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갈이

 

유종인



굽갈이




굽 없는 신발을 신고

문 닫은 구둣방 곁을 스쳤다

문 닫으면 문 닫을수록

더 들여다보게 되는 구둣방 안의 의자,

툇마루처럼 등받이 벽을 가진 의자에

마흔 가까이 닳린 몸 앉혀보지 못했다니


궁벽(窮僻)에는 살이 없다더니

살 대신 살가죽만 남은 비루먹은 말이

낡은 편자를 갈아달라 툭, 툭

앞발로 어둑한 구둣방 유리문을 건드리듯

흐린 날 주먹눈들이 닫힌 자물쇠에 엉겨붙는 날,

편마모(偏磨耗)의 내 신발 뒤축에도

문득 오리나무 편자라도 해 달고 싶어지는 건

궁벽에는 오지(奧地)가 따로 없어서이니

멀리 가서

멀어진 눈과 귀로

마음밖에 남은 말이 고삐도 없다면


가난은 굽만 갈아 신는 신발,

편마모의 뒤축으로 눈길을 밟아오면

어느 날은 지구가

내 몸의 굽으로 매달렸다, 숫눈 깔린 저녁은

내 몸에 들린 지구가 적막한 내 발자국으로

저의 말굽인양 갈아 신으며




견본(見本)




 들판의 물길 지나간 고랑에 뿌리 뽑힌 갯버들 누워있네 나이가 얼마냐는 듯 저녁 까치는 짖고 늘그막도 없이 싱그럽게 누운 처녀를 범하듯 굵은 가지에 오르네 포클레인에 끌려나온 뿌리는 무성한 음모처럼 꼬불거리고 누운 처자 가지마다 가랑이가 여럿이네 근처 농수로의 물 냄새만으로도 초죽음의 끼니는 되는 법 어둑시니 어둠은 천 리 가까운 아득함을 밟아오고 숫처녀 이 싱싱한 주검에 한 계절쯤 붉은겨우살이*로 곁들어 보느니 서로 뿌리를 드러낸 것들끼리 한 하늘을 손잡고 누웠다 하네 이년 저년 생몰(生沒)의 사반 세기 선한 목청도 없이 스러진 갯버들 가에 들고양이 호박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도 한 마디 말 못하네 저어기 들판 끝에 콘크리트 천막을 친 마을의 불빛만 날 멀리하네 가만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의 꼴이란 어디다 스며둬야 하는지 몰라 갯버들 말라 가는 뿌리 거웃만 더듬네 우리 전생의 물가에서 아랫도리 얼키고설킨 내력이 든 바람의 두루마리가 찢겨 나부끼는 걸 다 읽지 못하고 왔네



* 붉은겨우살이: 상록성 기생 관목. 새둥지처럼 자람. 열매의 색깔이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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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는어항

와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