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심보선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가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 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 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벤 허




티베리우스는 말년에 카프리 섬으로 은둔했고 거기서 죽었다, 우유부단했던 빌라도는 유배를 전전하던 끝에 단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마지못해, 그러나 능숙하게 잔인을 구사했던 로마인들, 토가의 주름을 피던 노예의 손목을 낚아 채 그 위에 새겨진 겹겹의 주저흔을 바라보며 능청스럽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이 약해빠진 암염소들아, 잘 새겨들어라, 위대한 작가 호메로스조차 너희들 노예의 비극을 다룬다면 삼류로 전락할 것이다!


유대의 명문귀족 허Hur 가문의 벤Ben, 기구한 운명을 따라 갤리선의 노예로 몰락했다가, 또한 로마의 시민으로 부활했다가, 결국에는 집안의 원수 메살라*를 죽이고 유대의 영웅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복수의 운명은 아직 그를 종착지에 데려다 놓지 않았다, 오래 전 지붕에서 떨어졌던 기왓장은 아직도 땅에 닿지 않았다**, 온몸이 말발굽에 찢긴 메살라는 죽어가며 절규했다, 이제 네가 승자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착각은 거두어라,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


그 때 메살라의 몸처럼 만신창이가 된 폐허의 유대 땅에 무엇이 남았던가, 골고다 언덕에서 나체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젊은 랍비의 크나큰 연민, 그의 한줌 피가 온 유대의 부토를 속속들이 붉게 물들였다,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대낮의 하늘이 순식간에 암흑에 빠지고, 죽은 자의 무덤이 벼락에 맞아 기왓장처럼 둘로 쩍 갈라졌다, 마리아와 마리아는 참을 수 없는 애통을 울부짖었다, 십자가 위의 젊은 랍비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인자(人子)로 눈을 감으며 울부짖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온 벤 허는 가슴에 전염된 크나큰 연민으로 어머니와 누이와 연인을 끌어안고 울었다, 마치 여자가 넷인 것처럼 흐느꼈다, 그 순간 그는 묘한 행복감에 젖었다, 케사르의 칼날이 벤 허의 품에서 빠져나와 케사르에게 돌아갔다***, 죽을 자의 얼굴을 죽을 자의 눈에 되비춰 주던 페르세우스의 칼날, 그 칼날은 로마의 모든 황금 조상(彫像)을 조각조각 찢어 발겼다, 폼페이를 뒤덮은 용암의 붉은 혀처럼 절정의 순간에 부르르 떨던 자랑스런 제국의 자지phallus들을 단칼에 거세해 버렸다


이후 크나큰 연민이 거대한 우유빛 아마포처럼 세상을 덮어 나갔다, 본래의 죄와 새로이 터득한 덕을 합치면 깨졌던 모든 기왓장들이 멀끔히 제 모습을 되찾았다, 벤 허는 유대의 땅과 로마의 땅 모두에 침을 뱉고, 아리따운 세 여자를 향해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유대의 명문귀족 허 가문의 벤, 그는 너그럽고 유순한 장자로서 어머니와 누이와 연인을 티그리스 강의 비옥한 삼각지처럼 가꾸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전해진다     




* 로마인이었으나 벤 허의 어릴 적 친구였다. 벤 허가 무죄임을 알고 있었으나 로마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국 우정을 버리고 벤 허와 철천지원수 관계가 된다.

** 벤 허의 연인이자 시종인 에스더가 그의 끈질긴 복수심을 질책하며 한 말.

***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로”, 마가복음 12장 13절~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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