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문

 

검은 문

 

서유미

 

 



 

 

 


 

  211번은 일어나자마자 침대 옆의 벽으로 다가갔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는 벽에 사선을 하나 그었다. 다섯 개씩 묶인 표시는 꽤 되지만 그 수가 정확한 건 아니다. 처음부터 표시를 남긴 게 아니고 남기기 시작한 후에도 버릇이 붙지 않아 잊은 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걸 뭘 세고 있냐?”

  123번은 식전부터 병에서 꺼낸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211번이 처음 벽에 표시하는 걸 봤을 때도 그의 반응은 비슷했다.

  이곳에서는 날짜를 새기고 세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211번도 알고 있다. 벽의 구석구석에는 누군가 남기고 간 표시의 묶음들이 낙서나 흠집처럼 남아 있다. 처음에는 211번도 새기고 세는 일에 집착했지만 이제는 버릇처럼 표시를 하나 더 추가할 뿐이다. 표시의 수가 정확하고 그 표시가 벽 전체를 다 채우면 뭐하나. 하지만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서는 무의미한 것에 기대야 할 때도 있다.

  “이따가 한 놈 들어올 거야. 간수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123번의 눈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가 흐려졌다. 211번은 오늘의 표시 옆에 줄을 하나 더 그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입소 첫날, 211번은 철창 앞에서 실내를 들여다봤다. 그 안은 눈부시게 하얬다. 벽과 타일, 침대보와 베개 커버, 두 남자가 입고 있는 옷까지. 누추한 것은 남자들의 얼굴색뿐이었다. 남자 간수가 철창문을 열고 211번의 등을 떠밀었다. 손이 문에 닿자 여자가 곤봉으로 제지했다. 문에 손을 대지 않는다, 는 이곳의 규칙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도어 록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211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들이 눈동자만으로 211번을 훑어봤다. 덩치가 큰 쪽이 123번, 키가 작고 다부진 쪽이 99번을 달고 있었다. 그들의 무표정이 211번에 대한 경계 때문인지, 원래 그런 건지, 일부러 표정을 지운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211번은 배정받은 침대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시간 역시 무표정하게 흘러갔다.

  철창 밑의 배식구로 아침 식사가 들어왔다. 배식판을 넣어 주는 사람의 얼굴도 식판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불필요한 말이나 동작, 표정이 전혀 없었다. 배가 고팠는지 99번과 123번이 포크 쥔 손을 빠르게 놀렸다. 음식을 입에 넣고 씹어 삼키는 그들의 턱 근육이 느리지만 집요하게 움직였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123번은 유리병 안에 든 사탕을 꺼내서 입에 털어 넣었다. 긴 한숨을 내뿜는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맵싸한 박하 향이 주변에 퍼졌다. 99번도 유리병을 힐끔거렸지만 사탕을 먹진 않았다. 그는 뭔가를 참는 듯 입에 힘을 꾹 줬다.

  211번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서 백색의 공간을 둘러봤다. 철창 안, 사각형의 공간은 앞면이 철창이고, 양쪽 측면은 벽으로 막혔으며 그 가운데 세 개의 침대가 횡대로 놓여 있었다. 내부는 단출했으나 막혀 있어야 할 뒷면의 벽이 삼분의 일쯤 뚫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쪽문처럼 개방되어 있었다. 문밖으로 난 길은 일 미터쯤 이어지다가 오른쪽으로 꺾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벽이었을 경계선 너머의 타일과 벽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검은 구멍은 죽은 사람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211번은 그곳을 응시하다가 홀린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 서자 진원을 알 수 없는 찬바람이 흘러나와 몸을 감쌌다. 입구의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구의 둥근 빛은 얼마 가지 못한 채 용해되어 사라져 버리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둠의 밀도가 진해졌다. 그래서 전진하는 게 아니라 견고해지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완전한 암흑이라고 판단하고 멈칫한 순간, 두툼한 손이 211번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 그는 짧게 소리 질렀다.

  99번은 유리병에서 꺼낸 사탕을 내밀었다.

  “먹어 둬.”

  행동과 표정은 박력이 넘치지만 뜻밖에도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211번은 사탕을 입안에 넣고 천천히 굴렸다. 연기를 삼킨 것처럼 쓰고 맵고 싸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뱉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달리 그는 그것을 녹이는 데 열중했다. 사탕을 빨고 있자니 몽롱해지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211번은 벽에 등을 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눈을 감은 채 매운 박하 향에 자신을 맡겼다. 그 모습을 보며 99번이 팔짱을 꼈다. 흰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려서 다부진 팔뚝이 그대로 드러났다.

  “출구 쪽으로는 가지 마라.”

  그 말은 금기 속에 자유를 품고 있어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211번은 출구라는 명칭에 끌렸다.

  “출구라면, 어디로 나가는 거지?”

  “그건 몰라. 나갔다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까.”

  123번이 출구를 등지고 앉아서 사탕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왜? 나가 보고 싶나?”

  99번은 다리를 어깨 너비만큼 벌리고 섰다. 그 자세는 그의 키를 약간 작게 만들었지만 자신감 넘치는 남자로 보이게 했다.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아. 여기에서 편하게 지내고 싶다면 말이야.”

  99번은 사탕을 입에 넣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슴을 쫙 폈다. 그 모습이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몸을 부풀린 짐승 같았다.

  “앞으로 이놈하고 친하게 지내라고. 사는 게 수월해지니까.”

  123번이 사탕 통을 두드리며 웃음을 흘렸다.

 “소등 후에는 출구 앞에서 불침번을 서야 한다. 그게 이곳의 규칙이야.”

  99번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불침번은 왜 서는 거지?”

  “출구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지.”

  “새벽이 되면 출구에서 누군가 나올지도 몰라. 출구로 끌려 들어가면 끝이야. 다신 돌아오지 못한다고.”

  123번은 끝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묻어났다.

  “출구에 있다는 자를 본 적이 있나?”

  “그 자를 본 사람은 없다. 본 사람은 모두 끌려갔으니까. 우리가 아는 건 출구로 끌려가면 죽는다는 것뿐이야.”

  출구 앞에 놓인 불침번용 의자는 오래된 것인 듯 낡고 노쇠했다. 의자의 반은 불빛이 환한 이쪽에, 반은 어둠 저쪽에 속해 있어서 반쯤 지워진 것처럼 보였다.

  휴식 시간이 끝나자 간수가 식판을 수거해 가고 일거리를 가져와서 나눠줬다. 211번도 작업 도구를 받았다. 그것은 직사각형으로 생김새와 크기, 무게가 벽돌과 흡사했다. 단축 한 면에 회전식 손잡이가 달려 있고 장축 한 면은 숫자판으로 돼 있었다. 벽돌을 받은 99번과 123번이 능숙하게 손잡이를 돌렸다. 손잡이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숫자판의 숫자가 하나씩 올라갔다. 99번의 숫자판엔 597,811, 123번의 숫자판에는 606,349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이건 뭐하는 거야?”

  “그냥, 일하는 거야.”

  그냥, 이라고 하면서도 123번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할당량이 있나?”

  “그런 건 없어.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99번은 속도를 높이면서 123번의 숫자판을 쳐다봤다.

  천장 구석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행진곡풍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211번은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두 남자는 쉬거나 멈추지 않고 손잡이를 반복해서 돌렸다. 나중에는 손잡이가 그들의 손과 팔을 돌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211번은 아직 숫자가 새겨지지 않은 자신의 벽돌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99번이 그 모습을 힐끔거렸다.

  “손잡이를 돌리는 건 숫자 때문이야. 여기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숫자뿐이니까. 숫자는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있다는 표시지. 존재의 증명 같은 거야. 물론 숫자가 높을수록 행복해지지.”

  그 순간에도 두 개의 손잡이는 빠르게 돌아가고 숫자도 증가했다. 123번은 606,349만큼 생동감 넘치고 행복해 보였다. 반면에 99번은 123번과 벌어진 숫자의 차이만큼 불행하고 조급해 보였다. 한 사람은 숫자를 따라잡기 위해, 한 사람은 행복을 지키기 위해 철창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열심히 손잡이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211번도 손잡이를 잡았다. 뻑뻑해서 쉽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힘을 주자 삐걱, 소리와 함께 천천히 움직였다. 철컥, 한 바퀴를 돌리자 숫자판의 0이 1로 변했다. 한 바퀴 더 돌리자 1은 2가 되었다.

  211번은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손잡이를 돌렸다. 칠, 팔, 구……. 그리고 커져 가는 숫자를 눈으로 확인했다. 물론 늘어난 숫자는 손잡이를 돌린 횟수고, 노동과 시간을 먹고 자란 결과물에 불과하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증가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용한 일인데도 반복은 의미를 생산했다. 7일 때의 자신과 8일 때의 자신은 전혀 다른 존재 같았다. 11이 되자 10은 의미를 잃었다. 의미를 소유하기 위해 211번은 손잡이를 계속 돌렸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손목이 뻐근해졌다. 하지만 그는 커져 가는 숫자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일종의 갈증, 더 큰 숫자에 대한 욕망이 손과 팔을 지배하고 움직였다. 그러니 손잡이를 돌리고 숫자가 올라가도 만족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저 만족의 언저리를 맴돌 뿐이다.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계속 돌려라, 돌려라, 멈추지 말고, 손잡이를 돌리면 행복해진다고 속삭였다. 거짓말, 다 같이 속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211번은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간수가 휴식, 하고 외치자, 99번과 123번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벌게진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둘은 서로의 숫자판을 힐끔거리며 벽돌을 내려놓지 않았다.

  “반납!”

  간수가 호루라기를 불자 그제야 둘 다 미적거리며 벽돌을 내려놓았다.

  123번이 49라고 적힌 211번의 숫자판을 보며 히죽 웃었다.

  “딱 떨어지는 숫자로 끝나야 기분이 좋은데 말이야.” 

  벽돌을 돌릴 때 123번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숫자가 그의 물렁한 살을 단단하게 만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하는 모양이었다. 벽돌에 몰두해 있을 때 123번은 출구와 그 안에 있다는 누군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숫자가 적으면 불행해져. 그날의 목표량을 채워야 밥도 맛있고 잠도 잘 오지.”

  123번이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99번은 별 말이 없었다. 잘 발달된 그의 팔 근육이 벽돌을 돌릴 때는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듯했다. 박력이 넘치던 그의 몸이 처음보다 왜소해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배식구로 식판이 들어왔다. 세 사람은 철창 앞에 모여 앉았다. 식판을 들여다본 99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구겼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철창 앞으로 갔다.

  “이봐. 반찬이 이게 뭐야? 풀만 먹고 어떻게 힘을 쓰나! 고기를 달란 말이야.”

  99번은 흘러내린 소매를 걷어 올리고 두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간수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우면 교도 조치하겠습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 123번은 묵묵히 포크를 움직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211번도 플라스틱 포크를 손에 쥐었다. 선 채로 간수를 노려보던 99번이 자리에 앉아서 숟가락질을 했다.

  “잔말 말고 그냥 먹어. 저번처럼 배식 끊기지 말고…….”

  123번은 입안에 든 밥알을 열심히 씹어 삼켰다.

  “이런 건 개도 안 먹겠다.”

  99번은 계속 투덜거렸지만 그의 불평은 아무것도 바꿔 놓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다시 벽돌의 손잡이를 돌렸다. 식곤증 때문에 세 사람 모두 표정이 나른했다. 211번은 밀려오는 졸음 때문에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고 123번과 99번의 손도 오전보다 느렸다. 공간 전체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고요하고 묵직했다. 그 안에서 제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시계의 초침뿐이었다. 123번이 못 참겠다는 듯 유리병에서 사탕을 한 움큼 꺼냈다.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123번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속도는 회복되지 않았다. 눈동자의 초점이 또렷해졌다가 다시 풀어졌다.

  간수가 철창 밖에서 호루라기를 길게 분 후 벽돌을 회수해 갔다. 빈손이 된 99번은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123번은 연거푸 트림을 하며 인상을 썼다. 그때마다 그의 입에서 악취가 났다.

  “어흐, 속 쓰려 죽겠네.”

  123번은 사탕을 하나 더 꺼내 입에 넣었다.

  “위에 빵꾸가 났나. 이 시간만 되면 죽겠네.”

  123번은 배를 감싸며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구겨진 이마와 인중에 식은땀이 촘촘히 배어 있었다.

  “약을 달라고 하면 되잖아.”

  “이봐, 신참. 여긴 병원이 아니야. 간수 놈들은 아프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왜 그런 줄 알아? 그놈들은 우리가 아파야 편하거든. 어쩌면 음식에 약 같은 걸 탔을지도 몰라. 건강하면 문제를 일으키니까. 조심해, 너도. 고장 나는 거 금방이야.”

  99번은 졸음을 쫓으려는 듯 한쪽 구석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123번의 속쓰림과 죽겠다는 하소연에 이력이 난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99번이 허리를 좌우로 틀면서 물었다.

  “이리 와서 발 좀 잡아 주겠나?”

  211번이 발목을 잡아 주자 99번은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숫자를 많이 올리려면 말이야…….”

  99번은 상체를 빠르게 오르내렸다.

  “지금부터 저녁 먹기 전까지 정신 바짝 차려. 그때가 진짜거든.”

  휴식 시간이 끝나고 간수가 다시 벽돌을 나눠주었다. 123번은 속쓰림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에 99번은 오천 차이까지 따라붙었다. 211번은 막 490을 넘어 500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는 동안에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반납!”

  간수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작업 중지!”

  211번은 못 들은 척 손잡이를 돌렸다. 세 바퀴만 더 돌리면 500이었다. 간수가 99번과 123번의 벽돌을 회수했다. 211번은 벽돌을 등 뒤로 감췄다.

  “211번, 반납!”

  “세 바퀴만 더 돌리면 500이라고.”

  211번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벽돌을 내려놓지 않자 99번이 211번을 힘으로 제압했다. 211번은 99번의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사이에 123번이 등 뒤에 감춘 벽돌을 빼앗아서 간수에게 반납했다. 곤봉을 든 간수가 211번을 내려다봤다. 한쪽 입 꼬리만 올라간 웃음이 야비했다. 모멸감 때문에 211번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간수는 세 개의 벽돌을 회수해서 철창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도 211번은 눈을 뜨지 않았다.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사탕을 입에 넣으며 123번이 사과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유리병 안에 남은 사탕은 두 알뿐이었다.

  “우리는 어차피 간수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간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간수의 재량에 따라 조치를 취한다. 그게 이곳의 규칙이니까.”

  그 와중에도 99번은 손목과 어깨를 풀었다.

  “간수의 명령엔 복종해야 돼.”

  둘이 동시에 덧붙였다.

  211번은 벽에 기대앉은 채 철창 쪽을 바라봤다. 123번이 준 사탕을 입에 넣자 속이 화끈거리다가 기분이 점차 몽롱해졌다. 그런데도 497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질 않았다. 500으로 마무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211번은 채워지지 않은 수만큼 불행했다. 멍하게 졸지 않았더라면, 뺏기지 않고 좀 더 버티기만 했어도 채울 수 있었는데. 하지만 간수는 곤봉과 권총을 갖고 있다. 211번이 끝까지 반납하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무기로 제압당하는 건 99번과 123번의 완력, 간수의 야비한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일 것이다. 뽑은 칼보다 칼집에 들어 있는 칼이, 가해진 폭력보다 가해질 수 있는 폭력이 더 공포스럽다. 곤봉이 어깨와 머리를 가격했을 때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은 칼과 총의 위력에 대해서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사로잡혀 저항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211번은 다시 눈을 감았다.

  식판이 들어오기 전에 음식 냄새가 먼저 복도를 떠돌았다. 저녁 반찬으로 나온 고깃덩어리 때문에 99번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고 123번도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텅 빈 유리병도 사탕이 가득 찬 새 것으로 바뀌었다. 99번과 123번의 손과 입이 게걸스럽게 움직였다. 211번도 기름진 밥과 반찬을 입에 넣고 씹었다. 나쁠 것 없는 저녁이었다. 하지만 211번은 이런 평화가 낯설고 불편했다. 99번과 123번은 하루 종일 출구가 없는 것처럼, 등 뒤가 벽으로 막힌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히 철창과 배식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숫자와 밥그릇에 매어 있었다. 211번은 고개를 돌려 출구를 힐끗 보았다. 그것은 검고 음험한 수수께끼처럼 여전히 거기 있었다. 출구는 외면하고 살 수 있지만 끼니 때마다 제공되는 음식과 사탕, 쌓아 놓은 숫자, 새하얀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무서운 것은 등 뒤의 출구가 아니라 눈앞에 버티고 있는 생활이다.

  “첫날이라 정신없을 거야. 입맛도 없고. 금방 익숙해지니까 걱정 마. ……이거 남기는 거면 내가 먹어도 되지?”

  99번은 식판에 있는 고기를 덜어 갔다.

  “사탕 줄까? 이게 만병통치약이야. 위궤양 빼고는 다 고친다니까. 여기가 복잡할 때도 이게 최고야.”

  123번이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쿡쿡 찔렀다.

  “……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여기에서 지금 뭐하는 거지?”

  “그냥 사는 거지. 복잡하게 생각할 거 뭐 있어. 사탕이나 먹어.”

  123번이 사탕이 든 유리병을 흔들었다.

  211번은 사탕을 입안에 구겨 넣었다. 이곳이 이상한가. 이곳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신이 이상한가. 211번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내부를 둘러봤다. 사탕이 녹자 생각도 녹아 흐물거렸다. 모든 게 귀찮고 피곤했다.

  소등.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 후 불이 꺼졌다. 깜깜하게 변한 복도에서 간수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중얼거리는 소리, 곤봉으로 철창을 긁는 소리가 한 차례 지나간 후 사방이 고요해졌다. 99번과 123번은 침대에 눕고 211번은 출구 앞 의자에 앉았다.

  “1시에 나를 깨워. 졸면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려. 출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깨우고.”

  복도의 천장에 달린 새끼손톱만 한 취침 등이 일제히 불을 밝혔다. 그 붉은 빛 때문에 복도엔 핏물이 번진 것 같았다. 천장에 달린 전구의 불빛은 멀리 가지 못하고 의자 밖에서 경계가 희미한 원을 그렸다. 211번은 출구 쪽을 보며 발소리가 들리는지 귀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99번과 123번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세상은 잠들고 시간은 멈추고 이 밤이 계속 이어져 영원히 여기에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뚜벅뚜벅, 발소리는 졸음처럼 이물감 없이 천천히 다가왔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211번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폈다. 발소리가 나는 건 복도 쪽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남자 간수가 철창 앞에 서서 실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든 손전등의 강렬한 빛이 211번의 눈을 깊숙이 찔렀다.

  “그쪽이 아닙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상당한 저음이라 낮은 음계의 피아노 건반을 하나씩 천천히 누르는 것 같았다.

  “감시해야 할 곳은 반대쪽입니다.”

  211번은 출구의 반대쪽인 실내를 둘러봤다. 내부는 비온 뒤의 저녁 묘지처럼 쓸쓸하고 음산했다. 99번과 123번은 침대 위에서 몸을 만 채 잠들어 있었다. 움직임이 없는 그들은 두 구의 시체처럼 보였다. 무엇을 감시하라는 건가. 실내엔 죽은 시간과 물체뿐인데. 211번은 의자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출구 쪽을 응시했다. 어둠과 정적이 그의 오감과 판단력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211번은 시계를 확인한 후 99번을 깨웠다.

 

  점등과 동시에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211번은 인상을 쓰며 이불을 찾았지만 99번이 이미 걷어간 후였다. 이곳에서 백열등은 태양이고 점등은 기상을 의미한다. 설령 아침과 밤이 바뀌었다 해도 알아낼 도리가 없다. 백열등이 켜지지 않으면 아침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침대 위를 정리한 세 사람은 철창 앞에 모여서 아침을 먹었다. 잠을 못 잤는지 123번의 얼굴이 푸석했다.

  “어젯밤에 출구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어.”

  불면의 이유를 털어놓으며 123번이 출구 쪽을 쳐다봤다.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211번은 잠꼬대하듯 웅얼거렸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된 거야. 새로 사람도 들어왔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게. 사탕을 너무 많이 먹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99번은 식판을 비우고 일어섰다. 물을 마신 후에는 철창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123번은 속이 쓰린지 얼굴을 찡그리며 밥을 먹었다. 211번은 자신이 출구 앞을 지키던 때를 되짚어 봤다. 발소리가 들렸던가. 그가 들은 건 간수의 목소리뿐이었다.

  간수가 벽돌을 들고 오는 걸 보고 99번은 손가락 마디를 꺾어 투둑투둑 소리를 냈다. 생기와 의욕이 넘쳤다.

  “내가 똑똑히 들었어. 바로 앞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니까. 분명히 다시 올 거야.”

  123번은 허겁지겁 사탕 통의 뚜껑을 열었고 99번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손잡이를 돌렸다. 낮은 숫자의 시간이었다. 211번도 바로 500을 넘어 600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600이 가까워지자 간밤에 품었던 목표는 사라지고 새로운 목표, 새로운 숫자에 대한 갈망이 등장했다. 211번은 그 힘으로 다시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사탕에 취한 123번도 뒤늦게 분발했다. 눈가가 붉게 변한 그는 사탕을 연료 삼아 움직이는 기계 같았다. 숫자는 클수록 좋다. 거기에는 어떤 이견도 따르지 않는다. 숫자는 99번과 123번, 211번의 욕망을 획일화시켰다.

  하지만 목표는 계속 도망쳤다. 원하는 숫자는 항상 손의 움직임보다 빠르게 뒤로 물러나고 먼 곳으로 달아났다. 아무리 손잡이를 열심히 돌려도 그 숫자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이만 하면 됐다, 싶을 때는 오지 않았다. 손아귀가 욱신거리고 팔목이 시큰하고 어깨가 결려서 잠시 멈추긴 해도 그건 불가항력일 뿐, 마음 같아서는 손잡이를 돌리는 기계가 되고 싶었다. 이 숫자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돌리면 돌릴수록 결핍과 갈증이 쌓여 가고 만족은 금세 녹아 사라져 버렸다.

  99번과 123번은 서로의 숫자판을 의식하며 손잡이를 돌렸다. 웅크린 등은 왜소하고 무력해 보이지만 두 사람의 한쪽 어깨는 위아래로 격렬하게 움직였다. 편한 자세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지만 그게 바로 힘을 집중적으로 쏟아내기에 가장 좋은 자세였다. 99번이 123번의 숫자를 빠르게 쫓아가서 두 숫자의 차는 겨우 백 정도에 불과했다. 상대의 숫자를 넘어서기 위해,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두 사람 다 분초를 다투며 땀을 흘렸다.

  “반납!”

  간수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123번이 99번의 눈치를 살피며 벽돌을 내려놓았지만 99번은 돌아앉아서 계속 손잡이를 돌렸다. 빠르게 증가한 숫자는 그새 삼십 차이로 좁혀진 상태였다.

  “99번, 반납!”

  남자 간수가 같은 명령을 반복했지만 99번은 손잡이를 등 뒤로 감춘 채 계속 돌렸다. 팔을 잡은 123번은 99번의 기에 눌려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남자 간수가 허리에서 곤봉을 뽑아 99번의 어깨를 내리쳤다. 99번은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벽돌에 매달렸다.

  “99번, 반납!”

  여자 간수가 들어와서 곤봉으로 99번의 머리를 여러 번 가격했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99번은 저항을 멈추고 벽돌에서 손을 뗐다.

  남자 간수가 이마와 얼굴이 붉게 물든 99번의 얼굴과 숫자판을 번갈아 쳐다봤다. 숫자판에는 여섯 자리의 숫자, 몇 십만 번의 회전운동이 기록돼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만큼의 노동과 시간의 축적을 의미했다.

  “간수의 명령에 불복종했으니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돼! 제발…….”

  99번이 두 손을 모았지만 남자 간수는 한 발 뒤로 물러설 뿐 대꾸가 없었다. 그는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리더니 벽돌의 손잡이를 반대 방향으로 꺾어버렸다.

  “하지 마!”

  99번이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간수가 손잡이를 반대로 돌릴 때마다 숫자가 뒤에서부터 하나씩 0으로 변했다.

  “으악!”

  99번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다가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남자 간수가 돌려준 손잡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0. 한 사람의 과거, 한 세계가 말소돼 버린 순간이었다. 남은 건 99번의 절망뿐이었다.

  간수들이 철창문을 열고 나갔다. 두 사람의 발소리는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 갔지만 그들의 얼굴에 번지던 가학적인 웃음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벽돌을 돌려받았으나 99번은 더 이상 손잡이를 돌리지 않았다. 벽에 기대앉은 채 멍하게 철창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 절망과 우울함이 두려워서 123번과 211번은 99번을 외면했다.

  중간에 깨어 불침번을 서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규칙과 의무 앞에서 211번은 눈을 비볐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무 의자가 미세하게 삐걱거렸다.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지만 졸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211번은 출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123번은 발소리를 들었다고 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 미세한 소리가 먼지처럼 떠돌았는데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가면서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마다 211번은 긴장해서 출구 쪽을 주시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불만 같은 건 잊게 된다고 했지만 211번의 관심은 자꾸 출구에 쏠렸다. 경계와 감시가 아닌 출구 그 자체, 정확히 말하자면 출구 너머로 향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나. 끝이 있긴 있나. 출구 저쪽에 정말 누가 있는 건가. 그래서 사람을 끌고 가는가. 아니면 스스로 출구 저쪽으로 걸어가는 걸까. 보초를 설 때마다 211번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출구에 대한 풍문은 다양했으나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공포와 희망. 그 끝이 죽음이고 지옥이라는 쪽과 자유와 해방의 새로운 세계로 이어진다는 쪽. 하지만 두 갈래의 길조차 추측에 불과하고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곳으로 간 자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정적은 지속됐다. 211번은 졸음을 쫓기 위해 목을 돌리고 허리를 좌우로 틀었다. 팔을 움직이고 다리를 바꾸어 꼬기도 했다. 그래도 졸음이 가시지 않자 철창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출구와 불침번이 일상이 되자 긴장은 사라지고 공포조차 권태로워졌다. 차라리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99번과 교대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식구 앞의 식판은 두 개뿐이었다. 눈을 떠보니 99번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99번 어디 갔어? 네가 99번하고 교대했잖아?”

  123번은 침대 사이를 산만하게 오갔다. 눈동자가 불안과 공포로 흔들렸다.

  “교대할 때는 분명히 있었는데.”

  막 잠에서 깬 211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졌다. 99번은 지난밤 불침번의 마지막 주자였으니 한두 시간 전에 증발해 버렸다는 얘기였다.

  “99번 사망. 정리하겠습니다.”

  간수가 들어와서 99번의 침대 위를 치웠다.

  “99번은 끌려간 거야. 누가 와서 끌고 간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다시 올 거라고.”

  123번은 출구를 등지고 앉아서 몸을 웅크렸다. 그는 식판을 옆으로 밀어 두고 유리병에서 사탕을 꺼냈다. 그가 말하고 움직일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211번은 음식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99번과 함께 행방의 진실도 사라져 버렸다. 211번은 침대 옆의 벽에 날짜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99번이 사라진 후로 123번은 악몽을 자주 꿨다. 출구에서 나온 ‘그 자’는 123번을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123번은 암흑의 한가운데에서 가위에 눌렸고 존재가 흩어지는 것 같은 공포 속에서 깨어났다. 123번은 잠드는 걸 두려워했고 불면과 악몽은 그의 위궤양을 악화시켰다. 그는 툭하면 쓰린 배를 부여잡고 ‘죽겠다’고 중얼거렸고 사탕을 과용했다.

  99번이 사라진 후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밥을 먹고 난 후에는 손잡이를 돌렸고, 간수들은 벽돌을 가지고 오거나 회수해 갔다. 반복되는 일상은 99번의 존재를 서서히 지워 갔다. 이곳에 있는 어떤 것도 99번의 부재를 증명할 수 없었다. 물론 99번은 123번과 211번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그가 사라져서 이곳엔 빈 침대와 몇 가지 의혹, 약간의 의기소침이 남아 있지만, 그것도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망각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이곳의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변하는 게 있다면 그건 머물다 가는 사람의 번호, 벽돌에 새겨지는 숫자뿐일 것이다. 두 사람은 점차 99번을 잊었다.

  “99번은 정말 끌려갔을까?”

  밥을 먹다가 211번이 중얼거렸다.

  “99번이 사라진 게 언제지? ……근데 99번이 누구였지?”

  123번이 하품을 길게 했다.

 

  305번은 99번이 쓰던, 그 전에는 다른 사람이 썼던 침대를 배정받았다. 123번과 211번이 아침을 먹는 동안 305번은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의아한 눈으로 출구를 주시했다.

  “침대가 꽉 찼군. 이래야 정상이지.”

  123번은 어깨를 쭉 펴고 팔뚝이 드러나도록 흰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의 큰 덩치가 단단하고 다부져 보였다.

  123번은 305번에게 이곳의 생활에 대해 차근차근, 그러나 절도 있게 설명했다. 그는 여유가 넘쳤고 출구의 위엄과 공포는 과장되었다. 305번은 실체가 없는 경계심 때문에 긴장했다. 305번이 불안한 눈빛으로 출구를 힐끔거리자 123번이 유리병에서 꺼낸 사탕을 선심 쓰듯 건넸다.

  “먹어 둬. 지내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 상황을 지켜보며 211번은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을 느꼈다. 이곳의 일상이, 반복되는 패턴이, 흘러가고 지속되는 시간이 못 견디게 지루하고 지겨웠다. 이런 날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숫자와 사탕, 출구와 불침번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무얼 지키고 무엇을 두려워하라는 건가.

  305번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기침을 한 후에 사탕의 맛에 적응했고 벽돌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숫자가 가장 큰 123번은 여유를 부렸고, 211번은 숙련된 솜씨로 손잡이를 돌렸다. 이제 딴생각을 해도 속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아니 딴생각을 하는 쪽이 일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다.

  숫자가 늘어난다는 건 시간이 흘러간다는 뜻이었다. 그건 늙어 가고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이 안에 가만히 앉아서 밥을 먹고 손잡이를 돌리는 것이 출구 밖으로 나가는 일이었다. 211번은 사탕을 입에 넣고 천천히 녹여 먹었다. 그런 생각이 삶을 분열시키고 피로를 가중시킨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불침번을 서기 위해 출구 앞에 앉은 211번은 목 언저리와 가슴께를 긁적거렸다. 어딘가가 몹시 가려운데 정확한 부위를 알 수 없어서 여기저기를 마구 긁어댔다. 손톱이 닿자 간지러움은 불이 번지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211번은 손이 닿지 않는 등 한가운데를 긁으려고 낑낑대다 벌떡 일어섰다. 도대체 여기에서 뭘 하는 거지? 그는 123번과 305번의 침대 주위를 서성거리고 철창까지 빠른 걸음으로 왕복했다. 그래도 가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123번과 305번의 코고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211번은 곤하게 자고 있는 그들과 비현실적으로 버티고 있는 출구를 쳐다보았다. 일시정지 돼 있던 211번의 몸이 한순간에 출구 쪽으로 쏠렸다. 암흑에 대한 공포가 서서히 엄습해 왔지만 그 서늘한 긴장감은 가려움과 반비례했다. 그는 빨려 들어가듯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의 선택이란 이곳 아니면 저쪽뿐이었다.

  211번은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 걸었고 그것마저 사라지고 완벽한 어둠이 시작되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더듬더듬 발걸음을 떼었다. 걸으면서 그는 출구의 끝에 대해 상상했다.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죽음에 빠지게 될지, 혹은 누군가 지키고 있다가 죽일지,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 될지, 그곳이 천국일지 지옥일지, 자유의 땅일지 조심스럽게 점쳐 보았다. 하지만 저 끝이 그가 생각한 가능성 중 하나에 해당할지 아닐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동일한 암흑 속에서 211번은 벽을 더듬고 벽에 부딪쳐 가며 걸었다. 앞으로 가는 건지 옆으로 가는 건지 모르는 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극도의 긴장감과 목마름과 막막함과 졸음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211번은 깨달음을 얻듯 죽음을 예감했다. 출구로 나간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이란 누군가 나타나서 죽이고 죽음이 덮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하는 것. 기약 없는 어둠의 미로 속에서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뿐일 것이다. 211번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공포와 절망이 그를 잠식했다. 그의 몸은 돌덩이처럼 무겁고 찼다. 입김이 쏟아지고 콧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그는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았다. 그리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죽음과도 같은 끈끈한 잠에 자신을 의탁했다. 후회와 체념이 뒤섞인 눈물이 뺨을 뜨겁게 적셨다.

  211번이 깨어난 건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극심한 두통과 오한 때문이었다. 추위의 외피를 입은 공포가 목을 조여 왔다. 그는 깨어난 것을 원망하면서도 죽지 않으려고 굳은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저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건 어둠에 익은 사람만이 감지할 수 있는 희미함이었다. 211번은 눈물이 말라붙은 눈을 비비고 네 발로 기어 그 빛을 쫓아갔다. 그곳이 죽음이든 지옥이든 어딘가에 도달하고 싶었다.

  손을 앞으로 더듬으며 나가자 갈림길이 나타났다. 희미한 빛은 왼쪽과 오른쪽 모두에서 새어 나왔다. 211번은 양쪽을 번갈아 보며 심호흡을 했다. 어느 길이 그를 죽음에서 건져내고 해방에 이르게 할지, 그런 걸 가려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이 사소한 선택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거라는 사실 때문에 망설여졌다. 211번은 머뭇거리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빛의 양은 미미했고 몸이 언 그의 걸음은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수록 심장박동은 빨라졌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빛이 쏟아져 나왔고 211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출구의 끝에 도달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조바심과 달리 눈부심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눈을 뜨고 빛에 적응했을 때 그가 목도한 것은 철창이었다. 새하얀 벽과 새하얀 타일이 깔린 철창의 내부. 127번과 183번을 단 남자 둘이 철창 앞에 앉아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다. 그걸 본 211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리고 이 안에 있을 수많은 방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발아래와 머리 위, 양옆으로 첩첩이 쌓여 있을 방들. 사람들. 숫자들.

 

  《문장웹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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