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서

 

김은경



빗속에서




집으로 향하는 성내천(城內川)

우산 없이 비를 맞는다 토끼풀과 나란히

비바람에 시시때때 꽃잎과 결별 중인

찔레나무와 나란히

눈 뜨고 잠든 돌멩이와

나란히 나란히


돌아보니 빗속을 이렇게 

맨몸으로 걸은 기억이 없다 어느 저녁

피치 못할 소낙비를 맞으며

눈물로 한 사내를 기다린 적 있었으나

불손하게도 인생은 어차피

장마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 때 있었으나

빗방울을 생애 단벌로 껴입은

토란잎처럼은 아니었다

황사 비에도 어김없이 제 초록을 키워 가는

청미래 이파리처럼은 아니었다

(슬픔의 연주 방식에도 고수와 하수가 있다니!)


눈 뜬 채 비 맞는

모든 맨몸은 매혹적이다

오디나무의 맨손 사마귀의 맨발

눈 먼 해바라기의 맨얼굴 그리고

나의 맨 처음, 그대

결코 회귀할 수 없는 물고기 같은 말

맨 처음……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기운 어느 저녁

우연히 마주친 비,

가랑가랑 고저장단을 맞추어 내리는 빗속에서

나는 지금 오롯이 맨몸이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가 직립의 한 생애를

둥글게 감싼다




섣달그믐




오래전

붉은 그믐의 밤이 반죽한

한 몸이 있었는데

무딘 칼 한 자루에도

마음 곧잘 내어 주던

착한 영혼이 있었는데


잠깐의 목멤이 없지는 않았으나

모르는 척,

식당에 혼자 앉아

팥칼국수를 먹는 저녁

내가 미처 음복 못하고 보낸

첩첩의 고통이 긴 실타래 풀어

마침내 나를 먹이는가

떠난 당신이 내 앞에 앉아

허연 국수사발 같은 눈동자로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데


살아야 한다고, 때로는 무심한 듯

살아야 한다고

왼손이 오른손에게 더운 손이

찬 손에게

몸의 일부를 내어 주며

숟가락을 내미는 시간, 핏빛의 당신을

물 한 모금 없이

후루룩 삼키는 저녁


목으로 넘어가는 이 따듯한 어둠이

당신의 눈물인 듯 간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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