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보라

 

물보라

 

김유진

 



 

   

 

나는 그곳의 주소를 알고 있었다. 한 달 내내 비가 내렸다. 이런 여름은 처음인 것 같아. 내가 우산을 접고 차에 오르자, L이 인사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비에 젖은 어깨와 팔뚝 위로 에어컨의 냉기가 바늘로 찌르는 듯 파고들었다. 물기는 빠른 속도로 증발했다. 이런 여름은 처음이 아니었다. 4년 전 여름엔 60일 동안 비가 내렸다. 그러나 그해의 긴 장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L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그 기억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었으므로, 때때로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곤 했다. 가죽냄새와 딸기 시럽 향의 방향제 냄새가 슬며시 올라왔다. 그는 나이 든 남자처럼 철제 사탕 통에 동전을 모아 두었다. L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헐겁게 여미고는 발밑으로 밀어 넣으며 캔버스 가방에서 포켓용 수첩을 꺼냈다. L은 수첩 한쪽 구석에 적힌 쌀알 크기의 글자들이 알아보기 어렵다는 듯, 눈을 가늘게 치뜨는 시늉을 했다. 그것은 학창 시절 안경잡이였던 나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는 시력이 무척 좋았다. 손톱으로 수첩에 붙어 있던 과자 부스러기를 긁어냈다. L은 주소를 소리 내어 읽으며 내비게이션에 능숙하게 입력했다. 젖은 우산이 발등에 닿아 축축했다. 나는 우산을 지그시 밟았다. 우산에 난 발자국은, 펼치는 순간 이내 빗물에 쓸려 내려갈 것이었다. 폭이 제각각인 물줄기들이 차창을 가로질렀다. 차창 밖의 습기도, 빠른 속도로 물기를 앗아가는 내부의 냉기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양쪽 팔을 감싸안으며 조금 춥다는 듯 굴었다. L은 21도를 가리키던 에어컨 온도를 23도로 올렸다.

 

그곳은 직접 밭을 일구어 장아찌를 담그는 것으로 유명한 한정식집이었다. 인터넷으로 산야초나 수세미로 만든 효소를 팔기도 했다. 정식 메뉴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두어 가지의 콩고기 요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물과 장아찌, 버섯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홈페이지에서 식당의 전경을 보았다. 들풀과 들꽃과 표면이 거친 돌과 나무, 기와로 이루어진 낡은 한옥이 숲 한가운데 있었다. 호젓했다. 나는 그곳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었다. L과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었다. 나는 짠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L은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L을 알고 지낸 지 퍽 오래되었지만, 그의 식성은 알지 못했다. L은 대체로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먹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은 열 시에 문을 닫았다.

 

차는 서서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장대비가 앞길을 막았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아, 눈을 비볐다. 각막이 하드 렌즈에 쓸려 따끔거렸다. 나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안경잡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근엔 알레르기성 결막염에 시달렸다. 의사는 기후 탓이라고 했다. 만성질환이었다. 더위와 습기, 비에 순응하듯, 염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하루에 두 번,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안약을 시차를 두고 눈에 넣었다. 창밖으로 자동차 바퀴가 빠르게 회전하며 고인 물을 튕겨내는 것이 보였다. 호기롭게 바위로 돌진한 파도가 산산이 부서지듯, 차가 지나는 곳마다 물보라가 일었다. L이 카오디오를 켰다. 댄스곡이 급작스레 튀어나오자, 그는 재빨리 소리를 줄였다. 겸연쩍은 듯 입꼬리만 올려 웃어 보이는 L의 표정이 사무원 같았다. L은 실제로 사무원이었다. 버튼을 여러 번 눌러 음악을 바꿨다. 나는 그 댄스곡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핸드폰 가게를 지나면서, 점포정리 중인 등산복 판매장에서, 개업 전단을 돌리는 아르바이트생들과 그 뒤로 흐느적거리는 행사용 풍선인형이 있는 노래방 앞에서, 노래는 끝없이 흘러나왔다. L은 나이 어린 여성그룹의 노래를 듣는다는 사실을 들킨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L이 바꾼 음악은 90년대 초반의 발라드 음반 같았다. 조금 전의 댄스곡과 발라드곡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평소 음악을 거의 듣지 않았으므로, L이 무슨 음악을 듣건 개의치 않았다.

 

내가 L에게 한정식집으로 데려가겠노라 했을 때, L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돈도 없는 게. 나는 월급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수룩해 보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얼마 전 취직 후, 첫 월급을 받았다. 나는 신입치고 나이가 많았다. 나는 나이에 비해 이력이 짧았다. 나는 전국의 300개에 달하는 도서관 목록을 관리했다. 그곳에 분기별로 선정된 책들을 보냈다. 책 선정에 관한 것은 내 관할이 아니었다. 되돌아오는 책으로 도서관의 폐관 소식을 알았다. 목록에서 지우고, 개관하거나 이전한 도서관을 추가했다. 도서관의 규모는 제각각이었다. 하나의 도서관이 사라지면, 곧 다른 것이 생겼다. 도서관은 그 규모에 상관없이 항상 일정한 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목록에 있는 도서관 중 이름이 낯익은 것은 동네의 구립도서관뿐이었다. 책은 군내 병영문고, 교도소, 대여점 규모의 마을문고로도 보내졌다. 소규모일수록, 이름은 그에 걸맞게 알려지지 않은 꽃이나 나무, 이미 사라진 옛 지명을 딴 경우가 많았다. 나는 엑셀을 다룰 줄 몰랐다. 항목을 추가하거나 가나다순으로 정렬하는 법, 혹은 항목을 제하고 번호를 매기는 것을 어렵사리 익혔다. 나는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므로, 월급도 그에 응하는 수준을 받았다. 나는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했다. 나는 4대 보험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월급을 받은 후에야 알았다. 책 기증에 대해 문의전화를 거는 사람 중에는 촌의 이장이나 갓 스무 살을 넘긴 군인들도 있었다. 때때로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톨게이트를 지나자 차량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L은 속도를 올렸다. L의 차는 텅 빈 도로를 달렸다. 비는 사그라졌다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아파트단지와 공장지대를 지나자 야트막한 산이 끝없이 이어졌다. 야산의 끝자락은 어둠에 젖어들어 경계가 모호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해파리를 닮은 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해를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몇 개의 주유소를 지났으나 문을 연 곳은 없었다.

 

텅 빈 도로를 달리면 무섭지 않아?

나는 아무 말이나 뱉었다.

자유로 귀신 같은 거 말하는 거야?

L은 슬쩍 백미러를 보며 대답했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혼자잖아.

난 혼자인 게 편한데. 앞을 가로막는 것들이 없잖아.

 

L은 ‘가로막는 것들’에 힘을 실어 말했다. 나는 그것이 L이 구사하는 말법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L은 당황했을 때, 무언가 피하고 싶을 때, 적의를 은근히 드러내고 싶을 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진심을 들키지 않도록, 혹은 들키길 은근히 바라듯 단순한 농담으로 대체했다. L은 과묵한 타입은 아니었다. L은 말장난을 좋아하고 조소하거나 비꼬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L과 함께 있으면 때때로 놀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L은 체구가 작고 선이 부드러워 유순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그의 농담을 경계심 없이 받아들였다. L은 자신의 외양만큼이나 언사가 가벼웠다. 내비게이션 하단의 시계가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L의 눈이 자주 시계 쪽으로 향했다.

 

꼭 그곳에 가야 하는 건 아니야.

L이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늦게 도착하면 근처에서 적당히 먹자.

나는 L을 달래듯 말을 이었다.

아냐, 갈 수 있어.

L이 짐짓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나는 L의 꾹 다문 얇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으악! 갑자기 L이 고함을 질렀다. 나는 순간적으로 L이 장난치는 것으로 생각했다가, 그의 크게 떠진 눈을 보고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새였다. 날개를 활짝 펼친 새가 차 유리로 뛰어들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새의 흰 배가 환하게 드러났다. 새는 차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내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 하강했다가, 다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L은 무척 놀란 듯 손바닥을 쥐었다 펼쳤다. 한숨을 쉬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었던 그는 나보다 몇 배는 더 놀란 눈치였다. 입술을 작게 오물거리다 말았는데, 나는 그가 나와 함께 있지 않았더라면 욕설을 내뱉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나는 욕을 하는 L을 본 적이 없었다. 새는 안개가 흩어지듯 공중에서 사라졌다. L은 목덜미를 쓸어 식은땀을 닦으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나는 L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었다 내렸다.

꼭 그 식당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채식주의자도 아니었고, 나는 장아찌를 좋아하지 않았다. L은 미식에 취미가 없었다. 이미 밤이 깊어, 숲의 정취를 느낄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매 같았어, 그렇지? L이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새는 매만큼 크지는 않았다. 시계가 8시 50분을 가리켰을 때, 차는 김포시로 들어섰다.

 

L은 취직한 후 어느 정도 여윳돈이 생기자, 가장 먼저 차를 샀다. 그는 자신의 나이와 능력보다 크고 비싼 차를 골랐다. 지하철 타는 게 너무 지겨워서. L의 말은 무리해서 큰 차를 산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는 되어 주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크고 좋은 차를 사는 이유와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았다. L은 차를 출퇴근 용도 이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지낼 때, L은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는 기억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퇴근한 L은 거실 한쪽 벽면에 설치한 어항 주변에서 맴돌았다. 어항 위에 설치된 조명의 조도를 맞추고, 이산화탄소의 양을 조절했다. 주말이면, 대청소를 하는 주부처럼 분주해졌다. 물 위에 뜬 죽은 풀들을 걷어내고, 이따금 수초항 전체의 물을 갈거나 새로운 풀을 심었다. 풀들이 웃자라면 어린아이의 귀밑머리를 다듬듯 세심하게 잘라냈다. 물속에서 피는 꽃들을 구해다 심었다. 꽃은 촛불을 닮아 붉고 아름다웠다. 물속에서 썩지도 자라지도 않는 나무 조각과 돌들을 가져왔다. 바람을 만들어, 물결이 일게 하고, 물바람을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푸른 잔디를 닮은 수초를, 해가 뜨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이 만든 풍경이 질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전부 갈아엎었다.

L의 어항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았다. L은 그것을 수초항이라 불렀다. 수초항을 기르는 L과 과장되게 큰 차를 산 그는 서로 다른 사람 같았다. 그즈음 L은 월급쟁이인 자신의 처지를 비꼬는 농담들을 내뱉고 다녔다. 갑이니 을이니, 새경이니 머슴이니 하는 단어들을 유행어인 듯 입에 달고 지냈다. 함께 지내는 동안, 우리는 딱 한 번 교외로 드라이브를 간 적이 있었다.

 

산새에 놀란 L은 예민해져 있었다. 차가 시내로 들어서자, 택시를 잡으려 도로 한가운데까지 나온 사람들이나 신호가 떨어지기 직전 급하게 달려나오는 사람들과 수시로 맞닥뜨려야 했다. L은 그때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짜증을 냈다. 나는 어느새 L의 눈치를 살피는 데 급급해 있었다. 시간은 이미 아홉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길을 돌리자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L은 오락기 앞에 앉은 어린아이처럼, 장애물과 적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빠진 것 같았다. 적들을 부수고 다음 판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세계에, L은 있었다. L은 전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단횡단을 하는 노인을 향해 사납게 경적을 울렸다. 내가 아는 L은 그렇게 선병질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L은 내비게이션의 음성안내가 귀에 거슬렸는지 소리를 낮췄다. 문득, 산새를 마주친 이후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려다 이내 포기했다. 내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김포는 처음이었다. 굳이 그 식당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김포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조악하게 만든 일일드라마 세트장처럼 듬성듬성 박혀 있는 4층짜리 주상복합건물들을 연달아 지났다. 돼지갈비를 파는 식당과 과메기집들이 번갈아 나타났다. 내비게이션이 말하는 예상도착시간은 9시 10분이었다. 식당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무사히 도착해, 밥을 먹고 속을 데우고 싶었다. 그러면 L의 기분도 자연스레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나에게 기금사업회를 소개해 준 것은, 지난해 함께 아르바이트하던 사무실 동료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삼천육백 가지의 경우의 수로 나뉜 올해의 운세에 말을 덧붙이는 일을 했다. 물론 우리는 토정비결이니 사주니 하는 것들에 지식이 없었다. 각각의 운세에는 토정비결을 기반으로 한 정보가 몇 가지 주어졌다. 좋음, 나쁨, 보통, 손재수, 재물운, 결혼운, 파혼운, 이별운, 자식운 같은 것들이었는데, 운세가 극단적일수록 말 만들기가 편했다. 배우자와의 이별, 자식의 죽음 같은 경우가 그러했다. 그 파편적인 단어들을 뼈대로 A4용지 한 장 분량의 살을 입혔다. 각각의 운세풀이는 반복되거나 겹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언어는 은유적이고 모호할수록, 어떤 사실은 과장되거나 축소될수록 좋다는 점에서, 그 작업은 문학적이라 할 만했다. 가장 까다로운 경우는 운세가 그저 그런 경우였다. 특별한 일이 생길 가능성도, 횡재수나 새로운 인연이 나타날 가능성도 없는 삶, 새로운 일을 찾아도 성과를 내기 어려운 해, 지난해와 별다를 것 없이 시시한 한 해가 될 사람들의 운세였다. 나는 아마도 그것이 나의 운세일 것이라 짐작했다. 우리는 다섯 평의 작은 방에서 매일 주어진 20개 남짓의 작업 분량을 채우고 퇴근했다. A4용지 20장 분량을 매일 소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와 손목에 무리가 왔다. 사무실에는 창문이 없어, 늘 공기가 탁했다. 컴퓨터의 열기가 고스란히 몸으로 흡수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L의 표정을 떠올렸다.

 

봄 대지에서 새싹이 돋듯, 따듯한 흙 위를 걷듯, 오래된 나무에서 꽃이 피듯, 한 쌍의 청둥오리가 물 위를 유영하듯, 분에 넘치도록 크고 아름다운 칼을 가진 듯, 아침의 부드러운 햇빛이 쏟아지듯.

 

나는 무책임하게 많은 말들을 생산했다. 함께 일하던 그는 3개월을 채운 후 그만두었다. 3개월을 채우지 못하면 마지막 달의 월급은 50%밖에 가져가지 못했다. 너는 너무 둔해. 그는 일을 그만두며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삼천육백 개의 자명한 낱말로 이루어진 운세가 모호하고 통속적인 은유와 과장으로 완성되어 가는 순간을 지켰다. 그가 일을 그만두었으므로, 작업은 석 달가량 더 걸렸다. 그는 아르바이트 동료에서 회사 선배가 되었다.

 

시내를 지나자 금세 비닐하우스와 논밭이 나타났다. 논두렁 뒤로 보이는 유명브랜드의 고층아파트 단지가 구름 위에 뜬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폭우에 쓸려 내려간 논을 따라 샛길로 들어섰다. 그곳에 숲이 있었다.

무른 흙 때문에 헛바퀴가 돌았다. 가로등이 없어 헤드라이트에 온전히 의지했다. 온 숲에 불을 가진 이가 우리뿐인 듯, 날벌레들이 달라붙었다. 달은 어디 있을까. 나는 그제야 비가 완전히 그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는 산새가 차창으로 날아들었을 때도 이미 그쳤을 것이었다. 불현듯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키가 작은 나뭇가지들이 차창에 제 볼을 문질렀다. 자갈들이 툭툭 튀어 올라 차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길이 무척 좁았다. L의 목덜미가 땀으로 흥건했다. 이 근처인데. L은 내비게이션의 음성안내처럼 그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내비게이션이 방향을 재탐색하기 시작했다. 차가 후진해 길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L은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너는 하고 싶은 일 없어?

언젠가, 퇴근한 L이 나에게 물었다.

아직은.

나는 거실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새로 산 브래지어 안쪽의 라벨을 쪽가위로 잘라내며 대답했다.

나는 네가 뭔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왜?

왜라니, 당연하잖아.

L은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잔뜩 보풀이 일어난 L의 쥐색 양말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 그만 돌아갈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 왔는걸. 이 근방인데. 여기 화면 봐. 이제 눈으로도 간판을 찾을 수 있는 거리야. L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꺾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어둠뿐이었다. 날벌레의 꽁무니에서 새어나올 법한 크기의 불빛조차 없었다. 방향을 잃은 차는 한동안 계속 후진하다, 간신히 방향을 틀었다. 바퀴에 깔린 마른 나뭇가지가 비명을 질렀다. L은 같은 자리를 두어 번 더 돈 후에야 내비게이션의 동선을 정확히 따랐다. 붉은 점이 목적지에 점차 가까워졌다. 여기다! L의 목소리가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내리자. 나는 L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차창 밖을 두리번거렸다. 야시장이었다. 열대야를 피해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닭꼬치나 떡볶이, 얼음 위에 편으로 썬 멜론을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했다. 붉은 대야에 담긴 산낙지들이 있었다. 우리는 야시장 바로 옆 도로를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허공에 장식용 꼬마전구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별인 듯, 별이 아닌 듯 점멸했다. 어린 연인들과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 근처 공장 직원들이 무리지어 다녔다. 몇몇은 길거리에서 나누어준 홍보용 플라스틱 부채로 쉴 새 없이 부채질했다. 차 안은 에어컨 때문에 한기가 서릴 정도였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야시장 너머로 관람차가 보였다. 관람차는 주변의 어떤 건물들보다도 컸다. 붉고 푸른 천막 위로 껑충하게 솟아오른 관람차는 구부정하게 선 초식공룡 같았다.

 

L이 관람차 너머의 어둠을 가리켰다.

보여? 저기 선착장이다.

나는 L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둠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런가?

나는 말끝을 흐렸다. L은 다시 한 번 채근했다.

진짜 안 내릴 거야? 네가 바다 보고 싶다고 했잖아.

사람이 너무 많아. 너무 더울 것 같아. 저길 걸어갈 자신이 없어.

입에선 부정적인 의미의 문장만 튀어나왔다. 나는 L과 소란하고 빛나는 길을 함께 걷고 싶지 않았다.

 

L은 야시장 골목 끝에 차를 세웠다. 가볍게 달려 나가는 뒷모습이 고등학생 시절 보아 왔던 모습과 똑같았다. L은 얇게 썰어 회오리 모양으로 튀긴 감자 꼬치를 사서 돌아왔다. 감자 꼬치는 지나치게 짜서 먹을 수 없었다. L은 입에 감자를 과장되게 쑤셔 넣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입가에 소금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감자 꼬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공터였다. 철근 몇 개와 폐타이어가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다. 공터 안쪽의 컨테이너는 기자재를 보관할 용도로 지어진 것 같았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공터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빛의 경계 너머로, 바닥에 깔린 모래자갈과 그 틈을 비집고 웃자란 들풀과 들꽃이 어스레하게 드러났다. 내비게이션의 현재 위치는 정확히 내가 적어 온 주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놀이공원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 갓길에 차를 댔다. 문을 열자, 습기가 훅 끼쳐 왔다. 삽시간에 목덜미가 끈적거렸다. 물 위를 걷는 듯, 혹은 구름 위를 걷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습기가 내 몸을 살짝 들어 올려 앞으로 밀거나 뒤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갓길을 따라, 안전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안전망 너머는 바다였다. 안전망에 바싹 달라붙은 L이 손짓했다. 이리 와. 나는 옆으로 다가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바다라기보단,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다의 바닥이었다.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일정한 간격의 물결무늬를 가진 바다의 내장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는 속이 메스꺼워 뒷걸음질쳤다. L이 손을 들어 어둠 저편을 가리켰다. 저쪽이 바다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밤눈이 밝았다. 기다려 봐. L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대쪽을 비추던 등대 불빛이 우리를 지나쳐 갔다. 그제야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빛에 바스러지는 물결이 보였다.

 

나는 돌아가자고 말했다. L은 끝까지 식당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L은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나는 내비게이션의 하단을 가리켜 보였다. 9시 50분이었다. 시간이 맞기는 하는 건지. L은 내비게이션의 성능을 비아냥거리면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시시하다. 나는 시시하다고 소리 내어 말했다. 누가, 무엇이 시시한지는 말을 내뱉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침묵한 채, 헤드라이트가 만들어내는 환한 빛을 바라보았다.

 

마을문고 관리자 중에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벽지의 노인들이거나 주부들이었다. 손 글씨로 쓴 엽서와 함께 사진을 몇 장 동봉했다. 사진은 배포된 책 상자, 몇몇이 상자를 열고 책을 꺼내는 모습, 책장에 꽂힌 모습, 소박한 도서관의 외관 같은 것들이 찍혀 있었다. 엽서에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사진은 빛으로 가득 차, 폭발할 것만 같았다. 돌담의 모난 부분마다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아스팔트와 돌담 사이의 좁은 공간을 비집고 진달래가 꽃대를 들이밀었다. 노인들의 얼굴에는 기름이 돌았다. 광대가 반짝거렸다. 내가 한동안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 선배가 어깨 너머에서 속삭였다. 그래도 이 일은 보람이 있지? 나는 그 말의 맥을 되짚느라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선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는, 당연한 질문이라는 태도 같았다.

이 일은, 이 일도, 이 일이야말로. 나는 그 문맥에 숨겨진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운세 입력 아르바이트를 끝으로 L의 집을 나왔다. L에 의해 떠밀리듯 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다. L은 나에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고,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었다. L의 말은 옳았다.

 

공터를 빠져나온 차는 다시 시내로 진입했다. L은 24시간 부대찌개집 앞에 주차했다. 그는 나의 의중을 묻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다. 나는 L을 따라 차 문을 열었다. 습기와 열기가 몸을 툭, 쳤다. 이마 위로 차가운 물이 떨어졌다. 비였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초항은 이를테면, 부피를 가진 풍경화와 같았다. 캔버스에 색을 채우듯, L은 가로와 세로, 높이가 30센티미터인 유리 큐브에 구색을 갖추었다. 비료가 섞인 흙을 깔고, 모심기 하듯 수초를 심었다. 은모래로 색을 입혔다. 수초는 잔디를 닮은 것, 물냉이를 닮은 것, 꽃대를 세우는 것 등 제각기 모양이 달랐다. 수초는 서서히 세를 넓혀 나갈 것이었다. 언젠가 보았던, 혹은 보고자 원하는 숲의 정경을 큐브 안에 재현했다. 울창한 밀림을, 바람이 이는 푸른 언덕을, 일본식 정원을, 은사가 반짝이는 바위섬을, 기암절벽을 만들었다. 자라난 수초들이 물속에서 광합성을 할 때면, 잎에 맺힌 공기 방울들이 일제히 수면으로 솟아올라 갔다. 그것은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풍경을 물 안에 가두는 것으로, 세계가 물에 잠길지도 모른다는 유서 깊은 두려움을 실현했다. L은 여러 조건을 변화시키며 풍경을 만들고, 제어했다. 수초항에서만큼은, 그는 조물주와 다름없었다.

나는 L의 집을 떠나기 직전, 그 수초항 곁에 있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푸르고 붉은 풀들을, 물보라가 일지 않는 만들어진 물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돌아가자고 말했다. L은 내 말을 무시한 채, 휴게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좀 쉬었다가 가자. 휴게소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주변의 모든 조명들이 꺼져 있었다. 커피 자판기 불빛만 희미하게 빛났다. 빗줄기는 차를 부술 듯 내리꽂고 있었다. 귀가 아팠다. L은 차종이 같은 두 대의 차가 나란히 주차된 주차장 안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차장에는 그 승용차 두 대와 우리가 전부였다. 차는 선팅이 되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비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L은 반대쪽에 차를 대고 시동을 껐다. 뭐하는 차들일까, 이 시간에. L의 목소리는 조금 과장된 것 같았다. 그는 이내 자정이 지난 휴게소 주차장에 주차된 채, 미동도 없는 두 대의 차량에 대한 가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L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웠다. 내가 시시하다고 말한 것에 내내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혹은 기분이 상한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일부러 유쾌한 척 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일부러 유쾌한 척 구는 것을 눈치 채 주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건 L의 궁금증은 불필요하고 유치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호기심에 맞장구쳐 주지 않았다. 커피 마실래? 나는 차창을 향해 있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L의 뒤통수가 앞뒤로 움직였다. 발치에 구겨져 있던 우산을 집어 들었을 때, 그가 작게 말했다. 잠깐. 나는 L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통수 너머로 차창이 보였다. 차창 너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두 대의 승용차 중 바깥쪽 차 문이 열리더니 사람 하나가 내렸다. 어두워 인상착의가 잘 구별되지 않았다. 형체는 어둠 속에서 휘적휘적 움직이며, 우리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남자였다. 검은 우비를 입고 있었다. L이 갑자기 손을 더듬어 시동을 걸었다. 남자 손에 뭐가 있는 것 같아. L이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말린 신문 같기도 했고, 가늘고 긴 파이프처럼 보이기도 했다. L은 헤드라이트와 안개등을 동시에 켜더니 빠르게 주차장을 벗어났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휴게소를 빠져나가는 차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어제가 떠올랐다. 어제, 광화문 한복판에서 선배와 우연히 마주쳤다. 동대문에서 커튼을 주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을 옮긴 이후, 월급을 받을 때까지 내내 벼르던 일이었다. 지나는 길에는 과일가게에 들렀다. 붉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무화과를 보았다. 바구니에 매직으로 만원이라고 휘갈겨 있었다. 올해 처음 보는 무화과였다. 비 때문에 더디 자란 듯 색이 옅었으나, 배꼽이 슬쩍 열려 있어 이미 익은 것 같았다. 입안에 침이 돌았다. 나는 주저 없이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선배와 나는 멋쩍게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하고 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손에 든 비닐봉지에서 무화과 한 개를 꺼내 선배에게 주었다. 비닐봉지가 비에 젖어 바스락거렸다. 선배는 과일을 받아 들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는 무화과를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비닐봉지에서 무화과 한 개를 더 꺼냈다. 어깨를 귀에 붙여 우산을 목 근처에 고정했다. 무른 과일을 양 손가락 끝으로 집고 조심히 반으로 갈라, 껍질째 입에 넣었다. 선배는 무화과 먹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내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선배의 손에 들린 무화과 위로 빗물이 조금씩 들쳤다. 선배의 눈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헛자란 과일은 전혀 달지 않았다. 나는 곧 선배에게 무화과를 준 것을 후회했다.

 

차 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차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으므로, 거침없이 달렸다. 금세 익숙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오랜 관광을 마치고 귀환하는 여행객들처럼 피로해져 있었다. 그것은 L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목덜미가 축축했다. 붉어진 얼굴이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이윽고 차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양쪽으로 크기와 모양이 비슷한 다세대주택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 한동안 집을 구별하지 못해 애를 먹었던 일이 떠올랐다. L은 자주 헛기침을 했다. 마른침을 삼켰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L은 물었다. 취직하니까 어때?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상냥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발끝을 이용해 바닥에 널브러진 우산대를 들어 올린 후 손으로 집었다. 차 안에서 내내 짓밟힌 우산은 축축하고 더러웠다. 응, 점점 인간이 되어 가는 것 같아.

나는 우산을 손에 든 채로 빠르게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에 도착하는 동안 머리카락과 어깨가 조금 젖었으나, 상관없었다. 가능한 한 빨리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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