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소처럼 늙어라

 

유강희



정미소처럼 늙어라




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아직은 늙음을 사랑할 순 없지만 언젠가 사랑하게 되리


하루하루가 다소곳하게 조금은 수줍은 영혼으로 늙기를 바라네


어느 날 쭈글쭈글한 주름 찾아오면 높은 산에 올라 채취한 나물처럼


그 속에 한없는 겸손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하늘의 열매 같은 그런 따사로운 빛이 내 파리한


손바닥 한 귀퉁이에도 아주 조금은 남아 있길 바라네


언젠가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다 잠깐 들어가 본


오래 된 정미소처럼 그렇게 늙어 가길 바라네


그 많은 곡식의 알갱이들 밥으로 고스란히 돌려주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식은 왕겨 몇 줌만으로 소리 없이 늙어 가는


그러고도 한 번도 진실로 후회해 본 적 없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반짝, 들려 주는 녹슨 양철 지붕을


먼 산봉우리인 양 머리에 인 채 늙어 가는 시골 정미소처럼


나 또한 그렇게 잊힌 듯 안 잊은 듯 조용히 늙어 가길 바라네




눈 내려라 대포항




이제 사랑 없이도

눈 내려라 대포항에

가슴에 쟁인 슬픔의 가지 쳐내듯

푹푹 내려라 펄펄 내려라

다닥다닥 줄 지어 기댄 포장마차마다

게 등딱지보다 붉은 불빛 흘러 넘쳐

배들은 코를 박고 옛사랑에 훌쩍인다

아무데나 어깨 낮추고 기어들면 어떠랴

아픈 아내를 위해 새벽이면

제 속의 이슬 깨고 달빛 걸음으로 절을 찾는

당신의 어둔 이마에도 하루 빨리 봄이 오길

눈썹 들어 빈 잔에 쓴 소주 한잔 채운다

수족관에 끌려온 바다고기들의 선한 눈망울과

건어물집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북어대가리에도

엎드려 절을 하며 내리는 대포항 눈발들,

한순간 물기둥으로 우우 솟구쳐 일어나

누구의 헛된 가슴을 세게 때리려는지

바다는 시퍼런 숫돌처럼 꿈쩍 않고 누워 있고

어디선가 대게들 딱딱 무릎 꺾는 소리와

피시식 입 벌리는 조개들의 탄식 소리 들리는데

하늘에 무슨 커다란 눈고기가 있어

하느님이 지상의 가난한 자들에게

눈발회 한 접시 돌리려고

이렇게 오늘 대포항에 흰 눈발 펑펑 나르시는가

kakao

댓글남기기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