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자루 속에서 4

바람자루 속에서 4

– 삼월의 눈

김도연

 
 

“……꽃이 피었겠네.”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내내 거의 잠만 자던 그녀가 잠꼬대를 하듯 처음으로 뱉어낸 말이었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화장실을 드나든 것만 빼면 옹관묘 같은 솜이불 속에서 겨울잠을 청하는 작은 곰이나 다름없던 그녀였다.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상반신만 내놓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실의 유리창 밖에는 자잘한 햇살과 푸석푸석한 눈발이 공평하게 뒤섞여 내려오고 있었다. 근데 꽃이라니? 그는 잘 읽혀지지 않는 책을 덮고 다시 그녀의 핼쑥한 얼굴로 눈을 돌렸다. 길고 깊었던 겨울잠에서 그녀가 막 깨어나려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꽃이 피려면 아직 멀었어. 눈이라도 녹아야…….”
벗어 놓았던 양말을 이불 밑에서 찾아 신고 서둘러 외투를 걸치는 그녀는 그의 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현기증 탓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렸지만 부축을 하려는 그의 손길도 당연히 거부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고 굽혔던 허리를 펴다가 다시 휘청했지만 용케 문손잡이를 잡아 쓰러지지 않았다. 지지난해 겨울 초입에 예고 없이 집을 떠나 꼬박 일 년을 소식 없이 지내다가 다다음해 이월의 끝자락에 역시 예고 없이 돌아왔으니 햇수로는 삼 년 동안의 가출인 셈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무슨 시차적응이라도 하듯 잠에 몰두하다 깨어나 다짜고짜 꽃을 찾아 나가다니……. 그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끌어당겨 양말의 제 짝을 찾다가 장판 위에다 모두 쏟아 버렸다. 그게 그거 같았지만 막상 손에 들고 보면 그게 아니었다.
햇살 속에서 너풀거리는 눈은 봄날의 버드나무에서 날리는 꽃가루 같았다. 그러나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니었다. 대관령 자락에서 눈발이 날려왔지만  땅에서는 눈석임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집에서 나온 신발 자국이 질척거리는 눈 위에 찍혀 있고 고개를 드니 무덤들이 모여 있는 양지 바른 동산을 향해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걸어가는 그녀가 보였다. 그 곳은 키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봄날 가장 먼저 피어나는 곳이었다. 그는 그녀를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손차양을 만들어 동산을 살폈다. 꽃을 보려면 조금 더 있어야 했다. 그 사실을 그녀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헛간에서 괭이를 꺼내와 마당으로 눈석임물이 흘러들지 않도록 도랑을 만들며 그는 자주 뒷동산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동안거에 들어갔다가 나와 봄볕을 쬐는 비구니처럼 무덤 앞에 앉아 있었다. 마치 숨을 고르는 것 같았기에 그는 마른 입술을 적시려고 침을 끌어모아야 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대관령 꼭대기에서 내려와 게으르게 날리는 눈발은 햇살에 밀려 현저하게 힘을 잃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무릎에 가슴을 묻고 앉아 있는 동산의 뒤편, 대관령이라는 신전을 떠받치는 기둥 같은 다리의 거대한 교각들을 보며 그는 한숨을 흘렸다. 자그마한 웅덩이들에서 한 곳으로 모여든 눈 녹은 물은 흙탕물로 변해 개울로 콸콸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의 형체가 허물어져 한 방울의 물로 변하는 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번 학기는 강릉에서만 강의가 있어. 논문을 쓰려고…….”
묻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녀의 침묵에 어떤 답변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야만 그녀도 지난 일 년의 침묵을 스스로 풀어 놓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궁금했다. 그동안 그녀는 세상 어느 곳을, 무엇을 하며 돌아다녔을까. 누구를 만났으며. 하지만 그는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하며 목젖까지 올라온 그 질문들을 신물 삼키듯 억지로 눌러 버렸다. 그 질문들은 그녀가 그에게 똑같이 되물을 수 있는 것들이기에. 그는 거실로 꺼내 놓았던 넓은 상과 책들을 작은방으로 하나씩 도로 들여 가며 주방을 정리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살폈다.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다시 가사 일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러니 그도 거실에 마구잡이로 펼쳐 놓았던 것들을 먼저 제자리로 돌려 놓을 마음을 먹게 된 거였다. 두 번의 겨울을 난 지난 일 년 동안 집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것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 터였다. 삼월이 되면서부터 눈이 내리는 것보다 눈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니 언제 어느 곳에서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덩달아 마음도 화끈거렸다. 그녀가 일상으로 복귀한 이상 그도 서둘러 집 안팎을 정리해야만 했다. 물론…… 그런다고 마음 속 깊은 곳의 어떤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질 거란 희망을 품진 않았지만, 적어도 집 바깥 청소는 해 두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마당 가 눈 더미 속에 무엇이 파묻혀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여기가 갑갑하면 이참에 강릉 시내로 나가서 살까?”
“수저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끓는 물에 삶기까지 한 수저들을 마른 수건으로 닦다 말고 그녀는 코에 들이대며 계속 킁킁거렸다. 수저에서 냄새가 나다니. 그도 그녀를 따라 냄새를 맡다가 이내 수저통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녀의 손길을 탄 수저와 그릇들은 냄새는커녕 모처럼 반짝거리며 윤을 낼 뿐이었다. 그는 작은방으로 들어가 넓은 상 앞에 앉아 닫지 않은 문 너머로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그릇과 수저가 담긴 고무대야에 물을 붓고 다시 세제를 풀고 있었다. 그는 잘 읽혀지지 않는 두꺼운 책을 펼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대관령을 넘어가는 중이라 그늘이 깊어지고 있었고 눈발은 여전히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집을 비웠던 지난 일 년 동안 이 집을 들락거리며 수저를 입에 넣고 빨았을 누군가의 냄새를 그녀가 찾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가만히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천천히 해. 몸살나겠다.”
“냉장고가 아니라 쓰레기장이야.”
울타리 안쪽의 눈 더미를 치울 복장을 갖춘 그는 김치를 안주로 소주 몇 잔을 비웠다. 그녀는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듯 끙끙거렸다. 도와주려고 그가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대신에 그녀는 그의 앞으로 냉장고에서 꺼낸, 계란을 담아 둔 반찬통을 열어 내밀었다. 썩은 계란에서 올라오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취에 그는 숨을 멈추고 코를 막았다. 그것도 모자라 썩은 계란으로 가득한 통을 들고 집밖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동안 냉장고 문을 열면 피어나던 정체불명의 냄새와 전면적으로 맞대면을 하는 순간이었다. 계란을 든 채 그는 마당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에다 버릴 것인가. 마당의 눈 더미와 울타리 너머 눈 덮인 밭, 그리고 쓰레기 소각로로 눈길을 이동시켰다. 거무스름하게 변해 가는 계란들에선 회색 곰팡이가 수북하게 피어 있었다. 계란 속에서 썩어 가는 병아리까지 떠오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녹슨 드럼통 소각로로 통째 던져 버렸다.
산그늘이 짙어 갈수록 눈발이 굵어졌다. 낮엔 녹고 밤엔 집중적으로 내리는 게 삼월의 대관령 눈이었다. 그는 볼이 넓은 플라스틱 삽으로 지난겨울 내내 마당 구석으로 밀쳐 놓은, 담 높이까지 올라간 눈 더미의 눈을 떠서 담 밖으로 던졌다. 낮 동안 녹은 눈은 물기가 많고 무거웠다. 겨울 내내 집 밖으로 던져 버린 쓰레기와 술병들, 그리고 무수한 오줌줄기를 받아들여 벌집처럼 보이기도 했던 눈 더미였다. 물론 그것들만 눈 속에 묻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등덜미를 뜨끈하게 적시는 땀을 식히려 삽질을 멈췄다. 안하던 삽질을 갑자기 하면 몸에 무리가 올 수 있었다. 그러면 저녁밥을 뜨기 무섭게 잠들어 버릴 것이다. 긴 잠에서 그녀가 깨어난 첫날이니만큼 그럴 수는 없었다. 눈이야 매일 조금씩 치우면 문제될 게 없었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불빛이 흘러나오는 거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난 일 년 동안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을까, 갖지 않았을까……. 눈 속으로 찔러 넣은 삽에 검게 변한 담배꽁초가 반쯤 들어차 있는 소주병이 눈과 함께 실려 나왔다. 여러 종류의 담배꽁초(립스틱이 묻은 것도 있다)가 담겨 있는 병을 담 너머로 버렸다. 그 남자는, 남자들은 누구였을까. 그녀는 즐거웠을까. 행복했을까. 샛노란 오줌줄기가 배어 있는 눈은 담을 넘지 못하고 도리어 그에게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는 삽을 내던지고 눈을 털었다. 호주머니에서 몇 날 며칠째 잠만 자고 있는 듯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곤 다시 집어넣었다. 집 뒤 골짜기의 산과 산을 건너가는 고속도로의 다리 위로 노란 가로등이 어느새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식에게 어떤 자세로 알몸을 보여줬을까. 그녀는…… 그 자식들에게…… 어떤 목소리로……. 그는 눈 녹은 물에 거실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번들거리는 마당을 떠나 집 뒤편 어둠이 고이기 시작하는 골짜기로 걸음을 옮겼다. 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쉬지 않고 왼손바닥을 퍽퍽 때리며.
너무 높아 눈발은 물론이고 비나 햇볕도 피할 수 없는 다리 밑 교각에 기대 그는 Y에게 세 번째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벌써 두 달째였다. 하늘에 떠 있는 듯한 가로등 불빛이 그나마 눈송이를 품고 있어 쓸쓸함을 달랠 수 있었다. 그는 Y에게 걸었던 통화기록을 모두 삭제했다. 눈송이는 점점 더 굵어졌다. 전화를 받지 않는 Y에게 왜 자꾸만 전화를 거는 건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허공에서 미아가 된 전파들이, 어떤 마음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눈송이로 변해 내려오는 것만 같은 골짜기 다리 아래에서 그는 머리를 한껏 뒤로 젖히고 시린 눈송이를 맞으며 중얼거렸다.
“집 나갔던 아내가 돌아왔어……. 근데 내게 말을 안해.”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진동하는 밤이었다. 쌩쌩거리다가 덜덜거리고 또 털털대다가 텅텅거렸다. 그녀는, 눈이 내리고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불 빨래를 하고 있었다. 양이 많아서 세 번 정도는 세탁기를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주방 옆 화장실에서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온 집안이 드르르 흔들리고 있어 그는 마치 딱따구리의 부리에 쪼이는 나무가 된 기분이었다. 영동 지방에 봄을 시샘하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는 텔레비전 보도를 들으려고 세탁기 소리에 따라 조금씩 볼륨을 키우고 줄여야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탈수가 끝난 수건을 하나씩 소리 나게 털어 옷걸이에 걸었다. 자정이 되면 온 집안이 세탁물로 덮이고 거기서 풍기는 냄새로 진동할 것 같았다. 그는 뉴스가 끝난 텔레비전 볼륨을 줄이고 그녀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때가 빠진 빨래처럼 해맑아지길 기다리며.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어?”
그녀는 무슨 말이라도 할 듯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가 갑자기 방바닥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다가 멈추더니 이번엔 오른손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리고…… 그녀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이 거실 바닥에서 무엇인가를 들어올렸다. 그도 미간을 좁히며 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것은 특이하게 생긴 털 한 오라기였다. 수건에서 떨어졌을. 손을 들어 형광등 불빛에 털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볼도 조금씩 경련을 일으켰다. 그 음모는 마치 볼펜에 들어 있는 용수철을 조금 잡아 늘인 것처럼 심하게 꼬불꼬불했다.
“……왜?”
“내 것도 아니고 당신 것도 아냐.”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지그래.”
“이게 왜 여기 왔을까.” 그녀의 안색이 저물녘 소나무 숲처럼 어두웠다.
“털에 발이 달린 모양이지.” 일 년 만에 나누는 대화가 고작 이 모양이라니. 그는 작은방으로 건너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겨워.”
방문턱을 채 넘어가지 못한 왼발 뒤꿈치에 그녀의 비수가 꽂혔지만 그는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천천히 다물었다.
외등 불빛 속으로 닭똥 같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는 밤이었다. 그는 여전히 페이지를 넘기기 힘든 책 앞에 앉아 있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 청소기 소음까지 더해진 밤이었다. 그녀는 수색견을 닮은 청소기를 끌고 집안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털이란 털은 모조리 찾아내려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없었던 지난 일 년 동안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온 사람은 당연히 한둘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그들이 흘리고 갔을 털을 놓고 그녀는 어떤 특정한 여자의 것으로 단정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도통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든 책을 밀쳐 놓고 눈을 비볐다. Y가 이 집에 왔었던가? 와서 자고 갔던가……. 자면서 사타구니의 털들을 흘렸었나. Y의 사타구니 털이 볼펜 용수철처럼 꼬불꼬불했던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꿈속에서라면 또 모를까……. 세탁기와 청소기 소리는 그가 앉아 있는 작은방 문을 밀치고 곧 들이닥칠 듯 사나웠다. 도대체 논문을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창밖 외등 불빛 속의 눈송이들마저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 밤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문 채 선방에 든 스님처럼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아 눈송이만 바라보았다. 청소기를 잡은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리며. 아무리 시끄럽다고 한들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는 밀쳐 놓은 책을 다시 펼치고 두 눈을 부릅떴으나 발이 달리기라도 한 듯 글자들은 슬금슬금 달아나고 있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마침내 열렸다.
“이 방도 청소를 해야겠어.”
“내가 할게.”
그녀는 문턱 앞에 서서 책과 프린트물이 널려 있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문턱에 걸린 청소기가 비로소 잠잠해졌다. 그가 손짓으로 방바닥에 널려 있는 책들을 가리키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함을 알렸다. 얼굴을 찡그린 채 청소기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녀는 세탁기에서 빨래가 끝났다는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비로소 등을 돌렸다. 물론 청소기 속으로 책들이 빨려들지는 않겠지만 그는 서둘러 책꽂이로 책을 돌려보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두둑 소리가 피어나는 무릎을 주무르며 허리를 굽혀 책을 줍고 허리를 펴고서 눈을 돌렸다. 때가 되면 꽂혀 있던 자리로 스스로 되돌아가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털들도.
“거치적거리니까 나가 있어.”
“……책이나 복사물들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어.”
초저녁 때처럼 그는 소주 반병을 비우고 마당으로 나왔다. 닭똥 같이 퍼석퍼석했던 눈은 밤이 깊어가고 기온이 내려가자 알밤처럼 여물어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릴 조짐이었다. 그는 눈 더미에 꽂은 삽 가득 눈을 떠서 담 너머로 던졌다. 삽날에 술병이나 휴대용 가스통이 걸리면 한 곳으로 모아 놓았다. 지난겨울 동안, 아니 그녀가 사라졌던 일 년 동안 마신 술의 양이 갑자기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울화가 치밀어올랐을 때,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깨어나 다시 잠들기 힘들었을 때, 종일 눈이 내릴 때, 책 속의 글자들이 모두 달아나 백지인 것처럼 느껴질 때, 공 들인 강의가 떨어져나갔을 때, 인간들에 대한 배신감이 봄날 비바람에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몰려올 때, 꽃이 피고 질 무렵 은근한 가려움증이 온몸으로 도질 때…… 그는 술잔을 잡았다. 눈 더미 속에는 그러니까 빈 술병만 묻혀 있는 게 아니었다. 욕정과 부질없는 희망, 눈물과 욕설, 한숨도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 때가 잔뜩 묻었으나 썩지 않은 채로. 그는 녹고 얼기를 반복해서 무거워진 눈을, 성벽의 돌처럼 삽으로 반듯하게 각을 떠서 버렸다. 술기운에 떠밀린 생각 같아선 어린 시절처럼 눈 더미 속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굴을 뚫고 싶기도 했지만 애써 참았다. 그 속에, 대면하기 힘든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이었다. 궁금했지만 막상 그것과 대면할 배짱이 없다는 걸, 또 어찌 보면 은근슬쩍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연락이 끊어진 Y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내서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려던 마음은 흐지부지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는 유리창을 통해 책 더미 속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그녀를 훔쳐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돌아왔으니…… 어쩌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간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분간은 논문에나 몰두하며 갑자기 찾아온 평화를 즐겨도 될 것 같았다. 팽팽한 바람의 시간은 또 찾아오게 마련이었다. Y와의 관계는 그 때 다시 생각해도 괜찮았다. 그는 목장갑의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비빈 뒤 삽자루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성벽의 돌을 하나하나 옮기듯 눈을 떠서 담 너머로 던졌다.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등과 겨드랑이, 사타구니를 땀으로 적시며.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세탁기와 청소기가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그는 마당가에 쌓여 있던 눈 더미를 모두 담 밖으로 치울 수 있었다. 눈이 사라진 담 밑엔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술병들이 자리를 잡았다. 가지런히 누워 마치 피라미드 모양의 탑을 쌓듯이. 그 탑의 꼭대기는 거의 담 위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그녀는 외등 불빛 속에서 눈을 맞고 있는, 그가 제법 공들여 쌓은 술병들을 좀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찻잔을, 그는 술잔을 잡고 있는 밤이었다.
“……고마워.”
“저렇게 술을 마셔댔으니 강의를 줄 리가 없지.” 그녀는 여전히 그와 대화 채널을 맞추지 않았다.
“강의는…… 다른 문제야. 알다시피 술은 내가 원래 즐기는 편이잖아.”
“욕실 바닥의 수챗구멍에 걸려 있는, 긴 머리카락의 주인들과 마셨겠지.”
사타구니 털에서 겨우 머리카락까지밖에 그녀의 시선이 이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쓴 술을 들이켰다. 생각 같아선 세상의 모든 털들을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털은 발이 달려 있어서 스스로 세상을 떠돌다가 마지막엔 수챗구멍에 걸리게 마련이야. 아이고! 오랜만에 삽질을 했더니 온몸이 욱신거린다.”
“난 머리가 지끈거려.” 그는 그녀의 말에 코를 킁킁거렸다. 욕실에서 새어나왔을 독한 소독제 냄새가 거실을 떠돌고 있었다.
“……미안해.”
“눈 참 지겹다.”
외등을 끌까 생각했지만 그는 이내 포기했다. 술병으로 만든 피라미드 모양의 탑에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온 분명한 까닭을. 무엇을 더 단단하게 쌓고 또 무엇을 허물어 버렸는지를. 담장 밖을 서성이는 듯한 말만 가지곤 아무런 그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겨우 알아낸 게 있다면 바로 그녀의 달라진 말이었다. 날카롭지만 이어지지 않는, 분명 집안 어느 한 곳의 부패한 곳을 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시 들여다보면 어느새 대문 밖으로 쓱 사라져 버리는 그런 말.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느낌에서 그는 쉽사리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에게 지난 일 년 동안 단련한 자신의 패를 쉽게 꺼내 놓지 않고 있었다.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고. 물론 그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깨와 허리를 수시로 주무르며 술잔을 비웠다. 그 사이, 다른 지역에서는 분명 폭설이라고 호들갑을 떨 만한 눈이 눈석임물이 흐르던 마당을 빠르게 덮어 가고 있었다. 그는 담장 옆의 빈 술병들이 만든 삼각형과 그 옆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는 목련나무를 보며 그녀 몰래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피곤할 텐데…… 그만 잘까?” 말을 꺼내 놓고 보니 우스웠다. 일 주일을 내리 잠에 몰두했던 그녀에게 잠을 자자고 청하다니. 그러나 그 말과 함께 그의 사타구니는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꼬여 있는 털을 뽑아낼 듯이.
“밤새 눈이 내리면 마당에 무덤이 하나 생기겠어.” 술병들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술 한잔 하든지.”
“취하게 해 놓고 뭘 하려고?”
“뭘 하긴…….”
그는 집안 곳곳에 걸려 있는 이불 홑청과 베갯잇, 수건 들을 둘러보았다. 아내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이불을 빨지 않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베갯잇도. 집안에 있는 모든 것에게서 윤기가 흐르고 있음을 눈치챈 그는 빈 잔에 술을 따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세탁기에서 꺼낸 마지막 빨래를 옆으로 밀쳐 놓고 술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술잔이 그녀의 입술을 적셨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신이 어디 절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내가 스님이야!”
“해외로 나간 건 아닐까…… 인도나 티베트 같은 곳…… 그런 생각도 했었어.”
“행복한 소리 하고 있네. 내게 그만 한 돈을 줘 본 적이 있어!”
“어딘가에 숨어서 이 집을, 나를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땐 두렵기도 했고.”
“내가 왜 숨어서 당신을 지켜봐!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그럼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나도 몰라. 기억나지 않아.”
그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머릿속에서 부글거리는,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다투는 상상들을 지그시 눌러 버렸다. 한증막에 들어간 것처럼 이마에 땀이 촘촘하게 잡혔다. 넓고 둥근 외등 불빛 속을 채우는 눈송이도 촘촘했다. 수령 오십 년은 된 듯한 목련나무가 한꺼번에 꽃을 피운 것 같았다. 그는 주방으로 가 냉수 한 컵을 들이켰다. 그제야 낯선 남자와 엉켜 있는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스르르 사라졌다. 술잔 앞으로 돌아오다가 그는 벽에 걸린 대형거울을 애써 외면했다.
“어쩌나. 삼월을 다 덮어 버리겠네.” 그녀의 얼굴이 안타까움에 덮여 있었다.
“삼월 눈은 무섭게 내리지만 녹는 것도 빠르잖아.”
“이제 막 피어나려고 애를 쓰는 꽃들이 다 얼어 버릴 거야.”
“스스로 잘 조절할 거야. 따스하면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리다가 날이 추우면 딱 멈추는 게 식물이거든.”
“그래? 그럼 그년은 지금 뭐하고 있어? 쉬고 있나?” 그녀에게 Y는 그년이었다.
“……이제 연락하지 않아.”
“날이 풀리면 연락하겠네?”
“그런 일 없을 거야. 당신은 그동안 정말 어디에 가 있었는데?”
“내가 어디에 가 있었느냐가 중요한 일이야? 왜 집을 나갔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눈송이는 불꽃놀이를 하듯 쉬지 않고 외등 불빛 속으로 쏟아졌다. 아침이 되면 길도 집도 모두 눈 속에 파묻힐 것 같았다. 집에서 사는 사람들도 당연히.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그는 왠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와 그녀는 숨을 고르며 마당으로 내리는 눈송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빈 술병들의 탑도 빠르게 키를 키우는 눈 탓인지 시퍼렇던 위세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왜?’라는 거울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 아무렇지 않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도. 새벽 두 시를 넘어가는 시계바늘을 보며 그는 비로소 그녀에게 어디에 가 있었냐고 묻지 않은 채 투항 의사를 내비치기로 마음먹었다.
“……치졸한 변명이라 여기겠지만, 한 시절 지나간 바람이라고 생각해 줘.”
“일 년 동안 집 나간 보람이 있네.” 그녀의 표정은 쓸쓸했다.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가 내민 손을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자루 속으로 수시로 드나드는 게 바람이란 거겠지.”
“가정을 지켜야지. 가면 어딜 가겠어.” 그는 술술 흘러나오는 낯간지러운 자신의 말을 들여다보려고 술잔을 비웠다.
“그럼 집은 당신이 지키고 이젠 내가 바람 속으로 들어가면 되겠네!”
“진심이야?”
“응. 아, 취한다! 눈 구경 가야겠다.”
길은 당연히 종아리까지 차오른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외등 불빛의 영역에서 벗어나면서부터 그가 들고 있는 손전등이 그녀의 앞을 비췄다. 그녀는 낮에 꽃을 찾아갔던 집 뒤편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는 창피한 마음에 자꾸만 비틀거렸다. 가정을 지키겠다니! 가면 어딜 가겠냐고 말하다니. 마음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로서는 정말 그녀에게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고작 세상 사내들이 내뱉는, 뻔하고 촌스러운 말을 똑같이 중얼거렸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동산 아래에서 그녀는 그가 들고 있던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비춰보느라 바빴다.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 둥근 묘를 덮은 눈과 그 곳으로 가는 하얀 산길. 그리고…… 대관령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높고 긴 다리를. 긴 기둥이 된 손전등 불빛은 다리의 교각을, 상판을, 바람벽을, 바람주머니를 차례로 훑어 나갔다. 두툼한 눈송이는 그 빛기둥 속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가 눈을 뭉쳐 던졌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대관령에 새로 생긴 저 거대한 다리들이 싫었어.” 손전등의 기다란 빛기둥이 천천히 다리 난간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어 나갔다.
“왜?” 삭이지 못한 화 때문에 그는 시린 손으로 눈을 뭉쳤다. 삼월의 눈에는 물기가 많았다.
“당신을 그년한테 훨씬 빨리 데려다 준다고 생각했거든.” 고속도로의 서쪽 끝에서 살고 있는 Y도 잠을 못 이루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다리를 향해 뭉친 눈을 던졌지만 어림도 없었다.
“한때는 저 다리가 무너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기도 했어.” 중얼거리기만 한 게 아니라 기도까지 드린 듯한 그녀의 표정을 그는 훔쳐보았다, 눈을 뭉치며.
“감기 걸리겠다. 그만 가자.”
“그런데……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 내가 저 다리를 건너갈 수도 있겠구나.”
“…….”
그와 그녀는 작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치우지 않은 술자리 앞에 다시 앉았다. 그는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어 녹였고 그녀는 본격적으로 술잔을 채웠다가 비웠다. 외등 불빛이 사라진 마당으로 더 이상 목련꽃 같은 함박눈은 보이지 않았다. 밤눈은 마치 외등을 켜야만 그 때 비로소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강설의 풍경이 사라진 유리창 화면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무릎을 껴안은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잠겨 있는, 새벽 세 시 반으로 흘러가는 검은 화면을.
“외등 다시 켤까?”
“……눈도 쉴 시간을 줘야지.”
그는 그녀가 말한 눈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두 사람의 어두운 형체가 들어 있는 거실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졸음이 밀려왔지만 잠들지 않은 그녀보다 먼저 눕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아직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청사진이 과연 무엇인지. 그는 우두둑 소리가 나는 무릎관절을 펴고 일어났다. 심야의 클래식이 흐르는 라디오를 틀고 지난 가을의 노란 돌배들이 담겨 있는 술 단지를 껴안고 왔다.
“눈 내리는 걸 보며…… 우리가 얼마를 같이 살았지?” 그녀의 시선은 고개 숙인 생각 속에 여전히 잠겨 있었다.
“……이제 십 년.”
“많이 본 걸까, 적게 본 걸까?”
“……십 년을 본 거지.”
술 단지 속에서 흘러나온 돌배 한 알이 주전자로 들어가지 않고 상 위를 구르다 장판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술을 흘리며 굴러가는 돌배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두 손으로 잡았던 술 단지를 놓고 돌배를 잡았다. 시큼한 돌배 냄새와 술 냄새가 와락 달려들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돌배는 그녀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술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몹시 실 게 분명한 돌배를 입으로 깨물었다. 그의 입 속으로 침이 샘솟았다. 그녀는 씹던 돌배를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을까…….”
“이렇게라니?” 그는 서둘러 침을 삼켰다.
“……마음 없이.” 그녀는 뒤늦게 시린 기운이 몰려온 듯 눈을 찡그렸다. 사랑이거나 정이 없다는 말을 그 덕에 간신히 바꿔 놓은 것처럼.
“……어쩌면 다들 그렇게 사는 게 아닐까. 영원한 건 없잖아.”
“믿음 없이.”
“……아기를 갖는 건 어떨까.”
“아기.”
그녀가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돌배 부스러기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검은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안이 환하니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밖에서는 누군가의 기침도 없는지 눈송이 하나 창을 뚫고 들어오지 않았다. 피곤한 눈을 문지르고 그는 장판에 떨어진 돌배 부스러기들을 휴지로 훔쳤다.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며 그는 술을 마셨다. 취하지 않도록 조금씩. 물과 함께. 거실의 불을 끄면 유리창 너머로 내리는 눈이 보이지 않을까 상상하며. 연결고리가 삭아 가는 두 사람에게 아기는 작은 의지가 될 수 있다는 게, 새로이 생겨난 그의 믿음이었다. 그녀와 그 사이에 십 년 전의 휘황찬란했던 사랑의 불꽃이 십 년 후에 다시 피어나리란 희망은 사실 무모해 보였기에. 그는 한숨과 함께 검은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거실의 불을 끄고 외등을 켤까 말까 망설이며.
“알고 싶은 게 있어.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없는 동안……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
달아올랐던 그녀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외등을 켜고 실내등을 껐다. 자리에 앉아 술 한 잔을 삼켰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다. 눈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바람 없이 내리는 폭설이었다.
“같은 질문에 당신도 대답한다면 나도 대답할게.”
이번엔 그녀가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눈 내리는 것 좀 보고.”
“그래…….”
그도 두 팔을 무릎에 겹쳐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커다란 유리창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 온 지난 십 년 동안의 강설을 하이라이트로 보여주는 듯했다. 술병들의 탑은 사타구니 근처까지 눈에 잠겼다. 그는 마치 자신이 눈 속에 벌거벗은 나신을 담그고 있는 듯 잠시 몸을 떨었다. 애초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것은 의견일치를 본 일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종합한다면 미래에 대한 어떤 불안 때문이었다. 그것이 과장된 예측이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땐 이미 타성에 젖어 버린 눈이 오금을 덮은 뒤였다. 어쩌면 그즈음부터 그의 눈이 슬금슬금 다른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녀는 그의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밤눈 내리는 화면에 몰두했다. 흰눈을 닮은 수백 송이의 목련이 마당에서 피고 지는 장면을. 그는 그녀가 예고도 없이 사라졌던 지난 일 년 동안의 일들을 빠르게 되돌렸다. 목련을 닮은 눈송이들은 지상을 떠나 허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닌, 잠을 잔 적이 있는 다른 여자를 찾아서. 그는 연락이 끊긴 Y를 떠올렸다. Y와 나는 과연 잠을 잤을까. 그녀처럼, Y는 왜 예고도 없이 연락을 끊어 버린 걸까. 무엇을 예감한 것일까, Y는. 다른 남자가 나타난 걸까. 그는 술잔으로 향하던 손길을 거두고 다시 그녀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잤을까. 만약 잤다고 말한다면? 일 년 동안 다른 남자들과 연애를 했다고 말한다면? 창밖의 눈은 다시 세차게 지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삼월의 폭설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혹시…… 저 밤눈은 두 사람이 잠들지 못하고 있는 이 집 마당에만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집들의 하늘엔 별이 총총한 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다른 여자와 잤다고 말하면…… 그녀는 어떤 행동을 할까. 뒷산 어디에서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그녀는 아주 오래된 것만 같은 침묵에서 깨어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졸음과 피로, 술기운이 골고루 배합된 표정을 거울인 듯 살폈다. 그는 하품을 참으려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내가 다른 여자와 잤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이기적이라고 욕하겠지만 난 우리 관계가 여기서 끝나는 걸 원치 않아.”
“그동안 내가 다른 남자와 잤다면?”
“솔직히 고통스럽겠지만…… 내가 저지른 일도 있으니…….”
“나는 잤어. 당신은?”
“……안 잤어. 그럴 뻔했던 적은 있지만.”
“당신답지 않게 왜 그런 바보짓을 했어?”
쿵덕거리는 속내를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그가 대답을 찾아 창밖의 눈송이 사이를 떠돌다 돌아왔을 때 그녀는 앉은자리에서 옆으로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베개를 찾아 받쳐 주고 그는 소리 나지 않게 마당으로 나갔다. 거실에서 보던 눈과는 전혀 다른 눈이 내리고 있어 한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담배는 진정되지 않는 그의 속내를 드러내듯 부르르 떨렸다. 사실일까, 다른 남자와 잤다는 그녀의 말이. 그는 눈과 침에 젖은, 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뱉어 버리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눈이 너무 내려 현관에서 마당으로 내려가지 않고 오줌을 눴다. 성기에 붙어 있는 고불고불한 털 몇 오라기를 손가락으로 떼어내며. 그녀의 말은 거짓말이 분명하다고, 마음에 종주먹을 들이대며 오줌방울을 털었다. 깜박했으면 그녀의 꾀에 넘어갈 뻔했다고 자위하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신발 앞의 오줌구멍은 쏟아지는 눈발에 이내 자취를 감췄다. 술을 마셔서 색깔도 노랗지 않았다. 그는 사라지는 오줌구멍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잤을지도 몰라. 자그마치 일 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잖아. 자지 못할 까닭이 없잖아. 그의 의심을 지지라도 하듯 다시 뒷산 어딘가에서 소나무 생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쩌억― 골짜기를 울렸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현관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바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은 손가락 사이에서 떨리는 담배처럼 사타구니와 허벅지 사이에서 진동했다. Y의 전화였다.
Y는 전화기 속에서 울고만 있었다. 그의 물음에는 대꾸도 없이. 그는 그녀가 쓰러져 자고 있는, 현관 너머의 거실이 신경 쓰여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무릎까지 빠지는 마당의 눈 속으로 들어갔다.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로 싸늘한 눈의 감촉이 전해졌다. Y는 계속 울기만 했다. 그는 신발로 눈을 다져 서 있을 자리를 만들었다. 한쪽 발로 서서 다른 쪽 발과 신발에 묻은 눈을 털었다. 눈 속에 처박히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왜 우는 거야? 말 좀 해 봐.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어? Y의 울음은 진눈깨비처럼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남쪽 땅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어. Y는 많이 취한 것 같았다. 밤새, 아니 며칠째 술을 마시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우는 거냐고? 말을 해야 알지. 진눈깨비에서 눈석임물로 변한 Y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뒷산에서 다시 소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내려왔다. 생살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병원에…… 갔다 왔어.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입 속의 침이 빠르게 말라 가고 있었다. 눈 쌓인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게 아니라 아름드리 줄기가 꺾여 나가는 환영이 사라지지 않았다. Y의 울음 소리는 점점 가라앉더니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떨리는 손으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일 때 눈 한 송이가 총알처럼 그의 눈동자를 때렸다. 그 암흑 속에서 아기의 울음 소리가 포연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꺾고 눈 속으로 주저앉았다. 남쪽 땅, 어느 모텔 방에 홀로 앉아 있을 Y를 생각하며 눈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딜 갔다 온 거야?” 그녀는 깨어나 있었다. “몰골이 왜 그래?”
“……담배 피우다 눈에 미끄러져 넘어졌어.”
“조심하지. 무슨…… 소리야?”
“소나무 부러지는 소리.”
“울었어? 내가 다른 남자와 잤다고?”
“머리에 묻은…… 눈이 녹은 거야.”
외등 불빛이 엷어지고 있었다. 그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술을 비웠다. 닭이 울기 전에 술 단지의 술을 모두 비워야 꿈꾸던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라도 하듯.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두 손으로 술잔을 잡았고 거실 바닥으로 구르는 돌배도 더 이상 줍지 않았다. 집의 천장과 지붕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아 깜짝 놀라 머리를 젖혔지만 어디에서도 눈송이는 찾을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낡아 가는 벽지의 꽃들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이리 와.” 그녀가 그에게 옆 자리를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와.” 그는 앉은걸음으로 술잔을 밀며 그녀 옆으로 갔다.
어둠이 대관령 골짜기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담요로 무릎을 덮은 그와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새벽의 푸른 강설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 몰래 오른쪽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그의 어깨에 기댄 그녀의 어깨에서 따스한 온기가 건너왔다. 그는 담요 속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잠깐 움찔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외등 불빛은 점점 빛을 잃어 갔다.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허벅지는 어깨보다 더 따스했다. 그는 눈 속에 빠졌던 맨발에 와 닿았던 눈의 감촉을 떠올렸다. 길고 깊었던 밤이 마침내 끝이 나는 것 같았다. 힘들겠지만 Y는 모든 걸 잘 이겨낼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 홀로 남쪽으로 떠나 일을 처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허벅지에 올려놓은 손을 어디로 옮길까 궁리했다. 창밖으론 외등 너머의 풍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생의 한 고비를 무사히 넘어섰다는 생각에 그는 안도했다. 그의 손은 그녀의 사타구니 쪽을 향해 올라갔다.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다른 남자와 잔 거, 정말 아무렇지 않아?”
“……힘들어.”
“눈 정말 많이 내렸다…….”
“해가 뜨면 금방 녹을 거야.”
“꽃도 다시 피겠지.”
“곧 봄이 올 거니까, 당연히 필 거야.”
“내가 정말 다른 남자랑 잤다고 믿어?”
“……아니. 이제 그런 이야기 그만 하자.”
그는 그녀의 손을 밀치고 볼록한 사타구니를 쓰다듬었다. 바지 지퍼를 내리려고 했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순서를 바꿔 그녀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자세 때문에 브래지어를 푸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희붐하게 변해 가는 바깥을 보고 있었는데 어쩌면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더 먼 곳에 있는 다른 사내를. 다급해진 그는 담요 속으로 얼굴을 디밀고 들어갔다. 골짜기에서 소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내려왔다.
“나름…… 괜찮았어. 색다르던데.”
굶주린 아기처럼 그녀의 젖을, 그는 빨았다.
“오랜만에 흥분되기도 하고.”
그녀의 바지와 팬티를 함께 벗겼다. 양말은 내버려 두었다.
“이래서 당신도 다른 여자를 품는구나…….”
그는 거칠게 그녀의 속으로 들어갔다.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던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벚꽃이 분분히 떨어지는 날 병원에 가서 아기도 지워 버렸어. 섬진강 어느 자락에 있는 도시였지, 아마.”
소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거나 부러지는 소리로 요란한 아침이었다. 그는 그녀의 안에다가 사정을 하려고 악을 썼다.
“이렇게 봄눈도 푸지게 내렸으니…… 우린 아마 앞으로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안 그래?”
“……그래.”
“모르겠어. 지난 일 년 동안 어디에 가서 무얼 하며 지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그는 입술을 악다문 채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치 눈 속인 것처럼 차가웠다. 

《문장웹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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