   《문장웹진 6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