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의 고향

 

액션의 고향

 

심재천

 

 

 

  

   X는 일주일 만에 구두를 벗었다.

   일주일 만에 구두를 벗는 생활.

   그런 삶을 살다 보면 발가락뼈는 변형되고 발톱은 너덜너덜해진다. 오소리 발이 되는 것이다. X의 발도 오소리 발이 된 지 오래.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X는 문득 의문이 든다. 그러나 깊이 고민하진 않는다. 오소리 발이 된다는 것. 남자가 밖에서 일한다는 건 그런 의미다. 시대정신이 그렇다.

   X는 현관문을 닫고 구두를 체크한다. 한쪽 구두를 들어 얼굴 가까이에 대고 뭐가 묻었나 살핀다. 구두코에 혈흔이 묻어 있다. ‘피가 팍 튀었네’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잔뜩 튀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 있는 거야.”

   그는 중얼거렸다. 살아 있기 때문에 타인의 혈흔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죽어버리면 구두 얼룩을 체크할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살아만 있다면 오소리 발이 되든 족제비 발이 되든 그에게 상관이 없었다.

 

 

 

   X는 신발장 위에 놓인 크리넥스통에서 티슈를 한 장 뽑았다.

   구두코에 묻은 혈흔을 티슈로 문지른다. 핏자국 일부는 흰 티슈에 묻어 나왔고 일부는 가루가 돼 떨어졌다. X는 피 얼룩으로 더럽혀진 티슈를 라이터로 태웠다. 훅, 불길이 솟았다.

   “아빠, 구두에 뭐가 묻었어?”

   X의 열 살짜리 아들이 거실에서 나왔다.

   “밀크커피.”

   “그런데 휴지는 왜 태워?”

   “어른이 하는 일이야.”

   X는 성대를 꾹 눌러 발음했다. 성대를 조이면서 말하면 위엄 있는 목소리가 나온다. X는 그런 식으로 품위를 유지한다. 집 안에서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가 재킷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아들의 손에 쥐어준다. 아이는 봉투 속 지폐를 셌다.

   “야, 삼백만 원이다.”

   “엄마 갖다 줘.”

   X는 이 가정의 주인이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겠다는 말투로 말했다. 아이는 다다다다, 달려가 제 엄마에게 봉투를 건넸다. 잠시 후 봉투를 손에 쥔 X의 아내가 나타났다. 키 170센티미터에 가슴은 봉긋, 팔다리는 가늘다. 출산 경험이 있는 40대 주부인데 그런 몸매가 가능한가. X는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다. 40대든 50대든 여자라면 그런 몸매를 갖는 것이 이 시대의 정신이므로.

   예민해졌어.

   그는 고개를 흔든다. 요즘 지극히 당연한 일에 불쑥 의혹을 품는다. 자신의 오소리 발, 아내의 글래머러스한 몸매. 사실 그런 것들은 관습이라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녀오셨어요.”

   X의 아내가 일본 여자 풍으로 남편을 맞는다. X는 포커페이스로 아내의 인사를 받았다. 엄혹한 표정으로 아내의 인사를 받을 것. 그것 역시 당대의 정신이다.

 

 

 

   아, 난 싸움을 너무 잘해.

   X는 생각했다. 마흔이 넘었는데도 격투에 능하다. 왜일까. X는 잠시 숙고했다. 방어와 공격이 너무 생각대로 맞아떨어진다. 상대가 흉악범이든 특수부대 출신이든 X는 이겨 왔다. 나이프, 권총, 만년필촉 어떤 무기라도 오케이. X는 안 진다. 저놈이 칼로 내 간을 쑤시고 들어오겠구나, 예측하면 정확히 간 쪽으로 칼끝이 들어온다. X는 딱 칼이 지나갈 만큼만 허리를 튼다. 칼날이 스친 자리는 셔츠가 조금 찢길 뿐이다. 실제로 간이라든가 비장이 찔린 적은 없다.

   반격도 깔끔하다. 이마를 쏴주지, 하고 총을 쏘면 상대의 미간에 탄환이 박힌다. 어김이 없다. 한 번쯤은 총알이 빗나가 귓불을 스칠 법도 한데 그런 적은 없었다. 언제나 클린.

   이렇게 유능해도 되는 걸까.

   X는 자문했다. 자신의 유능함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는 특수훈련을 받았다. 죽고 죽이는 실전을 거쳤고, 병뚜껑 하나로 사람을 죽여 봤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특수훈련을 받게 됐을까. 왜 이 길을 걷고 있나.

   X에게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면밀히 따지진 않는다. 지금 그의 발바닥은 무척 안락하기 때문이다. X는 양말을 벗고 털실 매트 위에 올라서 있다.

   맨발바닥에 털실이 닿으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한 느낌이 난다. 발바닥 쾌감 앞에선 아이덴티티 따위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아, 난 살아 있어” 하는 안도감만이 온몸을 휘감는다. 일주일 만에 구두를 벗으면 그런 장점이 있다. 털실 감촉만으로 인생에 감사하게 된다.

   게다가 집 안에선 아늑한 피죤향이 풍기고, 빨래 건조대엔 아내의 브라가 한가로이 걸려 있다. 헐렁헐렁한 브라의 모습에 X는 그만 가슴이 녹아내리고 만다. 가정이란 이런 거야, 란 서정이 그를 나른하게 감싼다.

   이대로 괜찮지 않은가.

   X는 따뜻한 물로 발을 닦는다. 자신이 지나치게 싸움을 잘하는 것에 대한 의혹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각사각.

   X의 아내는 강판에 사과를 간다. 그녀는 손수 망으로 즙을 짜서 남편에게 건넸다.

   “사과즙 드세요.”

   그녀는 언제나 존댓말을 쓴다. 신장 170센티미터에 가슴 모양도 예쁜데 반말을 찍찍 할 순 없는 법. 키 크고 볼륨감 있는 현대여성이라면 누구나 24시간 존댓말을 쓴다. 그건 너무 당연해서 관습이라고 하기에도 뭣하다.

   X는 포커페이스로 사과즙을 마신다. 빈 컵을 아내에게 돌려줄 때 다정하게 “고마워, 당신”이란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을 하면 마음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 바닥에서 약해지면 끝장, 이라는 게 X의 소신이다. 남자라면 다들 그렇게 산다.

   “아빠, 나 트랜스젠더 변신.”

   X의 아들이 여장을 하고 나타났다. 뽀글파마 가발을 썼고, 코밑엔 애교점을 그려 넣었다. 분장을 완성한 뒤 아이는 눈까풀을 깜박대면서 교태를 부렸다. 풋, X의 아내가 웃었다. 열 살 사내아이의 재롱이라기엔 수준이 높았던 것이다.

   X는 웃지 않는 걸 기본으로 삼는 남자다. 아이의 재롱에 히죽 웃는다면 가장으로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겠나, 하는 게 X의 오랜 관념이었다. 아들이 제아무리 미스코리아 흉내를 내도 웃어선 안 된다.

   트랜스젠더 쇼는 5분간 이어지다 끝났다. 아이는 침착하게 가발을 벗고 애교점을 지웠다. X는 끝까지 웃어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뭔가 국가의 중책을 수행하는 사나이야.

   그것이 아이의 견해였다. 웃어 주지 않는 아빠에게 앙심을 품진 않았다. 오히려 아이는 존경심으로 뺨을 붉혔다. X는 아들의 홍조를 보고는 좀 더 냉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빠 최강.

   X의 아들은 안심했다. 아버지의 포커페이스를 보면 자식은 더욱 깊은 경애심을 갖기 마련. 아이는 애써 흥분을 감추고 ‘2차 세계대전—롬멜 편’ 도서를 읽기 시작했다.

   “잠을 자야겠어.”

   X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아이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푹 쉬세요, 여보.” 아내도 애호박 썰던 손을 멈추고 인사한다.

   X는 안방 문을 걸어 잠갔다.

   철컥.

   쇳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피죤향 은은한 가정에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무정한 쇳소리였다. 하지만 X의 아들은 거기에 대해 유감을 갖진 않았다. 아빠라면 터프하게 방문을 잠그는 법. 학교 친구들의 아빠도 죄다들 그렇게 문을 잠갔다. X의 아내 또한 문 잠그는 행위에 대해 별로 불평하지 않는다.

   저이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야.

   그녀는 확신했다. X는 자신이 비밀요원이라는 사실을 공표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어느 순간 눈치를 채기 마련이다. 비밀요원이 아닌 남자가 한 집안의 가장이 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무릇 시대가 그렇다.

   저이는 극한의 긴장 속에 살고 있어. 그래서 저토록 과격하게 안방 문을 걸어 잠그는 거야. 내 사과즙을 받아 마시고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

   X의 아내는 분석했다.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애호박을 균일하게 썰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X는 한잠 잘 준비를 했다.

   자신에게 그 정도 권리는 있다는 판단이다. 일주일 동안 일했으면 당연한 것이다.

   X는 권총집의 피스톨을 빼서 베개 밑에 두었다. 그러고는 선인장 화분을 들추고, 천장 스프링클러를 뜯었다. 클린. 도청장치 없음. 그는 망원경을 든다.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바깥 동태를 살핀다. 클린. 저격수 없음. X는 안도하고 침대에 누웠다.

   가만. 내 아들이 너무 잘생긴 건 아닌가.

   X는 또다시 사색에 빠졌다.

   그의 아들은 ‘열 살 소년의 표준’이라고 할 만큼 평범하다. 키 150센티미터에 턱선이 잘 빠졌다. 손가락이 길고 복근이 발달했다. 그뿐인가. 반항도 꽤 멋있게 한다. 얼마 전엔 “이런 게 인생이 아니잖아요.”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자 간 대화가 필요하다 싶을 땐 “아빠, 후배위라는 게 뭐죠?” 하며 먼저 물어 온다. 타이밍이 뭔지 아는 녀석이다. 트랜스젠더 쇼 같은 재롱도 제시간에 내놓는다. 즉 지극히 평균적이다. 남의 집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X는 근본적인 것에 자꾸 회의를 품는 자신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 원인을 분석하기엔 몸이 너무 고단했다. 그는 담요를 턱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아, 빵점짜리 작문 숙제.”

   불현듯 X는 아들의 과제물을 기억해 냈다. 아들은 지난주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빵점을 맞아 왔다. 노트 하단엔 ‘아무리 SF라지만 현실감 부족’이라는 심사평이 적혀 있었다.

   “뭐였더라. ‘영화’라는 희한한 말이 등장했지.”

   아들의 작문은 ‘영화’가 테마였다. X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도대체 ‘영화’라는 단어는 어디서 나온 거냐고 묻자, 아이는 자신이 직접 ‘비칠 영(映)’과 ‘그림 화(畵)’를 합성해 어휘를 만들었다고 대답했다. “너무 제멋대로인데.”라고 X가 평하자 아이는 시무룩해졌다.

   내용은 더욱 제멋대로였다. 머나먼 미래사회. 주민들은 ‘영화’라는 대형 직사각형을 쳐다보면서 자신이 스파이라든가 특수부대 중령이 된 기분을 느낀다. 대형 직사각형 속에선 그림들이 움직이는데 그건 빛으로 만든 가짜 형체다. 형체들이 서로 사랑하거나 배신하고 자동차 추격을 벌이면, 미래인들은 그걸 주시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돈까지 지불하고 ‘영화’란 걸 쳐다본다는 건데 전혀 리얼리티가 없었다. 스파이가 되고 싶으면 직접 스파이가 되면 그만이다. 어째서 ‘스파이 형체’를 보면서 스파이 기분을 낸다는 것인가. 대체 그런 사회가 가능하기나 한가.

   X도 처음엔 빵점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의 작문엔 뭔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누가 딱 집어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X는 요즘 자신이 사물에 대해 엉뚱한 의심을 품는 게 아들의 작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대해 더 분석하려 했지만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낮에는 수업, 밤에는 살인. 두 얼굴의 고교 체육교사.

   조간신문 1면엔 그렇게 쓰여 있다. 잠에서 깬 X는 식탁 위의 신문을 집었다. 일주일치 잠을 몰아서 잤기 때문에 눈알이 깨끗해진 느낌이 들었다. 오전 11시였고 아이는 학교에 가고 없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신문을 읽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석 달간 여고생 제자 6명 살해.

   헤드라인엔 그런 소제목이 붙어 있다. X는 식탁 앞에 앉아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영화’니 ‘리얼리티’니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아들의 빵점 작문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었다. 신문 활자를 읽고 있으면 확실히 현실감이 돌아온다. 고교 체육교사는 살인을 하고 여고생은 죽는다. 그건 유행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딘가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X의 아내는 늦은 아침상을 차린다. 삼치구이에 레몬을 뿌렸고, 간장에 고추냉이를 풀었다. 브로콜리를 데쳤고, 토란국의 간을 봤다. 마지막으로 백김치를 썰면서 그녀는 남편을 흘끗 바라봤다. X의 자세는 무척 곧았다. 척추를 꼿꼿이 펴고 목 관절 각도 45도를 유지한 채 신문을 읽었다. 얼굴은 늘 그렇듯 포커페이스였다.

   과연.

   백김치를 종지에 담으며 X의 아내는 감탄했다. 여고생 6명이 살해당한 기사를 읽으면서도 남편은 의젓했던 것이다.

   그건 이이가 저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X가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온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사회의 강력사건이 해결돼 있었다. 지난달에는 주한미군을 살해한 범인이 잡혔고, 두 달 전엔 잠실 쇼핑몰 총기난사범이 저격당했다. 모두 남편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의 헤드라인이었다. 당시 남편은 무생채라든가 미나리를 씹으며 무심히 헤드라인을 읽었다.

   이날 아침도 X는 밥에 백김치를 얹어 먹으며 덤덤히 신문을 본다. 체육교사의 살인 행각을 날짜별로 정리한 그래픽에 시선을 주면서 우적우적 잘도 백김치를 씹었다.

   “이번 출장은 어땠어요?”

   X의 아내가 물었다.

   “뭐, 그렇지.”

   X는 반말로 답했다. X의 반말은 풍속을 위반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X의 아내에겐 그 점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비즈니스는 잘 해결됐고요?”

   “노란색 스펀지.”

   X는 독백을 내뱉었다. 그는 고교 체육교사의 원룸을 덮쳤던 순간을 회상했다. 여섯 번째 희생자는 이미 시체가 돼 있었고, 체육교사는 톱으로 시체의 허벅지를 썰고 있었다. 절단된 허벅지에선 샛노란 피하지방이 스펀지처럼 비어져 나왔다. 여자의 신체엔 지방이 많아서 노란 스펀지가 하염없이 새어 나오는 법이다.

   체육교사는 원룸 욕실에 쭈그려 앉아 “지금은 공교육 중이야.”라고 웅얼거렸다. 말을 하면서 계속 시체에 톱질을 했다. 욕실 바닥은 피바다였고, 노란 스펀지 같은 피하지방이 점점이 떠 있었다. X가 숱하게 봐온 일상적인 정경이었다. 그는 구둣발로 체육교사의 턱을 힘껏 깠다. 체육교사의 앞니가 부러지며 피가 튀었다. X의 구두코에 묻은 피 얼룩은 그때 튄 것이었다.

   “뭐라고요? 노란색 스펀지?”

   X의 아내가 물었다.

   “남자가 하는 일에 신경 쓰지 마!”

   X는 엄하게 꾸짖었다. 그건 관습이다. 아내가 뭔가 눈치 챘다는 기미를 보일 땐 “신경 쓰지 마!”라고 윽박지를 것. 남자가 간간이 폭발해 줘야 여자도 안심한다. 여편네에게 ‘노란색 스펀지’에 대해 고시랑고시랑 설명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겠는가. X의 아내도 거기에 대해선 이의가 없었다. X는 태연하게 백김치, 삼치구이 위주로 밥을 먹었다.

   역시.

   X의 아내는 미소를 지었다. 저 남자는 듬직해. 그녀는 평범한 가정생활이 만족스러웠다.

   사각사각.

   남편의 디저트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강판에 사과를 갈았다. X는 식사를 마치고 사과즙을 마셨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에 한 점 의혹도 일지 않았다.

 

 

 

   15시 30분. 명동 스타벅스 전멸.

   X는 그런 시나리오를 그려 봤다. 그는 지금 명동 스타벅스에 와 있다. 언제든 매장 내 손님들의 이마에 총알구멍이 뚫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게 인생이지, 라고 X는 생각했다.

   스타벅스 맞은편으로 해산물 뷔페 건물이 보였다. 그곳 옥상은 스타벅스 내부를 조준하기에 알맞았다. 스타벅스 내 손님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들은 센스 있게 창가 테이블을 피해서 앉는다. 창가에 앉으면 저격당하기 딱 좋기 때문이다.

   X는 스타벅스에서 데이트하는 젊은 커플을 바라봤다. 두 남녀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치즈케이크를 파먹고 있다. 커플은 포크를 든 채 수시로 주위를 곁눈질한다. 킬러가 다가오진 않나, 누군가 시한폭탄을 설치하진 않나 체크하는 것이다. 주변 경계에 힘쓰며 데이트하기. 그건 연애의 기본이다.

   미래엔 ‘영화’라는 걸 보며 데이트한다고?

   커플을 보고 있자니 X는 다시금 아들의 빵점 작문이 떠올랐다. 도입부부터 두 연인이 어두운 실내에 들어가 대형 직사각형을 멀거니 쳐다보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직사각형 속에선 ‘비밀요원 형체’가 ‘테러분자 형체’와 목숨을 건 격투를 벌인다. 그걸 보면서 남자가 애인에게 “기가 막히지?” 속삭인다는 설정인데, 역시 황당하다.

   하지만 빵점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어.

   X는 채점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영화’를 통해 비밀요원 기분을 실감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리얼리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X의 관점이다.

   “구관조 한 마리 사시겠습니까?”

   이때 한 남자가 X에게 접근해 왔다. 30대 초반으로 자세가 매우 곧은 사내였다. 남자는 훈련받은 척추를 가졌다.

   “서울역 앞에서 구루마를 끌어도 당당하게 끈다.”

   X가 대꾸했다.

   “더치페이가 좋을까요?”

   남자가 재차 찔러 들어왔다.

   “사내연애는 끝이 좋지 않지.”

   X는 받아쳤다. 코드를 확인한 그들은 악수를 나눴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X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체육교사 사건은 뷰티풀.”

   남자가 X를 치켜세웠다.

   “차 한 잔 하지.”

   X는 캐모마일을, 남자는 다르질링을 주문해 마신다. 커피숍 종업원이 몰래 독을 타는 걸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카운터에서 뜨거운 물과 티백을 따로 받아왔다. 남자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X에게 성냥갑을 건넸다. X는 성냥갑을 열어 쪽지를 꺼냈다.

   るhⅦ恐εEgφΔM.

   쪽지엔 암호화된 지령이 적혀 있다. X는 매뉴얼대로 지령을 해독했다.

   ‘르네상스 호텔 705호실에서 영국인 여자를 만날 것.’

   X는 쪽지를 입에 넣고는 캐모마일 차를 들이켜 꿀꺽 삼켰다. 지령 접수 완료. X와 남자는 경계심을 풀고 한담을 나눴다. X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영화’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 있나?”

   “글쎄요, 무슨 암호 같은데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X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곧 ‘나도 주책이지’라며 자신을 탓했다. 열 살짜리가 멋대로 꾸며낸 말을 남에게 물어보다니. X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그잔을 반납대에 놓고, 사용한 냅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 모든 행위를 그는 왼손으로만 했다.

   오른손은 언제나 비워 둔다.

   그것이 기본자세다. 오른손은 피스톨을 잡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숟가락을 들거나 뒤통수를 긁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는 양손으로 피스톨을 쏠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오른손 명중률이 왼손보다 언제나 10퍼센트 높게 나왔다. 죽느냐 죽이느냐 상황에서의 10퍼센트. 그건 목숨 전부와 같다.

   X는 출입구로 걸어간다. 매장 내 테이블을 엄폐물로 삼으며 이동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만에 하나 있을 총격전에 대비하는 것이다.

   “김 국장 밑에서 일하십니까?”

   남자가 X를 떠본다.

   “그걸 밝히는 바보도 있나.”

   X는 명동거리의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영국 여자는 “체리맛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 물었다.

   그러고는 금세 팬티 차림이 됐다.

   X는 삼각팬티만 걸친 영국 여자를 훑어본다. 키 178센티미터에 숱 많은 금발.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가슴 크기와 옥스퍼드대 법학과 출신의 이지적인 마스크. 그런 20대 여자가 삼각팬티만 입고 있다. 지금까지 숱한 인텔리 여성들이 X 앞에서 옷을 벗어 왔다. 그저 관행이었으며 X는 그걸 당연한 사회통념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정말 당연한 걸까.

   X는 의심 때문에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여자의 가슴이며 회음부를 쳐다본다. 이 상황의 리얼리티를 확인하기 위해 여자의 팬티 고무줄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동작이다. 팬티 고무줄이 여자의 골반에 튕겨지며 탁, 소리를 냈다. 역시 눈앞의 여자는 분명한 현실인 것이다.

   그녀는 버지니아 슬림 한 개비를 입에 문다. 이전 여자들도 하나같이 버지니아 슬림을 피웠다. 이 기계적인 버지니아 슬림은 또 뭔가. 다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관행이었으므로 깊이 파헤쳐 봤자 골치만 아팠다. X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일단 임무부터 수행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장미일수록 가시가 많지.”

   X가 중저음으로 읊조렸다. 여자는 훗, 웃고는 팬티마저 내렸다. 이어 매끈한 다리를 들어 X의 허벅지에 올려놓고, 손톱으로 그의 뺨을 살살 긁었다. 여자의 손에선 장미향이 풍겼다.

   X는 도발되지 않는다. 이쯤에서 여자가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리란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여자들도 다 그래 왔다.

   “브론스키가 보냈나?”

   X가 포커페이스로 물었다. 섣불리 발기하는 일 없이 침착하게 자기 할 말을 한다.

   “알고 있었군요.”

   여자가 입 꼬리를 올린다.

   브론스키? 사실 X도 모르는 이름이다. 왠지 ‘브론스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을 뿐. 이전에도 X는 “라헨만이 보냈나?” “노노가 보냈나?” 기분 내키는 대로 말했다. 그러면 여자들이 “다 알고 있군요.”라고 순순히 인정했다.

   이제 X는 벌떡 일어나 여자의 머리채를 낚아챈다. 뒷덜미 부근에서 머리핀 모양의 암살용 독침이 발견된다. 스치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즉사. 부검하면 그저 심장마비로 판명된다.

   “아까 뺨을 간질일 때 날 죽일 수 있었을 텐데?”

   X는 말한다. 그러자 여자는 혼절하듯 바닥에 쓰러진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젠틀해.”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내가 젠틀했나.

   X는 새삼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본다. 젠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여자와 대화할 때 귀를 후비진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알몸의 여자를 내려다본다.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카펫에 엎어져 울음을 터뜨리는 나체를 그는 질리도록 보아 왔다.

   X는 롱코트를 집어 여자의 어깨에 둘러 준다. 늘 해왔던 대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의 매너에 감동한 여자가 한층 격하게 운다.

   “이제 당신이 위험해. 영국으로 떠나.”

   X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인데도 지금 상황에 매우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테이블에 달러 뭉치와 런던행 티켓을 던졌다. 여자는 계속 흐느꼈고 X는 객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매너리즘.

   X는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영국 여자에게 “우리 실뜨기 한번 할까?” 했다면 어땠을까. X가 그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여자는 삼각팬티만 입고 도도하게 버지니아 슬림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X는 차마 실뜨기를 제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관행대로 “아름다운 장미일수록 가시가 많지.”라고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힘이 X를 짓누르고 있어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할 수가 없었다.

   현실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X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 세계에서 자신이 결정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의지로 특수훈련을 받았다. 또 자신의 의지로 살인마 체육교사의 턱을 구둣발로 깠다. 하지만, 이라고 X는 생각했다. ‘특수훈련’이라는 틀, ‘턱을 깐다’라는 틀은 내가 만든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 틀을 내가 스스로 덮어썼을 뿐이잖은가. 영국 여자 역시 ‘팬티를 벗는다’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X는 조금 무서워졌다.

 

 

 

   X는 일주일 만에 귀가했다.

   일주일 동안 두 가지 임무를 해결했다. 영국 여자와 맞섰고, 방울토마토 농부를 처리했다. X는 방울토마토 농부 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농부는 토마토를 재배하는 척하며 농축 우라늄을 밀거래하고 있었다. X는 농부를 밀살한 뒤 상부에 보고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주일이었다.

   X는 현관에서 자신의 구두를 체크했다. 구두 굽에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핏자국인 줄 알았는데 토마토 즙이었다. X는 농장 잠복근무 중 방울토마토를 밟은 것을 기억했다. 토마토 자국이라도 흔적은 흔적. X는 티슈로 얼룩을 닦고 불태웠다.

   “아빠. 엄마가…… 죽었어.”

   거실에서 X의 아들이 나타났다. 엄마 잃은 아이답게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X는 아들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봤다. 역시 지나치게 잘생긴 감이 있었다. 우는 모습도 나무랄 데가 없다. X는 왼손으로 아들을 안았다. 오른손으로는 재킷 속의 피스톨을 잡았다. 침입자가 아직 집 안에 있을지 모르는 일.

   “아빠가 왔으니 이젠 괜찮다.”

   부자는 털실 매트 위에서 포옹했다. 문득 “실뜨기 할래?”란 문장이 다시 한 번 X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도저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X의 아내는 피를 흘리며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쇄골 부근에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보였다. 관통상은 작고 깔끔해서 예쁘다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녀의 드레스 앞섶은 출혈 때문에 다소 지저분해졌다.

   벌써 때가 된 건가.

   X는 중얼거렸다. 아내의 사망은 예상됐던 바다. 키 170센티미터에 가슴이 글래머러스한 주부가 흉탄에 죽는 건 흔한 일. X의 어머니도, 큰누나도, 장모도 그렇게 갔다. 보통 여자라면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게 순리다.

   X는 거실을 훑어봤다. 베란다 창문이 깨져 있었다. 침입자가 베란다로 들어와 아내를 쐈음을 알 수 있었다. 배후가 누구인지 짐작 가는 데는 없다.

   홈메이드 사과즙은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됐군.

   X는 생각했다. 그는 축 늘어진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의 아들이 “엄마.” 하면서 몸부림쳤다. 아이는 10분간 오열하고는 잠시 쉬었다.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하고 있었다. X가 나서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코치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뒤 X의 파트너가 검은 세단을 타고 도착했다. 그는 성호를 긋고는 시신을 세단 뒷좌석에 뉘었다. “지옥까지 함께 갈 준비가 돼 있네.” 파트너는 X에게 권총을 흔들어 보였다. 복수를 다짐하며 그는 잠시 하품을 했다. 동료들의 복수극에 한두 번 참여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복수는 약간 지루한 일이었다. 그는 피가 낭자한 거실 바닥을 걸레로 닦아 주고 떠났다.

   “너도 준비를 해둬라.”

   X는 아들에게 말했다. 그의 아들은 내일 등굣길에 괴한에게 납치될 것이다. 아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이는 속옷을 갈아입고, 필통에 옷핀을 챙겨 넣었다. 옷핀은 수갑을 풀 때나 잠긴 문을 딸 때 유용하다.

   “아저씨들이 청테이프로 네 입을 붙일 거야.”

   “알아요.”

   “그러면 코로 복식호흡을 해라.”

   “네.”

   “잊지 마라. 복식호흡이다.”

   X는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아이는 산수 숙제를 마친 뒤 양치를 하고 잤다.

   X는 거실에 홀로 남아 이곳저곳 서성였다. 그러다가 식기건조대에 놓인 스테인리스 강판을 봤다. X는 사과를 갈던 아내 모습을 떠올리며 강판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강판의 까끌까끌한 요철에 긁혔다. X는 강판 표면에 손을 세게 문질러 봤다. 살갗이 벗겨지면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현실이야.”

   X는 체념한 듯 혼잣말 했다. 그는 식기장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아내가 죽은 날 밤에 위스키를 마시는 건 남편의 도리. X는 밤새도록 혼자 위스키를 홀짝였다.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달리 다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X는 오전 10시에 일어났다.

   텅 빈 거실에서 그는 스트레칭과 맨손체조를 했다. 냉장고에서 사과를 꺼내 아작아작 씹었다. 얼마 만인가, X는 새삼 놀랐다. 결혼 후 이렇게 사과를 씹어 먹은 건 처음이었다. 아내가 항상 사과를 손수 갈아줬기 때문에 그는 다른 방식으로 사과를 먹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사과를 통째로 먹는 수도 있군.”

   X는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내가 현실을 결정할 수도 있다’라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사과를 다 먹자 그 느낌은 사라졌다.

   X는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이미 학교에 가고 없었다. 지금쯤이면 납치돼서 서울 외곽의 창고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X는 괴한들이 아들을 완전히 감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해 봤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는 아들의 책상과 학용품을 쓰다듬었다. 납치범이 연락해 올 때까지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X는 책상 서랍에서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언젠가 아들이 빵점을 받아 온 SF 작문이다. 첫 페이지 상단엔 빨간 색연필로 ‘0점’이라 쓰여 있다. X는 엄지로 ‘0점’을 가린 채 아들의 글을 재독했다. ‘빵점짜리’라는 선입견을 지우니 그리 흉한 SF소설은 아니었다. ‘영화’라는 개념도 뜻밖에 심오한 데가 있었다.

   미래청년 아놀드는 매일 구두를 벗습니다. 매일 회사에 갔다가 매일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 규칙적인 일을 수행하고 매월 25일에 약간의 돈을 받습니다. “꼭 달성해 보고 싶은 목표가 있어서 일주일간 구두를 벗을 틈도 일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시대에 없습니다. 다들 매일 회사에서 서류를 읽고, 매일 집에 돌아와 ‘영화’를 보고 잠을 잡니다. 집에는 죄다 가정용 직사각형 하나씩 갖춰져 있습니다. ‘영화’ 덕분에 아놀드는 회사 일을 질리지도 않고 평생 할 수 있습니다. 아놀드의 부모님도, 형제도, 친구들도 그렇게 살고 있어서 그는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월요일 저녁, 아놀드는 퇴근 후 발을 닦고 ‘영화’를 봅니다. 가정용 직사각형 속에선 ‘잘생긴 싸움꾼 형체’가 누군가를 멋지게 팹니다. 아놀드는 자신도 저런 멋진 모습이겠거니 하며 소파에서 잠이 듭니다. 화요일 저녁, 그는 ‘실업자 형체’가 나오는 영화를 봅니다. 키 작고 직업도 없는 형체들은 ‘미녀 형체’들과 절대 결혼할 수 없다는 슬픈 로맨스. 아놀드는 “저렇게 되긴 싫어” 하면서 다음날 회사에서 좀 더 분발해 일합니다. 한편 아놀드의 짝사랑 마틸다는…….

   여기까지 읽다가 X는 노트를 내려놓았다. 돌연 초인종이 울렸기 때문이다. X는 방탄조끼를 입고 피스톨을 챙겼다. 탄창엔 실탄이 꽉 차 있다.

   현관 밖에는 키 178센티미터의 영국 여자가 와 있었다. X는 그다지 놀라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영국 여자가 자신을 도우러 오리라는 걸 X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금발미녀가 장차 아들의 새엄마가 되리라는 것도 상식.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아내가 때맞춰 죽었고 아들은 납치됐으며 능력 있는 영국 여자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다. X로선 더 이상 현실에 의문을 품는 게 무의미했다.

   “당신 아들이 위험해요.”

   영국 여자는 선글라스를 낀 채 말했다. “영국으로 떠나지 않았나?” X가 의례적으로 묻자, 그녀는 “브론스키는 당신 혼자 상대할 수 없어요.”라고 답했다.

   아, 맞다. 브론스키.

   X는 그 이름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영국 여자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요.” 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금발이 하늘하늘 출렁였고 목덜미에서는 라벤더 향이 났다.

   “잠깐 기다려.”

   X는 아들 방으로 갔다. 아들의 작문 노트가 그대로 펼쳐져 있다. 첫 장엔 선생이 갈겨 쓴 ‘0점’이란 점수가 선명했다. X는 빨간 펜으로 ‘0점’을 직직 긋고, 그 옆에 큼지막하게 ‘100점’이라고 썼다.

   “자, 가지.”

   X는 영국 여자와 함께 집을 나섰다.

   두 남녀의 바바리코트가 바람에 휘날렸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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