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의 도시

연기의 도시

이영훈

 
 

연기가 도시를 덮친 후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
봄이 지나갈 무렵 강원도의 작은 산에서 불이 일어났다. 불은 산에서 산으로 움직이며 풀과 나무를 태웠다. 사람들은 불길을 잡아 보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몇 차례 비가 지나간 다음에야 불은 꺼졌다. 불이 지나간 자리는 처참했다. 풀들은 재가 되어 흙 속에 묻혔고 나무들은 검은 뼈대만 남았다.
연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여름의 일이었다. 그 날 아침 사람들은 평소보다 공기가 무겁고 시야가 뿌옇다는 것을 알았다. 도시는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하얀 기체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사물은 모두 흐리게 보였고 어디서나 매캐한 냄새가 났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깊은 고민을 하기에 아침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사람들은 바쁘게 발길을 옮겼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도시를 메운 것이 안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개는 습기로 이루어져 있었고, 해가 뜨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하얀 장막은 새벽을 지나 한낮이 되어도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고 어둠이 드리운 뒤에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도시를 메운 것이 안개가 아니라고 처음으로 말한 것은 저녁 뉴스에 등장한 기상 전문가였다.
“스모그입니다.”
전문가는 단언했다.
“공기 중의 매연이 안개처럼 내려오는 것이죠. 바람이 없는 요즘 같은 철에 자주 나타나곤 합니다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한 편이군요.”
전문가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스모그는 곧 사라질 것이고, 어린이나 노인, 호흡기가 약한 사람들만 조심하면 된다. 뉴스 진행자는 도시의 공해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 소식이 이어졌다.
그렇군, 스모그였군. 뉴스를 본 사람들은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안개는 아니었어. 안개라면 저렇게 무거울 리가 없지. 코를 쏘는 매운 냄새도 이상했어. 아이와 노인, 호흡기가 약한 사람들은 마스크를 준비했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두었던 창문이 닫히고, 집 밖에 걸어 두었던 빨래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연기는 그 후에도 도시에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스모그가 오래 가는군. 아마도 날씨 때문일 거야.
연기는 불편한 것이었다. 시야를 가리고 호흡을 어렵게 했다. 하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일 만큼 치명적인 것도 아닌데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회사를 쉬거나 장사를 그만둘 순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함없이 살아갔다. 자욱하게 드리운 연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도시는 전과 다름없이 작동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린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후 평상 위의 노트북을 켰다. 오래 된 노트북은 기지개를 켜듯 가벼운 잡음을 내며 눈을 떴다. 메신저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고 신이 있는지 확인했다. 신의 이름 옆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며 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 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린은 입을 다물고 동그란 눈으로 문을 봤다. 대꾸가 없자 다시 한 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들어가는 것 봤어. 안에 있는 것 아니까 나와.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문 밖에서 말했다. 1층에 사는 집주인이었다. 린은 문을 열어 주었다.
반쯤 열린 문 밖에 배가 불룩 튀어 나온 집주인 남자가 서 있었다.
엄마는?
찡그린 얼굴로 린을 쏘아보며 남자가 말했다.
“아직…….”
아직?
남자가 반쯤 열린 문을 홱 젖히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남자는 린의 등 너머로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집세가 많이 밀렸어. 알아?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엄마랑 이야기하려고 해도 코빼기도 안 비치니 말이야. 경우가 그런 게 아니잖아.
린은 목을 파묻고 입을 다물었다.
보증금도 제대로 안 받고 집을 빌려 줬으니, 집세는 확실히 내야지. 그나마 밀린 월세로 보증금은 예전에 다 나갔어. 도대체 네 엄마는 어디에 있는 거야?
엄마가 어디에 있느냐고? 린이야말로 너무나 궁금했다. 연락이 닿는 곳에는 모두 물어 보았지만 엄마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힐난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린은 눈을 내리깔고 발을 봤다. 급하게 문을 여느라 제대로 신발도 신지 못하고 있었다. 린은 양말 끝으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남자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엄마랑 연락이 닿으면 말해. 주인집에서 찾는다고.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나서던 남자가 갑자기 생각난 듯 홱 돌아섰다.
요즘도 집에 남자애들 끌어들여?
그것은 이상한 말이었다. 요즘도, 라니? 집에 친구들이 놀러 왔던 것은 한 번뿐이었고, 그 이후 린은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았다.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버텨 선 채 남자는 말했다.
엄마가 연락 두절이라고 아무나 끌어들이고 그러면 안 돼. 이럴 때일수록 네가 정신 바짝 차려야지. 안 그래?
남자가 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신발을 신지 않았기 때문일까. 린은 갑자기 무척 부끄러워졌다. 발밑에서 냉기가 싸늘하게 올라왔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린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현관 자물쇠를 잠근 후 잠시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노트북에서 가벼운 종소리가 들렸다. 린은 황급히 평상 앞에 앉았다. 메신저에 신이 들어와 있었다. 린이 키보드를 건드리기 전에 신이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안녕.
언제나처럼 짧은 인사였다. 그래, 안녕. 두 사람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쪽은 어때?
린은 창 밖을 내다봤다. 일반적인 집보다 약간 높이 나 있는 반지하 방의 창문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연기를 뚫고 들어온 빛은 어딘가 지친 것처럼 희끄무레하게 질려 있었다. 직선으로 몸을 떨어뜨리는 빛 속에 아지랑이처럼 연기가 떠올랐다. 농도가 옅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 연기는 집 안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골목에서 남자아이들이 즐거운 듯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연기에 묻히기라도 한 듯 곧 멀어졌다.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 소리와 무언가 물건을 파는 확성기 소리가 들리고, 흩어졌다. 갑자기 코끝이 간질거렸다. 재채기를 한 후 린은 키보드를 두들겼다.
아무 일도 없어.
 
린과 신은 중학교 다닐 때 처음 만났다. 린의 고향은 강원도였다. 린은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살았고, 신은 어딘가의 대도시에서 전학을 왔다.
신은 조용한 아이였다. 가볍게 텃세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친근감을 드러내는 아이도 있었지만 신은 어느 쪽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신이 아이들의 이목을 끈 것은 처음 몇 주뿐이었다.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신은 교실 한쪽으로 숨어 버렸다.
카지노가 들어서 있던 린의 고향은 번화가마다 유흥업소가 즐비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린은 술집이나 모텔이 된 건물 사이의 골목길을 지나가야 했다. 화려한 불빛을 벗어난 골목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린은 그 속에서 자랐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긴 곳에 주렁주렁 매달린 조명을 볼 때마다 린은 불빛들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거나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여겼다.
린과 신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어느 겨울, 린은 허름한 점퍼에 무릎이 늘어난 트레이닝을 입고 집을 나서는 신을 봤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벅터벅 주택가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신이 걸어가는 방향에는 작은 야산이 있었다. 등산을 하기에는 너무 낮고, 바람을 쐬기에는 너무 깊었기에 동네 사람들도 제대로 찾지 않는 산이었다. 어딜 가는 거지? 린은 처음으로 신에게 눈길이 갔다.
그뒤에도 린은 산을 향해 걷는 신을 발견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동네는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린은 집 밖으로 나와 길을 확인했다. 신의 발자국이 야산을 향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린은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처음으로 신이 걷던 길을 따라나섰다. 다른 날이라면 모를까, 눈이 이렇게 쌓인 날에도 변함없이 산을 오르는 이유가 궁금했다.
한참 동안 신의 발자국을 따라 밟은 후에야 산 중턱의 나무 둥치에 앉아 있던 신과 만날 수 있었다. 두 손을 점퍼 속에 넣은 신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린을 말없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안녕.
신의 인사 속에 린을 나서게 한 호기심은 녹아 버렸다. 어쩐지 이유 같은 건 상관없는 기분이 들었다. 린은 눈길을 돌렸다. 집과 건물들이 보였다. 야트막한 산과 벌판이 있었고, 드문드문 논과 밭이 보였다. 그것은 아주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풍경이었다. 린이 아는 모든 곳이자, 한 번도 확인해 보지 못한 장소들. 저 건물이 저런 생김새였나? 저 길을 정말로 내가 걸었던 걸까? 차가운 바람 속에 눈발이 휘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얼어붙은 코끝에 이내 몽롱한 기분이 어렸다. 그것은 확신과 불신이 뒤섞인 몹시도 이상한 감정이었다. 간질간질한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감이 린을 흔들었다.
“거기 앉아도 돼?”
린은 말했다. 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해가 질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둠이 동네에 내려왔다. 멀리 번화가에는 알록달록한 불빛들이 글씨를 그렸고, 조금 떨어진 집들은 글씨를 끝맺는 마침표처럼 노랗고 빨간 점이 되었다.
불빛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져. 신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나도 저 불빛 속에 섞여 버릴 것 같아서.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는 것처럼 저 불의 일부분이 되어 버리는 거야. 그런 걸 상상하면 몹시 무서워.
산 속은 무척 어두웠기에 린은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신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신이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번화가의 골목을 지날 때마다 린 역시 같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에.
그 날부터 두 사람은 자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린과 신은 닮은 점이 많았다. 어머니가 번화가의 식당에서 일한다는 것도 그랬고, 아버지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도 같았다. 린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고 신의 아버지는 카지노를 헤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산을 올랐다. 습기를 머금은 낙엽 위에 앉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를 견디며 린과 신은 동네를 봤다. 그 곳에서 두 사람은 대화를 주고받거나 가끔은 조심스레 서로의 몸을 대어 봤다.
때때로 신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지금의 두 사람에게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것들에 관한 것이거나 가까이 있었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선을 허공에 두고 조심스레 입을 움직이는 신을 보고 있을 때마다 린은 신이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거나 나중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겨울이 지나고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린의 아버지가 돌아왔다. 돌아온 아버지는 이유 없이 화가 나 있었고 몹시 난폭했다. 린의 어머니는 서둘러 움직였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두 사람은 가벼운 짐을 챙겨 동네를 나섰다. 린과 어머니는 그렇게 도시로 옮겨 왔다.
신과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도시로 옮겨 온 지 몇 주가 지난 후였다. 급하게 구한 집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을 때 메신저 프로그램에 신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린이 말을 걸기도 전에 신에게서 쪽지가 전달됐다.
안녕.
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안녕.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린에게 산불 소식을 처음 전해 준 것은 신이었다.
다 타버렸어. 신이 적은 글씨가 화면에 떠올랐다.
우리가 앉아 있던 산도?
응. 거기까지 불이 내려오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다 타버렸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산불이 났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 자신이 살던 동네까지 여파가 미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산의 불을 끄느라 소방서 사람들은 여기에 신경을 쓰질 못했어. 하지만 누가 신경을 썼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불은 아주 잠깐 사이에 덮쳐왔고 작은 산은 한꺼번에 타버렸어.
불이 난 후에 산에 올라간 적이 있어?
몇 번 정도. 이제 거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 버렸어. 숨을 쉬면 온통 타는 냄새가 나고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에 까만 재가 묻어 나와. 가끔은 바닥 아래에서 열기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해. 거긴 이제 우리가 함께 있던 곳이 아니야.
신이 쳐내려간 글씨는 무표정했다. 린은 글씨에 표정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이야기는 무덤덤하게 전해졌고, 그 때문에 가슴 한편의 서늘함이 조금은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손을 멈추고 있던 신이 한 마디 덧붙였다.
불이란 건 참 순식간에 타오르더라. 조심해.
 
산불이 가실 때쯤 린의 어머니가 사라졌다. 린의 어머니는 고향에서처럼 도시의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린의 어머니는 몹시 지친 표정으로 옛날 살던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 볼 수도 없을 만큼 어머니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새벽에 집을 나선 어머니는 그 길로 소식이 끊겼다. 당장의 생활은 어머니가 갖고 있던 통장의 돈으로 꾸려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집세는 어쩔 수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던 보증금은 금세 녹아 버렸고 집주인의 독촉이 시작됐다.
그즈음 린에게도 친구가 몇 사람 생겼다. 신처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인사를 주고받거나 때때로 점심을 같이 먹는 아이들이었다. 린의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신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아이들 중 하나가 린의 집에 모여 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모였고, 그 아이들과 친한 남자아이들이 끼어들었다. 몇 사람이 돈을 모아 과자 몇 봉지와 맥주를 사 왔다. 밤이 깊을 무렵, 아이들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잔뜩 취한 아이들은 쓸데없이 야한 농담을 뱉거나, 장난을 치듯 킥킥거리며 서로의 몸을 만졌다. 친구들과 어울리던 린은 거실 구석에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린이 처음으로 느낀 것은 누군가의 들척지근한 숨결이었다. 남자아이 하나가 린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반쯤 포개고 있었다. 술이 깨어 가는 사람 특유의 끈적끈적한 입김이 린의 얼굴 위에 쏟아졌다. 팔을 들어 남자아이를 밀쳤지만, 아이는 느릿느릿 손을 뻗어 린의 팔과 목을 만졌다. 남자아이의 입이 린의 입에 닿았다. 린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남자아이가 린의 어깨를 잡았다. 짧은 비명이 새어나올 뻔했지만 린은 곧바로 소리를 삼켰다. 자고 있는 친구들이 깨면 무척 창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린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 한참 동안 몸싸움이 이어지자 남자아이는 포기한 듯 다른 곳에 가서 누웠다. 잠시 그 자리에서 숨을 추스르던 린은 친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집 밖으로 나왔다.
반지하의 계단을 올라와 연립주택의 유리문 앞에 섰다. 새벽이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 도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와 입에서 술냄새가 풍겼다. 가슴이 답답했다. 신선한 바람을 쐬면 방금 전 겪었던 일이 조금은 희석될 것 같았다. 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광경이었다. 새벽 거리를 처음 나서는 사람이라면 밤이 채 지나지 않은 세상이 낯설 수 있다. 하지만 린은 새벽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인가 일찍 집을 나서는 어머니를 배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린이 기대한 것은 습기를 머금은 안개와 차가운 공기, 인기척이 전혀 없는 적막함과 그만큼의 고요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날의 도시는 달랐다.
맨 처음 린을 감싼 것은 압도적인 냄새였다. 어딘가 오래 된 장소의 조심스러운 냄새. 사람이 발길을 들이지 않은 창고나 다락방의 무겁고 둔탁한 냄새가 풍겨 왔다. 냄새는 곧바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농도가 짙은 액체처럼 느리게 다가와 코를 자극했다. 매캐한 기운이 목에 닿았다. 린은 컥컥거리며 기침했다.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호흡기에 가득 들어찼다. 저절로 손이 올라와 입과 코를 막았다.
골목은 장막에 가려진 것처럼 희미한 형체만 보였다. 새벽의 미약한 햇살이 공기 중의 하얀 입자에 부딪쳐 흩어졌다. 옅은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구름 같은 입자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바람은 거리를 가득 메운 입자에 부딪쳐 곧 사라졌고, 바람이 사라진 자리는 다시 하얀 기운이 차지했다.
그것은 연기였다. 무언가 타오를 때 피어오르는 기체. 들척지근한 온기를 머금은 맵고 날카로운 기운이 거리에 가득 차 있었다. 한순간 린은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화재가 일어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은 조용했다. 정말로 불이 난 것이라면 누군가의 비명 소리라도 들릴 터였다. 걸음을 옮겨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 봤다. 가득한 연기 이외에 이변이 일어난 흔적은 없었다. 골목 가운데에서 린은 멈춰 섰다. 주변에 늘어선 집 때문에 바람이 들지 않는 골목에는 한층 두껍게 연기가 피어올라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 주변의 연기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차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골목 끝에서 동그란 불빛 두 개가 다가오고 있었다. 린은 한쪽으로 비켜섰다. 회색 자동차 하나가 린을 지나쳤다. 차는 거침없이 연기의 장막을 뚫고 큰 길을 향해 달려갔다. 차가 지나간 자리의 연기는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잠시 옅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풍부한 질감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연기와 처음 만난 다른 사람들처럼 린은 생각했다. 안개인가? 하지만 안개일 리 없었다. 연기는 차갑고 축축한 안개와는 달랐다. 보다 더 농밀한 질감을 지닌 연기는 호흡기를 찌르는 자극적인 탄내와 미지근한 열기를 뿜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기는 그렇게 도시를 덮쳤다.
 
친구들이 돌아가자마자 린은 노트북을 켰다. 메신저에 신이 떠올랐다. 거실에 켜놓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도시에 닥친 연기에 대한 소식이 지나가고 있었다. “스모그입니다.” 기상 전문가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스모그일까? 신의 글씨가 떠올랐다.
글쎄, 뉴스에서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아닐까? 린이 대답했다. 하지만, 뉴스가 언제나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냐. 신이 대답했다.
린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린은 새벽에 있었던 일을 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고, 메신저를 통하면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해진다는 것이 싫었다. 린은 그저 신의 글씨를 기다렸다.
스모그는 공해가 안개처럼 모여드는 거야. 신이 글을 띄웠다.
스모그가 그런 거야? 린은 신의 이야기를 잠자코 따라갔다.
응. 알아봤는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없대.
그렇구나.
잠시 대화가 끊겼다. 손을 멈추자 린의 머릿속에 새벽에 자신에게 다가왔던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남자아이의 숨결은 연기의 감촉과 비슷했다. 그 끈적거리는 열기와 불쾌한 냄새가 떠오르자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린은 신과 몸이 닿았을 때를 되새기려 했다. 조심스레 마주 잡았던 신의 손이나 작은 새가 부리를 부딪치듯 가볍게 맞대었던 입술의 감촉 같은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노트북에 손을 올리면 자판을 두들길 수가 없었다. 달칵거리는 자판 소리를 들을 때마다 린은 자신이 신과 무척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눈두덩이 달아올랐다.
걱정이야. 신의 글씨가 표정 없이 화면에 올라왔다. 연기는 해롭지 않아? 신이 물었다. 린은 물음을 던지는 신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신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린은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걱정할 거 없어.
아무 일도 없어.
 
여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초조해졌다. 날이 갈수록 해는 길고 뜨거워졌다. 연기는 낮 동안의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했고 사람들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면 스모그 같은 게 아닐지도 몰라. 비로소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니, 스모그인지 뭔지는 몰라도 이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잖아. 사람들은 서서히 화가 났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거야? 언제까지 연기 속에 살아야 해? 많은 이들이 분통을 터뜨렸지만 그뿐이었다. 연기는 손 쓸 도리 없이 퍼져 있었다.
병원은 호흡기에 탈이 난 사람들로 가득했다. 입을 가리는 마스크는 외출할 때의 필수품이 되었고 집집마다 창문이 굳게 닫혔다. 에어컨과 공기청정기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몇 군데 방송국에서 연기에 대한 특별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도시의 공해 문제를 따지는 사람도 있었고, 봄철에 일어났던 산불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 기온, 황사의 영향이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방송도 정확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추측들은 반향 없이 지나갔다. 사람들의 관심은 두 가지에 쏠려 있었다. 대체 누가 연기를 일으켰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연기가 사라지는가. 몇 사람의 정치인과 높은 공무원이 불려 나왔다. 불려 나온 이들은 저마다 책임을 떠넘길 뿐이었다. 사실 그들 중 누구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기는 돌연하게 도시에 찾아들었고 여전히 그 자리에 도사리고 있었으며 언제 사라질지 예측할 수도 없었다. 원인도 결과도 없이 연기는 그저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연기와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도시는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더욱 효과적으로 연기를 막아 주는 마스크가 나왔고 성능이 향상된 에어컨과 공기청정기가 개발됐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사람들은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됐는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는 일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했고 그 이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들이 린의 집에 다녀간 뒤 남자아이들은 린에 대한 험담을 퍼뜨렸다. 그것은 린이 하지 않은 음침한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친구들은 린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린은 입을 다물었다. 창피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자연스레 린은 친구들과 멀어졌다.
어머니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몇 번인가 린은 경찰서로 찾아가 보기도 했다. 사복을 입은 경찰은 린의 이야기를 들은 후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 보는 게 어때? 경찰은 말했다. 어른들에게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으니까 말이야. 별다른 소득 없이 린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 모든 일을 린이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멀리 있었고 표정을 알 순 없었지만 메신저 속의 신은 분명 예전 그대로였다. 신은 전처럼 조심스러운 말투로 린을 걱정해 주었다. 안녕? 그쪽은 어때?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어느 날, 린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골목의 한구석을 지나게 됐다. 담장 한구석에서 린은 까만 벌레의 무리를 봤다. 미리 알았더라면 피해 갔을 테지만 그 날은 다른 때보다 연기의 농도가 짙었다. 미처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린은 벌레의 무리에 다가서게 됐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몸집의 고양이였다. 옆으로 몸을 누인 고양이는 벌레의 무리에 몸을 뜯기고 있었다. 그 곁에 생쥐 몇 마리가 죽어 있었다. 린이 다가서자 고양이와 쥐 위에 앉아 있던 벌레들이 한꺼번에 파르르 날아올랐다. 그러나 몇 마리는 여전히 죽은 동물 위에서 몸을 떨고 있었고, 날아오른 것들도 힘없이 빙글빙글 맴돌 뿐이었다. 강아지와 고양이, 쥐와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이 연기 속에서 차례차례 죽어 가고 있었다. 작은 동물들의 죽은 몸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참 동안 죽은 동물을 바라보던 린은 집으로 돌아와 신을 만났다. 신이 물었다. 그쪽은 어때? 린은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어.
 
연거푸 재채기를 했을 때 신의 글이 전달됐다.
아주머니를 본 사람을 찾았어.
한순간 린은 신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이 글씨를 띄워 올렸다. 우리 어머니가 일하는 식당 근처에서 너희 어머니를 본 사람이 있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엄마, 괜찮은 거야?
아마도. 예전 우리 동네 번화가 있지? 거기에서 차를 타고 조금 나가면 약수터 같은 곳이 있어. 원래는 공원이었는데 산불이 난 후에 잠깐 폐쇄됐었어. 최근에 다시 문을 열었는데 거기에서 아주머니를 본 사람이 있대.
엄마가 거기에 왜 있는 거지?
그건 알 수 없지만, 틈나는 대로 거길 둘러볼 생각이야. 잘하면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당혹스러웠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라지던 날 어머니는 분명 고향에 다녀와야겠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왜 거기에 그대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주머니를 찾아 줄게. 약간 흥분한 듯 다른 때보다 빠르게 신의 글씨가 올라왔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 다 끝났어.
말을 마친 신이 메신저를 나갔다. 한참 동안 린은 불이 꺼진 신의 이름을 바라봤다. 신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맺혔다. 이제 다 끝났어. 표정 없는 신의 글씨는 린을 불안하게 했다. 끝났다고? 대체 뭐가?
 
집주인 남자는 하루에 두 번, 아침과 밤에 린의 집 문을 두들겼다.
아침의 남자는 퉁명스러웠다. 엄마는? 아직도? 대체 너희 식구는 뭐하는 사람이야? 엄마나 딸이나 뭐 이렇게 허술해? 위아래로 린을 훑어보며 주인 남자는 침을 튀겼다. 경우가 없어, 경우가. 없이 살면 염치라도 있어야지. 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침의 남자는 견딜 만한 편이었다. 밤의 남자는 아주 지독했다. 일을 나갔다 돌아온 남자에게선 술냄새가 풍겼다. 엄마한테 소식 없냐? 아직도?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는 린에게 다가섰다. 나도 네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봐 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 그렇지만. 남자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린의 머리나 어깨를 쓰다듬었다. 밤의 남자에게선 연기 냄새가 났다. 남자의 옷과 머리카락에는 뭔가 타고 남은 악취가 엉겨붙어 있었다. 그 냄새는 아주 강해서 연기가 달라붙은 것이 아니라 남자가 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린은 남자를 피하기 위해 애썼다. 일부러 밝은 미소를 짓기도 했고, 무성의한 태도로 말을 잘라 보기도 했다. 어느 쪽도 소용없었다. 미소를 지으면 남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봐 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 봐 줄 수도 있고. 말을 자르면 남자는 격앙된 어조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봐 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봐 줄 수도 있단 말이다! 문을 잠그고 아무도 없는 척을 해 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린이 사는 집의 열쇠는 남자도 갖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린은 매일 두 번씩 남자와 마주해야 했다.
어머니를 찾아 주겠다고 한 날 이후로 신은 메신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신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 린을 힘들게 했다. 밤의 남자가 다녀가면 린은 불을 끄고 노트북 앞에 앉아 신을 기다렸다. 연기가 내린 도시의 밤은 뜨겁고 탁했다. 낮의 더위는 연기 속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고 바람은 도무지 불어오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린은 반 쯤 열어 둔 창문 앞에 섰다. 언제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창문에서는 열기를 머금은 하얀 기체가 쉴 새 없이 스며들었고 유리창에는 노란 진이 배어 있었다. 그 앞에서 몇 번이고 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 날 도시는 들떠 있었다. 낮 시간 동안 텔레비전에서는 쉴 새 없이 속보가 흘러 나왔다. 봄철 강원도에서 일어난 산불의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었다. 저녁 뉴스의 주제는 단연 산불과 연기의 연관성에 관한 추측이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누군가 일으킨 거야. 연기에 화가 나 있던 사람들은 연기와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 산불과 그 산불을 일으킨 사람에게 새삼스레 분개했다.
의외의 순간에 린은 신을 볼 수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린의 귓가에 신의 이름이 흘러들었다. 린은 안방에 켜 두었던 텔레비전 앞에 섰다. 신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떠올랐다. 신보다 목 하나가 더 큰 어른 두 사람이 신의 팔을 끼고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신의 머리 위에 사진기의 섬광이 떨어졌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기자가 린의 동네 야산 앞에 서 있었다.
“산불의 진원지로 추측되는 야산의 모습입니다. 동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새 야산은 산불의 진원지로 추측되고 있었다. 산을 드나들던 신의 행적에 대한 증언이 뒤따랐다. 동네 아주머니 하나가 뭔가 고자질을 하듯 말했다.
“매일처럼 그 산에 드나들더라고. 왜 그런지는 모르지.”
사람들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끌려가는 신의 뒷모습이 비쳤다.
“경찰은 산불 사건의 정황을 조사하고 있지만 용의자인 소년은 뜻 모를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다시 신이 나왔다. 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린은 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친절하게도 자막이 떠올랐다. 표정 없는 글씨가 신의 말을 대신해 주었다.
아무 일도 없어.
린은 못 박힌 듯 텔레비전 앞에 서 있었다. 뉴스가 이어졌다.
“다음 소식입니다. 산불이 일어난 야산 근처에서는 신원 불명의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사체와 산불 간의 관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사체가 발견된 장소가 비춰졌다. 재만 남은 산의 초입 부근이 파헤쳐져 있었다. 검붉은 흙이 쌓인 한쪽에는 하얀 천이 펼쳐져 있었다. 천 위에는 사체가 지니고 있던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몇 장의 옷가지와 가방과 자그마한 물건들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아주 잠깐 린은 그 물건들이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건을 비춘 화면은 빠르게 지나가 버렸고 린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주인 남자였다. 문을 열어 주어야 했다. 서둘러 나가지 않으면 남자는 몹시 성을 내니까. 틀림없이 술에 취한 상태일 테고 같은 말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린은 움직일 수 없었다. 린은 뉴스에서 이야기하던 것들을 되새겨 보았다. 뉴스는 산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연기에 대해. 그 둘이 어떻게 관련됐는지에 대해. 범인으로 잡힌 신과 야산에서 발견된 사체에 대해. 수많은 말들이 아무런 표정 없이 흘러 나왔다. 문 밖의 남자가 세차게 문을 두들겼다. 문 안 열어? 자꾸 이러면 나도 생각이 있어? 남자가 주먹으로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좋게 봐 줬더니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너 거기서 기다려.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린은 거실로 나왔다. 어두운 거실에 노트북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노트북을 닫고 집을 나섰다.
 
집을 빠져나오자마자 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매캐한 냄새가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린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린이 움직일 때마다 하얀 기운이 무리지어 춤을 췄다. 눈이 몹시 따가웠다.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따가운 느낌이 눈 주변에 퍼졌다. 언젠가 신이 들려 준 타버린 산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완전히 낯설어져 버린 곳. 숨을 쉬면 타는 냄새가 나는 곳. 열기와 재가 가득한 곳. 그렇구나, 신. 산은 이런 곳이 되어 버린 거구나.
그렇지만 이제 낯설지 않은 곳이 있기나 할까. 도시는 연기로 가득 차 있고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다.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오면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멀리 가로등이 보였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은 얇은 천에 여과된 것처럼 뿌옇게 바래져 있었다. 그 빛은 누군가의 무표정한 말에 찍힌 마침표처럼 보였다. 노랗게 퍼지는 불빛을 바라보며 린은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 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덩어리진 잿빛 연기는 하늘을 온통 덮고 있었다. 연기에 가려진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낮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며 린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늠해 보았다. 어느 길도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는 낮고, 침침하고, 뜨겁고, 희미했다. 죽은 쥐와 고양이와 벌레들이 놓여 있던 골목 구석에서 린은 걸음을 멈췄다. 린은 인사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어.  《문장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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