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등뼈

 

너의 등뼈

진연주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이다. 오토바이의 무례한 엔진 소리까지 다정하게 느껴지니까. 어린 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잔뜩 움켜쥐고 있다. 남자는 핸들을 몇 번 돌린 뒤 속력을 높인다. 어린 여자의 머리가 잠깐 뒤로 젖혀졌다가 제 자리로 돌아온다. 오토바이의 기울기를 가늠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수컷의 과시욕은 오토바이의 기울기와 반비례한다. 오토바이가 쓰러질 듯 기울수록 과시는 의기양양해진다. 남자는 오토바이의 왼쪽 몸통이 땅에 닿기 직전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어린 여자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피곤이 몰려온다. 어둠은 익숙하고 DJ의 목소리 또한 그러하다. 눈을 감으면 청각이 예민해진다. DJ의 목소리가 두개골을 파고들어 변연계를 자극한다. 시와 DJ의 목소리가 엉킨다. “우리는 맴돌았고, 우리는 성가셨고, / 우리는 불 꺼진 램프처럼 차가웠고, / 우리는 각자의 과도로 사과를 푹 찔렀고, / 달콤한 과즙은 저 혼자의 혀로 핥기 바빴으니 / 모두 잃은 내깃돈,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끝이라는 이름의 끗」의 두 번째 연. 이 시를 읽을 땐 각운에 힘을 줘야 한다. ‘고’를 꾹꾹 눌러 읽는 밤. 덤으로 ‘내깃돈’도, 그러나 ‘마음’은 말줄임표를 상상하며 여운을.
정신을 차렸을 때 DJ는 “변태 아니세요?”라는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어떤 사연이었을까? 내가 건너 뛴 그대들의 이야기는.
어린 여자는 지치지도 않고 웃어댄다. DJ의 목소리가 어린 여자의 웃음소리에 묻힌다. 남자가 내게 문자를 보내고, 내가 남자의 문자를 무시한 지 두 달 만에 남자는 어린 여자를 태우고 나타났다. 아무려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남자가 여자와 놀아나든 여자와 사랑에 빠지든 관심 밖이다. 남자가 내게 느낀 감정은 내 몫이 아니고 내가 남자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내게 남자는 DJ처럼 수많은 남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남자는 지금 오토바이에 어린 여자를 태운 채 곡예를 하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만족감으로 팽창해 있다. 질퍽한 섹스라도 끝내고 나온 것일까. 어린 여자는 싱싱하다고들 하니까. 싱싱함이 관능보다 자극적일까. 그럴 수도.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이다. 당신이 온 날이니까. 검은 휘장을 걷고 당신은 나의 동굴에 불시착한다. 나의 거부는 거부되었다. 파들파들 떨어대는 몸의 근육들. 꽃불처럼 터지는 절박. 절박하게, 절박하게 나는 오래도록 당신을 응시하고 그보다 더 오래도록 당신을 외면한다. 본질적 소통에는 언제나 섹스가 숨어 있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지. 그 폭발 지점에서 우리의 소통은 분절된다. 내 손, 내 입, 그리고 나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나의 내부로 당신을 흡입하고 당신을 감싸고 당신을 잉태하고 싶었으나 불화는 나를 허락하지 않는다. 무섭다. 도망친다. 당신 곁에 남아 출렁이는 나의 잔영. 당신의 고개가 푹 꺾인다. 당신이 멀어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점쟁이는 내게 일생에 단 두 번의 사랑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이 맞다면 당신은 내게 두 번째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두 번째 사랑이 영 시원찮았으니 승률은 5 대 5다. 첫 번째 사랑은 실패했으나 실패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수도 있으리란 건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다. 머릿속에서 지진을 경험하는 일은 그리 흔한 게 아니므로 첫 번째 사랑은 충분히 성공한 셈이다.
점쟁이는 또 말했다. 천고를 타고났다고. 그 말에 분명 나는 웃었을 것이다. 분위기 좀 잡는다는 치들에게 수없이 들어 왔던 말이다. 그리고 그런 치들은 대부분 헤프고 가벼웠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넘어뜨릴 궁리를 하기에 바빴고 제 맘대로 되지 않으면 신경질을 부리거나 질질 짰다. 남자보다는 수컷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치들이 바로 천고를 타고났다는 족속들이다. 그들은 절대 불같이 뜨거운 고독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래, 그 자리에서 분명 나는 웃었을 것이다.
“부모가 있어도 없는 거나 매한가지고 만나는 인연마다 상처가 될 거야. 타고난 재주는 많으나 그걸 살라줄 불이 없으니 사는 내내 고달프고 외롭겠구만.”
창 밖에는 만(卍니)자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싸구려 향냄새가 코를 찔렀고 조악한 불상과 탱화가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요령을 쥐고 흔드는 점쟁이의 손등엔 푸른 힘줄이 유난히 선명했다. 자꾸만 잠이 쏟아졌다.
“그 점부터 빼. 눈물 받아먹고 사는 점인 게야.”
뒤통수에 대고 점쟁이가 소리쳤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미장원을 지나쳐야 한다. 동네 여자들은 미장원에 모여 자장면을 시켜 먹거나 화투를 치거나 얼굴을 붉히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드잡이를 했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벼 먹기도 했다. 미장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궁전 미용실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여닫이문은 녹이 슬어 있었고 코팅지도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문 가운데 매달린 자물쇠만 유난히 번쩍거려 기이한 느낌을 풍겼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꼬맹이 머리를 자르고 있던 미용사가 반색을 했다. 여자들은 가장자리에 철제 손잡이가 달려 있는 소파에 앉아 눈을 빛내며 쳐다봤다. 괜히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땐 이미 미용사가 내 팔을 잡아채 소파 구석에 앉힌 뒤였다. 여자들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머리 하러 왔느냐는 둥, 점을 빼면 인상이 훨씬 세련돼 보일 거라는 둥, 지나다니는 걸 봤다는 식의 단순한 인사치레로 시작된 말이, 같이 다니던 남자가 애인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러고는 곧 요즘 통 안 보이던데 싸웠느냐는 호기심으로, 그럴 땐 그저 여자가 져주는 게 상책이라는 조언으로 이어졌다. 여자들은 저희끼리 말을 꺼내고 저희끼리 맞장구를 쳐가며 타인의 사생활을 밑천 삼아 떠들고 또 떠들었다. 미용사도 머리를 자르는 틈틈이 수다에 끼어들었다. 나는 표정이 굳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써야 했다. 
미용사가 젖은 솜뭉치로 눈 밑을 닦았다. 눈앞에서 미용사의 젖가슴이 출렁였다. 처지긴 했으나 나이에 비해 탱탱하고 풍만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가슴이었다. 굵은 땀방울이 가슴골을 타고 흘러내리자 미용사가 두툼한 손을 밀어넣어 땀을 닦았다. 
“근데 아가씬 미용실 어디 다녀? 우리 집으로 와. 내가 잘해 줄게.”
미용사가 콧소리를 섞어 말했다.
눈을 떠보니 눈 밑이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노란 고름이 차올랐다. 으레 그러려니 했던 건 실수였다. 염증이 눈 안으로 흘러들어 피부과 치료와 함께 안과 치료까지 병행해야 했다. 미용사는 안대를 한 나를 볼 때마다 미장원 안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안대를 풀고 한 달쯤 지났을 때 발을 젖히고 나온 미용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머리하러 안 와? 잘해 준다니깐!”
 
남잔 낮엔 어린 여자를 태운 채 달렸고 밤엔 여전히 내게 문자를 보냈다. 흔한 말로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그런 문자들이었으나 남자의 문자에선 계절이 가고 또 오고 있었다. 분명 어제도 황사 때문에 곤욕을 치렀고 오늘도 더위를 피해 한강변에 몰려든 사람들 모습이 방송되었고 십오 년만의 폭설이라 수선을 떠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남자의 문자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주차자ㅇ길있죠?라일락기장난아니네요.완젼숨막혀죽을꺼같아요.’
노을이 질 무렵 집을 나선다. 산유화도 벚꽃도 보지 못했는데 언제 라일락이 만개했을까. 주차장길에 도착하기도 전에 코를 찌르는 라일락향에 잠시 아찔해진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드는 대신 구두코를 바라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원피스 자락이 흩날려 구두코가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코끝이 시큰하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소담스럽게 열려 있는 꽃뭉치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소풍 가고 싶어. 그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을 말을 흘리며 그렇게 나는 라일락나무 밑에 서서 깊은, 밤의 꽃향기를 맡는다. 숨 막혀 죽을 것 같다던 말을 생각해 낸다. 남자는 어느 자리에 서서 꽃향기를 맡았을까. 맞춤법이라곤 엉망인 글자를 핸드폰에 쿡쿡 찍어 누르던 곳은 또 어디였을까. 바람이 불자 도로에 떨어져 있던 꽃잎이 이리저리 흩어진다. 봄의 육체, 취기가 애틋하게 발등을 딛고 떠오른다.
여린 꽃잎은 당신의 항문과 닮았다. 당신의 항문은 귀여운, 작은, 한 마리 짐승이고 우리 둘만의 가장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성소였다. 꼼지락거리고 발발 떨고 칭얼거리는, 애교로 넘치는 연약한 짐승. 나는 당신을 사랑하듯 당신의 항문을 사랑했다. 그 주름과 그 움직임과 혀끝에 닿았을 때의 그 새큼한 맛을. 당신의 항문도 내 혀를 사랑했다. 내 혀가 닿을 때마다 뜨거움을 주체하지 못해 움찔거렸다. 나는 그것이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것이 열에 들떠 붉어지는 것과 환희에 차 폭발하는 모습을 봤다. 당신의 항문은 내장의 끝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었고 세계의 중심이었다. 말초적인 쾌락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었다.
이제 꽃잎도, 꽃향도 지고 이내 봄도 저물 것이다.
  
자야 한다.
불 끄고 눕는다.
어둠 속에서 반짝, 당신이 켜진다.
당신은 반딧불이 같은 음색으로
그렇지만 나는 여기 없어, 속삭인다.
 
내 방은 울음을 확장하는 진공관이다. 무한히 흘러넘치는 흐느낌, 늙은 여자의 눈은 점점 짓무른다. 나이 일곱의 어린 내가 말없이 늙은 여자의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그곳에서 어린 내가 번식한다. 문지방에 앉아, 마당에 수북이 쌓인 노을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하던 그 여자애가, 늙은 여자의 몸속에서 울고 있다. 흐느낌은 여자애의 것이다. 울지 마,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늙은 여자가 어린 나를 어르다 잠이 든다.
방엔 날벌레들이 날아다녔고 가끔 방바닥을 기어다니다 발에 밟히기도 했다. 그러나 존재감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매일, 매순간마다 무언가가 조금씩, 모래가 흘러내리듯 아주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위, 콩팥, 폐, 심장 같은 것들이었다. 부재가 계속될 때마다 기다림도 조금씩 빠져나갔다. 내 몸무게는 어린아이의 것과 같아졌다. 날벌레만큼 가벼울 수도 있었다. 그러자 점점, 이 방에 고여 있는 시간이 버거워졌다. 세계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나만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정말 살고는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멈췄다. 가만히 누워 두 손을 가슴에 포갰다. 음악은 머릿속에서만 재생됐다. 어둠이 깊어 내 몸 어느 한구석도 확인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이곳은 관념의 공간이 된다. 실체가 없다. 현실이 증명되지 않는 곳, 현실이 한순간 무화되는 곳, 육체마저 추상화되는 곳. 내가 생각한, 착각한 관념의 덩어리로 더럽혀진 곳. 말하자면 이곳은 거대한 파지(破紙). 눈을 깜박였다. 눈을 깜박이는 건 구체일까, 아니면 그마저 관념인가. 그럴 때면 창을 활짝 열고 골목을 내려다봤다. 방범등이 깜박였고 전깃줄에 걸쳐진 줄넘기가 흔들렸다.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가 여섯 개로 늘어났고 가게 앞 화분은 여덟 개로 줄어들었다. 주차된 차들의 위치가 바뀌고 무단 투척된 쓰레기가 차 뒤에 쌓여 있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내가 보지 않을 때만 일어난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실재하는 비실재. 저 변화를 믿어야 할지, 혹 변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차를 몰고 나간 건 계집애 때문이다. 일곱 살에 이미 죽음을 생각한 계집애. 잠이 들 때마다 울음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흘러 넘쳐 베갯잇을 적셨다. 참을 수가 없다. 지갑만 들고 나선다. 아침이 오려면 멀었다. 무작정 차에 시동을 건다. 안개 때문에 앞을 분간할 수 없다. 열어 둔 창으로 안개가 기어든다. 시야를 가리고 폐까지 스며든다. 안개가 어둠보다 무섭다. 짙은 구름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포박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온몸이 경직된다. 어쩐지 불온하다.
안개가 걷힌 곳에서 시속계는 160을 가리켰고 때로 170에 닿기도 했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속도를 줄였나 싶으면 어느 샌가 170킬로미터다. 속도를 지닌 자만이 기억을 따돌릴 수 있기라도 한 듯 내 발은 가속페달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운 좋게 120으로 고르게 달리는 차를 만난다. 카메라가 나타날 때쯤 알맞게 속도를 늦추기도 한다. 미행을 하는 것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차를 뒤따른다. 마음이 놓인다. 괜히 친숙하게 느껴져 번호판을 외우고 또 외운다. 기흥을 지나고 안성을 지난다. 천안과 목천도 지난다. 앞차가 속력을 높인다. 왜지? 가속페달을 밟는다. 시속계가 150을 가리킨다. 갑자기 왜? 앞차가 속도를 늦춘다. 100킬로미터. 뭐지? 다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다 차선을 바꿔 추월한다. 재빨리 따라간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앞차가 휴게소로 방향을 튼다. 그렇잖아도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흰색인 줄 알았는데 불빛 아래에서 보니 크림색이다. 예쁜 차다. 차를 지나쳐 커피숍으로 간다. 공기가 차다. 종이컵을 들고 계단 끝에 선다. 차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에 간 걸까, 아니면 우동이라도 먹나.
“나 알아요?”
30대 남자다. 감색 9부 면바지에 흰색 폴로셔츠, 거기에 빨간색 서스펜더까지, 무척 세련된 차림이다. 남자가 자기를 왜 따라왔는지 묻는다.
“내비게이션이 없어서…… 어두워서…… 카메라가 잘 안 보여서요.”
그래, 딱 거기까지만. 어둠이 무서웠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이다. 혹 대구까지 가는 거냐고 묻는다. 방향이 같으면 계속 따라와도 좋다고 한다.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선다. 어디까지 가냐는 외침이 희미하게 밝아진 공중을 가로지른다. 지나친 친절과 오지랖이 순식간에 안도를 불쾌와 불안으로 뒤바꿔 놓는다. 
고속도로는 한갓지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탓일 테다. 간간이 화물트럭을 만나곤 했지만 그들의 육중한 모습에 기가 질렸다. 그들은 속도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 느림이 차의 덩치와 맞물려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차 뒤꽁무니에서 반짝이는 붉은 불빛도 그랬다. 무서웠다. 그러나 모두 사라지고 나면 외로워졌다.
 
해운대, 당신과 묵었던 숙소에 방을 잡는다. 침대는 그날처럼 회색 시트로 덮여 있다. 당신이 누웠던 자리에선 스프링 삑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쯤이었을까. 당신이 손을 뻗었던 자리는. 당신은 벽으로 손을 뻗었고 나는 당신 손등에 새겨진 타투를 사진에 담았다. 라틴어라고 했는데 당신은 끝내 그 뜻을 말해 주지 않았다. 당신의 양말은 저쯤에, 그리고 셔츠는 저기쯤 떨어져 있었다. 나는 당신의 셔츠에 코를 묻었다. 셔츠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당신은 체취가 없는 사람이다.
당신이 누웠던 자리에 나도 눕는다. 그날, 당신이 모로 누워 무슨 일을 했는지,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당신은 알고 있을까. 당신은 내가 잠들었으리라 생각했을 테다. 그러나 눈을 감고도 난, 꿈속에서도 난, 당신을 볼 수 있었고 당신을 느낄 수 있었다.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드라이어를 집어 들어 침대에 내동댕이친다.
모텔 로비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머뭇거린다. 어디로 가야 하나. 당신과 함께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24시간 영업이라고 써 붙인 돼지국밥집으로 들어간다. 낡아 빠진 철제 테이블과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 파마머리가 부스스한 남자가 맞는다. 아무도 없는 홀에 들어서기가 멋쩍다. 돌아설까 하다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거기 앉아 부부 문제를 재연한 프로그램을 보며 돼지국밥을 먹는다. 모자이크 처리된 여자는 내내 울고 있다. 국물 넘기는 게 불편할 정도로 TV의 영상과 소리는 위협적이다. 불편하다. 한 번의 들숨과 날숨으로 생각이 흩어지거나 흘러든다.
머리가 맑지 못하다. 맑지 못해서 우울하다. 우울해서 맑지 못할 수도 있다. 몸이 슬프다. 몸이 슬프니 맘도 덩달아 슬프다. 아니, 어쩜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이미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항상 실제로는 끝난 게 아닌 법이란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은 틀렸다. 실제로는 끝났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뿐이다.
TV 속 여자는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다. 불행을 가장한 채 쉼 없이 울어댄다. 저렇듯 확고하게 남편의 사랑을 자신하는 것도 우습다. 사랑 때문에 목을 조르고 사랑 때문에 두들겨 패고 사랑 때문에 며칠씩 집을 나간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모든 것의 이면을 보려 하는 건 실수다. 문장이나 행간에서 의외의 진정을 찾게 되는 것은 문학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마음은, 차면 넘치게 마련이다. 침묵이나 발화된 어떤 문장, 또는 하나의 행위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면 할수록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끔찍한 진실만 목격하게 될 뿐이다. 상대가 생각하는 진실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를 수도 있고 내겐 진실이 아닌 것이 상대에겐 진실일 수도 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보이는 그대로 믿고 들리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최선이다. 행위의 표면은 거짓투성이고 진실이 응축되어 나타나는 법 또한 없지만 그렇다고 그 이면이 항상 우리에게 애틋한 진실을 가져다 주는 것만은 아니다. 
저 여잔 도저히 참아지지 않는다.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내려놓는다. 해운대로 간다. 2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건물은 좀 더 높아졌고 프랜차이즈 커피숍과 레스토랑이 건물마다 들어서 있다. 당신과 갔던 음식점은 그대로다. 그대로지만 좀 더 낡아 궁색해 보인다. 당신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담배를 피워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당신은, 담배를 피우는 대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유리문 밖에서 당신, 환하게 웃었다.
머리카락에 정전기가 인다. 누군가 나를 타고 흐르는 게 분명하다. 그것은 지구가 온 힘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었다가 말할 수 없는 불쾌였다가 흐느낌으로 변하고 급기야 내게 착 달라붙어 내가 나를 온 힘으로 밀어내게 한다. 내가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이 몹쓸 자장(磁場). 덕분에 나는 잘 지내. 나는 정확하게 살아 있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말을 내뱉는다. 거짓말이 눈에 안 보이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낭만적일 거야라는 말도, 나는 너를 끝내 몰랐으므로 사랑은 아니었어, 이런 말도 내뱉는다.
모래사장은 아직 차갑다. 엉덩이를 타고 냉기가 기어오른다. 그날은 이렇지 않았다. 불더미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뙤약볕도 살인적이었다. 사람들은 텐트 안으로, 파라솔 밑으로 볕을 피해 들어갔다. 평상복 차림으로 뙤약볕을 받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방인이 된 느낌. 그 어정쩡함과 무더위 속에서 나는 당신을 찾고 또 찾았다. 당신은 파도를 타고 높이 솟구쳤다가 한순간 사라졌다. 오른쪽에 있다가 왼쪽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당신은 파도와 한몸이 되어 바다를 헤치며 돌아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신은 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점점 느리게 흘렀고 숨이 가빠왔다. 눈앞이 몽롱해졌고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생리혈이 간혹 뭉클뭉클 쏟아지기도 했다. 어지럽다, 어지럽다, 그만 가자, 그만 가자.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을 자꾸 내뱉었다.
당신은 샤워장으로 들어갔고, 나는 남겨졌다. 몸뚱이가 화끈거려 손을 댈 수도 없었고 땀이 흘러내릴 때마다 온몸에 화기가 느껴졌다. 나는 남겨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당신이 나올 때까지 발끝으로 시멘트 바닥을 쿡쿡 찍어댔다. 우리의 이해는 서로 용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다른 세계,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당신과 나 사이엔 대화가 없다. 처음엔 침묵이 답답했으나 이젠 침묵이 깨질까 두렵다. 우리의 침묵은 언어를 위한 토양이 아니라 언어의 무질서함과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도피다. 언어가 때로 서로에 대한 불가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 탓이다. 육체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육체 또한 상황에 맞는 논리와 상대에 대한 배려를 지닌다. 과도한 열정과 현란한 체위보다 팔과 목, 가슴과 가슴, 다리와 다리가 엇갈리고 만나면서 빚어내는 포옹이 더 감미로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잔잔한 떨림이 잠으로 내려앉는 순간, 정지한 시간 속에서 서로의 체온만이 느리게 흘러가는 순간의 슬픔은 그 어떤 희열과도 맞바꿀 수 없다. 몸짓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통로도 갖지 못한다. 그곳에 언어성이 깃들 때, 그러니까 마음의 풍경이 몸짓으로 나타날 때만이 갈라진 시간의 틈으로부터 새어나와 비로소 통로가 된다. 그날 밤 내게 필요했던 건 격정이 아니라 약간의 온기와 이해 그리고 고독으로부터 숨을 수 있는 작은 피난처뿐이었다.
쓸모없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모텔에 들어가기 전 문구점에 들러 가위를 산다. 로비에 앉아 있던 종업원이 목례를 한다. 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탄다. 6층, 당신은 유난히 6이란 숫자를 좋아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간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는다. 내 등을 상상한다. 내 등뼈도 잘 여문 능선처럼 아름다울까. 왼손을 뻗어 등뼈를 만진다. 살짝 왼쪽으로 휘었다. 오른쪽으로 허리를 튼다. 그래도 등뼈는 그대로다.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사타구니를 내려다본다. 제모를 결심한 것은 당신 때문이었다. 당신이 좋아할 거란 생각을 왜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민둥산 같은 언덕이 드러났을 때 나는 잠시 울었다. 그 후 당신과 나는 무슨 일인가로 다퉜고 난 당신이 올 날을 기다리며 밤마다 면도칼을 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날짜를 셀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당신이 찾아왔을 때 삐죽삐죽 솟아나기 시작한 터럭이 고슴도치처럼 당신을 찔렀다.
이제 그곳은 민둥산 같지도, 고슴도치 같지도 않다. 다리를 접고 다시 쭈그려 앉는다. 그러고는 머리를 한움큼 잡는다. 푸석푸석하다. 단백질 부족인가. 낮엔 생선회나 구이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머리칼에 가위를 갖다댄다. 새것인데도 머리칼을 한번에 잘라내지 못한다. 가위 소리가 무겁다. 한올 한올 자를 때마다 월경하듯 뭉텅뭉텅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속이 메스껍다.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속엣것을 게워낸다. 검은 머리칼이 한움큼 빠져나온다. 가뿐하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무언가를 경멸하기로 결정한다. 권태롭지 않기 위해서다.
돌아오는 길엔 줄곧 100킬로미터로 달린다. 규정 속도에서 단 10킬로미터도 벗어나지 않는다. 바퀴는 떠났던 날을 지우고 짓뭉개며 씩씩하게 구른다. 언젠가 이 길을 달린 기억이 있다. 언젠지 모르겠다.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규정 속도를 지키며 착하게 달릴 뿐이다. 벌써 톨게이트다. 불빛이 아늑하다. 철조물 안의 매표원은 곱슬머리다. 통행료를 내기 위해 옆 좌석을 본다. 지갑이 없다. 머리가 멍해진다. 난감하다. 매표원의 손끝을 바라보며 우물쭈물 상황을 설명한다. 매표원이 서류 두 장을 내민다. 하나는 A4 크기고 또 하나는 간이세금계산서만 하다. 매표원은 별일 아니니 울지 말라는 말도 덧붙인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려 미소가 배어든다. 매표원이, 저 여자가 웃는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가 웃는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 때문에 마음이 놓인다.
삼각지에 차를 세우고 이름을 적는다. 차량번호, 몇 번이었더라. 차량등록증을 꺼내 빈칸을 채운 뒤 매표원에게 내민다. 매표원이 작은 종잇장을 건네며 종이에 적힌 계좌로 입금하거나 일주일 안에 아무 톨게이트에나 납부해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휴지 몇 장을 뽑아준다. 매표원은 여전히 웃고 있다. 저 여자의 웃음은 무척 따뜻하다. 차로 돌아가며 눈도 닦고 코도 푼다.
 
손발이 해파리처럼 풀어진다. 눈을 뜰 수 없다. 목젖이 느껴진다. 구강과 비강이 크게 열린다. 혀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귓불이 부푼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자궁이 단단해진다. 신체 기관 하나하나까지 또렷하게 감지된다. 이상야릇한 음악이 들린다. 기계의 단조로움과 낯선 악기의 퉁퉁거림이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소름끼친다. 음악이 소리가 아닌 하나의 형태로, 움직임으로 감각된다. 음이 높게 치솟는다. 머리도 원뿔형으로 늘어난다. 음이 가라앉는다. 원뿔이 낮아지며 넓게 퍼진다. 원뿔이 팔과, 그리고 손과 만난다. 손에서 기포처럼 음표가 떠오른다. 이 음악은 너무 슬프다. 볼륨 좀 줄여 줘, 너무 괴로워. 일곱 살짜리 여자애는 울고만 있다. 너무 아파, 볼륨 좀 줄여 달라니까. 여자애가 시끄럽게 울어댄다. 무섭다. 눈 뜨고 싶다. 미궁에 갇힌 느낌이다.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무섭다.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 고통스럽다. 일곱 살짜리 여자애는 손발을 버둥거리며 울고 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눈뜰 수 없다. 이 음악은 너무 슬프다. 음표 하나하나가 나를 향해 돌진한다. 뾰족한 음표들이 몸속의 모든 장기들을 향해 돌진한다. 내 몸에 억만 개의 구멍이 뚫린다. 나는 거대한 구멍이다. 눈 떠, 눈 뜨고 날 좀 봐. 저리 가, 제발 저리 가 버려. 움직일 수 있잖아, 울지 말라고 말해 줘. 아니, 아니, 난 움직일 수 없어, 말할 수 없어. 여자애의 눈이 그렁그렁하다. 지긋지긋하다. 손을 뻗는다. 조금만 더, 넌 할 수 있어. 여자애가 내 팔을 잡아당긴다. 목을 조른다. 여자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손아귀에 힘을 준다. 내 팔을 잡고 있던 여자애의 손이 밑으로 툭 떨어진다.
돌아와 며칠을 앓는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다. 꿈을 꾸었고,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었고,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내 몸은 끝없이 팽창하거나 수축했다. 소리는 위협적이었고 냄새는 혐오스러웠다. 외부 세계는 폭력적으로 비대했고 나는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것을 받아내느라 녹초가 되었다. 겨우 눈을 떴을 때 공기는 시큼했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음악이 들려 왔다. 부엌으로 기어간다. 싱크대를 붙잡고 간신히 일어선다. 수돗물을 틀고 수도꼭지에 입을 댄 채 벌컥벌컥 들이켠다. 몸이 식는다. 그 자리에 누워 다시 잠든다.
 
남잔 오늘도 어린 여자를 태운 채 달린다. 예전처럼 오토바이가 기우는 일은 없다. 어린 여자도 깔깔거리지 않는다. 어린 여자의 팔은 남자의 허리에 느슨하게 매달려 있다. 남잔 기어를 바꿀 생각도 않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다. 남잔 이제 검정색 재킷과 바지, 그리고 금속성의 벨트체인 차림이 아니다. 목이 늘어난 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다. 어린 여자도 비슷하다. 바람에 날려 나풀거리던 치마는 볼 수가 없다. 어린 여자의 뽀얀 허벅지, 너무나 탱탱해서 자꾸만 눈이 가고, 자꾸만 눈을 피해야 했던 허벅지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남잔 간혹 팔을 뻗어 어린 여자의 허벅지를 만지곤 했다. 남자의 팔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어린 여자의 치마 속으로 손가락을 찔러넣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내게 문자를 보낼 수도 있었다. 가만히 창문을 닫는다.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 방안을 서성인다. 개수대엔 컵 몇 개가 쓰러져 있고 냄비엔 잔뜩 곰팡이가 슨 음식물이 담겨 있다. 거실 테이블엔 촛농이 눌어붙어 있다. 소파에 앉는다. 무언가 엉덩이를 찌른다. 발톱이다. “당신아, 나 손톱 깎아 줘.” 손톱을 깎기 위해 겨드랑이에 당신 팔을 낄 때마다 맘이 움찔거렸다. 자연스럽게 당신이 나를 안는 포즈가 되어, 비로소 당신과 내가 섹스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만난다는 느낌이 들어, 마냥 가슴이 설렜다. 발톱을 깎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내 무릎에 발을 올려놓을 때면, 평생이라도 이렇게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당신은, 사정을 하고 난 후면 언제나 몸을 둥그렇게 말거나 만 상태로 돌아누웠다. 그럴 때마다 당신이 수억 광년쯤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사정을 하고 난 후의 허탈감을 견딜 수 없노란 당신의 말을 떠올렸다. 말하자면 섹스 후 당신의 등은 실존적 고뇌에 빠지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컴퓨터엔 아직도 커서가 깜박이고 있다. ‘심장이 콩탁콩탁하는 소리가 들려. 피는 가슴에서만 맴도는 것 같고.’ 문장은 거기에서 멈춰 있다. 당신이 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싶었던 말은…….
샤워기 밑에 쭈그리고 앉는다. 물줄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뜨겁다. 당신은 늘 물이 미지근하다고 투덜댔다. 수압이 강하면 그러더라고, 그러니 조금 약하게 틀라고 해도 번번이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당신에게 미안했다. 당신은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숙였다. 당신의 뒤통수는 우습게 울퉁불퉁했지만 난 그것이 당신의 말 못할 우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당신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고 거품을 낼 때마다 심장이 욱신댔다.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거품이 다 씻기고 몸이 따가워질 때까지 샤워기 밑에 그냥 앉아 있는다.
 
미장원은 언제나 북적댄다. 동네 여자들은 미장원에 모여 소문을 만들고 소문을 전한다.  타인의 영역에 거리낌 없이 침투하는 타인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불편하고 불쾌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멀리서도 여자들의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오토바이 탄 남자를 들먹이는 미용사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고는 한꺼번에 잠잠해진다. 세상에, 어머어머, 하는 감탄사가 짤막하게 터져 나온다. 나는 최대한 여자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담벼락에 붙어 걷는다. 머리도 최대한 숙인다. 잘못한 일도 없이 졸지에 죄인이 된 기분이다. 걸음이 빨라진다. 답답하다. 목이 짓눌린 느낌이다. 그때 미용사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챈다. 
“아가씨! 어디 갔었어? 애인 왔다 갔는데, 애인 맞지?”
 
대형 마트는 몇 번을 와도 적응하기 어렵다. 물건이 너무 많아 무얼 사야 할지 허둥대기 일쑤다. 어느 땐 빈손으로 돌아오고, 또 어느 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잔뜩 사 오기도 한다. 식료품 매장으로 들어선다. 갖가지 음식 냄새로 속이 느끼해진다. 머리에 흰 스카프를 두른 아주머니가 붙잡는다. 두부를 반값에 준단다. 거기에 생식용 두부도 덤으로 준단다. 두부를 카트에 넣는다. 당신은 두부조림을 좋아했다. 고춧가루를 많이 넣어 매콤하게 조리는 걸 특히 좋아했다. 카트에서 두부를 빼 진열장에 넣는다. 기름진 음식 냄새들 틈에서 딸기향만 유난히 달다. 그 쪽으로 카트를 민다. 붉은 알이 탐스럽다. 당신은 사과 말고는 좋아하는 과일이 없었다. 접시에 여러 가지 과일을 소담스럽게 담아내도 사과 외엔 손을 대지 않았다. 딸기 한 상자를 카트에 넣는다. 당신은 또 스팸을 좋아했다. 흰 쌀밥과 구운 스팸, 그리고 김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스팸 대신 베이컨을 산다. 위벽을 긁는다며 당신은 쳐다보지도 않던 오렌지 주스도 두 통 담는다. 김 대신 파래튀각을 넣고, 삼치 대신 고등어자반을 넣는다. 사리곰탕면은 느끼해서 싫다. 신라면을 세 뭉치 담는다. 무향의 비누 대신 장미향이 짙은 비누를 담고, 향수도 하나 집어 든다.
집에 돌아와 우편함을 확인한다. 편지봉투 하나가 달랑 놓여 있다.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한 뒤 커튼을 뜯어 세탁기에 넣는다. 몸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털고 쓸고 닦는다. 욕실 청소도 한다. 타일벽에서 시커먼 물이 흘러내린다. 다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꿈을 꾼다. 일곱 살 무렵의 내가 길바닥에 누워 있었던 것 같다. 희미하다. 그 애의 가슴과 배에 검은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던 것만 또렷하다.
일어나 앉는다. 어둠 속이다. 밤인지 낮인지 분간할 수 없다. 검은 커튼이 둘러쳐진 방에선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편지에 생각이 미친다. 일어나 스탠드를 켜고 주머니를 뒤져 편지를 꺼낸다. 당신 글씨다. 편지를 뒤집는다. 그러고는 뒷면에 꾹꾹 눌러 적는다.
 
너는 몰랐겠지
잘 여문, 능선 같은 너의 등뼈를 한 개, 또 한 개 짚으며
푸른 바다를 상상했다는 것
고래의 척추를 지나 꼬리를 타고 일몰로 출렁였다는 것
두 번의 사랑이 너를 잠으로 이끌었을 때 내가,
너의 오래된 꼬리뼈를 발견했다는 것
꼬리뼈 속에서 너의 미래를 살짝 훔쳐봤다는 것
이른 아침
내가 만든 미소를 넌 몰랐겠지
이토록 사랑,
이라 쓰고 얼른 지워 버린 배반을
넌 죽어도 몰랐겠지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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