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바다에 와서

 

이승철 



변산바다에 와서

―박영근 시인을 생각하며




그날 파도는 온종일 나에게 앓는 소리를 토해 냈다.

변산반도 앞 새푸른 솔섬이 깃발처럼 나부껴대던 날

태풍이 난장 치며 떠나간 방파제 아래 뻘밭 게떼들이

생존의 구렁 속에 온몸 처박고서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만삭의 파도가 하이얀 면사포를 뒤집어쓴 채 떠나갔다. 

저물녘 흐느낌소리 뒤끝 홍화문 문짝처럼 서러워지던 너.   

저 꽃들이 두렵다던 네 말을 그땐 차마 믿지 못하였다.

눈먼 네 사랑은 곰소 염전창고 막소금처럼 짜고, 개운했다.      

애당초 끗발 없던 인생쯤이야 적막강산으로 남겨져야 했다.  

이팔청춘의 흔적처럼 산다손 얼마나 더 버팅길 수 있었을까.    

여직 귓바퀴 속에 감도는 이냥저냥 잘 놀다간다던 네 유언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철지난 유행가 가락 속에 

봄날이 소주병에 꽂혀…… 아, 진달래, 환히, 취한, 얼굴들아

어여 길 떠나시게나, 뉘라서 저 파도와 당당히 노닐었을까.      




남자는 그 무엇으로 사는가

―부서진 육체들에게




흔적 소리 요란한 뒷골목 어디서나 가시면류관을 쓴 시절이

가고 또 왔을 뿐, 저만치서 파산된 한 사내가 저물어간다. 

채석강 층암처럼 덧쌓여 가던 그 바람의 흉터가 허청허청 

버려진 몸피 곁으론 몇 마리 갈매기가 똑딱선을 재촉할 때

내 귀밑머리를 간질이는 그 얼굴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변산바다에 와서 삐비꽃 울음들이 차마 가당키나 할 건가.

엉덩이가 탱탱한 그 여자가 내 핏속에 아직 살아 있다고?

그날 은빛 부챗살을 펼치며 난 말했지. 한세상 살아가려면

사랑이 아니라 씨발 난, 지금, 돈이 필요해. 해줄 수 있어?

넌 철면피 개자식이야…… 썰물 진 바다 위 가을 수국처럼

묵묵히 고개 숙이던 한 사내의 뒷그림자가 가당치 않았다.

맨발의 깡촌에서 서울까지 달려왔다면 그래, 장한 일이지. 

승냥이 울음처럼 엎어져 살고팠던 솔밭가 노을 속으로

참숯 한 자루도 없이 나 또한 훨훨훨, 잘 타오르고 있었지.

토막난 그리움만 부용산 산허리를 허위단심 휘감아 돌 때

저물녘 여강 갈대밭 그늘 속에서 우리 이제 헤어지는 연습을

하자구, 당신 만나면 무심히 살속으로 집어넣고 싶었을 뿐

허나 이젠 돌아볼 언덕도 찾아갈 옛 사랑의 그림자도 없이

그 무엇 때문에 부서진 육체들만 허구헌날 만지작거리나.

오늘 갑자기 울고 싶어져, 하지만 내 참아야지, 참아야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구? 네 핏속 깊이 내 마음이 산다구?

난 지금 너 때문에 망가져 갈 뿐이라고 차마 말하지 않겠어.

날 사랑한다고? 죽도록 영원히 나만을 홀로 사랑하겠다고?

그건 야무진 꿈일 뿐이야, 니기미 나 혼자 살아가기도 벅차.

널 끝까지 데리고 갈 수 없어, 그게 나라는 존재임을 알아줘,

다만 내가 널 인간적으루다가 좋아한다는 걸 넌 이미 알거야.

황동 석쇠 위 유황오리 한 마리처럼 제발 날 조근조근 씹어줘.

난 길을 잃었어, 지난 여름 빗방울처럼 서운찮게 부서질 거야.

남자는 그 무엇으로 사는가, 라고 제발 또 다시 묻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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