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개를 위하여 - 이현호
목록

 

이현호



들개를 위하여




그것이 앞발보다 신성할 까닭은 없다 어둠의 골조가 단단하게 발기하는 시간

그것에 닿지 못한 혓바닥을 거스러미 인 앞발에 대어 본다 모든 걸 안다는 듯

칠 벗겨진 침묵을 껴입은 백양목들 맞닿을 수 없는 뿌리의 간극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왼쪽 가슴에 달무리 진다

강물의 사전 태양의 연대기 달의 참회록 들에도 없는 그것이 갈비뼈 틈에서 달그락거린다

외진 주둥이를 앞질러 굴러가는 낙엽을 보면 굶주림 또한 일이지만 살얼음 안개 속은 너무 차고

입을 벌리면 구절양장의 빈 방으로부터 바람배가 차오른다


그것만이 맹목의 구체


수십 억 년 바람의 기억이 무진무진 피어오르는 이곳의 먹잇감들은 모두 안개의 습속을 지닌 것인가

날마다 표정을 바꾸는 달의 이면을 향해 삽날 같은 긴 울음을 우는 일

오랜 방황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사라져 가는 소실점 속에서 그것의 내밀이 출렁인다

오선(五線)에 목매고 죽은 까만 열매들이 부르는 깊고 쓸쓸한 소야곡

불면에 월계관 씌우고 애꾸눈의 어둠이 눈꺼풀을 주머니에 넣어 둔 채 히죽거린다

썩은 이파리 위에 고무 튜브처럼 둥글게 몸을 말고 길게 혀를 뽑는다

우물을 닮은 시간 속 그것은 들개에게서 가깝고 제일 먼 데 있다     




속항해일지(續航海日誌)



활공하는 유일한 왕국이여, 바다의 이마를 떠도는 무덤이여


그의 만돌린 소리가 들려오는 밤이면, 모두 갑판으로 나와 별빛에 몸을 씻었다 조타수의 손에서 물갈퀴가 사라지고 새 혀가 돋은 요리장은 게걸스레 바닷물을 퍼마셨다 눈 먼 항해사가 망원경을 길게 뽑고 뭍, 뭍, 뭍, 흐느끼는 소리 선장은 어둔 선실에 숨어 그 밤 내 환지통(幻肢痛)을 앓았다 운명과 근친(近親)이며, 선원만큼 저주와 어울리는 이들은 없다


그날 아침 그는 갑판 끄트머리에 섰다 바닷바람에 콧수염이 그믐달같이 휘어 버린 외팔이 선장의 칼끝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선상 반란이거나 물고기 밥이거나, 중인환시(衆人環視)의 파도가 다가올 비극의 초연이 재밌다는 듯 몸을 뒤치며 하얗게 웃었다 선장의 빈 소맷자락이 백기처럼 펄럭였고 돛대의 새들이 짤막한 울음을 남긴 채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유독 환했던 태양 그리고 바닷사람 같지 않던 그의 흰 목


새빨간 달이 산보 가듯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는 갈무리광(貯藏庫)에서 마지막 럼주를 꺼내 왔다 육지를 향한 축배 그리고 최후의 주술, 뭍에 두고 온 것이 사랑의 일만은 아닐 것 그는 갑판에 누워 한동안 밤하늘을 바라본다 한때 혼음(混飮)의 날이 계속되었던 배는 이제 잠들지 않는다 그는 느리게 연주를 마치고 빈 술병을 닫는다 이 배의 유일한 악사(樂士)인 그의 만돌린이 빈 내장을 검푸른 정적으로 채우며 가라앉았다


배는 뜨지 않는다, 영혼의 가장 낮은 곳이 젖지 않으면


만돌린 소리가 잦아들자 파도가 높게 일었다 혹은 파도가 일자 다른 소리들이 잦아들었다 별빛에 부서지는 물방울들 사이로 물고기들이 솟아올랐고, 선원들은 기괴한 웃음을 바다에 던졌다 선장은 충혈된 눈으로 빈 술병을 열고 혀를 쭉 빼물었다 그때 남은 우리들은 거대한 흰 물고기 한 마리가 파도의 정점에서 별을 삼키고 수평선 쪽으로 사라지는 걸 보았다 그 물고기가 사라진 자리로 엄지손톱만 한 검은 점이 돋아났다 술병 속에서 이명(耳鳴)처럼 그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던가 누군가 소리쳤다 육지다, 라고


빈 배의 항해일지를 넘기는 건 바람의 일이고, 지우는 건 바다의 일이다 우리는 강물에 몸을 눕혔다 뼛속까지 밴 소금기를 지우려 씻고 또 씻었다 강바닥으로 하얀 유리 가루가 쌓였다 살갗이 터진 돛을 불태우고 빈 술병에 흙을 담아 바다로 흘려보냈다 누구도 다신 바다를 밟지 않는다 듣기론 만돌린을 탄 사내가 길 잃은 배들을 노랫소리로 이끈다는 풍문이 뱃사람들 사이를 떠돈다고 했다


사람의 살을 먹은 물고기는 별빛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 라는 말을

오래전 한 늙은 선원에게 들은 적이 있다

목록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