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로 단 눈웃음

 

정유화



패로 단 눈웃음




잠시 나를 바라보던 한 처녀가

눈웃음 하나를 놓고

봄이 오는 길모퉁이로 사라졌는데

그 눈웃음은 사라지지 않고 

내게로 와서 복사꽃 피듯 피어나는데

이를 어찌해야 하나

가슴에 받아 든 이 눈웃음에서

풋풋한 살냄새도 나고 보리냄새도 나고

아카시아 꽃향기도 나곤 해서

이를 오래도록 몸속에 지니고 싶은데

이를 어디에다 숨겨놓고 볼 수는 없을까

하여, 나는 나의 눈웃음까지 섞어

절벽에서 필 철쭉나무에게도 주고

턱을 괴고 듣기만 하는 바위에게도 나누어 주고

봄바람 쐬러 나오는 별의 처마에도 나누어 주고

강물 속의 물고기에게도 나누어 주고

그래도 남은 눈웃음이 있으면

우리 집 문패로 걸어 놓으리

꽃피고 지는 계절 없이 늘

아껴서 볼 눈웃음

맑은 피를 돌게 하는 눈웃음.




‘동지(冬至)’라는 말 속에 들어가




누워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밤 속에 들어가 누워보니

인적도 없는 아름다운 숲 속의

오두막집에 갓 든 듯하고

포대기에 싸인 갓난 애기라도 된 듯하다

동지의 내부는 바람도 없이 아늑해서

눈이라도 온다면 맨발로 걸어서

까칠한 세상 바깥 어디로든 갈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동지는 한 해의 어둠 중에서

가장 짙고 연한 신생의 어둠을 지어서

꿀밤나무, 오소리, 토끼, 마늘밭

봇도랑, 지붕, 십자가, 김칫독, 굴뚝새에게도

나누어주고 있는데

나는 아랫목에 누워서

동지가 지어내는 어둠이 마치 먼 후일의

생명을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저녁 환한 부엌에서 잔치인 듯 음식을

지어내는 어매와 누이와

일가친척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이제 숲 속의 바람이 몰려와 마당에서

한바탕 시위를 해도 괜찮을 것만 같다

나도 먼 후일에 쓸 요량으로 깊은 밤을

여러 개의 볏단처럼 묶어서

차곡차곡 볏가리를 쌓고 있으니

동지랑 함께 동치미 익는 소리를 들으며

잔치처럼 쓸 어둠의 빛을 설레며 묶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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