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깊이

 

강연호



그늘의 깊이




사람의 그늘을 만난 지 오래다

어디 그늘이 없었을까, 눈 흐려진 탓이다

나이 들면 자꾸 멀리 보게 마련이고

멀리 건너다보는 시력으로는

사람의 그늘도 흐리게 뭉개지는 법


그늘을 헤아리는 심사는

어느 늙은 나뭇가지 사이로

한때 무성했던 세월이 구름처럼

뭉텅뭉텅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바람 가는 방향으로 귀를 연 이파리들의 

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늘어졌을

한 시절의 내력을 가늠하는 일

우듬지 여윈 손가락이 바람을 쓸어 넘기듯

아, 나도 언젠가 저런 빗질을 받은 적이 있었더랬는데

덜 마른 빨래처럼 고개 수그리고

머리를 맡겨 생각에 잠기는 일


지금은 없는 누군가의 서늘했던 그늘

그 어두웠던 눈 밑으로

문득 흔들렸을, 아니 잠깐 반짝였을

불빛인지 물빛인지를 놓치지 않았으나

그저 놓치지 않았을 뿐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멀리 외면했던

그늘의 길이를, 마침내는 깊이를

이제 와 곰곰 되짚는 일이다


그러나 눈 흐려진 지 오래

한 뼘 두 뼘 겨우 더듬을 뿐

사람의 그늘을 재어 본 지 오래다

 



금 위에서 서성거리다




어릴 적 여자애들의 줄넘기놀이

줄을 밟았다 넘었다 하는 현란한 발놀림이

나는 늘 어지러웠다

이 금 넘어오지 마, 초등학교 책상 위에

연필 깎는 칼로 그어 놓은 금은 또 어땠을까

나는 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금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날카롭게 파인 금이 아파 보였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선택의 강요는 언제나 내게 숨 가빴다 

나는 금 위에 머물고 팠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 사이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사이에서

촛불과 물대포 사이에서, 조차

나는 금 위에 있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많이 얻어맞았다

양쪽에서 욕설이 난무했고

회색은 색이 아니란다, 일단 선을 죽 긋고

당신, 어느 편이야?

이쪽이든 저쪽이든 넘어가야 한단다

노선은 분명해야 하고

탈선이란 선을 넘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경계는 늘 아슬아슬한 법이다

금 위에서 아슬아슬하고 싶었을 뿐

내 노선은 결코 탈선이 아니다

금 위에서 오래 서성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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