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데이

 

메이데이

 

이지영

 

 



 

  0. 읽기 전에.

  1. 눈을 감고

  2. 머리, 몸통, 팔, 다리를 갖춘 생명체를 상상한 뒤

  3. 눈, 코, 입을 그려 주고

  4. 색깔을 칠해 주세요.

  5. 눈을 뜨면

  6. 녀석이 나타납니다.

 


  녀석은 얼갈이배추를 타고 왔다. 할머니가 콩나물 500원어치에 얼갈이배추 반 단을 덤으로 집어줄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내일 비가 올라나 허리가 하도 쑤셔서 그러니께 너무 부담 갖지는 말어, 라는 말에 사양도 않고 받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날씨가 이렇게 화창한데 비가 올 것 같아 허리가 쑤신다는 말을 곧이 믿어버리다니.

  할머니의 거짓말에 넘어가 받아온 얼갈이배추 속에서 녀석이 기어 나왔을 때도 나는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가 텃밭에서 직접 키운 얼갈이배추이겠거니 생각했다. 약을 치지 않고 키운 채소에는 달팽이나 애벌레는 물론이고 잎 뒷면에 알이 빼곡히 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애벌레와는 약간 다르게 생긴 것 같았지만 애벌레든 뭐든 다리 많은 것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라비틀어진 겉잎을 떼어낸 뒤 벌레까지 한데 모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애벌레도 아니었고,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얼갈이를 씻기 위해 틀어 놓은 물을 받아 마신 녀석의 몸집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풍선에 물을 집어넣듯 부풀어 오르는 녀석의 몸집을 보며 나는 우두망찰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그때 망설이지 말고 물을 꺼버렸어야 했다거나, 발견 즉시 국자로 짓이겨버리기라도 했어야 했다고 얼마나 깊은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물만 마시고도 쑥쑥 자라 싱크대를 다 차지할 만큼 커진 녀석은 태연하게 수도꼭지의 물을 잠그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뭘 보고 섰냐.

 

  나는 녀석을 녹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녀석은 다짜고짜 나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지은 이름은 번번이 퇴짜를 맞았는데 가령 얼갈이는 얼간이 같아서 싫고, 미미나 해피 혹은 다롱이는 애완견 같아서 싫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할머니가 채소를 펼쳐 놓고 팔던 지하철 역 이름을 따서 녀석에게 녹번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녹번이가 말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할머니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지만 녀석을 안고 할머니에게 갈 수는 없었다. 팔뚝만 한 애완견 크기로 불어난 녀석은 몸이 제법 다부진 것이 꽤 무게가 나갈 것 같았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마신 물을 토하게 만들까도 생각해 봤지만 녹번이가 내 손가락을 씹어 먹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상상에만 그쳐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은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조금 입이 거친 애완동물을 집에 들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녀석은 애완동물의 조건에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애완동물은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작은 동물이라는 뜻이라는데 녀석은 그다지 작지도 귀엽지도 않았고, 가까이 두고 싶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내가 기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녀석이 나를 기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해 보였다.

  ─ 뭐하는 거야.

  ─ …….

  ─ 부추는 살살 버무려야지.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숨이 죽은 부추는 버무려지다 못해 녹즙이 될 지경이었다.

  ─ 그러면 풋내 나서 못 먹어.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부추만 계속해서 두드리는 녹번이를 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잎은 다 버리고 꽁지만 잘라서 볶은 시금치나 싹을 틔워 싹만 쪄먹은 감자를 생각하면 곤죽이 된 부추는 양반이었다. 적어도 버리는 것보다는 먹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상황을 합리화하는 나에게 녹번이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 이게 뭐야?

  ─ 부추 주스!

 

  간밤의 부추 주스에 이어 아침밥으로는 담쟁이덩굴을 넣고 끓인 죽을 먹었더니 속에서 계속 풋내가 올라온다. 부추에다 뭘 넣어서 즙을 낸 것인지 밤새 설사를 한 데다 또 생전 처음 먹어 보는 풀로 끓인 죽을 먹으니 뱃속에서는 난리가 났다. 지하철이 역사에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배가 꾸르륵거리는 것을 보니 예감이 좋지 않다.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데 큰일이다.

  아침은 원래부터 안 먹었으니 아침밥은 차려 주지 않아도 된다는 나의 말에도 녹번이는 부득불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차려 준 성의를 생각해서 먹는다고 하기보다는 후환이 두려워서 먹을 수밖에 없는 아침밥이었다. 덕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 화장실까지 달려간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지각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주에는 바지 지퍼에 안감이 말려 올라가 옷을 입은 채로 볼일을 보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화장실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제발 좀 먼저 들어가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을 하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다. 사무실에서도 자리에 엉덩이 붙이기가 무섭게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통에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밤낮으로 설사를 할 때면 녹번이는 아주 뿌듯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곧 건강해질 거야, 라고. 도대체 녹번이는 왜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내가 건강해진다면 그것은 녹번이 때문이 아니라 소식 때문일 것이다.

 

  ─ 도대체 뭘 버리고 뭘 먹는 거야!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매끈하고 곧게 뻗어 있는 달래와 함께 굳이 생김을 사온 것을 보면 모르는지 녹번이는 기어이 제 식대로 달래무침을 해버렸다. 불에 살짝 구운 김에 밥을 싸서 쫑쫑 썬 달래를 넣고 만든 양념간장에 찍어먹는 상상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알뿌리와 수염뿌리가 소금과 참기름에 버무려져 있는 새하얀 달래무침 앞에서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달래 남은 거 어디 있어?

  뿌리만 떼어 쓰고 남은 달래를 찾는 나에게 녹번이가 음식물 건조기를 흘낏 가르쳤다.

  ─ 이 집에는 좋은 게 참 많아.

  녹번이는 그렇게 말하며 알뿌리 하나를 입에 넣고 야무지게 씹었다. 나는 약이 바짝 올라 밥을 안 먹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참기름 냄새에 요동치기 시작한 위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바로 오늘 아침 담쟁이로 끓인 죽 때문에 속이 쓰렸던 것도 잠시, 맹렬히 올라오는 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식탁에 앉았다. 달래의 가는 수염뿌리는 집요하게 잇새를 파고들었다.

  녹번이는 내가 설거지를 끝내기도 전에 곯아떨어지곤 했다. 먹은 것도 없이 상을 치우느라 짜증이 나는 날이면 잠든 녀석을 포대 자루에 넣어서 할머니가 얼갈이배추를 팔던 녹번역이든 어디든 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러기에는 하루하루가 너무 피곤했고, 모든 것이 귀찮았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면서 녹번이는 더욱 분주해졌다. 쑥이며 질경이는 물론이고 벚나무의 새순과 개나리 나뭇가지까지 녹번이 손에 들어가면 못 먹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 장염만 충실히 앓았다. 특히 청양고추로 끓인 국을 먹고 나서 시작된 설사는 꼬박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고추씨만 넣고 맑게 끓인 국은 자주 먹던 것이었지만 오늘은 화끈하게 끓여 봤어, 라며 녹번이가 상에 낸 청양고추씨로 끓인 국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물만 먹고도 변기 앞을 떠날 줄 모르는 나에게 너는 지금 건강해지고 있는 중이야, 라고 말하던 녹번이를 몇 번이나 변기에 넣고 함께 내려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녹번이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기에 몸집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컨디션은 장염으로 인한 탈수와 춘곤증까지 겹쳐 연일 최악으로 치달았다. 몽롱한 정신으로 회사에는 사직서를 냈다. 준이 떠난 뒤로 내내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이때껏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배려였다.

  그래, 큰일 겪었으니 몸도 마음도 좀 추스르고 꼭 다시 보자고. 연락 자주 해요. 우리 언제 송별회 제대로 해야지. 건강부터 좀 챙겨요, 언니 얼굴 정말 안됐어. 힘내요. 나중에 꼭 다시 봐요.

  사무실을 나서자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봄볕이 따가웠다. 삼 년을 일했지만 짐은 간소했다. 형광펜이나 볼펜, 수첩 따위의 사무용품과 색이 바랜 텀블러, 방석과 무릎담요, 실내화가 전부였다. 포스트잇과 인덱스, 수정테이프 같은 것은 사무실에 두고 올걸 그랬는지 생각이 났지만 이내 상자 채로 골목 한쪽 쓰레기 더미 위에 올려 두었다. 돈 귀한 줄 알아야지, 준은 단 한 번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이 지적을 하고, 잔소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준은 이제 없다.

 

  회사도 그만두고 집에서 놀기 시작하자 녹번이는 작정이라도 한 듯 나를 부려먹었다. 좀 쉬고 싶어서 집에 있겠다는 것이 일을 할 때보다 더 바빠져 버린 것이다. 녹번이는 매일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나를 깨워서는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몸 이곳저곳을 당기고 비틀어 놓았다. 하루는 양팔을 등 뒤에서 묶어 놓은 탓에 근육이 뭉쳐서 사흘이나 양치질을 못할 만큼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녹번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등에 파스 좀 붙여 달라는 나의 손에 커다란 바구니를 들려 밖으로 내보냈다. 바구니 가득 토끼풀을 따오기 전에는 절대 들여보내 주지 않겠다는 녹번이의 말이 현관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문을 열고 들어가 녹번이를 한 손에 제압하고 나의 부엌과 편안한 일상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되찾을 것도 지킬 것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파트 복도에서 바라본 날씨가 한 점 티끌 없이 화창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봄날이야. 준은 겨울이 끝나고 봄볕이 나기 시작하면 바깥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다. 손등이나 목이 금세 발갛게 익어버리는 것도 잊은 채 준과 함께 햇빛 아래 앉아 있으면 머리꼭지에 해가 모여 간질거렸다.

  풀이 나 있는 곳이면 토끼풀은 지천이었다. 하지만 바구니 하나를 다 채울 만큼 토끼풀을 뜯으려면 반나절은 꼬박 걸릴 것 같았다. 무릎이 결리고 현기증이 났다. 허리가 아파 올 수록 현관문 밖으로 쫓겨났을 때 순순히 물러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런 생각마저도 곧 사라졌다. 그저 빨리 바구니 하나를 다 채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기 마련이었다.

  내가 죽을 날을 함께 기다려 주지 않아도 돼. 준은 간이침대에 쪼그리고 누워 잠든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준은 내가 잠이 든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자고 있지 않았다. 준과 계속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것이 어색해 잠든 척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맨 처음 준이 죽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준이 살기를 바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루하루 준이 죽을 날을 함께 기다리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말기 암 선고 이후 10년간 생존, 수술 없이 대체 요법으로 다스리는 암, 산속으로 들어가 채식으로 암을 이기는 사람들…… 이런 것들을 믿기에 준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까부라졌다.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죽음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준에게 허락된 일은 고통을 견디는 일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준이 자꾸만 모르핀을 찾자 의사들은 준의 척수 한가운데를 지나는 신경회로를 끊어 주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료해졌다. 함께 있는 매순간에 감사하고 애틋해하기에 준의 삶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바구니 가득 토끼풀을 뜯느라 내내 쪼그려 앉아 있던 나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탈진해버렸다. 녹번이의 발길질에 눈을 떴을 땐 저녁 시간이 이미 한참 지난 후였다.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자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

  토끼풀로 차린 밥상은 감동적이었다. 솥에 적당히 불린 쌀을 넣고 그 위에 토끼풀을 덮어 지은 밥에는 초록 물이 알맞게 들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였다. 고슬고슬한 밥과 아삭함이 살아 있는 토끼풀에 갖은 양념이 들어간 간장을 넣고 비벼먹으니 몸에 기력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았다. 토끼풀꽃은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무쳐서 먹었다. 나는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먹을수록 입맛이 돌았다. 모처럼 푸짐하게 저녁을 먹으니 기력이 도는 것 같았다. 매일 이렇게만 잘 먹을 수 있다면 녹번이의 말처럼 금세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시간만 나면 풀을 뜯으러 다녔다. 퇴직금으로 얼마나 오래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던 차에 풀을 뜯어 먹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준은 불면증에 시달렸다. 수면제도 만성이 되어버려 뜬눈으로 밤을 새기 일쑤였다. 예민해진 신경은 고스란히 나를 향한 짜증으로 날아왔다. 회사에 다니며 간병을 하는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는 어디에서든 머리만 붙이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간이침대에서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자는 나를 준은 새벽에도 몇 번이나 깨워 물을 떠오라거나 화장실에 간다거나 목욕을 하겠다고 했다.

  가뜩이나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던 나는 임신을 하면서부터는 기면증처럼 서서도 졸게 되었다. 내가 빨리 죽어버려야 네가 잠을 잘 텐데. 준이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화장실 밖에서 링거 줄을 잡고 졸고 서 있는 나에게 준이 쏘아붙였다. 임신을 하면 졸음이 온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아기가 생겼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내 졸음을 빌미로 한 준의 신경질은 날로 거세졌다.

  ─ 임신이래.

  준은 놀라지 않았다.

  ─ 약 안 먹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임약을 먹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달이었다. 준은 언젠가부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우리 사이에 섹스는 끝난 것이라 생각했다. 관계를 가졌다는 것도 잊고 있었을 만큼 잠깐의 섹스가 임신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어차피 아기는 준과는 상관이 없는 아이였다. 우리는 결혼할 뻔한 사이였다. 결혼하기로 되어 있던 사이이기도 했고, 결혼하려고 했던 사이이기도 했지만 결혼한 사이는 아니었다. 준이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아이를 낳고 살다가도 이혼하는 사람이 수두룩했고, 결혼식을 올리고도 혼인신고는 미루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 동거는 꼭 해봐야 한다는 게 현명한 말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아기가 생기고 나서야 등 떠밀리듯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결혼식도 하지 않았는데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 아빠는 곧 죽는다는데 그 남자의 아기를 낳아 기르기에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준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기는 오로지 나만의 몫이었다.

  ─ 그래, 그렇구나.

  준은 그것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려는 듯 굴었다. 나를 등지고 누운 준의 등이 앙상했다. 나는 간이침대에 모로 누웠다. 눈을 감기도 전에 잠이 쏟아졌다.

 

  녹번이와 마주 앉아 낮에 뜯어온 봉숭아 줄기를 다듬고 있던 나는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과 함께 느껴지는 축축한 기운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생리였다. 마지막 생리 이후 일 년 만이었다. 서랍 깊숙이에서 끄집어낸 생리대를 차고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영양 섭취도 잘하시고요. 생리 유도제를 놓으며 번번이 간호사는 생리가 끊긴 것이 몸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생리 유도제를 맞으면 생리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사흘도 못 가서 끊어졌다. 나중에는 그것조차 맞지 않았다. 편하게 씻을 수도 없는 병원에서 생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고, 준이 죽은 이후에는 무엇이든지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생리가 시작된 것을 확인하자 허리에 이어 아랫배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채운 주머니를 끌어안고 한숨 푹 자고 싶었다. 하지만 녹번이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연하게 만든 줄기에 들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쳐 프라이 판에 굽기 시작한 것이다. 봉숭아 줄기에서 풍기는 냄새에 맹렬한 허기가 느껴졌다. 나는 요즘 거의 매일 과식을 하고 있었다. 많은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잔다. 기름에 지진 봉숭아 줄기를 밥 위에 얹어서 배가 아프도록 먹고, 오래도록 자야지. 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여겨졌다. 세상에 못 일어날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생각에서 깨지 않기 위해 나는 먹고 자기를 거듭했다.

  어서 밥을 먹고 자러 갈 생각에 방망이를 힘차게 두드리는데 지글거리는 봉숭아 줄기를 뒤집던 녹번이가 뒤집개로 별안간 내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 아주 짓이겨라. 죽 쒀 먹을래!

  나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방망이로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프라이 판에 올라가 있는 봉숭아 줄기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에 봉숭아 줄기를 두드리는 일에 성심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묵직한 아랫배의 통증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녹번이의 말대로 나는 정말 건강해지고 있는지 몰랐다.

 

  ─ 병원에 다녀왔어.

  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마음이 드는지, 기분이 나빠지는지, 다행이라고 여기는지, 내가 싫은지, 나에게 미안한지, 내가 끔찍한지,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지.

  ─ 그래 그랬구나.

  ─ 응…….

  ─ 응.

  돌아서는 나를 준은 잡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준의 병실을 나온 나는 일부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왔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로 병원을 나서면서 매 걸음을 뗄 때마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준이 나를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병원에 다녀왔어. 그래, 그랬구나. 응. 준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진다. 나를 원망하고 경멸하는 표정이다. 살인자. 준은 나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준은 그것마저도 알고 있었던 것인가. 병원에 다녀왔어. 준에게 이 말만은 하면 안 되었던 것일까. 나는 뻔뻔했나. 아니, 뻔뻔한 건 준이다. 내가 아니야.

  수술이 끝나자 간호사가 채워 준 커다란 패드를 차고 나는 국밥을 먹는다. 메스꺼움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이 생리 끝난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피임 잘하세요.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임신이 되었던 내 자궁은 십오 분 만에 생리를 막 끝낸 자궁이 되었다.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국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나는 시체들을 전시해 놓은 곳에 간다. 시체를 거푸집 삼아 굳힌 플라스틱 인체들 사이에 방부 용액에 담긴 태아가 전시되어 있다. 9주차의 태아는 새끼손톱보다 작다. 어쩔 수 없잖아. 나는 하나도 슬퍼지지 않아 슬퍼진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누구도 내가 어떻게 해야 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나만의 사정일 뿐이다. 누구도 나에게 상관하지 않는다. 전시실을 나온 나는 다시 준에게로 간다.

  준은 평소처럼 군다. 나도 평소처럼 준에게 밥을 가져다주고 그가 밥을 먹는 동안 뜨개질을 한다. 빈민국의 신생아를 위한 모자를 뜨는 것이다. 영아 저체온증을 막기 위한 모자다. 모자를 씌우면 사망률을 70%까지 떨어트릴 수 있다고 했다. 좋은 일 많이 해야지. 그래, 우리 마누라 덕분에 나 오래 살겠네. 오래 전에는 이런 말도 했었지.

  준은 밥을 먹으며 티브이를 본다. 병실의 모든 환자가 밥을 먹으며 티브이를 본다. 나는 천천히 모자를 뜨지만 그것은 금세 완성된다. 아무리 빈곤국이라지만 이렇게 작은 아이를 낳다니. 나의 말에 준이 맞장구를 친다. 그러네. 모자 색깔이 예쁘다. 나는 폭발하고 만다.

  ─ 비겁한 새끼.

  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앙증맞은 모자를 손에 꽉 쥐고 나는 다시 한 번 말한다.

  ─ 너는 비겁해.

  그러자 준이 담담하게 대답한다.

  ─ 너는 시발 년이야.

  그렇다. 그는 비겁하고 나는 시발이다. 나는 다시 평상시처럼 준이 먹은 쟁반을 복도에 내놓고 식탁을 물티슈로 닦고 저녁 약 봉지를 찢어 준에게 건네준다. 준은 평소처럼 약을 두 번에 나누어 먹는다. 세 알, 네 알. 나는 팬티에 붙어 있는 패드의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코바늘에 새 털실을 감는다. 패드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궁 안에 피를 잔뜩 담은 채 나는 모자를 뜬다.

  ─ 그건 여자 아이한테 어울리는 모자겠다.

  준이 말한다.

  ─ 그렇지.

  내가 말한다. 평소처럼.

 

  천천히 눈을 뜨자 밝아진 방이 어슴푸레 보인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금은 언제지. 일어나서 준의 병원에 가야 하나. 아니다. 준은 죽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다시 눕는다.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아눕는다. 왼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가슴과 가슴 사이에 밀어 넣는다. 따뜻하다. 내가 등을 돌리고 누우면 준은 나의 등 뒤로 다가와 가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곤 했다. 따뜻해. 준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 지금도 똑똑히 기억해 낼 수 있다. 가슴 사이에 손을 넣고 있으면 준이 내 등 뒤에 누워 있는 것 같고 내가 나를 안고 있는 준이 된 것 같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모로 누워 있는 사이 사위가 천천히 밝아졌다. 창밖으로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사람들의 기척이 만든 소음이 점차 커진다. 한참 전에 깨우러 왔어야 하는 녹번이도 잠잠하다. 갔나. 이 집에 나는 다시 혼자 남았나. 순간 뱃속에서 커다란 덩어리가 올라온다. 나를 혼자 두고 떠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숨을 몰아쉰다. 오래 참은 눈물은 진득거린다. 코를 세게 풀자 생리가 왈칵 쏟아진다. 준은 이제 없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집 안에 풀 냄새가 진동을 한다. 솥이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어제 따온 플라타너스 잎을 찌는 모양이었다. 나는 흉측하게 부운 얼굴을 씻으며 조금 더 울었다. 녹번이가 도마에 칼질을 하는 소리가 경쾌했다. 뚝배기에서 보글거리는 쌈장에서는 파뿌리의 쌉쌀한 냄새가 났다.

  찐 플라타너스 잎에 밥을 싸서 한 입 가득 우겨넣고 씹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녹번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결혼을 할 뻔했다는 게 신기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머리를 핀으로 올려 꽂은 탓에 형광등 빛을 그대로 받아 번들거리는 이마와 풀을 뜯으러 밖을 헤매느라 급속도로 늘어버린 기미가 포진한 눈가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새빨갛게 부어오른 눈두덩을 하고 있어 민망스럽기는 했지만 길게 생각하기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먹어도, 먹어도 늘 허기가 졌다.

  ─ 내 말 듣고 있느냐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녹번이의 젓가락이 속눈썹 끝에 닿아 눈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준이 아프지 않았다면 오늘은 결혼 이 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놀라서 뒤로 물러앉은 나는 녹번이의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 내일 아침상에는 또 한 번 청양고추씨로 끓인 국이 올라올 것을 직감했다.

  녹번이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는 밥을 먹을 수 없어 식탁 위에 올라 앉아 있었는데 그런 탓에 종종 젓가락과 수저를 들고 나에게 달려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식탁 위에 올라앉은 녹번이를 뒤로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녀석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은 나를 늘 비굴하게 만들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싱크대로 기어 올라가 물을 마시는 녹번이. 콸콸 쏟아지는 물을 계속해서 들이키더니 마침내 나와 똑같은 덩치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녹번이의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지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 지금 웃냐?

  녹번이가 다시 한 번 발끈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플라타너스 쌈밥을 녹번이의 입 앞으로 다정하게 내밀었다. 녀석은 나를 향해 눈을 치뜨더니 이내 고분고분 입을 벌리며 쌈을 여미고 있던 내 손가락까지 덥석 물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은 너무 사납다.

 

  ─ 요새는 왜 부추 주슨가 부추죽인가 안 만들어?

  녹번이는 요즘에도 내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꼬아 놓기 일쑤다. 이제는 그런 것에도 단련이 되어 웬만한 자세는 거의 다 무리 없이 소화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양 팔꿈치를 등 뒤에서 붙이는 자세는 완벽히 할 수 있다. 녹번이는 내 허벅지를 교차시킨 뒤 발목을 다시 꼬아 놓으면서 대답한다.

  ─ 요즘 부추 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 돈도 못 버는 게 입만 고급이어서.

  내 엉덩이를 밟고 허리로 기어 올라온 녹번이는 내 귀를 잡아당기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그럴 때면 귀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제는 녹번이가 당기는 힘에 따라 목을 젖히며 목 뒤의 근육을 이완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러면 녹번이는 만족스러운 듯 이렇게 말하곤 한다.

  ─ 느끼지 마. 좋은 건 알아 가지고.

  녹번이와 스트레칭을 한 판 한 뒤 거실에 누워 있으니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소름이 돋는다.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내 몸을 오가던 녹번이도 소파 위에 올라가 잠이 들었다. 어느새 녹번이 전용 계단이 되어버린 쿠션은 어찌나 밟고 올라 다녔는지 가운데 커버가 다 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녹번이가 내는 갸릉갸릉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한다.

  낮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해가 질 때까지도 깨지 않은 거야. 그래서 눈을 뜨니 주위가 온통 깜깜한 거지. 다시 잠들기엔 배가 고프고, 일어나서 내 손으로 불을 켜기는 너무 싫은 그런 순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방 불을 켜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사 가지고 온 피자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 거야. 그러고는 얼음을 넣은 커다란 잔에 콜라를 가득 따라서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손에 쥐어주는 거지. 그때까지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피자의 고소한 냄새를 맡고서야 정신이 들어. 정신이 들기가 무섭게 허기를 느낀 나는 피자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거야. 두 조각, 세 조각쯤 먹고 나서야 너에게 이런저런 것을 묻는 거지.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왔는지, 오늘은 별일 없었는지. 묻기는 하지만 포만감에 나른해져서 네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다시 소파에 까라지고 마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어. 길고 긴 잠을 자는 거지.

  준은 죽음에 다가갈수록 식탐을 부렸다. 이미 몸의 거의 모든 장기가 기능을 멈춘 이후에도 준은 평생 듣고 본 모든 음식은 다 먹어 보고 죽으려는 듯 집요하게 먹을 것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준이 마지막까지 먹고 싶어 하던 음식은 오직 치즈와 페페로니만 올린 피자와 석화구이에 겻들인 소주 한 잔, 설탕을 넣은 토마토 화채였다. 있잖아, 너는 낮잠을 자는 나에게 저녁을 먹이기 위해 찾아온 사람 같았어. 준은 나에게 단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낮잠을 잠깐만 잤으면 좋았잖아. 내가 말했다. 그러자 준은, 언제 일어날지 안다면 그건 낮잠이 아니야, 라고 대답했다. 그래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 안다면 그건 낮잠이 아니지. 준의 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낮잠에 빠져든다.

 

  녹번이는 나에게 은행을 주워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고는 떠났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은행을 비닐봉지 한 가득 주워온 나는 적막한 집 안을 바라보며 현관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커다란 대야를 가져와 은행을 붓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바락바락 문질렀다. 은행 열매 냄새에 콧속이 아릿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모든 것에는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씁쓸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헹궈내고서야 은행은 뽀얗고 단단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한 곳에 신문지를 깔고 은행을 펼쳐 놓은 뒤 저녁을 차려 먹었다. 흰 밥을 물에 말아 코스모스 김치와 먹으니 금세 한 공기가 비었다. 집은 훈훈했다. 나물을 말린다며 난방을 돌려 놓은 덕분이었다. 맨 처음 집을 얻을 때 아기 방으로 쓰려고 했던 빈 방에는 이제 녹번이가 널어 놓은 나물이 가득했다. 녹번이는 신문지 대신 아무에게도 건네지 못한 청첩장을 바닥에 꼼꼼하게 펼친 뒤 그 위에 나물을 널었다. 돌이켜보니 월동 준비를 한다며 온갖 풀을 찌고 말릴 때부터 녹번이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물을 널어 놓은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여러 종류의 나물이 한데 섞여 말라 가는 냄새는 그리 향기롭지 않았다. 그러나 녹번이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쟁여 놓은 음식만 있다면 올 겨울은 거뜬히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장염을 앓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설탕에 재운 강아지풀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린 차를 마시면서 티브이를 보니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까지 내리자 바람이 쌀쌀했다. 지금쯤 녹번이는 어딘가에 들어갔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녹번이라면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내리는 비를 다 받아 마시고 쑥 커져서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도 남을 것이다.

  ─ 야, 같이 좀 쓰자.

  아니면 아무 할머니가 파는 시금치나 고사리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 고사리는 고라니 같잖아, 멍청아!

  이름을 지어 달라고 말하고는 이런 행패를 부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녹번이와 마주치더라도 놀라지 마시라.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녀석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니까.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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