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학개론

 

이해학개론

 

이갑수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두 물체 사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두 물체의 질점 사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한다. 유럽과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뉴턴이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법칙을 생각해 냈다는 낭설이 돌고 있다. 아마도 북유럽의 세계수 신화와 관련이 있는 소문일 것이다. 그러나 뉴턴은 사과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곱 살 때 벌레 먹은 사과를 먹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 사과에는 쐐기밤나비의 유충이 들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뉴턴은 사흘 밤낮을 고열에 시달리다 겨우 깨어났다. 일부 뉴턴 연구가들은 그때의 열병이 뉴턴의 뇌에 어떤 영향을 줘서 독특한 사고체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뉴턴이 만든 모든 법칙은 결국 사과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공식에 적용해서 사물과 현상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교육환경 탓이다. 아버지는 외교관이었다. 20년 넘게 나를 데리고 전 세계의 반을 돌았다. 4년간 머문 나라도 있었고 네 시간 만에 추방당한 나라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서른다섯 곳의 학교를 다녔다. 대부분 사용하는 언어와 교육과정이 상이했다. 국어, 역사, 사회 같은 것들이 나라마다 전부 달라서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법과 문화도 제각각이었다. 같은 반 여자 아이의 머리카락을 만지면 매를 맞는 곳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가능한 대사관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최소한의 관계만 맺으면서 살았다. 주로 수학과 과학 문제를 풀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공식의 세계는 무엇보다 명징했다. 이치에 합당한 과정을 거치면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이치를 따져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세상에는 도무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

  언젠가 조간신문의 지구촌 이모저모에는 아기 엄마가 5톤짜리 트럭을 들어 올리고 아기를 꺼냈다는 기사가 나왔다. 베네수엘라의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교차신호 때문에 복잡한 사거리에서 사고가 있었고 아기가 탄 유모차가 트럭 밑에 깔렸다. 3단 쿠션 유모차 덕분에 아기는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대로 구급차와 트럭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장비를 기다렸어도 아기는 무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기 엄마는 트럭 밑에서 우는 아기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찌그러진 차체 사이로 보이는 아기의 얼굴에 피 같은 게 묻어 있는 것을 본 것이 결정적이었다. 나중에 그것은 사고가 나면서 새어 나온 엔진오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기 엄마는 사람들이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트럭을 들어 올렸다. 그 아기 엄마의 나이는 39세였으며 체중은 46kg이었다. 여자 역도 인상 세계신기록이 140kg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초자연적인 존재를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작년에 헤어진 내 여자 친구는 외숙모의 유령 때문에 한 달이나 잠을 못 잤다. 그녀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학창시절을 외숙모 밑에서 보냈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온 후로 5년 동안 한 번도 외숙모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외숙모는 젊었을 때 사별을 하고 요리 배우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 사람이었다. 외숙모는 계란쿠키를 먹다가 죽었다. 외숙모의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야쿠르트 배달을 하는 여자였는데, 시체 옆에 호밀에 계란을 섞어 구운 쿠키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홍차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인은 질식사였다. 쿠키 조각이 기도를 막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어이없이 죽은 것이 억울했기 때문인지 밤마다 외숙모의 유령이 여자 친구를 찾아왔다.

  ─ 매일 밤 찾아와. 십자가, 염주는 물론이고 달마대사 사진도 소용이 없더라니까.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어. 내가 외숙모한테 무슨 큰 잘못을 한 건가?

  희재는 그렇게 말했다.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고 피곤과 불안에 시달려서 오랜 시간 피랍 당했다가 석방된 인질 같은 얼굴이었다.

  ─ 찾아와서 뭘 어떻게 하는데? 널 위협해?

  ─ 아니, 차를 같이 마시자고 하셔.

  나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눈동자가 심연에 닿아 있는 존재가 따라주는 차의 검붉은빛이 떠올라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돼서 퇴마술에 관련된 책을 몇 권이나 읽었다. 하지만 다음 주에 만난 그녀는 말끔한 모습으로 여자애들과 지망지망 떠들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됐냐고 묻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같이 차를 한잔 마셨더니 사라졌다고 했다.

  ─ 맛있더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물들도 있다. 최초의 세계지도는 1570년에 만들어진 오르텔리우스 세계지도다. 그리고 1597년에 콜네리스 워트프리트의 세계지도가 만들어졌고 1660년에는 W. J. 불라우의 세계지도가 제작되었다. 이 세 개의 지도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남극대륙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극대륙은 1772년 J. 쿡이 항해하던 도중 처음 발견했다. 남극을 최초로 정복한 사람은 아문센으로 1910년의 일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지 그것을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논리와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유인력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도 몰랐다. 결국 인간의 역사란 그렇게 하나씩 이치를 쌓아 가는 과정이다. 수많은 이치들이 존재하고 그것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예견대로 빛은 태양 주위에서 휜다. 전자와 자기의 장은 맥스웰 방정식의 설명대로 상호작용을 한다. 베타 방사선 붕괴는 약이론의 설명대로 발생하고 가속기 내부의 양자는 강핵력 이론의 설명대로 움직인다. 모든 현상, 물체, 심지어 관념조차 그에 합당한 이치를 알고 있으면 이해할 수 있다. 현재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나 사물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자료를 수집하거나 좀 더 높은 수준의 이론을 발견하면 그것이 필연적인 것임을 입증할 수 있다.

 

   

  입자의 위치를 측정하려고 하면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운동량을 측정하려고 하면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심각한 오해가 있다. 그것 때문에 하이젠부르크는 요즘 니체와 함께 술독에 빠져 있다. 니체는 예전에 한 말실수 탓에 신에게 미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하이젠부르크는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살자고 공식을 만든 게 아니다. 자신의 시대에는 두 가지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후대에는 측정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과학도들은 저 공식만을 믿고 측정할 방법을 찾는 것조차 포기하고 있다.

 

  나는 1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캐나다와 브라질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한국 사람이 되길 원했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죽기 직전 아버지의 눈을 보고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일생의 반을 외국에서 보낸 사람답게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죽었다. 나는 그때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내 전공은 분자화학이었다. 주로 합금을 만드는 실험을 했다. 내 지도교수는 몇 년째 같은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의료용으로 쓰는 형상기억합금을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석사 마지막 학기 때부터 연구에 참여했다. 일본 굴지의 거대 유통회사 회장이 거의 무한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연구비를 지원했다. 회장의 손녀가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선천적인 기형심장으로 보통 사람보다 혈관이 두 개 많았다. 그래서 약간만 움직여도 숨이 가쁘고 심한 빈혈을 앓았다. 보통은 혈관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 되지만 그녀는 마취 알레르기 때문에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

  작은 금속이 동맥의 흐름을 따라 심장에 도착했을 때 일정한 온도의 수용액을 흘려보내 금속을 혈관을 막을 수 있는 크기로 팽창시키는 것이 연구의 요지였다. 공식은 완벽했고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회장의 손녀에게 시술을 하면 번번이 실패였다. 금속이 너무 팽창하는 바람에 혈관이 찢어져 위험했던 적도 있었다.

  ─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거야?

  교수는 매일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무엇이 문제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슈퍼컴퓨터까지 써서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지만 교수의 계산은 정확했다. 합금의 재질을 바꾸고 기억온도를 다르게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실험에 진전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죽었다. 테러였다. 아버지는 삼계탕 때문에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어느 나라에 가든 복날에 맞춰 삼계탕을 해 먹었다. 대사관 직원들은 그것을 아버지의 배려라고 생각해서 좋아했다. 아버지는 어느 나라로 발령을 받든 인삼과 대추, 찹쌀을 가지고 갔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닭은 있었다. 그러나 조류독감이 돌거나 수해로 교통이 끊겨 닭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도 아버지는 삼계탕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도요새, 칠면조, 청둥오리 같은 새의 배에다 인삼과 대추, 찹쌀을 넣고 끓였다. 그런 것마저도 없을 때는 무엇이든 새를 구해 왔다. 대머리독수리와 올빼미의 맛은 정말 독특했다. 몽골에서는 두루미를 먹은 적도 있다. 만약 아버지가 남극의 세종기지 같은 곳에서 일했다면 펭귄이라도 잡아왔을 것이다.

  ─ 이건 대사관 같은 거야. 평소엔 있으나 없으나 신경도 쓰지 않지만 어떤 때가 되면 필요하거든.

  복날이 되면 아버지는 삼계탕을 먹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겨울에도 평균기온이 30도가 넘는 적도국가에서 특별히 복날이 의미가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날도 닭을 한가득 실은 차가 대사관 안으로 들어왔다. 경비는 식당에서 또 삼계탕을 하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검문 없이 차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닭이 뱃속에 품고 있는 것은 계란이 아니라, C4였다. 베개싸움을 할 때처럼 닭털이 사방으로 날렸고 아버지와 대사관 직원들은 전신화상을 입었다. 테러범들은 한 시간 후에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소니와 도요타는 아프리카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열네 시간을 날아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 원망하지 마라.

  죽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이 유언이라면 아버지의 유언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 나라에 일본 대사관이 없으니 이웃 나라의 대사인 자신이 대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내 유골은 네 엄마 무덤에 뿌려 다오.

  ─ 어머니 무덤이 어딘데요?

  아버지 대신 심전도 측정기가 ‘삐’ 하고 대답했다. 유언은 그렇게 끝났다.

  의사는 유품이 담긴 상자를 건네주면서 내가 아들이라 놀랐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새카맣게 탄 바람에 현지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인종을 구분한 것은 독일의 인류학자 블루멘바흐의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은 수많은 종류의 인종구분표가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흑색인, 황색인, 백색인을 주축으로 하는 3인종계주는 공통으로 사용된다.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나는 멜라닌 색소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을 분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상자에는 폭발 때 아버지가 입고 있던 옷과 구두가 들어 있었다. 구두는 열에 녹아 고무신 같았고 넥타이는 불에 타서 목 부분만 남아 있었다. 양복 상의와 와이셔츠는 수술을 하기 위해 잘랐는지 여러 개로 조각나 있었다.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바지뿐이었다. 바지는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체액이 말라붙어서 뻣뻣했다. 바지를 들어 올리자 상자 안쪽에는 넥타이핀과 시계가 들어 있었다. 시계와 넥타이핀은 언젠가 내가 생일선물로 보냈던 것이었다. 학교 앞의 매장에서 산 것이었는데, 꽤 유명한 일본 브랜드였다. 어쩌면 그것들도 오해에 한몫 했을 것이다. 원망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어서, 불쾌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삼계탕을 이해할 수 없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그 후에도 소니와 도요타의 아프리카 노동자에 대한 대우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물질의 온도를 높이는 데 필요한 열량으로 열을 가하거나 빼앗을 때 물체의 온도가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알려준다. 그런데 1963년 탄자니아에서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에라스토 음펨바에 의해 이상한 현상이 발견된다. 음펨바는 가정수업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다가 뜨거운 액체를 냉동고에 넣었는데, 차가운 액체보다 뜨거운 액체가 더 빨리 얼었다. 열용량 공식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새로운 공식을 만드는 대신, 특정한 조건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예외로 규정해 버렸다. 때문에 에라스토 음펨바는 냉동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로 살고 있다. 2011년 현재, 그는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의 아프리카 삼림 및 야생동물 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내가 대사관에 있는 아버지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동안 외무부는 내 동의도 없이 시신운구절차를 밟았다. 나는 아버지의 시신을 쫓아 바로 한국으로 왔다. 세 살 때 떠났으므로 추억은 전혀 없었다. 내가 삼계탕의 나라에 와서 느낀 것은 고향의 익숙함이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를 여행할 때의 낯설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이었을 뿐, 눈에 보이는 것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라와 나라의 문 역할을 하는 공항이 어디나 같은 모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좀 더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나중으로 미뤘다. 만나고 싶은 사람과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작년에 헤어진 여자 친구였고, 가야 할 곳은 어머니의 무덤이 있다는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일단은 서울로 올라와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짐을 풀고 있을 때 외무부에서 전화가 왔다. 입국하기 전에 부탁해 둔 것이 준비됐다고 했다. 엄마의 무덤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퀵 서비스로 서류를 보내 줄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직접 가지러 가겠다고 말했다. 아는 얼굴이 많을 것 같아서 인사라도 할 생각이었다.

  생각보다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격오지의 지사장 같은 처지였으니 아버지 밑에 있던 사람들이 본사에 근무할 리가 없다. 그래도 몇 명쯤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 자네 아버지는 용감한 분이셨어.

  아버지의 외무고시 동기가 서류를 전해 주면서 말했다. 용기라는 것은 많은 경우에 죽음과 결부지어진다. 인류사의 수많은 부분이 전쟁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광화문에 서 있는 사나이가 용감한 사람의 대표인 것은, 그가 나라를 구했다는 것보다도 장렬하게 전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아버지가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골을 국립묘지에 안치하는 데 반대했다. 유언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주였다. 누가 조사를 했는지 모르지만 친절하게도 경주의 관광안내 책자가 같이 들어 있었다. 그 옛날 세계지도를 만들었던 사람들처럼 나도 가본 적은 없지만 경주를 알고 있었다. 천년고도, 불국사, 다보탑, 안압지, 석굴암. 아버지가 유골을 뿌려 달라던 어머니의 무덤도 경주에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희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만약 받는다면 경주에 함께 가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희재가 승낙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떠났고 나는 그녀에게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신호가 세 번 갔고 목소리가 들렸다. 희재의 목소리는 죽은 외숙모를 다시 만난 것처럼 가늘게 떨렸다.

  ─ 차나 한잔 마시자.

  내가 말했다.

  ─ 알았어.

  희재가 말했다. 어쩌면 희재는 차를 같이 마시고 나면 내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희재를 만나기 전에 외환은행에 들려서 탄자니아 동전을 몇 개 구했다.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나는 곧바로 경주행 버스표를 꺼내고 용건을 말했다. 희재는 빨대로 홍차를 마실 뿐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차를 마시면서 희재의 머리가 가로로 흔들렸기 때문에 거절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서 머리를 가로젓는 것은 대체로 ‘싫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윈은 이 현상을,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다가 배가 부르면 고개를 외로 틀어 그만 먹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 같이 가주면 이거 줄게.

  나는 100실링짜리 탄자니아 동전 세 개가 담겨 있는 비닐봉투를 꺼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희재의 눈빛이 조금씩 변했다.

 

  희재는 동전을 모았다. 나는 변화하는 여성들의 취미문화에 대해 언젠가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자주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을 즐기지도 않는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여자도 많지 않다. 그렇다고 독서를 하거나 딱히 어떤 공부를 더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요즘 여자들에게는 요리, 자수, 뜨개질, 꽃꽂이 같은 것 말고 뭔가 다른 취미들이 있다. 시대가 변해도 뭔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유희하는 주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희재의 취미는 좀 별난 것이기는 했다.

  희재는 세계 각국에서 사용되는 동전들과 발행이 중지된 주화들을 스크랩북에 넣어서 보관했는데, 백과사전 두께의 스크랩북이 열한 권이나 됐다. 나는 뭔가를 수집하는 행위는 변형된 방식의 부의 축적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사귄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희재가 갖고 있지 못한 동전들을 구해 줬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프리카의 동전들도 받았다. 내 덕분에 그녀는 박물관에 있는 희귀한 것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종류의 동전을 모을 수 있었다. 희재는 아주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는 몇 달 만에 아주 시무룩해졌다. 어떤 나라가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 한 희재는 자신의 스크랩북을 더 늘릴 수가 없었다. 나는 희재가 수집 대상을 지폐나 우표 같은 것으로 바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희재는 계속해서 동전을 모았다. 대신 사연이 있는 동전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차 대전 때 독일 병사의 목숨을 구했다는 탄환이 박혀 있는 금 마르크, 피천득 선생의 수필에 나왔다는 은전 한 닢, 홍콩에서 삼합회에게 살해된 남자가 쥐고 있었다는 5마오, 따위를 인터넷 경매로 샀다. 희재는 새로 스크랩북을 만들어서 동전을 넣고 그 밑에 동전의 사연을 만년필로 적었다. 그런 것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격이 비쌌다. 희재는 한국에서 보내오는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전부 동전을 사는 데 썼다. 급하게 매물이 나왔을 때는 나한테 돈을 빌리기도 했다.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고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어서 크게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집이 부의 축적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내 가설은 틀린 것이 되었다. 빚까지 내며 동전을 모으는 것은 불합리했다.

  우리가 헤어진 것도 어쩌면 동전 때문이었다. 그때도 희재는 내게 삼십만 엔을 빌렸다. 미국의 오파츠 동전을 사기 위해서였다. 토머스 제퍼슨의 얼굴이 새겨진 5센트짜리 동전이었다. 그것은 1967년에 발견된 켄타로사우르스 화석에 붙어 있었다고 했다. 탄소연대 측정결과 동전은 화석과 동일한 시대의 물건으로 판명되었다. 희재는 그것을 꼭 갖고 싶다고 말했다.

  ─ 난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게 동전을 모으는 이유가 뭐야?

  나는 돈이 든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 이유 같은 건 없어.

  희재는 봉투를 손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 아니,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우리가 이렇게 카페에 마주 앉아 있는 이유, 네가 카페에 오면 홍차를 자주 먹는 이유. 동전을 모으는 이유.

  내가 말했다.

  ─ 그렇게 모든 것이 당위적이진 않아. 그냥 하고 싶은 것도 있어. 이유를 잘 모르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희재가 말했다.

  ─ 지금 당장은 모르더라도 나중에는 알게 될 거야. 내용을 볼 수 있는 형식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희재는 나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얼마 후에, 그녀는 말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동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자를 파동으로 다루면 전자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본인이 만든 이 방정식을 믿지 않았다. 양자역학에서는 어떤 일의 발생을 확률적으로 기술한다. 붕괴된 핵과 붕괴되지 않은 핵이 10개 중 5개 있다는 식으로 ─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을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방정식을 만든 까닭은 그의 삶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27년 그는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갔다. 그런데 영국 사회는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두 아내와 같은 집에 살면서 두 아내가 낳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는 아내들이 아닌 각기 다른 두 여인으로부터 두 명의 아이를 낳기도 했다.

 

  모든 현상과 사물에는 기원과 유래가 있다. 그것이 발전되거나 변형되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과 유래를 따라가 보는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유사성을 가진 다른 현상이나 사물과 비교해 보면 현실의 모양새가 더 분명해진다.

  경주는 닭의 도시다.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을 목적으로 경주에 가기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유통되는 계란과 닭고기의 35%가 경주에서 생산된다. 안압지를 거쳐 석굴암 불국사로 가는 코스가 아니라 경주시 외곽으로 나가는 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양계장들이 경주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엔 나도 조금 놀랐지만 사실 그것에 대한 암시는 대사관에서 준 관광안내 책자에도 나와 있었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고, 신라의 옛 이름은 계림(鷄林)이다. 그리고 심지어 신라를 세웠다는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는 예정 시간보다 10분 늦게 출발했다.

  ─ 왜 묻지 않아?

  버스가 서울을 벗어났을 때 희재가 말했다. 나는 창밖을 보고 있다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내가 왜 떠났는지.

  희재가 말을 이었다.

  ─ 알고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 희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알고 있으면 어디 한번 말해 봐, 라고 압박을 주는 것 같았다.

  ─ 인간관계에서 파생되는 분노의 많은 부분은 자기가 상대에게 소비한 에너지와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에너지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발생하는 거야. 네가 떠난 건 그 균형의 차이 때문이겠지.

  내가 말했다.

  ─ 사람은 이론만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어.

  희재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눈을 감았다.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희재를 다시 만나서 느낀 것은 내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하지만 희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희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도 힘겨워서 사이에 있는 것에는 눈을 돌릴 수가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 것이다. 고속도로의 경치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무한한 변화가 생기는 프랙탈기하학을 떠올렸다.

 

   

  중력과 시공간의 관계를 맺어 주는 식이다. 이것으로 공간이 휘어지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 하면 을 떠올리지만, 사실, 특수 상대성이론보다는 일반 상대성이론이 훨씬 뛰어난 업적이다. 이 식의 Λ(람다함수)가 바로 유명한 우주상수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우주의 전반에 대입하면, 우주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하와 물질들이 서로의 인력에 이끌려 축소하거나 팽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대인인 그에게 우주의 탄생은 천지창조의 6일로 끝나고, 종말은 예수의 재림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정적인 우주를 만들기 위해 방정식에 집어넣은 것이 바로 우주상수다. 하지만 이후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 아인슈타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숨겼다 ─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는 내 일생일대의 큰 실수였다.”라고 말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인 밀레바 마라비치에게 “허블 이 자식이 유다보다 더 큰 배신을 한 거야.”라고 말했다. 그런데 현재는, 우주의 팽창속도가 줄지 않고 계속 가속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면서, 아인슈타인이 억지로 끼워 넣었던 ‘보이지 않는 힘’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버렸다.

 

  경주가 관광명소라는 것은 터미널에서부터 쉽게 알 수 있었다. 양산을 든 아주머니들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드문드문 외국인들도 보였다. 신기하게도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은 모두 같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머리 모양도 똑같았다. 다들 앞머리가 있는 단발이었고 정수리 부분에 한 갈래 정도를 묶고 있었다. 머리띠는 연분홍색의 얇은 고무 소재였다. 내가 신기하다고 말하자 희재가 사과머리라고 이름을 알려줬다. 가운데 머리를 잡아 묶으면 사과 모양과 비슷하게 보여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확실히 꼭지 부분에 잎이 달린 사과와 그 형태가 비슷해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파파야, 체리, 코코멜론 같은 다른 과일들도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사과머리라고 불러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름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현상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유행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본래 유행이란 달라지고 싶은 자들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 그냥 우연이야.

  내 말을 들은 희재는 그렇게 일축했다. 하지만 전국 각지에서 수학여행을 온 여고생들이 모두 같은 머리띠로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단지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나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 공원묘지 가시게요?

  내가 주소가 적힌 종이를 건네자 택시기사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초행이라 길을 모르니 그냥 주소대로 가달라고 대답했다. 택시는 서울 방향으로 나가더니 버스가 들어왔던 길에서 옆으로 빠져나갔다. 경주 외곽을 도는 순환도로인 것 같았다. 커다란 트럭들만 오갈 뿐 다른 차는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양계장들이 늘어선 길을 계속 지나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 산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닭을 키우고 있었다. 규모가 작지는 않았지만 오면서 너무 큰 건물들을 많이 본 탓에 상대적으로 아담해 보였다. 풀이 드문드문 자란 운동장에 닭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운동장 전체를 그물 같은 것이 감싸고 있었다. 그물은 내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높았다. 하지만 그물코는 아주 넓었다. 그물 사이로 병아리들과 아직 덜 자란 닭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그러니까 다 자란 닭만 구속하는 그물이었다. 나는 그 광경이 꽤 재미있어서 한동안 닭들을 지켜봤다. 한 마리, 벼슬이 유난히 붉은 닭이 날아서 그물을 뛰어넘었다. 닭이 날 수 있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닭의 날개를 그저 루트기호를 닮은 음식으로만 여겼다. 아주 오래 전에는 닭도 날았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 가도 닭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횡단하는 닭의 모습을 떠올렸다. 희재는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병아리들한테 던졌다.

  

 

  1+1=2라는 것을 증명한 공식은 많다.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원리’가 대표적이다. 그 책은 360페이지로 되어 있는데, 수학자들도 난해한 기호와 방법으로 되어 있어서, 하루에 1페이지를 읽는 것도 힘들다. 그러니까 1+1=2, 라는 것을 증명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는 1년이 -5일을 쉴 수 있으므로, 휴식을 언제 할 것인지 적절히 배분해야 한다- 필요했다. 이 불합리함을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수학자 주세페 페아노가 만든 것이 페아노 공리계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증명이 아니라 설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단지, 1과 2, +, 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리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러셀과 페아노 같은 수학자들의 노력으로 1+1=2라는 것은 확실하게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학을 깊이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1+3=4, 2+7=9, 라는 것은 아무도 증명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관리사무소의 노인은 내가 못마땅한 것 같았다. 산을 오르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안내를 하는 게 아니라 나와 달리기 시합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 달리기 시합도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 계속 올라가기만 하면 돼.

  갈래 길을 벗어나 언덕이 나오자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내려가 버렸다. 노인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를 한 탓인지 다리가 떨렸다. 희재는 땀을 많이 흘리기는 했지만 크게 힘들어 하지는 않았다. 노인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자기 어머니의 묘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친절히 대해 주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대사관에서 준 자료에 따르면 아버지도 50년치 관리비를 선불로 내고는 한 번도 무덤을 찾지 않았다.

  무덤은 잘 손질되어 있었다. 그런데 봉분이 세 개였다. 비석은 보이지 않았다. 5미터씩 떨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가족묘는 아닌 것 같았다.

  ─ 어느 게 어머님 무덤이야?

  희재가 입구에서 사온 과일과 어포를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세 개의 무덤의 중간 지점에 상을 차리고 여섯 번 절을 했다. 나는 어머니를 알아볼 수 없지만, 어머니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지금의 나는 유사성을 갖고 있으니까.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 더 슬펐다. 유골은 뿌리지 못하고 다시 들고 내려왔다.

  노인은 어느 게 어머니의 무덤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보통은 번호를 붙여서 묘지를 관리하지만, 30년이 넘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서 기록이 없어졌다고 했다. 노인을 탓할 수는 없었다. 산 사람도 잊히는데 죽은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관리사무소에 있는 자료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봉분을 만든 시기, 이장한 무덤들, 폭우와 산사태로 보수한 무덤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봤다. 공원묘지의 무덤 중 10% 정도가 사실상 유실된 것이었다. 대략적인 위치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어쨌든 세 개 중 하나가 어머니의 무덤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 개의 봉분을 모두 파헤치고 유전자 감식을 하면 어느 게 어머니의 무덤인지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두 사람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예의가 아니었다. 아버지도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세 개의 봉분에 골고루 유골을 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최선책은 아니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어머니의 무덤에 대해 뭔가를 적어 놨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친구나 아버지의 지인 중 누군가가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 하룻밤 정도는 우리 집에서 묵어도 괜찮아.

  내가 근처에 여관이나 숙박시설이 없냐고 묻자, 노인이 그렇게 말했다. 시내를 오가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았다. 희재도 별말 하지 않았다.

  관리사무소 뒤에 노인의 집이 있었다. 단층으로 된 한옥이었다. 나는 입식생활에 익숙했지만, 일본에서 다다미방에 살았던 적도 있어서 바닥에 앉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노인은 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노인의 손녀는 초등학생인 것 같았다. 노인과 희재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노인의 손녀와 함께 방에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약해졌다.

  ─ 여섯 시다. 지금부터 내 생일이야. 축하해 줘.

  아이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 생일 축하해.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왜 여섯 시부터 생일인지 물었다.

  ─ 내가 태어난 날이랑 엄마가 죽은 날이 똑같거든. 그래서 열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엄마 제삿날로, 여섯 시부터 열두 시까지는 내 생일로 하기로 했어.

  ─ 엄마가 널 낳고 돌아가셨니?

  ─ 아니, 엄마가 죽은 후에, 내가 태어났어.

  아이가 말했다. 아이의 엄마는 예정일을 며칠 안 남긴 상태에서 죽었다고 했다. 아마 심장질환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죽은 엄마의 뱃속에서 여섯 시간 동안 있었다. 저녁때, 일을 마치고 돌아온 노인이 닭의 배를 가르는 칼로 아이를 꺼냈다. 아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의 의미를 잘 모르는지 어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처럼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죽은 산모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여섯 시간 동안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의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앞에 있는 아이는 살아 있었다.

  그때 노인과 희재가 상을 들고 들어왔다. 나는 일어나서 상을 받았다. 상 위에는 삼계탕 네 그릇과 깍두기가 있었다. 희재가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서 상 위에 올려놨다.

  우리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밥을 먹었다. 희재와 아이만 가끔씩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국물만 떠먹고 있었다. 노인이 나를 쳐다봤다. 먹지 않으면 다음날부터 아버지의 유령이 찾아와서 같이 삼계탕을 먹자고 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젓가락으로 닭의 배를 열었다. 찹쌀 사이에 묻혀 있는 인삼과 대추가 시한폭탄에 연결된 뇌관과 전선처럼 보였다. 나는 폭발물제거반 요원처럼 조심스럽게 인삼을 꺼내 그릇 위에 올려놨다. 썼다.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또 먹기는 싫은 그런 맛이었다. 나는 쓴맛을 상쇄하려고 대추를 집었다. 맛있었다. 정말로 그랬다.

  ─ 삼계탕에 들어 있는 대추는 먹는 거 아니야.

  희재가 말했다.

  ─ 어째서?

  나는 음식에 먹는 게 아닌 것이 들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닭에서 우러나온 나쁜 것들을 빨아들이려고 대추를 넣는 거야.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대추를 먹었다.

  ─ 먹는 거 아니라니까.

  희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괜찮아.

  나는 또 하나의 대추를 먹었다. 적당히 남아 있는 단맛과 혀만 대도 스르르 녹아버리는 식감이 마음에 들었다. 희재가 또 신경질을 부릴 것 같아서 서울로 돌아갈 때 주려고 했던 탄자니아 동전 세 개를 미리 줬다. 희재는 동전에 정신이 팔려서 내가 뭘 먹든 상관하지 않았다. 아이가 내 그릇에 대추를 옮겨줬다. 나는 요즘도 삼계탕에 들어 있는 대추를 먹는다. 내가 대추를 먹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노인과 희재는 설거지를 하러 갔고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방으로 돌아오니 아이는 책상 앞에 앉아서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다.

  ─ 산수가 정말 싫어.

  아이가 말했다.

  ─ 이리 줘봐.

  나는 아이에게 인도에서 배운 베다수학을 알려줬다. 베다수학은 타르타지라는 인도의 수학자가 인도의 고대 경전에 바탕을 두고 만든 것인데 수학의 모든 것을 열여섯 개의 수드라로 바꿔서 생각한다. 보통 사용하는 계산방법과 전혀 다른 체계라서 익숙해지는 것이 힘들지만 한번 익히고 나면 아주 유용하다. 이것의 장점은 무엇보다 계산이 빠르다는 것이다. 나는 베다수학 덕분에 미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 수학천재로 불린 적도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베다수학의 원리를 설명했다. 아이가 풀고 있는 문제는 85 곱하기 98이었다.    

 

  ─ 이런 식으로 백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보수끼리 곱하면 뒤의 두 자리가 나오고 그 보수를 대각선으로 빼면 앞의 두 자리가 나와 그래서 답은 8330이 되는 거야.

  ─ 선생님이 알려준 거랑 다른데?

  ─ 외국에서 쓰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 그냥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할래.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다음 문제를 풀었다. 78 곱하기 97이었다. 나는 잠시 아이가 문제를 푸는 것을 지켜봤다. 7566. 정답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창밖의 일몰을 바라보면서 지동설과 천동설을 떠올렸다. 하나의 형식체계는 결과로 가는 무한한 가능성 중 단지 한 가지 길을 발견한 것일 뿐, 결과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코페르니쿠스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나 이후의 사람들이나 해가 뜨고 지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어떤 생각이 났다. 수식이나 문장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영감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유통회사 회장 손녀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은 우리가 묵을 방을 청소하러 갔다. 희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스크랩북에 탄자니아 동전을 넣고 사연을 적었다. 다양한 사연들과 나란히 놓이니 아버지의 죽음이 평범해 보였다. 길게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 닭은 새벽에 우는 거 아냐?

  희재가 물었다.

  ─ 자기가 울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울어.

  아이가 대답했다. 나는 한동안 아버지의 유골을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무덤에 유골을 뿌려 달라고 말했을 뿐, 지금 당장 뿌려 달라거나 언제까지 뿌려 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몇 년쯤 후에는 뼈나 머리카락이 없어도, X-ray나 스캔 같은 것으로 유전자를 감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될지도 모른다.

  아이가 엎드려 있는 책상 다리에 십 원짜리 동전이 고임목처럼 끼워져 있었다. 책상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임시로 받쳐 놓은 것 같았다.

 

  Q.E.D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가 자주 쓰던 라틴어 문장의 약자다. 주로 수학에서 많이 사용한다. “이상이 내가 증명하려는 내용이었다.”라는 뜻이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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