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총

꼬리총

임수현

 
 


1

아들이 늦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덧문을 열고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콧등이 먼저 유리에 닿아 흠, 콧숨이 서렸다. 아버지는 코가 크다.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있었다. 아버지는 시린 코를 떼, 흐릿한 창에 입김을 불고 주먹으로 훔쳤다. 사과처럼 둥글고 반드러워진 유리에 빗발이 뚝뚝 그어졌다. 비는, 삶은 고사리처럼, 가늘고 회갈색이다. 우산을 챙겼나. 아버지는 아침 날씨가 가물가물했다. 비에 낙담한 아들이 책가방을 정수리에 얹고 걸어오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들은 중학생이 됐는데도 책가방이 등허리까지 내려왔다. 아들은 붉은 손으로 개울가의 너테와 나뭇가지에 달린 고드름을 뚝뚝 따 먹었다. 살얼음 낀 진창이 웨이퍼과자처럼 주저앉는 바람에 신코가 젖은 노란 운동화가 깨금발을 뛰었다. 아들은 한겨울에도 찬물을 밝혔다. 하지만 이 비라면 안 먹겠다. 아버지는 싱긋거리며 조리대로 걸어갔다. 큰솥에서 물이 설설 끓었다. 솥뚜껑을 열자 젖고, 따뜻한 김이 얼굴을 껍질처럼 쓸었다. 아버지는 소쿠리에 담아 놓은 고사리를 붓고 굵은소금을 엄지와 검지, 가운뎃손가락으로 쥐어 솔솔 뿌렸다. 얼마나 삶아야 하지? 아버지는 화장실 쪽을 힐끗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무문 너머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버지의 아내인, 어머니는 변비다. 겨울이면 더해, 사나흘에 한 번 겨우 이빨처럼 딱딱한 똥을 뚝뚝 끊어 눴다. 어머니는 두덩이 꿰매진, 선인장처럼 살갗이 가칠하고 몸이 굼떠졌다. 화장실을 오가는 발바닥이 마룻널에 쓸렸다. 고사리는 변비에 좋다. 한 자락 뜯어내 창에 걸어 놓으면 일 년 두고두고 흐뭇할 봄볕에 고사리를 뜯었다. 뒤꼍 비탈에 잇댄 광에는 숲에서 뜯어 삶고 말린 고사리와 쑥, 취와 약초가 한가득했다. 광은 오래된 햇빛처럼 갈근갈근한 먼지와 꾸덕꾸덕하게 마른 그늘의 냄새가 깊다. 봄부터 겨울까지 밥상에는 잎과 줄기, 뿌리와 열매가 숲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은 말린 고사리와 토란줄기, 무청, 버섯을 들기름으로 볶고, 들깨가루를 풀어 나물찜을 끓인다. 사근사근한 식감이 돌게 온상에서 키운 근대와 아욱도 듬성하게 썰어 넣고, 한 시간 남짓 불린 멥쌀을 곱게 갈아 훌훌 풀어 걸쭉하게 끓여낼 참이다. 조선간장 어디다 뒀지?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멎고, 두루마리휴지를 사르르 감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을 건 게 미안해졌다. 큰솥 옆 멸치와 다시마로 맛국물을 우리는 유리냄비가 달그락거렸다. 다시마가 머리카락처럼 부풀면서 달궈진 삼발이에 거품을 떨어뜨려 푸시시, 담금질 소리가 났다. 멸치다시 끓는대. 아버지는 여전히 눈치가 보여 행주를 훔치듯 넌지시 말을 붙여 봤다. 그러고는 가스레인지 불을 가장 낮게 줄이고, 고사리를 건져 체에 담고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솨솨, 아버지는 따가운 물소리에 문득 빗줄기의 굵기가 궁금했다. 창으로 두어 걸음 내디뎠는데 엄지발이 따끔했다. 말린 고사리를 다듬을 때 흩쳤는지 솔가리와 고사리순이 글씨처럼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바늘처럼 마른 잎가지와 벌레처럼 구불구불한 잎줄기를 주워 식탁 위에 펼쳐진 신문지에 담았다. 아버지는 신문지 네 귀퉁이를 그네처럼 들고 발끝으로 미닫이문 문틀을 밀었다. 식물의 찌끼들을 마당에 흩뿌리는데, 신문지 귀퉁이가 빗줄기에 후두두 젖었다. 콧숨과 입김이 연통처럼 고스란하게 차가운 허공을 갈랐다. 맵찬 공기의 칼날처럼, 마당 저쪽 아래채 댓돌 위에 노란 운동화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노란 두 개의 발이 화들짝 반가웠다. 아버지는 당장 아래채로 달려가 무심한 아들을 혼내 주고 싶었다. 아래채는 발이 벗어난 신목처럼 깜깜했다. 아들의 젖은 발가락과 발꿈치가 노랑처럼 시렸지만, 점심께 아궁이를 남겨 놓은 아래채에 개밥을 삶느라 군불을 지폈던 게 떠올랐다. 또 책을 읽다 잠들어 버린 걸까. 비를 맞아 따뜻한 아랫목에 파묻혀 읽는 글씨가 속눈썹처럼 간지러웠을 것이다. 통나무로 새집을 짓고 살림을 죄 안채로 옮겼는데도 아들은 툭하면 아래채에 틀어박혔다. 천장까지 쌓인 책 때문이었다. 아들은 책을 포식하는 탓인지 점점 입이 짧아졌다. 아들이 유달리 꺼리거나 깨작거리는 음식을 보면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젖은 신문지처럼 흐무러진 식물의 줄기를 앞에 두고 게으르게 젓가락질을 하는 아들과 실랑이를 벌일 식탁이 지레 흐뭇했다. 돼지비계나 멸치는 몰라도 나물은 전혀 남기지 않던 아들이 어느 저녁부터 들깨가루를 풀고 새알심을 넣은 고사릿국에서 고사리만 대접에 남겼다. “왜?” 딸이 먼저 아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꼬리 같아.” 아들은 고사리에 묻은 들깨가루를 빨아 삼킨 뒤 반지르르 윤이 나는 고사리줄기를 젓가락으로 심드렁하게 갈랐다. “꼬리?” “. 쥐꼬리.” “너 쥐 보는 거 좋아하잖아.” “꼬리라니까. ……그냥 다 꼬리 같아. 내 얼굴도. 손가락도. 창도. 문도. 길도. 나무도. . 눈꼬리. 입꼬리. 코꼬리. 귀꼬리. 목꼬리. 등꼬리. 손꼬리. 발꼬리. 배꼬리. 문꼬리. 돌꼬리. 잎꼬리. 혀꼬리.” “네가 콩꼬리만 하니까 그러는 거지.” 딸은 혀를 날름거리고는 고사리줄기를 호르르 삼켰다. 아들은 얼굴이 시뻘게져 식식거렸다. “…… …… 곰꼬리처럼 뚱뚱해.” 딸은 숟가락을 거머쥐고 아들의 이마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어머니가 깍짓손에 턱을 괴고 물었다. “질겨? 풋내가 싫어?” 어머니의 입맛일지 몰랐다. 어머니는 나물을 삶고 말리는 비릿한 냄새가 싫었다. 아버지는 봄이 되면 맏물인 잎과 줄기를 씹어야 그제야 피가 다시 도는 기분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천엽이나 간이 더 당겼다. 어머니는 고사리로 흙 같은 죽이 아니라 기름진 선짓국이나 육개장을 한 솥 끓이고 싶었다, 꼬리를 고듯. “고사리를 많이 먹으면…… 아이를 못 가진대.” 그 말에 어머니와 딸은 머리를 숟가락처럼 구부리고 아들의 눈을 깊숙이 쳐다봤다. “책에서…… 그랬어.” 아들은 어금니로 말을 하나하나 끊어 내뱉듯 입을 앙다물었다. 아들은 정말 책에 씐 글씨를 하나하나 씹어 삼켰는지도 몰랐다. 아들은 책을 식탁의 양초처럼 직각으로 세워 놓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거꾸로 꽂힌 책과 책등이 보이는 책이 반반이었다. 아버지는 거꾸로 꽂힌 책 중 가장 두꺼운 책을 꺼내본 적이 있었다. 이미 쓰인 문장을 너무 질투해서 할퀴었거나, 정말 감복한 나머지 씹어 삼키고 싶어 젓가락으로 바닥까지 긁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표지와 책갈피는 무수한 밑줄이 우툴두툴 그어져 있었다. “뭘 읽었기에 그래?” 딸은 눈치가 빨랐다. 아들은 쌀알을 세듯 주섬주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마추픽추처럼 높다란 골짜기마을이 있어.” “멕시코 이야기야?” 아들은 딸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바깥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곡절이 있어 들어온 사람들만 그 곳에 살아. 나라에서 세금을 받으러 온 적도 없고, 인구를 조사해 간 일도 없어. 그 곳 사람들은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살았어. 손바닥만큼씩 밭을 일구고, 산비탈과 골짜기를 뒤져 잡곡을 심는 것 외에 철따라 산나물을 뜯고 약초를 캤어.” “절름발이 영감한테 들은 얘기 아냐?” 딸의 의심에 아들은 쳇, 비웃고는 마저 말을 이어갔다. “근데, 이 마을은 어쩐 일인지 두 대만 되면 절손이 된다고 해. 혹 그 이유가 고사리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했대…….”1) 아버지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주워섬기는 아들을 보면서, 아들이 수음을 시작한 눈치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회갈색의 윤이 나는 고사리가 정말 꼬리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시부저기 말과 말 사이에 홀리고 겹친 제 생각을 도리질하며, 책은 정말 솔깃할 게 못 된다고 웃음을 깨물었다. 그래도 달걀을 먹으면 멍청해지고, 수음을 시작하면 왼손을 잘라야 한다고 말하는 책을 읽은 것보다 고사리를 끊는 것이 아버지 입장에서는 훨씬 안도가 됐다. “배고파.” 딸이 트레이닝복 등허리를 긁으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딸은 오후 세 시에 돌아왔다. 그 때부터 줄곧 제 방에 틀어박혀 노트북으로 인터넷쇼핑을 한 모양이었다. “또 신발 샀니?” 어머니가 발을 끌며 딸을 뒤따라오다 냉장고 옆에 놓인 독에서 물을 한 바가지 떠 꿀떡꿀떡 삼켰다. “하루에 물을 2리터나 마시는데도 왜 이러나 몰라.” 어머니는 딸의 볼을 꼬집었다. “아무래도 신용카드를 없애야겠다.” “정말 싼 거란 말이야. 한 켤레 값에 두 켤레를 준다고 했단 말이야. 게다가 구입 평을 잘 쓰면 사은품으로 또 한 켤레 준단 말이야.” 딸은 유일하게 신발을 사치했다. 시장이 바다만큼 멀어 간단한 생필품까지 인터넷쇼핑몰에서 주문해 마을에 나갈 때마다 찾아오는데, 어머니는 노트북 옆에 신용카드를 두고 필요한 것을 딸에게 주문하게 했다. 아들의 노란 운동화도 딸이 고른 것이었다. “얘가 왜 이렇게 늦지?” 어머니와 딸은 동시에 창밖을 힐끗거렸다. “우산을 챙겼나.” “아까아까 돌아와 또 책을 뚫고 있는 거 아냐.” 딸은 아들에게 환했다. 삶은 고사리 같은 빗발을 뚫고 와 허겁지겁 책을 먹다 까무룩 잠이 든 아들은 배가 부를 것이다. 또 한 권을 다 삼켰나 봐. 아버지는 엄지로 덧창을 히치하이킹처럼 가리켰다. “아래채 한번 가 볼까?” 딸은 그래 놓고는 하품처럼 흘린 말이었는지 제자리 뛰기를 하며 배고프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둬. 깨면 라면이라도 끓여 주지 뭐. 우리끼리 먼저 시작하자.” “아 참.” 냄비뚜껑을 열어 보고, 김치를 손가락으로 집어먹던 딸이 다시 포르르 방으로 들어가더니 나뭇가지 서너 개를 가슴에 품고 왔다. 딸은 냉장고를 열어 거의 바닥만 남은 콜라 페트병을 꺼내 꼴꼴 마셨다. 그러고는 병 속을 부신 뒤, 칼로 구멍을 내고 가위로 둥그렇게 잘라 물을 받아 나뭇가지를 담갔다. 나뭇가지에는 붉은 꽃눈이 뾰루지처럼 종알종알 매달려 있었다. “일주일 정도 담가 놓으면 개나리와 매화를 볼 수 있을 거야.” 아버지는 꽃눈들이 아들의 감긴 눈에 얹힌 가지런한 속눈썹처럼 보였다. 가족은 종교가 없지만 식탁 앞에 모이면 늘 간단한 기도를 올렸다. “동백은 폈던데.” “벌써?” “요즘 꽃들이 다 그렇잖아. 들쑥날쑥.” 숟가락과 젓가락처럼 가지런하게 반복되는 이야기 끝에 드르륵, 문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어머니는 깜짝 놀라 엉겁결에 숟가락을 놓치고 말았다. 숟가락이 떵,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딸의 야윈 어깨도 한순간 곤두섰다 이내 누그러졌다. 아들이 성큼성큼 걸어와 식탁에 앉았다. “또 고사리네.” “라면 끓여 줄까?” “괜찮아요.” 아버지는 거울처럼 가까워진 아들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다가 눈이 찔린 것처럼 쪼뼛해졌다. 아들의 목덜미에 긴 생채기가 그어져 있었다. “빗물에 미끄러졌어.” 아들은 마당을 건너오며 젖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털고 허벅지에 쓱쓱 문댔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숟가락을 줍는 척 허리를 구부려 아들의 발을 쳐다봤다. 아들은 맨발이었고, 젖은 바짓가랑이에 흙과 검부러기, 도꼬마리가 몇 낱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신음을 삼키고, 우선 아들이 허기를 채우고 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아무 눈치도 못 챈 깜깜한 얼굴로 물만 들이켰다. 딸이 얄미운 표정으로 고사리줄기 하나를 아들의 그릇에 얹었다. 아들은 양손에 젓가락을 창과 방패처럼 쥐고 고사리줄기를 가느다랗게 갈라 담담하게 삼키고 오랫동안 씹었다. 딸은 맥이 빠졌는지 빼, 입바람을 불었다. 아버지가 준엄한 표정으로 꾸짖자 딸은 나만 왜,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국이 식어 갈 무렵 마당에서 잘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나. 아버지는 창을 쳐다봤지만, 덧문을 닫아 바깥이 하양인지 검정인지 회갈색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또다시 문틀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아버지는 아들이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딸은 장화를 두 켤레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다시 인기척에 무심해지려는 찰나, 미닫이문이 책갈피를 넘기듯 넓어졌다. 검은 비옷을 정수리까지 눌러써 눈이 보이지 않는 사내가 빗물을 뚝뚝 흘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삶은 나물처럼 무른 빗소리가 젓가락처럼 딱딱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 딸의 시선이 비옷을 향하는 순간, 미닫이문을 등지고 앉았던 아들도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의자가 삐거덕거렸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비옷은 식탁을 향해 사냥총을 겨눴다. 총신이 긴 사냥총이었다. 아버지는 비옷이 총을 들기 전까지 그의 오른손에 들려 바닥에 끌린 것이 장우산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버지는 비옷이 곧장 레버를 당기거나 총열을 아래로 꺾지 않는 걸 보면, 그가 사냥총의 주인이 아니거나 다섯 개의 탄창에 총알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실제로 총자루를 쥔 손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고, 오줌인지 빗물인지 모를 얼룩이 급하게 마룻바닥을 적셨다. 비옷은 어떤 협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냥총을 겨냥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들은 총을 한 자루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끝집으로 이사하는 고속도로에서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총을 탐하는 걸 보고, 아들이 곧 사내가 될 거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아들은 고속도로에 빽빽이 들어찬 자동차를 보면서, 총은 자동차처럼 제대로 사용하면 안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도 아들 나이 때 총을 한 자루 갖고 싶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슈퍼마켓에서 총을 살 수 있는 국가가 부러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국가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영어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공부에 재능이 없었다. 철봉을 못 넘듯 볼을 다루지 못하듯, 아버지는 책을 넘겨도 글자를 읽어도 퍼뜩 이해하지 못했고, 교실을 벗어나면 책을 들춰 본 적이 없었다(책은 책상에서 읽는 것인데, 아버지에게 책상이 있는 공간은 학교밖에 없었고, 그는 직장인처럼 학교를 벗어나면 학교를 전혀 그리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총을 만져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군대를 가지 않았다. 스무 살에 민방위에 편입돼 교육을 받으러 가면, 거들먹거리는 사내들 중에서 아버지는 가장 어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게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길 때의 느낌을 설명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비스듬하게 돌아앉은 아들이 비옷의 팔과 나란한 사냥총처럼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아들과 비옷 사이에 줄이 비끄러매져 있었던 것처럼, 아들의 등허리가 뒤로 기우듬해질수록 비옷의 몸도 점점 요동쳤다. . 아들이 바닥에 넘어지는 순간이 먼저였을까, 비옷이 사냥총의 반동을 이기지 못한 것처럼 뒤로 넘어진 것이 먼저였을까. 비옷이 사냥총을 떨어뜨리고 마룻바닥에 쓰러졌을 때, 아버지는 식탁 모서리를 뒤엎을 듯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딸은 페트병을 잘랐던 가위를 거머쥐고 있었고, 아들은 바닥에 퍼더 버린 자세로 왼손에만 젓가락 하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입속에 머금은 물을 입가로 흘렸다. 모두 무사했다. 아버지는 비옷을 쳐다봤다. 비옷의 경동맥이 지나가는 목덜미에 젓가락 하나가 꽃가지처럼 꽂혀 있었다. 비옷은 여전히 콧잔등까지 모자가 덮여 있어, 그의 입술이 웃고 있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품이 넓은 비옷의 안감을 따라 삶은 고사리처럼 가느다란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사내가 베고 누운 꼬리였던 것처럼 발바닥을 향해 천천히 흘러내렸다. 비옷은 가족이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숨이 끊어졌다.

2

꼬리를 밟은 것 같아.” 기(奇)는 딸, 기린(奇鱗)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열 발가락을 오므렸다. 기린은 비옷의 등허리에 꼬리처럼 깔린 사냥총을 끄집어 당겼다. 비옷이 들썩이며 안감에 고인 피가 찰랑였다. 아들, 기노(奇櫓)는 비옷의 단추를 열어 넓게 펼치고는 그 주위로 신문지를 다문다문 깔았다. 기린과 기노는 마치 오랫동안 비옷을 카펫처럼 펼쳐 놓고 생활했던 것처럼 의연하게 주검을 단속했다. 두 개의 등이 비옷을 가려 아이들은 벌로 마룻바닥을 청소하고 있는 듯 무심해 보였다. 기는 어쩐지 둘을 합쳐야 제 그림자만 했던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 하나는 충분히 가릴 만큼 자란 게 갸륵했다. 기는 호두처럼 딴딴한 기노와 기린의 발꿈치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사소한 손짓으로라도 간섭하는 게 불청객처럼 쭈뼛거려졌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물고기[鱗]처럼, 바다를 저어가는 노[櫓]처럼 세상을 굳세게 헤쳐 나가길 바라며 두 이름을 지었을 때 아내, 곡(曲)은 기의 성(姓)을 처음으로 좋아했다. 곡은 두 갓난아이의 붉은 입에 새끼손가락을 하나씩 물리고 말을 가르쳤다. “암마, 암마, 오로로 까꿍.” 말은 기린이 기노보다 훨씬 올되었다. 기린은 기의 손가락을 쥐고 암빠라고 옹알거렸다. 끝집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기린은 갓난아이 때처럼 기를 암빠라고 버릇해 불렀다. 그사이 혀까지 훌쩍 자라 버린 것일까, 기는 기린이 저를 보고 암빠, 하고 입술을 빠끔거려 주기를 바랐지만, 딸아이는 입천장에 붙은 혀처럼 마룻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하기는 아이들은 과묵한 게 어른이라고 오해하는 법이고, 끝집은 아이들이 옥수숫대처럼 훌쩍 자랄 만큼 멀고 멀었다. 기린과 기노는 끝집으로 가는 동안 숨바꼭질이라도 벌이는 듯 설렜다. “뱀이 있겠지.” “뱀이 무서워?” “아니.” “그래? 너 뱀 만질 수 있어?” “먼저 만지면.” “난 뱀을 핥을 수도 있어. 아니 깨물어 버릴 수도 있어.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도 만졌는걸. 넌 늘 겁쟁이였어.” 기린은 입을 벌리고 뱀의 머리를 잘근거리듯 아래윗니를 달각거렸다. 기노는 앙,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난 이 손으로 뱀을 단번에 죽여 보일 수 있어.” 길은 기린과 기노의 다짐처럼 어떤 핑계와도 같은 풍경을 뱀처럼 지루하게 끌고 있었다. 하염없이 오르막길이 가팔라지다 느닷없이 신작로가 사라지고, 좁다란 자드락길은 개울에 잠겼다 무덤을 따라 굽이굽이 돌았다. 그 모든 끝의 다짐들이 지겹고 미워지려는 막바지에 끝집이 있었다. 기도 세금인구조사에서 열외일 것 같은 끝집에 다다르는 동안 그만큼 늙어 버린 기분이었다. 기는 길의 끝이 아니라 시간의 끝을 찾아 헤맨 것 같았다. 그 끝에는 어항처럼 맑은 가족이 아니라 덫을 밟아 왼쪽 발목이 잘린 포수가 살았고, 그도 지난겨울에 더 깊은 남쪽으로 사라져 벌통과 버섯밭만 남았고, 아니 무너진 곳집 말고는 백 년 동안 인기척이 없었다고도 했다. 그래도 소문과 소문을 징검다리처럼 잇고, 끝을 오해하지만 않으면, 끝집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꼬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기는 그렇게 끝집에 다다랐을 때 몹시 피로하고 맥이 풀려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수 없었다. 늙은 시간과 어린 시간, 앞서가던 시간의 벽에 뒤미처 오던 시간이 총성처럼 부딪혀 멈춰 버린 순간에 갇힌 것만 같았다. 기린과 기노도 끝집에 도착하자 노독에 시달린 듯 집에서만 놀았다. 끝집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시골아이에 편입될까 봐 두려운 듯 자연에 서툴게 굴었고, 자신들만 고독을 이해하고 있다는 얼굴로, 자란 키의 헐거운 틈을 메우듯 구멍에서 놀았다. 그 구멍에 드리운 그늘은 밝은 자연의 공기와 부딪혀 어떤 예각이 느껴졌다. 기는 벼려진 공기를 눈치챌 때마다, 아이들이 자연을 액자를 벗어날 수 없는 풍경화처럼 갑갑해한다는 예감에 퍽 미안해졌다. 기가 암에 걸리지만 않았어도 그들이 쫓기듯 끝집으로 내려올 일은 없었다. 암은 기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을 찾아 장례식에 가듯 기가 아니라 기린과 기노, 곡에게 위로했다. 기의 부끄러움과 달리 사람들의 위로는 빚처럼 떳떳했다. 하나가 아프면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둘이 아파도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셋이 아파도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넷이 아파도 누구 하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면, 청소를 해야 하는 것과 같다.2) 오롯이 하나면 죽으면 그만이지만, 하나가 있고, 둘이 있고, 셋이 있고, 넷이 있는데 하나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범죄가 된다. 기는 사람들의 위로가 거듭될수록 기린과 기노, 곡이 범죄자가 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신이 자살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었다. 기린만이 사람들의 위로를 유일하게 알아먹었다. 기린은 여전히 기를 암빠라고 부르는 코흘리개였지만, 전쟁이 끝난 폐허 같은 집을 돌보기 위해 친척들에게 돈을 구걸하러 다녔다. “암빠라바라밤이 아파요. 돈이 된다면 숟가락이라도 팔아야 할 지경이라니까.” 기린은 자정이 넘어 차고 비릿한 그을음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기린은 책가방에 든 비닐봉지에서 포일 도시락을 꺼냈다. 짜부라진 뚜껑을 열자 끄트머리가 까맣게 타고 하얗게 굳은 기름에 엉긴 고깃점과 상추, 마늘쪽이 담겨 있었다. 기린은 상추에 차가운 고깃점을 싸서 기노에게 먹였다. 기린의 손은 어둠에 그을린 것처럼 검은 물집이 부풀어 있었다. 책가방에는 가끔 뚜껑이 따진 소주병이 여러 개 들어 있기도 했다. “암빠리바게뜨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술 먹고 까무러지는 게 훨씬 나아요.” 기린은 한 손에는 행주,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식탁을 훔치면서 겨드랑이를 꼬집는 삼겹살집 주인에게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기린은 마늘처럼 뒷맛이 아린 농담을 발명할 줄 알게 되었다. 기는 하루하루 살빛이 창백해지는 기린마저 암에 걸리는 게 아닐까, 불안했다. 기는 자정에서 새벽, 새벽에서 아침으로 점점 늦어지는 기린이 너무 안쓰럽고 아파 제 뺨을 후려치듯 때렸다. 기린은 화덕에 이글거리는 불잉걸처럼 눈을 희번덕였다. 기린이 그렇게 건강하고,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럼 죽기라도 기도하길 바랐어?” 기는 소녀에게 피부를 자랑하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웠다. 기는 기린의 노란 멍과 숯에 데고 굳은살이 박인 검은 손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기린의 몸은 기린 혼자만의 몸이 아니었다. 기는 누가 이런 흔적을 남겼는지, 그 손을 찾아 잘라 버리고 싶었다. 기는 인간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병이 찾아온다고 확신하게 됐다. 비옷은 큰솥에 넣고 삶기라도 한 것처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공기를 벗기면, 붉은 인형을 진흙처럼 빚을 수 있을 정도로 냄새는 두꺼웠다. 죽음은 어디에서나 냄새를 풍겼다. 기는 그 냄새가 기린이 밤을 벗겨온 누릿한 냄새만큼이나 익숙했다. 병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암은 그 길 중에서 고속도로였다. 암의 냄새는 몹시 건강했다. 도시에서 끝집까지, 화석 연료처럼 두꺼운 비린내가 기와 기린과 기노와 …… 곡의 꽁무니를 끈질기게 따라왔다. 기는 기노가 학교에서 집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면 석탄처럼 까만 벽과 창문, 이불과 눈만 빨간 흑인 같은 네 사람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노는 다리가 저린지 예수처럼 벌린 비옷의 오른 위팔에 엉덩이를 걸쳤다. 무게중심을 못 잡아 윗몸을 앞뒤로 흔들다 두 팔을 바닥에 짚고 잔기침을 했다. 비옷은 피를 뺀 고깃덩이처럼 차갑고 얌전했다. 표피가 벗겨지거나 멍이 들지도 않았고, 목덜미에 씨앗처럼 뚫린 조그만 자창만 아니라면, 아무리 눈썰미가 좋은 경찰이라도 검안만 하고 자연사로 사망원인을 종결시킬 것 같았다. 기노는 비옷과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나란히 앉아 사내의 코와 입을 우두커니 내려다봤다. 기노는 뭔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비옷의 인중 가까이 입술을 맞출 것처럼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노의 콧잔등에 비옷의 콧마루가 살짝 맞닿았다. 기노는 진저리를 치며 손등으로 얼굴을 껍질처럼 벗겨냈다. 그러고는 몹시 화가 난 듯 비옷의 콧구멍에 젓가락을 찌르고, 입술을 벌려 다물린 아래윗니 사이에 젓가락을 지렛대처럼 쑤셔넣었다. 기는 팥처럼 깜깜한 콧구멍과 보랏빛 입술을 보면서 왜 주검의 모든 구멍을 솜으로 틀어막고, 그예 베로 싸매는지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비옷은 어린아이들의 두 손에 피를 묻히게 하고 말았다는 자괴감에 휩싸인 것처럼 더욱 작아 보였다. “고작 이거였어.” 기는 기노가 젓가락으로 벌린 깜깜한 입속의 구멍을 보는 순간 씹고 핥고 빨고 삼키며 가장 성실했던 입의 시간들이 아팠다. 그 입이 눈과 코와 머리와 다리를 통째로 삼켜 버린 것처럼 사위가 깜깜해졌다. 기린과 기노와 곡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밥을 먹고 있다. 끝집은 자주 정전이 돼, 셋은 익숙해진 나머지 해거름에 서둘러 식탁에 앉았다. 기린은 산으로 마을가는 기노를 불러 가는 김에 버섯을 따오라고, 절름발이 포수가 고기를 준 게 있으니 저녁에 전골을 해먹자고 말했다. 끝집에는 이사 오기 전부터 여럿이 둘러앉아 먹기 좋은 큰솥이 있었다. 기린은 뭉근한 밑불에 단 큰솥에서 설설 물이 끓자 고기와 식물의 줄기를 넣었다. 어두운 큰솥에선 뿌리를 달이는 쌉싸래함, 연한 줄기를 데치는 달착지근함도 아닌, 마치 그늘을 끓이는 냄새가 풍겼다. 식물의 줄기가 익을수록 뻣뻣하던 얼굴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데친 고기와 식물의 줄기를 먹었다. 가난한 사람처럼 천천히. 옛날 사람들은 전구가 없어 어둠속에 웅크려 무언가를 먹었기 때문에 가난했던 것일까, 가난했기 때문에 어둠 속에 웅크려 무언가를 먹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기노는 잇새에 낀 식물의 줄기를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빼내 식탁 모서리에 문댔다. “그 인간 꼬리처럼 질기고 가느다래.” 기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아래채로 뛰어갔다. 기린은 기노의 침과 섞인 식물의 줄기를 공처럼 뭉치며 제 방으로 들어가 기노에게 선물할 노란 운동화를 챙겼다. 기노는 쥐처럼 혼자 지내려고만 했다. 기노에게 말을 건네려면 미끼가 필요했다. 기노가 수음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기린과 기노는 종이와 글씨처럼 늘 붙어 있었다. 기린이 기노의 내용이고, 기노가 기린의 기호인 것처럼 둘을 떨어뜨리면, 말과 이야기는 구멍이 나 흘러내렸다. 둘은 그늘에서 버섯처럼 얌전하고 부드럽게 놀았다. 기린은 말이 늦된 기노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제 입을 오려붙일 것처럼 말을 가르쳤다. 그것은 암마암빠 때부터 오래된 교육이었다. 기린은 앵두처럼 작게 입을 벌렸다. 기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린의 윗입술이 조금 발려지며 앵두는 대추처럼 커졌다. 기노는 눈을 지릅뜨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기린은 다시 입을 크게 벌렸다. 기린은 입가를 집게손가락으로 벌리고 붉은 혀로 허공을 핥았다. 혀는 무언가를 탐하듯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올랐다, 뱅그르르 돌았다. 허공에 커다란 버섯 하나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기린은 그렇게 기노를 조금씩 어른으로 만들었다. 기린은 버섯처럼 부숭부숭한 기노에게 제 모든 것을 흘려넣었다. 하지만 기노는 책을 읽은 뒤로 기린을 무시했다. 기노는 책을 읽지 않는 기린을 따돌리고, 아래채에 틀어박혀 제 배꼽을 쓰다듬으며 책을 읽었다. 수음은 기린이 기노에게 가르쳐줄 수 없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교육이었다. 기린은 노란 운동화를 기노에게 건넸다. 기노는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책 속에 씐 글씨를 삼킬 듯 젓가락으로 밑줄을 그었다. 책에는 투명한 밑줄이 손금처럼 무수히 그어져 있었다. 루이를 사랑해. “왜 그렇게 늦었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섯밭을 못 찾았어.” 루이를 사랑해 버릴 거야. “거짓말 하지 마.” 나는 가운뎃손가락의 거스러미를 죽 잡아당겼다. “버섯이 없었어.” 이처럼 주린 핏방울이 맺혔다. “정말이야. 아무리 찾아도 버섯이 없었어. 그래서 절름발이 영감한테 버섯을 가지러 갔어.” 루이를 먹어 버릴 거야. “그런데.” 아무렴. “영감이 죽어 있었어. ……마당에 커다란 신발자국이 나 있더라.” 나는 루이를 사랑하고, 사랑해 버린다고, 먹어 버리겠다고, 고백하고, 다짐하고, 응석부리는 로이의 따귀를 딸깍, 때렸다. “너 꼬리 밟힌 거 아냐.” 버클이 풀리는 소리는 맛있다. “아냐. 몰래 뛰어왔어. 몇 번이나 확인했는걸. 발자국이 남을까 봐 일부러 풀숲으로 왔어. 그러다 나뭇가지에 목덜미가 걸려 찢어질 뻔했단 말이야. 아마 평생 동안 범죄자처럼 흉터가 남을 거야.” 그건 팬티 바구니에 든 포도를 맛볼 수 있다는 종소리 같은 거니까. “그래서 버섯 대신 고사리를 끊어온 거야? 넌 내가 버섯과 고사리도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니?” 기노는 기린의 잔소리에 쳇, 비웃고는 양초처럼 세워진 두꺼운 책등을 향해 젓가락을 던졌다. 젓가락은 책꽂이 틀에 부딪혀 노란 운동화 위에 나동그라졌다. “혹시…… 암빠나나쉐이크가 아닐까.” 루이는 에이즈에 걸렸다……. 기린은 젓가락을 주워 기노에게 내밀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절대 여긴 못 찾을 거야.” 아마 이렇게 게으르게 살다가는 넌 꼬리를 밟히고 말 거야.3) 기노는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제 말이 못마땅한지 다시 젓가락을 던졌다. 젓가락은 책꽂이 너머로 사라졌다. “아니, 차라리 그 인간이었으면 좋겠어.” “어쨌든 암마한테는 비밀이야. 아마 알면 당장 죽어버리고 말 거야.” 기린은 노란 운동화를 집어 들고 방문을 열려고 하다가 기노를 돌아보며 히죽 비웃었다. “그래 갖고 암빠다코코낫을 이기겠다고? 암빠닐라우유는 저것보다 훨씬 작은 틈도 귀신같이 찾아내.” 기노는 얼굴이 시뻘게져 주먹을 쥐고 기린을 후려칠 듯 고함을 질렀다. “넌 그 암빠찡코가 오는 게 그렇게 좋냐. 그렇게 보고 싶어. 아마 그리워 죽겠지?” 그 소리에 기린은 책꽂이의 책들을 우수수 쏟아냈다. 책들이 쏟아진 책꽂이 뒤에는 벌거벗은 사내가 온몸에 숱한 자창을 새기고 있었다. 기린은 벽에 붙은 사내의 전신상이 실제 사람이라도 되는 듯 얼굴을 붉혔다. “마스터베이션 좀 작작 해. 너한테서 그 집구석하고 똑같은 냄새가 나.” 기린은 노란 운동화를 마당을 향해 집어던졌다. 꼬리처럼 가느다란 빗줄기를 따라 어둠과 숲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기의 코끝에도 그 냄새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러니까 죽음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의 냄새. 기린과 기노는 도시에서 고속도로를 지나고 끝일 듯 끝일 듯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그 냄새라고 따라오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기도 그 냄새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길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기는 날마다 비옷처럼 땀을 뻘뻘 흘렸다. 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날씨, 계절 따위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후각만 또렷하다. 기는 암의 냄새가 너무 싫었다. 거울을 보면 혀가 물고기처럼 하얗고 비늘이 벗겨질 것 같았다. 기는 머리가 지끈거려 한밤중이라도 암의 냄새가 가장 희미한 기노의 방으로 갔다. 기린이 밤과 거리에서 돈 냄새를 묻혀온 뒤로는 그 방으로 가는 게 꺼려졌다. 기는 기노의 냄새를 핥으며 겨우 숨을 회복했다. 하지만 기노의 몸에서도 암의 냄새, 기린의 냄새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기는 기린을 때리기 위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기린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암의 냄새가 가장 지독했다. 늘 커튼을 내려놔 똥처럼 흐린 그늘이 깊이 들어와 있었고, 비릿한 피비린내가 지층처럼 쌓여 있었다. 기는 기린의 보드라운 속옷으로 땀을 닦으며 그 자리에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누워야 할 자리에는 이미 거대한 입이 석유처럼 까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수족관처럼 여러 개의 줄을 달고 있었다. 기는 불청객을 쫓아내기 위해 기다란 줄을 뽑아 제 콧속에 꽂았다. 숨소리가 소나기처럼 거칠어지며 피비린내가 더욱 진동했다. 기는 그때 기린과 기노가 불청객을 수습하는 것처럼, 두 개의 암 덩이 중 하나를 잘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는 그제야 비옷의 입에서 겨우 얼굴을 빼낼 수 있었다. 두꺼운 피비린내의 진앙은 씨앗처럼 조그만 자창이 아니라 물고기처럼 벌린 그 입일지도 몰랐다. 기는 그 입이 거대한 생선처럼 보였다. 오랫동안 생선을 먹지 못했다. 곡은 제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비린 것이라면 질색을 했다. 기는 가끔 묵은 김치에 고등어를 지져 기린의 방으로 들어가 비늘 같은 살갗을 긁으며 소주와 함께 아귀아귀 먹었다. 곡뿐만 아니라 기린과 기노도 비린 거라면 눈살을 찌푸리기부터 했다. 기는 웃풍처럼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끓는 물로 생선을 씻는 것처럼 얼굴의 살점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콧구멍과 벌린 입속으로 뜨뜻하고 지린 물줄기가 역류했다. 누구 하나는 암 덩이를 잘라내야 했어. 기는 어떤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부걱거리는 거품이 그 어떤 말도 틀어막아 버렸다. “우릴 죽일 용기가 있으면…… 차라리 대통령이라도 죽여 보지 그랬어? 정말 끝까지 암 덩이야.” 기는 그 말에 제 몸이 정말 암 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말의 주인이 지린내를 풍기는 아들이라는 사실은 조금 억울했다.

3

“배고파.”
딸은 기지개를 켜며 식탁으로 걸어가다 털썩 주저앉았다. 아들도 발이 저린지 딸의 꼬리를 절뚝이며 밟았다. 딸은 식탁 모서리를 짚고 일어나 냄비에 분 짜파게티를 젓가락으로 찍었다. 불어 덩어리진 고사리 색의 짜파게티는 지층처럼 쓴맛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딸과 아들은 오랫동안 흙을 먹어 본 것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덩어리를 한 입씩 무뚝무뚝 베먹었다. 그래도 여전히 배가 차지 않는지 서랍장을 열어 라면을 꺼내고 설거지거리에 깔린 큰솥을 꺼냈다. 딸은 비계를 고았는지 바닥에 묵처럼 굳은 기름더께를 대충 물에 부시고 미닫이문을 열어 마당에 쏟아부었다. 부엌에는 설거지를 하지 않아 더러운 그릇이 한가득했다. 대접에는 나슬나슬한 곰팡이가 핀 밥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잎과 줄기와 뿌리와 열매는 산불이 잦아든 숲의 재처럼 메말라 있었다. 딸은 가스레인지에 라이터를 갖다대며 아들을 돌아봤다.
“라면 물 끓는 동안 얼른 해치우자.”
“또 라면?”
“왜 꼬리 같아?”
아들은 피가 묻은 젓가락을 흔들며 딸에게 말했다.
“봤지. 딱 한방에 끝냈잖아.”
“한 번에 급소를 겨냥하는 연습만 죽어라 하면 뭐해? 결국 집까지 끌어들일 거면서.”
아들은 젓가락을 허벅지에 쓱쓱 닦고 벽을 향해 던졌다. 젓가락은 마룻널에 튕겨 어머니의 정강이를 찔렀다. 어머니는 제법 따끔했을 텐데도 그저 꾸벅꾸벅 졸면서 입가로 하얀 침을 흘렸다. 그 앞에는 소주 페트병이 엎어져 둥그런 배에 한 모금 정도 맑게 출렁였다. 아들은 젓가락을 주워 수돗물에 헹군 뒤 군침이 도는지 젓가락을 쪽쪽 빨았다. 
“저 암 덩이 같은 인간이 총을 구해올 줄 알았나.”
“아무렴 어때, 총 한 자루가 거저 생겼는걸.”
인간은 기억 덕분에 꼬리가 사라진 게 아닐까. 아버지는 허탈한 얼굴로 문을 향해 슬그머니 흘러갔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가 미닫이문에 유리처럼 서자 저만치 노란 운동화가 나뒹굴고 있었다. 아버지는 노란 빛이 부신 듯 뒤를 돌아봤다. 네 개의 맨발이 꼬리를 밟듯 넓게 펼쳐진 제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맨발을 따라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고, 꽃가지를 자를 때처럼 가윗날 소리가 귀를 그었다. 식물의 줄기처럼 길쯤한 손가락이 하나둘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아버지는 딸과 아들에게 어떤 악수도 건넬 수 없었다.

《문장웹진 1월호》

1) 오영수, 「은냇골 이야기」 가운데,『오영수 작품집』, 지만지, 2010.

2)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끝과 시작」 가운데,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3) 작가 미상, 「루이를 사랑한 로이」. 아들, 기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나 실제 씌어졌는지,

    책으로 출간되었는지는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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