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근






칼날을 밀고 간다

비바람 눈보라 뚫고 간다

앞으로 기운 머리

무수한 빗금 맞으며 간다


누군가의 습기 찬 방바닥이었다가

거친 꿈을 운행하는 천장이었다가

모로 누워 잠들었던 그가

손[手]들의 배웅을 받으며

문 밖을 나선다


뒤를 보이지 마라 물러서지 마라

돌아서는 발끝이 천 길 벼랑이다


무엇을 세차게 품었거나

뼈빠지게 무거운 짐 졌던

불의 심지에까지 다다랐다가

안으로 굽은 채 숯덩이가 되어버린

단단한 결별 하나




철거촌을 지나며




저것은 참회의 모습과 닮았다

머리 처박은 포클레인

앞에 한 시절의 살림들이

부서지고 파헤쳐져 있다


눅눅한 구들장 냄새에 묻어 있던 온기 몇 점

바람에 멱살 잡히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느티나무 아래 버려진 늙은 소파들

식어빠진 오후의 방담을 나누고 있다

자발없이 바람은 자꾸 불어싸서

대화는 자주 끊기고

서로 자기 말만 중얼거린다


칼바람 맞은 플래카드가 부르르 떤다

길 옆 구덩이에 속을 비운 막걸리 병들이

오골오골 쌓여 있다 홀로코스트,

너무 많은 말[言]들이 죽어갔다


아니라는 건지 맞다는 건지

천변에 수양버들 가지들

죽어라 하늘을 그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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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

이영옥 선생님!! 문장웹진 이달의 시에 선생님작품을 읽게 되어 기쁘고 반갑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늘 건강과함께 좋은시 많이 잉태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