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배용제



봄날



1


마침내 꽃들이 피어났고

친구의 심장이 멎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듯이

황폐한 숲으로부터

한꺼번에 뒤덮인 화사한 꽃빛은

또 어떤 주검의 낯빛을 꾸미려 쏟아져 내려오는지, 이 도시에

저들을 맞이할 죽음은 모두 마련되어 있는지

거리에 버려진 캔이며 술병들은 이상하리만치 반짝였다

허리가 굽은 노인은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것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꽃들은 황폐한 내부에서 돌출된 마지막 숨결처럼

정직하게 차례대로 목을 꺾기 시작했다

거리는 처음인 듯 활기가 넘쳤다


2


가령 이렇다면 어떨까?

단지 우리는 바람의 두런거림을 듣지 못했노라고

친구가 긴 그림자를 끌며

겨울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

혹은 싱싱한 꽃을 보러 황폐한 숲으로 들어설 때,

나는 지나간 한 여자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공중에 가득한 뿌연 먼지 속을 뒤적거리고 있었을 때,

그것들은 너무도 명료한 시간들이어서

우리는 잡담 같은 바람의 수다를

전혀 듣지 못했노라고


그때도 낡은 덤프트럭은 언덕을 오르며

경적을 울렸다

막 커피 배달을 끝내고 돌아가는 아가씨의

하얀 다리는 여전히 탐욕스럽게 싱싱했다

결국 한줌의 햇살 속에서 우리가 꺼낸 이미지들은

어떤 것도 평범했다


양지바른 곳에서 노는 아이들은 가끔

어른들이 모르는 어떤 이유 때문에 울었다

그러고도 지루한 봄날의 오후는

철물점 안주인의 그림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제각기 다른 포즈로 진열된 상점주인들 사이

나는 친구가 흘리고 간 그림자를 주우러 거리를 헤매었다

순댓국밥집을 지나고

정육점을 지나는 동안, 내 표정은 아무런 저항 없이 비워졌다

그러고도 견디는 시간이 있다면

그러고도 호기심을 갖는 풍경이 있다면, 가령

약간은 더럽혀져도 좋을 우리의 주소록 같은 것


3


세상은 무서우리만치 침착했다

어김없이 밤이 가고, 새벽은 찾아오고

왜냐하면, 바람의 흔적은 언제나 한 번이었고

따뜻한 햇살 아래 졸음처럼 지나버리는 날들뿐,

황혼 무렵이면

건물들은 거꾸로 처박혔던 그림자를 뒤집어쓰고

빈 창문을 통해 천천히 한낮을 추억하는 그림을 그렸다


도시 밖으로 쏜살같이 몰려가는 햇살의 흔적과

어디선가 밥 짓는 냄새가 풍겨왔다

식탁에 덩그렇게 놓여 있는

가고 없는 날들뿐.




갈증




서해 어디쯤에서 밀려온 바다가

내 속으로 들어온다

수천의 무덤을 지나고 모든 종류의 뿌리를 지나온 바다가

벌컥벌컥 밀려온다


본디 내 몸이었던 바다,

내가 강물이었다가 짐승이었다가 나무였다가

암컷이 되고 수컷이 되고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고

너의 눈물이 지나간 길로 내 붉은 피가 흘러간다

내가 낡아간 구멍에서 너는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살아있음도 죽음도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지나가는 길

언제나 바다는 맨 처음 되돌아간다


세상에 소나기가 퍼붓는 동안,

온갖 풍경들이 바다를 향해간다

그 붉디붉은 길을 거침없이 끌고 나를 통과한다

몸의 평원에 신기루가 열리고

핏빛 공포의 무지개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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