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을 먹다

 

붉은색을 먹다

 

김희진

 

 



 

   

 

여자는 오늘도 붉은색을 먹었다. 여자가 붉은색을 먹기 시작한 건, 몇 주 전 일요일 아침부터였다. 그날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무더웠고, 결코 특별한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아니, 그렇고 그런 일상의 연속이었고, 토요일 밤에 이어 으레 찾아오는 일요일 아침일 뿐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양미간을 찡그린 채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이 덜 깬 눈으로 창 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때 여자의 눈으로 들어온 건 양쪽으로 묶여 있던 붉은색 꽃무늬 커튼이었다. 여자는 매일같이 봐오던 커튼 색깔이 그날따라 이상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대상이 한순간 기묘하게 보일 때가 있듯이, 여자에겐 그때 그 순간이 그랬다. 뒤이어 여자의 입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건 난데없이 튀어나온 말만큼이나 난데없는 궁금증이었다.

“근데 저 커튼은 왜 붉은색이지? 붉은색은 왜 붉은색인 걸까? 할 수만 있다면 저 붉은색을 몽땅 먹어버리고 싶어. 붉은색에서는 무슨 맛이 날까?”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말에, 여자는 붉은색을 먹는다고? 라고 자신에게 반문했다. 여자는 실실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어이없는 표정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참 나,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지금은 꿈속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호기심이 발동한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 가까이 다가갔다. 스스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여기면서도 여자는 왠지 그래 보고 싶었다. 여자는 눈을 감은 다음 혀를 내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래야 한다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했다. 그리고 폐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고 난 여자가 눈을 떴을 때, 여자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엄마야! 이게 뭐야! 진짜로 사라져 버렸어! 붉은색이 진짜로 몽땅 사라져 버렸다고!”

놀란 나머지 여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커튼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거울 앞으로 달려간 여자는 입을 크게 벌려 입안을 들여다봤다. 목구멍과 목젖에는 커튼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붉은색이 선명히 보였다.

“뭐, 뭐야! 저, 정말로 내가 붉은색을 먹은 거야?”

여자는 고개를 틀어 탈색된 꽃무늬 커튼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여자는 붉은색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루아침에 알게 된 것이었다. 억겁이 흐르는 동안 누구도 몰랐던, 그래서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었던 사실을 여자는 찰나적 운명적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은 평범한 일요일 아침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혼이라도 빠져나간 사람처럼 여자가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진짜로 이루어지다니……. 이건 분명 꿈일 거야, 꿈.”

여자는 눈을 비비고 다시 커튼을 쳐다봤다. 그러나 붉은색은 분명 사라지고 없었다.

붉은색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여자는 세상에 불가해한 일은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단지 시도나 도전이 없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46억 년이란 지구의 역사에 비해 인류의 진보가 더딘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색이 바랜 커튼을 쳐다보며 말했다.

“도대체 세상엔 얼마나 많은 비밀이 감춰져 있는 걸까?”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을 만든 건 먼지나 가스 따위가 아니라 의문과 비밀덩어리인지도 모른다고.

 

여자가 본격적으로 붉은색을 먹어 보기로 한 건 단순히 붉은색 인간이 되고 싶다는 열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처음엔 그랬다. 처음엔 그저 아메리카 인디언보다 더 붉은 인간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장난처럼 그랬다. 하지만 붉은색을 먹으면 먹을수록 붉은색 인간에 대한 열망보다는 특별한 인간에 대한 열망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인간이 되기 위해 붉은색을 택한 셈이었다.

“특별한 사건이나 현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특별한 인간이라니……. 정말 멋진걸.”

어느새 붉은색은 평범하기 그지없던 여자를 흥분시키고 뒤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색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실로 엄청난 사건임에도, 붉은색을 먹는 방법은 의외로 쉽고 간단했다. 일단 먹고 싶은 붉은색부터 택해야 했다. 같은 붉은색이라고 해서 맛과 향이 모두 같은 건 아니었다. 심지어 혀에서 느껴지는 감촉마저도 붉은색의 출처에 따라 다 달랐다. 가령 때밀이 타월에 있는 붉은색이 거칠고 쌉싸름한 맛이라면, 크레파스에 있는 붉은색은 좀 더 부드러우면서 시큼한 맛이 났다. 대체로 붉은색의 맛은 그 물질을 이루는 원료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붉은색을 먹기 전에 대충 맛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운동화에 있는 붉은색 나이키 로고는 왠지 질기고 구릴 것 같아.”

여자는 그런 식으로 맛을 상상했다. 상상 속의 맛은 실제의 맛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한때 여자는 점점 탁월해지는 붉은색 맛에 대한 감각으로 편식에 빠져들기도 했다.

먹고 싶은 붉은색을 택하고 나면 붉은색이 들어간 대상물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먹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와 함께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야만 붉은색이 완전히 몸 속으로 빨려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를 한데 모은 상태에서 숨을 완전히 뱉어낸 후, 마지막으로 혀를 내밀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기만 하면 붉은색 먹기는 끝이 난다. 물론 입과 혀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붉은색을 먹을 수는 있었다. 콧구멍을 이용하는 방법이 그것이었는데, 하지만 콧구멍만 통하는 경우엔 배전의 힘이 필요했다. 게다가 두통을 일으킬 수도 있어 그 방법은 여러 모로 고통스러웠다.

아무튼 그렇게 몸 속으로 붉은색이 들어오고 나면 대상물에 있던 붉은색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 붉은색이 있었던 자리는 탈색된 것처럼 하얗게 바래버리는 것이었다. 대신 붉은색이 사라진 만큼 여자의 몸엔 붉은색이 축적돼 갔다. 제로섬게임처럼 여자의 몸이 붉게 물들어 가는 동안 세상의 붉은색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여자가 커튼 다음으로 먹은 붉은색은 고무장갑에 있는 것이었다. 색은 젤리처럼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고무 냄새가 조금 나긴 했지만 쫄깃쫄깃한 맛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물론 붉은색을 빨아들이는 순간 고무장갑은 아이보리빛으로 변해버렸다. 색이 바랜 고무장갑은 여자의 눈에 기절해 쓰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여자는 두 번째로 붉은색을 먹던 날 배꼽을 움켜잡고 웃고 또 웃었다. 그날 밤 저녁식사를 끝낸 여자의 엄마가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었다. 여자의 엄마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분명 빨간색이었는데……?”

여자의 엄마는 고무장갑을 뒤집어 보며 여자에게 물었다.

“혹시 니가 고무장갑 새로 사다 놨니?”

여자가 고개를 가로젓자 여자의 엄마는 자신의 건망증을 탓하며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혼잣말을 했다.

“고무장갑도 락스물에 탈색이 되나?”

문득 여자의 엄마는 여자에게, 네 방에 걸린 커튼 색깔이 왜 그러냐고 물었을 때 여자가 한 대답이 생각났다. 여자는 커튼에 있는 붉은색을 먹던 날, 커튼을 락스물에 담갔더니 탈색이 돼버렸다며, 여자의 엄마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여자가 세 번째로 먹은 색은 딸기에 있는 붉은색이었다. 딸기향과 함께 입으로 들어온 붉은색은 아주 달고 맛있었다. 색을 다 먹고 나자 딸기 또한 고무장갑처럼 몸 색깔을 바꾸었다. 딸기는 마치 익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나 창백해진 딸기의 맛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붉은색만 사라졌을 뿐 딸기 속 고유의 맛까지 붉은색에 완전히 따라나오는 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창백해진 냉장고 속 딸기를 발견한 여자의 엄마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기겁을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라니? 딸기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을 리는 없을 테고.”

“그, 그러게.”

“이것들이 날 속인 거야!”

급기야 여자의 엄마가 창백해진 딸기를 들고 과일가게로 쳐들어가려고 하자, 여자가 엄마에게 딸기를 들이밀며 말했다.

“보기엔 안 익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한번 먹어 보라니까.”

그러나 여자의 엄마는 딸기를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못 가게 말려 보았지만 알뜰한 여자의 엄마를 당해낼 순 없었다. 과일가게에 들어선 여자의 엄마는 팔을 걷어붙이며 소리쳤다.

“어떻게 익지도 않은 딸기를 섞어 팔 수 있어요!”

과일가게 아주머니는 그럴 리 없다며 의아해했다. 긴 분쟁을 지켜본 여자는 일단 집에 있는 붉은색은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붉은색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포만감을 주지 않았다. 세상엔 저렇게 많은 붉은색이 있는데 저걸 언제 다 먹지? 라는 걱정 따윈 필요 없었다. 배가 부르지 않으니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양이 제한된 것도 아니었다. 여자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붉은색이란 붉은색은 다 먹어치울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게 되자, 여자는 붉은색이 사라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몽땅 붉은색을 먹어치워 보겠다는 얄팍한 생각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여자는 일요일 하루 종일 바깥을 쏘다니며 붉은색 먹기를 강행했다. 신호등, 간판 글자, 행인들의 옷, 지나가는 소방차까지, 여자는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뒤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신호등이 고장났나 봐요.”

“어머, 내 옷이 왜 이래?”

특히 소방차가 하얗게 변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두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은 소방차와 앰뷸런스가 결합된 신종 차인 모양이라고 생각해버렸다.

이런저런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는 열심히 붉은색을 먹었다. 하지만 단시간에 모든 붉은색을 먹어치우기에는 역시 무리가 따랐다. 그날 여자에게 남은 건 과도하고 잦은 흡입으로 인한 두통과 현기증뿐이었다. 아무리 포만감을 주지 않는다 해도 과식은 금물이었다. 여자는 그 다음부터 과식은 물론 편식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여자의 몸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건 며칠 전 아침부터였다. 잠에서 깬 여자는 손가락과 발가락 끝이 붉게 물든 사실을 확인하고는 침대 위를 방방 뛰어다녔다. 여자는 조만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스물여덟 해를 살아온 동안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아온 여자가 말이다. 여자는 아메리카 인디언보다 더 완벽한 홍색 인종이 돼 가는 자신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다.

“뭐라 이름 붙이면 좋을까?”

여자는 자신의 몸에 어울릴 만한 이름을 궁리해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여자의 입에서 몇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빨간종? 그래 빨간종이야!”

여자는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몸을 최초로 명명했다. 당연하게도 아침 식탁에 모인 식구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여자의 열 손가락에 머물렀다. 가장 먼저 여자의 언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웬일이야? 너 봉숭아물 들였니?”

어릴 때도 봉숭아물 한 번 들인 적 없는 여자였기에 언니의 반응은 의아함 그 자체였다. 여자의 남동생이 식탁 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되게 빨갛다. 근데 누나, 발가락에도 들였어?”

아버지를 비롯해 식탁에 모인 식구들의 눈이 일제히 식탁 아래로 향했다. 여자의 엄마가 여자를 쏘아보며 물었다.

“쟤가 미쳤나. 너 왜 그러니?”

“내가 뭘?”

“어릴 때도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니까 이상하잖아.”

“재밌잖아.”

한편 여자의 언니는 뭘 넣어서 그렇게 새빨갛게 들여진 거냐며 궁금해했다.

“백반이라도 넣었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빨갛게 들여지긴 힘든데. 솜씨 좋다?”

여자의 언니가 시종일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는 식구들의 물음을 외면한 채 수저를 들고 조용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렸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여자는 붉은색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특별한 인간은 될 수 없었다. 특별하다는 건 소수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세상에 혼자만 간직할 수 있는 비밀이 있다는 건 정말 재밌고 스릴 넘치는 일이었다.

 

가을이 찾아왔다.

어느새 붉은색은 여자의 손목과 발목까지 올라왔다. 구청 직원들은 촌스럽게 빨간 장갑에 빨간 양말이 뭐냐며, 지나가는 말로 말했다. 여자는 그럴 때마다 가볍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러나 직장 내에서는 여자가 빨간색 장갑을 낀 게 아니라는 사실이 금세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빨간색 장갑을 낀 게 아니더라고요.”

“그럼 뭐예요?”

“모르겠어요. 혹시 손발에 붉은색 문신을 새긴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했을까요?”

“그야 저도 모르죠.”

이상한 눈초리였지만 여자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이 싫지만은 않았다. 식구들의 반응도 예외는 아니었다.

“봉숭아물이 아니었어!”

놀란 여자의 엄마는 당장 피부과에 여자를 데리고 갔다. 원인불명이라는 진단에 여자의 엄마는 의사 자격 운운하며 격분을 감추지 못했다. 의사가 내린 처방은 추이를 계속 지켜보자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여자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여자는, 의사가 엄마에 의해 돌팔이 취급받는 게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붉은색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순 없었다. 의사인 당신도 당장 붉은색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까지 자신의 변화를 이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붉은색이 손목과 발목까지 차오르는 동안 여자는 예전보다 더 능숙한 솜씨로 붉은색을 먹게 되었다. 뭐든 시간이 지나면 요령을 터득하게 되고 숙련된 기술과 방법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제 여자는 예전처럼 숨을 깊이 들이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애써 기를 모을 필요도 없이 그냥 생각만으로도 붉은색 먹기는 가능해졌다. 붉은색을 먹기 위해 밖을 쏘다니지 않아도 되는 건 물론이었다. 여자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옆집에 있는 빨간 슬리퍼나 도로를 질주하는 빨간 스포츠카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능력으로 여자는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우리나라에 있는 빨간색 신호등을 집중적으로 먹어치웠다. 여자의 손목과 발목까지 차오른 붉은색은 바로 신호등에서 빠져나온 색들이었다. 빨간색 신호등이 사라지자 한때 교통체계는 혼선을 빚었다. 빨간색 대신 하얀색 불이 켜지는 바람에 사람과 차들은 멈추는 법을 잊어버렸고, 교차로에선 사고가 잇따라 일어났다. 빨간색이 정지 신호라는, 사람들 머릿속에 고착화된 교통법규 때문이었다. 정부와 관계부처는 신호등 색깔 변화에 대한 원인규명에 나섰고, 빠른 시일 내에 신호등이 정상화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수많은 신호등 색깔을 다시 빨간색으로 교체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하는 수 없이 정부는 하얀색을 정지 신호로 쓰겠다는,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관련부처 장관은 교사와 학부모에게 신호등 재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거듭 당부했다. 물론 정부와 부처는 신호등 색깔 변화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데 대한 질책을 피해 가진 못했다.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일 아니었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장관은, 세상에 누가 신호등 색깔이 바뀌리라고 예상했겠습니까, 라고 응수했다. 여자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장관의 당혹스런 말과 표정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러고는 폭로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원인은 나야, 나! 이 바보들아.”

그렇게 말하고 나자 여자는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여자에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칠 수 있는 대나무 숲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했다.

내일 여자는 구청 직원들과 단풍구경을 가기로 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단풍을 먹고 나면 붉은색은 팔꿈치와 무릎까지 올라올 것이다. 물론 여자는 직원들과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단풍객들을 실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붉은색 단풍 먹기는 단풍객들이 다 빠져나가고 없는 밤에 하기로 했다. 밤에 다 먹지 못한 단풍은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서 해치울 생각이었다. 모레쯤이면 각종 언론매체는 신호등에 이어 단풍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떠들어댈지도 모른다. 종말론자들은 종말의 징후임에 틀림없다며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려 할 것이고, 식물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 또한 ‘무능과 무지’라는 수렁에 빠져들 것이다. 여자는 자기 자신에 의해 모든 것이 바뀌고 뒤틀려 가는 게 마냥 신나고 즐거웠다. 여자는 분명 특별한 환경과 상황을 조성해 가는 특별한 인간이, 전지전능한 인간이 돼 가고 있었다. 붉은색은 여자만을 위한 색이 돼 가고 있었다.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던 사진 속 남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남자를 만나기로 한 약속은 붉은색을 먹기 전부터 여자에게 잡혀 있던 것이었다. 남자는 오래 전부터 여자의 직장동료에게 여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그들에게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약속을 깬 쪽은 언제나 여자였다. 붉은색을 먹느라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엄마는 소개팅을 나가는 여자에게 스카프로 목을 단단히 동여매고 나갈 것을 당부했다. 그것도 모자라 옛날에 자신이 쓰던 붉은색 망사 장갑을 여자에게 내밀며 힘주어 말했다. 아주 촘촘한 망사 장갑이었다.

“식사 중에도 절대 벗어서는 안 돼!”

여자의 엄마는, 오늘 한 번 만나고 말 사람이라도 몸이 붉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붉은색은 여자의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목까지 차오른 붉은색은 아주 다양한 곳에서 빠져나온 색이었다. 축구장에 모인 붉은 악마, 각종 과일과 야채, 세계의 국기와 꽃 등, 수없이 많았다. 생각만으로 붉은색을 먹을 수 있게 되다 보니 몸에 축적돼 가는 붉은색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이제 가족들은 여자의 몸을 온도계 수은주 바라보듯 무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언니와 남동생은 빨리 여자의 얼굴이 빨개지기를 기대하는 눈치였고, 그에 반해 여자의 엄마는 얼굴까지 빨개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눈치였다. 여자는 물론 전자에 속했다.

붉은색이 여자 몸으로 들어와 사라지게 되면서 세상은 점점 부도덕해져 갔다. 대표적으로 과일이나 야채를 파는 장사치들이 그랬다. 익은 과일과 익지 않은 과일의 구별이 모호해지자 장사치들은 익은 과일과 익지 않은 과일을 섞어 팔아 폭리를 취했다. 사과, 수박, 딸기, 토마토 등이 그러한 과일과 야채에 속했다. 이런 파렴치한 상행위는 리어카나 트럭을 모는 장사치들에게 흔히 나타났다. 단풍을 구경하던 단풍객들도 괜한 히스테리를 부렸다.

“울긋불긋한 멋이 없잖아요. 갈색 단풍도 별로 아름답지가 않아요.”

“저 어중간함은 뭐야? 다시 여름이 되려는 것도 아닐 텐데. 말세야 말세.”

이파리 색깔이 푸른빛으로 역행해 가는 원인을 묻는 전화가 학계에 빗발쳤지만 명쾌한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고작 해야 오존층 파괴와 기후변화 어쩌고 하는 것일 뿐, 학자들도 파괴돼 가는 자연의 질서를 손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수한 디자이너들은 붉은색 옷감을 구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고, 화장품 업계 또한 빨간색 립스틱 수급에 차질을 빚었다. 축구장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던 붉은 악마들은 하얗게 탈색된 서로의 옷을 쳐다보며 공포에 떨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 어느 누구도 세상에 사라져 가는 붉은색과 여자 몸에 축적돼 가는 붉은색과의 상관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다. 붉은색 관련 기사를 접한 여자의 엄마조차도 그때 고무장갑하고 딸기가 그래서 그랬던 거야, 라고 싱겁게 말할 뿐 여자와 연관 짓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우주의 정체 모를 거대한 물질이 블랙홀처럼 붉은색만 빨아들이고 있다는, 언론과 학자들의 그럴듯한 가설만 믿는 듯했다. 그래도 분명한 건 붉은색 하나가 세상을 우습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여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오히려 약속을 몇 차례 미뤄 온 자신이 더 미안하다고 했다.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이 갖다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남자가 긴장을 풀기 위해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여자가 불편하면 넥타이를 풀어도 괜찮다고 하자, 남자는 그래도 되겠느냐며 조심스레 넥타이를 풀었다.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물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들었어요.”

남자가 수줍게 웃으며 네, 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찍어대고 있었다. 여자는, 땀이 많은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남자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물었다.

“제가 이틀에 한 번 꼴로 구청에 간 거 모르시죠? 쓸데없는 민원서류 떼느라 돈 깨나 들었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직장동료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인감증명 떼느라 수업에 늦어 교장실에 불려간 적도 있었는걸요.”

“세상에나. 근데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당연하죠. 매번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갔으니까요.”

“아, 모자였군요. 갈색 야구 모자!”

“네.”

여자는 평소 구청 출입이 잦다 싶었던 모자 쓴 사람을 기억해 냈다. 모자 속 얼굴이 궁금했던 여자는 모자 챙 아래를 보기 위해 일부러 허리를 굽힌 적도 있었다. 여자는 모자 쓴 남자를 보면서, 필시 구청 여직원 중에 저 남자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짐작했다. 분명한 건 그게 여자 자신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었다. 그런데 그게 여자 자신이었던 것이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빨간색 망사 장갑이 참 잘 어울리네요.”

여자는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의 피부색을 떠올렸다. 남자하고 피부색이 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여자는 남자와의 만남이 오늘로 끝일 거라고 단정해 버렸다. 여자는 자신의 신체변화에 대해 남자에게 얘기할 참이었다. 성사되지 못할 관계라면 일찌감치 단념시키는 게 나았다. 여자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푼 다음 손에 낀 빨간 망사 장갑을 벗었다.

“놀라셨죠?”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었는걸요. 주희 씨 몸이 붉어지고 있다는 사실을요.”

남자의 표정은 목소리만큼이나 차분했다. 놀랍게도 남자는,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붉은색 소동이 여자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남자는, 여자의 몸이 붉어지기 시작한 시점과 세상의 붉은색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이 일치한다는 논리를 들어 말했다.

“억측일지 모르지만, 혹시 주희 씨 몸으로 모든 붉은색이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상상했었죠.”

흥분한 여자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여자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말없이 남자를 쳐다봤다. 급기야 남자는 자신도 붉은색 인간이 되고 싶다며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자기만 붉어진다면 여자와의 결혼은 쉽게 성사될 거라고까지 했다. 첫 만남에 남자가 ‘결혼’이라는 말을 꺼내자 여자는 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래도 여자는 방법 같은 건 없다고 잡아뗐다.

“거짓말인 거 알아요. 전 주희 씨 손가락 끝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부터 지켜봐 온 사람이에요.”

여자는 붉은색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왠지 이 남자에게만은 문을 열어 주고 싶었다. 남자의 진심이 여자에게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 만남이었지만 여자도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혼자 가는 외로움을 누군가와 함께 나눈다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배우자라면 더더욱 그럴 것 같았다.

“저도 좀 가르쳐 주세요. 네?”

남자의 끈질긴 요구에 백기를 든 여자는 남자에게 일단 빨간색 망사 장갑을 쳐다보라고 했다. 여자가 숨을 들이마시자 장갑은 순식간에 흰색으로 바뀌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남자는 조금 놀란 듯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붉은색 먹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과 시간이 경과하면 좀 더 쉽게 먹을 수 있게 된다는 점도 일러줬다.

“나중엔 생각만으로도 먹을 수 있게 되죠.”

여자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상 말이에요. 머릿속으로 빨간 스포츠카를 먹는 걸 상상하면 된다는 뜻이에요.”

“정말이요?”

“그렇다니까요.”

남자는 자기도 그게 가능하냐고 의문조로 물었다. 여자는 아마도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저처럼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도 드물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한테나 가능하다는 얘긴가요?”

“네. 다만 다들 몰랐을 뿐인 거죠.”

“근데 왜 하필 붉은색이죠? 다른 색은 먹을 수 없나요?”

“제가 해본 결과 다른 색은 먹을 수 없더라고요.”

“왜죠?”

“글쎄요. 혹시 가장 원초적이면서 화려하고 잔인한 색이기 때문에 없앨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은 건 아닐까요?”

“그건 모순 아닌가요?”

“모순이라면 모순일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신의 영역인지도 모르죠. 그러고 보면 세상엔 인간이 파헤치지 못한 비밀이 아주 많은 것 같아요. 그죠?”

“그렇군요.”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환상적이고 불가사의한 건지도 몰라요.”

여자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남자 앞으로 내밀었다.

“붉은색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이제 당신과 나만의 비밀이에요. 알았죠?”

남자는 아주 진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여자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던 여자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좀 봐요. 무지개가 떴어요. 그것도 쌍무지개예요.”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나는 내가 먹을게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요. 노을하고 맛이 비슷할까요?”

“그럴 것 같은데요.”

여자는 근래에 남자가 먹은 노을 맛이 무척 궁금했다. 남자의 말로는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입안으로 녹아 들어갔다고 했다. 남자가 먼저 빨간색 무지개 띠를 먹자 여자가 입술을 달싹이며 궁금해 물었다.

“어때요? 노을하고 비슷한가요?”

“음, 아주 비슷해요. 차갑고 부드러운 게. 주희 씨도 어서 먹어 봐요.”

남자에 이어 여자가 눈을 감고 무지개 속 붉은색을 빨아들였다. 여자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 기분좋은 맛이네요.”

여자와 남자는 시간 날 때마다 데이트를 즐겼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보통 연인들과 달리 여자와 남자는 붉은색을 먹으러 다녔다. 이제 남자도 여자처럼 쉽게 붉은색을 먹을 수 있게 됐지만, 남자는 데이트를 핑계 삼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붉은색을 먹었다. 특히 남자가 그림을 좋아하는 관계로 그들은 일요일마다 전시회장을 찾았다. 그들의 시선이 머물다 간 세계의 명화들은 더 이상 감명을 주지 못했다. 붉은색이 빠져나간 명화는 더 이상 명화가 아니었다. 초대된 명화들의 색깔 변화에 전시회 주최측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본국에 있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더 안타까운 건 붉은색 물감이 없어 복원작업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그들만의 데이트를 즐기는 동안, 남자의 몸은 현재 목 아래까지 붉어진 상태였고, 여자는 이미 완전한 붉은 인간이 된 상태였다. 붉은색이 남자 목까지 올라오기 시작하자 남자의 부모는 여자와의 결혼을 승낙했다. 처음엔 여자로부터 몹쓸 병을 옮겨와 몸이 붉어진다고 생각한 남자의 부모는 여자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여자를 만나기 전부터 몸의 변화가 있었다는 남자의 거짓말에 부모의 태도는 돌변했다. 상견례 자리에서 남자의 엄마는 여자의 엄마에게 살긋이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아들도 붉어졌지 뭐예요. 아무래도 댁의 따님과는 천생연분인가 봐요.”

이에 질세라 여자의 엄마가 화답했다.

“댁의 아드님을 만나려고 우리 애가 빨개진 모양이에요.”

상견례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고, 결혼 날짜를 잡는 데까지 두 집안의 입이 모아졌다. 결혼 날짜가 잡힌 뒤 남자는 여자와 같아지기 위해 더 열심히 붉은색을 먹었다. 이제 붉은색은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입술은 창백해졌고 얼굴은 생기를 잃었다. 사람들 몸 속을 흐르던 혈액마저도 투명한 액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교통사고나 살인사건 현장은 예전만큼 끔찍하지 않았다. 피가 투명한 액체가 되면서 가장 손해를 본 곳은 생리대 생산업체들이었다. 기존에 생산되던 생리대는 모두 무용지물이 된 데다 새로운 상품 개발과 생산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야 할 판국이기 때문이었다. 어마어마한 적자와 파산이 예고되는 가운데 생리대 생산업체 소속 노동자들은 정부 보조를 외치며 거리 시위에 나섰다. 물론 일부에선 갓난아이 기저귀에 빗대며 기존의 것을 사용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이번엔 여성 단체들이 들고일어났다. 기저귀와 생리대의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며 여성 단체들은 새 제품 개발에 정부가 나서 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비하면 아주 사소해 보이는 불평불만도 터져나왔다. 미식가들의 불만이 그것이었다.

“아무리 맵고 맛있어도 백김치는 식욕을 돋구지 못해!”

미식가들은 붉고 붉은 파김치와 깍두기가 먹고 싶다고 떠들어댔다. 요리연구가나 푸드스타일리스트들의 불만도 미식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화가와 디자이너들도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현상은 붉은색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얼마 전에 남자는 ‘새빨간’이라는 언어와 낱말 속에 있는 붉은색마저 먹어버렸다. 빨간색이 사라져 가니 빨간색이라는 언어와 낱말도 필요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언어 속 붉은색을 먹는 순간 ‘앵두 같은 입술’이나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말도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사전에서도 그러한 낱말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신 ‘시멘트 같은 입술’이라든가 ‘새파란 거짓말’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런 추세라면 붉은색에 대한 존재 자체도 사람들 머릿속에서 빠져나올 터였다. 이러한 사태에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집단은 정치권이었다. ‘빨갱이’라는 말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보수 성향의 의원들은 ‘빨갱이’를 대처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여야 의원들은 이에 대해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한쪽에서는 언어라도 그런 시대적 유물은 사라져야 한다고 성토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이상 필요한 언어라고 못을 박았다. 또 다른 진보정당은 정치적으로 악용돼 온 언어가 사라진 건 시대적 대세라며 흐뭇해했다. 보수 논객들도 하나 둘 뭉쳐 ‘빨갱이’ 사수에 나섰다. 중요하고 만만한 글감이 사라지게 될 위기에 놓였으니 당연했다.

이렇듯 세상은 점점 혼돈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붉은색이 사라진 대신 갈등과 반목과 알력만 생겨난 듯했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붉은색을 다 먹고 나면 마지막으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붉은색을 먹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붉은색은 사람들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색이 되고 말았다. 붉은색은 여자와 남자 몸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두 부부가 거리를 거닐 때면 수많은 시선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사람들은 부부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고, 그 이상한 색을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들과의 신체 접촉을 꺼리는 사람들도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에게 붉은색은 아주 낯설고 기분 나쁜 색이 돼버렸다. 더불어 힘들어진 건 여자의 직장생활이었다. 구청 민원인들은 여자한테서 민원상담 받기를 꺼렸고, 신청한 민원서류도 여자가 건네면 선뜻 받으려 하지 않았다. 구청장 앞으로 걸려 오는 전화에는, 이상한 피부색 가진 여직원 좀 어떻게 할 수 없느냐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얼마 전에 여자는 길 가던 여중생들로부터 ‘사탄’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아야 했다.

남자도 학교생활이 어려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몇몇 학부모들은 남자가 아이들에게 신종 바이러스를 옮길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극성맞은 학부모들 때문에 추측은 삽시간에 기정사실화되어 교육청까지 소문이 들어갔다. 남자는 병원진단 확인 절차를 통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남자는 아이들이, 선생님은 왜 우리하고 피부색이 달라요? 라고 물어 올 때가 가장 당혹스러웠다. 햇볕을 많이 쫴서 그렇단다, 라고 궁색한 변명으로 순간을 모면해 왔지만 남자는 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남자에게 미안한 건 늘 여자였다. 여자는 그때 남자에게 붉은색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과 방법을 가르쳐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미안해요. 당신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어요.”

여자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이건 내가 택한 길이었어요. 수적 우위를 차지할 수 없다면 이건 당연한 결과예요. 예상했던 일인걸요.”

남자는 여자의 배를 어루만지며 다만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기가 문제라고 말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당신들 몸 색깔과 같은 색의 아기가 태어날 거라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에 여자와 남자는 잠시 혼란을 겪었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붉은색 인간을 택했지만 아기는 그렇지 않았다. 다름을 인식할 만한 나이가 됐을 때의 아기를 생각하면 남자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느 날 아이가, 왜 우리 가족만 피부색이 이래? 라고 물어 오면 뭐라 답해 줘야 할지 막막했다. 햇볕을 많이 쫴서, 라는 대답은 아기에게 설득력이 없을 것이었다. 솔직하게 세상의 붉은색을 먹어서 그렇게 됐단다, 라고 말하면 아기는 이해할 수 있을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세상에 붉은색이 존재했을 때나 이해가 가능한 말이었다. 세상엔 붉은색이라는 색깔도 붉은색이라는 말도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 머릿속에도 그 색은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 붉은색이 사라진 대신 세상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아기가 자랄 세상은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남자는 아기를 만나는 일이 점점 두려워졌다.

 

의사 말대로 붉은 아기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붉은 엄마와 붉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정상적인 아기였지만 세상의 반응은 달랐다. 흉흉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사람들은 쉬쉬했다. 아기와 함께 쏟아져 나온 붉은 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수군댔다. 다들 끔찍하다는 반응이었다.

“피부색이 다르니까 피 색깔도 다른가 봐요.”

“그런 색이 몸 속에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요.”

“냄새도 아주 비릿하더래요.”

사람들은 일제히 얼굴을 응그리며, 여자와 남자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한테까지 동정 섞인 눈빛을 보냈다. 그러한 시선이 못마땅했지만 여자와 남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긴 겨울방학이 막 시작된 터라 육아는 일단 남자가 맡기로 했다. 시어머니는 물론 친정엄마마저도 선뜻 손녀를 봐주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구청에서도 내심 그만두길 바라는 눈치예요. 나 때문에 업무에 지장 있다면서요.”

여자는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싶었지만 몇 달간 쉬고 나면 영영 복귀하지 못할 것 같아 관뒀다. 딸을 위해서라도 직장은 그만둘 수 없었다. 그래도 남자가 있어 다행이라고, 여자는 애써 자신의 처지를 위로했다. 여자는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딸 얼굴을 보는 것으로 해소했다. 하지만 딸이 언제까지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지나가는 말로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가 더 크기 전에 섬으로 들어가 사는 건 어때요?”

남자는 신중히 뱉어낸 여자의 말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남자는 딸이 세상과 맞서 싸워 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붉은색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은 좀 곤란했다. 자신의 피부색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딸은 삶을 포기하려 들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그럼 혜린이 몸에 있는 붉은색을 우리가 먹어버리는 건 어때요? 그러면…….”

남자는 아주 단호하게, 안 돼요! 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마저 의문시될 거라고 했다.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다면 그건 혜린이한테 더한 고통이 될 거예요. 그러다 나중에 있지도 않은 진짜 부모를 찾아나서겠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여자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요즘 남자는 몸에서 붉은색을 뱉어내는 방법을 연구 중이었다. 먹을 수 있다면 뱉어낼 수도 있을 거라는 게 남자의 생각이었다. 세상에 결코 붉은색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여자의 확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남자는 여자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우리 혜린이를 위해서예요.”

“그럴 순 없어요. 차라리 붉은색이 없는 세상이 우리 혜린이한테 더 득이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아요.”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색이니 더욱 특별해질 거라고요.”

“그래서 더 불행해질지도 몰라요.”

여자와 남자의 논쟁은 끝날 줄을 몰랐다. 한 발짝 물러난 여자가 남자에게 제안했다.

“그럼 사람들 머릿속에만 붉은색을 심어 놓는 건 어때요?”

붉은색의 질서와 가치를 사람들에게 일깨워 준다면 자신들 피부색의 가치 또한 높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붉은색이 얼마나 아름다운 색이었는지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면…….”

중간에 말을 끊은 여자가 생각에 잠겼다. 남자도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붉은색을 뱉어낼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 머릿속에다만 뱉어내기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끊임없는 연구와 각고의 노력 끝에 여자와 남자는 붉은색을 뱉어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먹을 때보다 더 많은 고통이 뒤따랐지만 붉은색에 관한 한 확실한 권력을 쥐게 된 것이었다. 여자와 남자는 그들이 합의한 대로 사람들 머릿속에만 붉은색을 심어 놓았다. 사람들은 예전에 자신들의 피가 붉은색이었다는 사실과 신호등 정지 신호가 붉은색이었다는 사실 등을 하나씩 알아 가기 시작했다. 붉은색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세상은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

“세상이 다시 시끄러워졌어요.”

“그러게요. 이를 어쩌죠. 다시 붉은색을 먹어버릴까요?”

뱉어내는 능력까지 보유한 여자와 남자는 시끄러운 세상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붉은색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자와 남자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했다. 다른 방법은 저녁식사 도중 여자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우리 혜린이 미래를 위해 세상의 모든 인간을 붉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사람들을요?”

“그래요. 우리가 지금까지 먹어 온 붉은색의 양이 얼마나 막대한지는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남자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이 붉어진다면 딸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었다. 다름이 사라진 세상, 그런 세상이라면 딸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자라 줄 것이었다.

“특별하다는 게 어떤 건지 몸소 체험해 본 우리잖아요. 우리 혜린이한테는 그딴 거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모든 인간이 붉어진다면 우리 혜린이는 눈에 띄지 않게 된다고요.”

남자는 신중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들 머릿속에 오직 인간만 붉다는 사실을 심어 놓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혼란도 조금은 잠잠해질 거라고요. 이건 일석이조라니까요.”

여자의 부연설명에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직 인간만 붉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인간들 머릿속에 심어 놓는 것! 그래, 그거였다. 그에 따른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지만, 딸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들은 식사를 중단한 채 행복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으로 몸을 내민 그들은 동시에 입으로 붉은색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온 세상의 인간들이 붉어질 때까지 그들은 붉은색을 토해내고 또 토해냈다. 여자가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구는 빨간종의 세상이 될 거예요.”

남자가 화답했다.

“그래요.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은 붉어질 거예요.”

이때 지나가는 행인들의 몸이 붉은색으로 돼 가는 게 보였다. 다행히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보여요? 동네 사람들이 빨간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여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그렇네요.”

흡족해진 여자와 남자는 더욱 온 힘을 다해 붉은색을 토해냈다. 그렇게 그들이 토해낸 붉은색에 의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붉어져 가고 있을 즈음, 여자와 남자의 이마 끄트머리에서는 조금씩 살구색이 내비치기 시작했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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