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말하기를 외 1편

 

류외향

 

 

섬이 말하기를

 

 

 

오전 10시와 당신 사이

섬이 길을 열어

얽히고설킨 억새 뿌리 같은 절벽이

수만 겹의 당신 마음 같은 계단을 밟고 내려서고서야

바다에 닿아

또 하루를 건너갈 수 있나니

 

바다에 흥건히 젖은 몸으로

섬이 말하기를

상처만이 상처를 알아볼 수 있나니

너무 성한 몸으로 내게 닻 내리지 말기를

 

검은 절벽에 뿌리 내린 수많은 구멍

그 속으로

당신을 품어 줄까

당신을 삼켜 줄까

 

섬이 말하기를

상처만이 상처를 외면할 수 있나니

사랑이라 하여 너무 서둘러 뛰어내리지 말기를

절벽 아래 검은 물속

열 길 사람 속보다 더 깜깜하여

누구도 섬이라는 이름의 당신을 구원할 수 없나니

 

오전 10시와 당신 사이

섬이 길을 열어

저어기 남태평양에 걸린 수평선 그 어디쯤

말갛게 씻긴 얼굴로 두둥실 떠오르는

너무 많은 당신

 

 

 

어떤 기억

 

 

 

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시큼달싹한 황금 똥을 닦아내다가,

보았네

 

바싹 마른 논두렁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사내아이 하나 서늘한 늦겨울 햇살 속에 아랫도리를 내어 놓았네 아빠는 돈 벌러 가서 돌아오지 않고 엄마는 돈 벌러 간 아빠를 찾으러 가서 돌아오지 않네 아이는 딱 한 발자국 앞의 할아버지 뒤꿈치만 쫓아가네 할아버지 발뒤꿈치 조금이라도 멀어질세라 멀어지면 날개 달린 구두처럼 눈앞에서 사라질세라 늘 아랫도리를 내어 놓은 그 아이에게 걷는다는 것은 그림자밟기와 같았네 뒷짐 진 할아버지는 좀처럼 뒤돌아보지 않았네 뒤를 돌아다볼 기력이 없었네 자라지 않는 아이의 잠지 끝에서 한겨울의 빨간 냉기가 뚝 뚝 떨어질 때 아이의 발자국 남겨진 논두렁 위로 무심히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네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가,

야무지게 젖을 짜내는 입과 맛있게 감긴 눈을 내려다보다가,

보았네

 

아랫도리를 내어 놓은 사내아이 하나 문지방 옆에 죽어 있네 돈 많이 벌어 데리러 오겠다던 아빠는 소식이 없고 아빠 찾아 데리러 오겠다던 엄마도 까치발이 다 닳도록 소식이 없네 이승의 소식보다 저승의 소식이 더 빨리 당도한 할아버지 비루한 육신이 먼저 숨을 놓았네 아이는 할아버지 시신에 매달려 여러 날을 보채며 울었을 것이네 그 강파른 육신이 조금씩 굳어 갈 동안 아이의 숨구멍도 하나씩 닫혀 갔을 것이네 세상에 나와 아이가 배운 것은 뒤꿈치를 쫓는 일이 전부였네 혼자 문지방을 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는 할아버지와 발바닥을 마주한 채 굶어 죽었네 얼마나 많은 날을 홀로 지새워야 굶어 죽을 수 있는 것인지 냉골의 방바닥 위에 너무 가벼워 손대면 바스라질 것 같은 두 죽음이 그림자처럼 누워 있네   

 

몇 년 전 TV와 신문에서 잠깐 보았을 뿐인 그 아이가,

다른 숱한 죽음처럼 스쳐 지나갔을 뿐인 그 아이가,

이제 와 자꾸 보이네   《문장웹진 6월호》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