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식

야식

박진규

 
 

나는 아파트 단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원의 남자 화장실에서 아내를 찾아냈다. 남자 화장실의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지켜보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고수머리의 남자가 때 낀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을 보았다. 수도꼭지를 잠그지도 세게 틀지도 않아 물줄기는 작은 소리를 내며 배수구로 흘러들었다. 운동을 나왔다 들렀는지 반바지 차림에 셔츠의 목둘레와 겨드랑이는 땀으로 펑 젖어 있었다. 남자는 노랗게 질린 얼굴이었는데 눈물은 흘리지 않았으나 눈이 붉었다.
남자는 몸을 돌려 내 쪽으로 한두 걸음 걸어오다 멈추었다. 강파르게 훌쭉한 볼은 볼품없었고 턱 끝의 염소수염이 지저분했다. 다만 입매는 좀 웃는 듯 부드러웠다. 무슨 까닭인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는 살짝 웃어 보였는데 어딘지 비겁한 사람으로 보였다. 문득 내 얼굴이 이 남자와 닮았을지 궁금하게 여겨졌다. 남자는 손을 들어 귀를 만지려다 다시 맥없이 그만두었다.
체구가 자그마한 아내는 남자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었다. 다리로 남자의 목을 감싸고 머리숱이 별로 없는 정수리에 양손을 포개 놓았다. 얼룩진 분홍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가 소름끼치도록 하얗게 보였다. 축축하고 긴 검정머리가 흘러내려 볼을 간질여서인지 남자의 안면근육이 조금씩 떨렸다.
잠시 아내가 나를 바라보았다. 흰자위에 핏발이 서고 오른쪽 눈가는 다래끼에 뒤덮였지만 아내의 눈동자는 새까맣고 아름답다. 아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줍은 듯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가볍게 뒤로 젖혔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아내가 입을 열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내뱉는 목소리는 언어가 아니었다. 소리였고 울음이었다. 추운 겨울 멀리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나 어두운 밤에 구슬프게 들려오는 새소리와 비슷했다.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떤 때는 소름끼쳤고 가끔은 가슴 한쪽이 시큰대는 기분이었다. 물론 우스꽝스럽거나 장난스럽게 들릴 때도 있었다. 다른 이들이 말로 표현하는 그때그때의 감정을 그녀는 입에서 내는 바람 같은 목소리로 표현했다. 물론 늘 내가 알아차리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언제부터 아내가 저렇게 울어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멀리에서도 아내의 목소리를 또렷이 듣고서 이곳 화장실까지 찾아왔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이.
남자의 귓불과 귓바퀴를 부드럽게 아내는 쓰다듬었다.
본격적인 식사의 시작이다. 남자는 이제 움직이지 않는다.
아내가 어루만진 귓바퀴에서 뚝뚝 액체가 흘러내렸다. 붉은 피로 착각하기 쉽지만 색깔이 더 엷었다. 아내는 손바닥에 액체를 받아 입으로 가져가 혀로 핥았다. 눈을 감고 손바닥을 적신 액체를 맛나게 손가락을 빨아가며 맛보았다. 계속 귓구멍에서 떨어지는 액체는 그의 볼과 턱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나에게도 다시금 허기가 찾아왔다. 나는 이미 세 사람을 먹어치운 후였다. 해가 떠서 해가 지기 전까지 우리는 깊은 잠을 잔다. 해가 지면 눈을 뜨고 그때에 처음 느끼는 감정은 지독한 허기다. 허기는 불안, 초조, 공포와 같은 지긋지긋하고 불쾌한 감정을 동반한다. 서둘러 밤거리로 나와 눈에 띄는 사람을 붙잡고 식사를 끝내야만 포만감에 겨우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 밤 내가 처음으로 빨아먹었던 사람은 말랐다. 중년의 남자였고 양복 상의를 어깨에 두르고 골목을 내려가며 가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입고 있는 반소매 흰 와이셔츠와 여름용 정장바지는 모두 한 치수쯤 커보였다. 하지만 옷이 크다기보다 몸피가 너무 작고 앙상하게 야윈 탓에 그리 보이는 듯했다. 나는 내 눈에 처음 띈 그를 가로막았다. 그는 멈추었다. 아마 자기 스스로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다고 여겼을 것이다. 나는 남자의 손목을 움켜잡고 힘껏 비틀었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는지 남자가 팔을 움찔하다 멈추었다. 비틀린 손목에서 흐르는 액체를 나는 다급히 빨아 마셨다.
인간이 몸에서 흘리는 액체의 맛은 특별하다. 달고 짜고 맵고, 이런 맛이 아니다. 우리가 빨아먹는 인간의 액체에는 그가 겪은 경험과 생각과 몽상이 녹아 있다. 그것은 타인이 꾸는 꿈의 맛이다. 눈을 감고 액체가 나에게 스며들면 나는 타인을 경험하고 허기를 채운다.
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남자의 목을 껴안고 두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감싸고서 아예 귀에 입을 대고 젖을 빨듯 빨아먹는다. 남자는 귀 한쪽을 빨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거울만 바라본다. 아내의 창백한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나는 더는 굶주림을 참지 못해 슬그머니 남자에게 다가간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무릎 뒤쪽을 할퀸다. 무릎 뒤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툭 터지면서 역시나 액체가 흘러내린다. 종아리에 혀를 댄다.
눈을 감는다. 내가 눈으로 본 남자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남자가 보인다. 하지만 그 특유의 부드러운 입가나 섬세한 턱은 여전하다. 나이가 든 지금은 볼품없어 보이는 구석이 젊은 날의 그에겐 매력으로 보인다. 남자의 옆에 뺨이 도톰하고 웃는 미소가 상냥한 여자가 무릎을 단정히 붙이고 앉아 있다. 노을이 깔리면서 푸른 하늘이 더욱 감미로워 보이는 시간이다. 남자가 슬그머니 여자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도톰하면서도 보드라운 그녀의 감촉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이.
나는 눈을 떴다.
남자의 가랑이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아내가 실핏줄이 터진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떠 검정 눈동자 둘레로 핏줄이 터진 흰자위 전체가 다 보였다. 긴 머리카락은 질척한 화장실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아내는 잔뜩 화가 난 것이 틀림없었다. 한 사람을 나눠 먹는 일이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우리가 머뭇대는 사이 남자가 정신을 차렸는지 몸을 움직였다. 그 바람에 아내가 털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내는 꽥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고소하다 싶은 마음에 웃음이 나오려던 걸 참았다. 아내가 몸을 웅크리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으르렁대는 아내를 달래고서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나와 아내 우리가 빨아먹던 남자. 우리 셋 모두 거울 앞에 있었다. 물론 나와 아내의 모습은 거울에 반사되지 않았다. 그저 피곤한 그러면서도 나른하고 개운한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중년의 고수머리 남자가 홀로 비칠 따름이었다. 그는 손등으로 땀이 밴 이마를 슥 닦아내고 귀를 툭툭 털었다. 그는 우리를 힐끔 돌아보고서 공원 화장실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서둘러 남자의 뒤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두툼한 유리문을 뒷발로 걷어차 닫아 버렸다.
우리는 스스로 문을 열지 못한다. 문을 열고 닫는 사람들의 뒤를 쫓아야만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이 가능하다. 그 짧은 순간을 놓쳐 버리면 우리는 문은 있지만 사방이 벽인 감옥과 다름없는 곳에 갇혀 버린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었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아내가 울었다. 공원 밖으로 나와서도 여전히. 나는 아내가 무슨 까닭이 있어 저리 우는지 이번에는 알기 어려웠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말을 하게 됐어?
아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며 계속 울었다.
밤의 공원은 산책 나온 부부나 아이들로 다소 소란스러웠다. 가로등이 그리 밝지 않아서 사람들의 얼굴은 그림자가 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사람들의 공간이 어딘가 있다면 이와 비슷할 터였다.
운동하는 중년의 여자가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다가왔다. 엉덩이와 팔을 요란스레 흔들고 가끔 입으로는 휘휘 바람 소리까지 냈다. 자칫하면 몸이 부딪칠 뻔해서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어리석은 버릇이다. 그녀와 부딪쳤대도 그녀는 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어떤 미세한 충돌을 느낄지는 모르겠다. 바람이 살짝 어깨를 스친다는 정도로.
우리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목소리조차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만일 내가 지금 배드민턴을 치는 여자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소용이 없다. 그녀는 허공에서 날아오는 셔틀콕만을 바라볼 것이다. 귀에 대고 빽 소리를 지른다면 어떨까? 아마 간지러워 긁을지 모르겠다. 나는 장난삼아 배드민턴 치는 여자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돌아서서 나를 잠깐 바라보고 손에 쥔 셔틀콕을 가볍게 라켓으로 날려 보냈다. 셔틀콕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지나 어둠 속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로 날아갔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어느새 아내가 내 옆으로 다가와 울어댔다.
언제 토라졌냐는 듯 아내는 상냥한 얼굴이었다. 내 얼굴을 바라보며 환히 미소를 짓더니 귀를 어루만졌다. 눈물이 흐를 만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나는 아내의 손목을 장난스럽게 하지만 살짝 힘주어 붙잡았다. 아내의 작은 손이 눈앞에서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그래 봤자 내 귀에선 아무것도 안 흘러내려. 우린 분명 그러니까…….
말문이 막혔다. 우리의 존재에 대해 아내에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말로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하얀 여백으로 변했다. 나는 아내의 손을 놓았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나는 나의 몸을 보지 못한다. 늙었는지 젊었는지 키가 큰지 살이 쪘는지 말랐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손과 발이 움직인다는 감각은 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진 못한다. 내가 타인의 액체를 빨아먹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이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 다만 나의 반쪽인 아내는 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왜 아내가 언어로 말을 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 아내의 옷차림이 왜 저렇게 지저분한지 나는 모른다. 하얀 블라우스 곳곳에 왜 흙탕물이 튀었는지 왜 신발도 없는 맨발로 걷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작은 새처럼 가볍게 사방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신발 따윈 그녀에게 필요없어 보였다.
아내가 가볍게 벤치로 폴짝 뛰어올라 앉았다. 온몸이 피둥피둥하게 살이 오른 숨쉬기도 버거워 보이는 노인의 옆자리였다. 노인은 치매 예방 운동을 하는지 연신 열손가락을 놀렸다. 그에 맞추어 짧지만 덥수룩한 콧수염과 턱수염으로 덮인 입술을 오물거렸다. 노인은 나지막한 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내뱉었으나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아내가 옆으로 다가가 손끝으로 노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두툼한 입술이 부르르 떨리면서 침이 아닌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내는 노인의 턱을 손으로 받쳤다. 걷기운동을 끝낸 노파가 노인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아마 두 사람이 부부인 모양이었다. 아내는 벤치 등받이로 뛰어올라가 손을 적신 노인의 액체를 설탕물처럼 핥아먹으면서 반대편 손으로 노파의 작고 찌그러진 귀를 어루만졌다. 아내는 신이 나서 노인과 노파를 빨아먹었다. 그 사이 노부부는 서로 대화 없이 밤하늘의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식사가 만족스러운지 아내는 벤치에서 뛰어내려 공원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밤하늘의 달이 구름에 가렸다 다시 나타나곤 했다. 아내는 그 달을 보며 이상한 소리로 웃었다. 나는 아내의 옆에 누워 그녀의 머리카락과 살이 없어 푹 들어간 볼을 쓰다듬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아파트로 돌아가 운동을 통해 몸에 쌓인 약간의 피로를 수면제 삼아 잠을 잘 것이다.
사람들이 사라진 후에도 아내는 한참을 하늘만 보았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이제 아무도 없어. 일어나자, 빨리 가야지.
나는 일어서지 않으려는 아내를 달래고 잡아끌어 일으켰다.
어서 떠나야 한다. 우리에게 허기는 시간에 맞춰 습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넉넉하게 배가 부르다가도 갑자기 울컥 지독한 공허를 빼닮은 허기가 들이닥친다. 허기의 신호인 공허는 우리의 존재를 한순간에 짓누를 만큼 강력하다. 그 공허의 공포를 견디지 못해 우리는 허기를 채워 줄 인간에게 미친 듯 달려든다. 하지만 새벽이 올 때까지 우리가 허기에 시달릴 일은 없다. 아무리 늦은 밤일지언정 번화가로 나가면 사람들은 늘 돌아다니기 마련이니까.
공원을 내려가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마을버스 한 대가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으나 내리는 승객도 타는 승객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와 아내 단둘만이 마을버스에 올랐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어서 버스 안은 승객이 겨우 네 사람뿐이었다.
아내는 요란하게 발소리를 내며 뛰어가 천장에 매달렸다. 배를 채우지 않을 때 생각에 잠기는 나와 달리 아내는 늘 부산스럽다.
중년여인의 옆에 앉은 군복을 입은 청년이 수상했다. 얼굴과 목덜미와 반소매 바깥으로 드러난 팔뚝은 햇볕에 그을린 듯 흑갈색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휴가 나온 군인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청년은 중년여인의 하얗게 살이 오른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들이마셨다. 중년여인은 목을 내어주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군복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군복을 입고 있군요.
그는 목덜미에서 입을 떼고 입가를 슥 닦았다. 중년여인에게서 빨아먹은 액체가 아직 흥건해 군복의 두툼한 입술이 번들거렸다.
그래서 뭐 달라질 게 있습니까? 어차피 내 눈엔 안 보입니다.
약간 퉁명스럽고 조금은 화가 난 말투였다.
나는 그런 쌀쌀맞은 태도에도 기분이 꽤 흐뭇해졌다. 오늘밤 처음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눠 보아서였다.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여자요? 따분하고 울적합니다. 그냥 하루살이나 다름없습니다.
군복은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래도 배가 불러서인지 그새 말투가 좀 느긋해졌다.
중년여인이 나와 군복을 번갈아 바라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이구, 이 여자가 우릴 알아보는 거 아닙니까?
군복이 깜짝 놀라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우릴 볼 턱은 없죠.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공원화장실에 도착하기 전 나는 두 사람을 더 빨아먹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평범한 인상의 청년과 가정주부인지 미혼인지 잘 모르겠는 한 여인이었다. 기억에 남는 쪽은 후자였다. 그녀는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앉아 텅빈 그네를 바라보았다. 가끔씩 부는 바람에 그네는 살짝 흔들리다 말았다. 유달리 목과 손마디가 길었고 얼굴이 창백했다. 창백한 여인은 그녀의 손가락에서 흘러내린 액체를 빨아먹는 동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손가락으로 내 이마와 코 그리고 입술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눈을 뜨면 그녀가 내 앞에 있고 눈을 감으면 그녀의 세계가 내 안에서 펼쳐졌다. 그녀는 잿빛이었다. 얼룩덜룩한 잿빛 사이로 흐릿하게 사람의 다리가 보였다. 잿빛에 가려지지 않은 종아리와 검정구두는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서성이다 자꾸만 멀어졌다. 식사를 끝냈을 때 그녀는 옷자락을 툭툭 털고 나를 힐끔 쳐다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뒤따라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나를 아냐고, 혹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물론 나는 알았다. 내 목소리와 모습이 결코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군복은 군모를 벗었다가 챙을 뒤쪽으로 돌려 머리에 눌러쓰고는 방금 자신이 빨아먹은 중년여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여인은 휴대폰 액정에 뜬 번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대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전화를 건 상대방이 아들이었는지 연신 입에서 아들 아들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첫 휴가가 언제냐는 말을 하는 걸로 보아 아마 아들이 입대한 지 얼마 안 된 눈치였다.
내가 군복차림이라고 했죠?
군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양복입니다.
어떤 양복이죠?
그냥 뭐 평범한 양복이에요.
얼굴은요?
평범해요. 그냥 그쪽은 아저씨라고요. 나도 처음에 당신이 나와 같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저 여자는 알겠더라고요. 어찌나 요란스럽게 뛰어다니는지. 그런데도 버스 운전기사가 아무 말 안하는 걸 보니 그냥 우리 종족이네 척 알겠더라고요.
군복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아내와 아내 또래의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아내는 그 여자의 긴 머리타래를 손에 친친 감아 장난을 치며 연신 귀를 핥았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내 아내입니다.
그래요? 아내까지 있다? 아저씨 대단하시네.
군복은 잠시 팔짱을 낀 채 코를 씰룩대다 다시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동반자살했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척 보면 알죠. 우린 귀신이잖습니까. 이렇게 떠돌아다니며 산사람이나 빨아먹으니까. 아마 나는 군에서 자살한 놈일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군복차림이죠. 죽어서도 제대를 못하니 더럽게 사나운 팔자 아닙니까? 당신이나 나나 다 억울한 원혼입니다.
귀신이란 말이 나에게는 너무 쉽게 들렸다. 귀신이라면 과연 이렇게 공허에 가까운 허기를 느낄까? 그리고 인간처럼 섬세한 감정들이 이렇게 생각 곳곳에 남겨지게 될까? 타인의 세계를 나의 세계로 느끼는 공감의 능력이 남아 있을까?
어째 뭐 씹은 얼굴이시네?
나는 그 말이 너무 쉬운 결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오늘 희한합니다. 몇 시간 전에 이 버스에 탄 양반도 아저씨하고 똑같은 말을 하던데요.
너무 쉬운 결론이라는?
그건 아니고 그냥 우리가 귀신이 아니랍니다. 그러면서 붉은 버스로 갈아타고 한 시간쯤 더 가면 우리 같은 괴물이 모여서 떠드는 장소가 있대요. 우리의 존재이유, 뭐 이런 것에 대해서.
버스가 멈추었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아내가 울부짖었다. 아내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서둘러 버스에서 내리려던 차였다. 아내는 그 여자를 따라가려고 서둘러 문 앞에 섰다. 아내가 버스정류장에 내리기 직전에 나는 재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버스 문이 닫혔고 아내는 결국 젊은 여자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러다 다시 못 보면 어쩌려고 그래.
나는 처음으로 아내에게 화를 냈다.
아내는 내 팔을 뿌리치고 버스의 창가 쪽 빈 좌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나는 그 옆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앉아 아내의 가느다란 팔목을 힘껏 움켜잡았다. 아내가 그대로 버스 밖으로 도망치기라도 할까 두려웠다. 그러면 나는 혼자다. 아내도 뭐가 두려운 건지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서글프게 몸을 떨었다.
참 다정합니다. 다정해요.
군복이 통로 건너편 자리에 반은 드러눕듯 앉아 킬킬거렸다.
아까 그 이야기 다시 해 줄 수 없습니까? 버스를 타고 어느 번화가로 가야 하죠?

군복의 말에 따라 붉은 버스로 갈아타고 번화가로 나왔다. 군복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은 갔지만 그대로 따라도 손해는 없었다. 번화가로 나서면 사람들이 많을 테고 최소한 우리의 종족을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허기에 시달리진 않을 테니 말이다.
붉은 버스 안에서도 아내는 허기를 참지 못해 두 사람을 빨아먹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허기를 참아볼 작정이었다. 다행히 번화가로 나올 때까지 어떤 공포나 불안 같은 허기가 찾아오기 직전에 느껴지는 불쾌한 전조증상은 없었다.
번화가에 내려 우리는 손을 잡고 한참이나 거리를 걸었다. 상가의 간판은 화려했고 거리 곳곳에서 유행하는 음악이 흘러나왔으며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은 꽤 많았다. 가끔 술 취한 이들이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에 아내는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또 허기가 지는지 아내가 혼자 길을 걷는 행인에게 달려들었다.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낀 다부져 보이는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그을린 피부에 어깨가 넓었고 턱이 각진 남자였다. 몸에 군살이 붙어 배가 나왔지만 둔하기보다 건장하게 보였다. 아내는 그의 두툼한 팔에 매달려 남자의 귀를 어루만졌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아내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점점 속이 뒤틀리고 거리의 풍경이 스산하게 보이면서 나도 어느새 허기를 느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벌레를 털어내듯 팔을 흔들었다. 아내는 잠시 기우뚱했지만 다시 남자의 넓은 어깨로 올라갔다. 남자는 귀에서 액체를 흘리면서도 몇 걸음씩 오히려 재빠르게 걸었다. 그 사이에도 아내는 귀에 대고 계속 남자의 경험과 몽상과 생각이 엉긴 무언가를 빨아먹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우리가 입술을 대고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움직임을 멈춘다. 우리가 인간의 액체를 빨아 마시는 동안 그들은 살짝 잠이 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엷게, 나른하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어떤 지점에서 잠시.
남자가 다시 걸음을 멈추고 사납게 몸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결국 아내는 보도블록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아내가 넘어진 채로 고개를 들어 서글프게 울었다.
남자는 재빠르게 달려갔다. 나는 그 뒤를 쫓아 달렸다.
우리가 보입니까?
나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른하게 숨을 쉴 뿐 길거리에서 그대로 눈을 뜨고 잠든 사람 같았다. 사나워 보이던 눈이 풀려 있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비틀었다. 피보다 조금 엷은 붉은 액체가 손목에 고였다. 나는 입을 대고 빨아먹었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세상에 떠도는지 아마도 그는 알지 몰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자명종이 울린다. 남자는 눈을 뜨자마자 팬티 아래 반쯤 발기된 성기를 옆에 누운 아내의 엉덩이에 대고 비빈다. 아내는 귀찮은 듯 칭얼대는 소리를 내고는 몸을 돌려 돌아눕는다. 아내가 입은 늘어진 셔츠자락이 말려 올라가면서 하얗고 늘어진 옆구리살이 보인다. 자명종은 여전히 요란하다. 남자는 자명종을 끄고 욕실로 향한다. 짧은 머리를 재빨리 감고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욕실 밖으로 나온다. 식탁에 갓 구운 토스트 한 조각과 어제 먹다 남은 갈색으로 변한 사과 두 쪽이 놓여 있다. 아내는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계란을 깨 넣는다. 그가 빵조각과 사과를 씹는 동안 아내가 목이 잠긴 목소리로 떠든다. 계란이 기름에 지글대며 익는 소리 탓에 그는 아내의 작은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가 짧은 식사를 끝내고 출근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는 욕실로 향한다. 아내 역시 직장에 다니지만 함께 현관으로 나간 지가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부부의 연봉은 비슷하지만 남자의 직장은 아내의 직장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서둘러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남자는 향한다. 지하철에서 남자는 토막잠을 잔다. 잠이 들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기절 같은 토막잠인데도 눈을 뜨니 바지 속 성기가 단단해져 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성추행자라도 된 기분이 들어 어서 발기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린다. 지하철이 정차하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또 우르르 쏟아져 들어온다. 그가 객차 안에서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이 더 줄어든다. 눈앞에 몸에 착 들러붙는 오피스 룩을 입은 여사무원의 뒤태를 보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야릇한 생각에 빠져든다. 겨우 힘이 빠지려던 그의 성기가 다시 단단해진다. 그의 옆에 붙어 있던 희끗희끗한 머리의 근엄한 샐러리맨이 그를 눈으로 훑어보며 헛기침을 한다. 그러더니 그 근엄한 얼굴 그대로 그의 앞에 서 있던 여사무원의 몸을 손으로 툭툭 무심하게 건드린다. 그가 내릴 환승역에 도착하자 그는 사람들에 떠밀려 서둘러 승강장으로 내린다. 사무실에서 그는 짬짬이 증권시세를 알아보거나 동료들과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운다. 김대리는 그 덩치에 사무직보다 힘쓰는 일이 제격인데. 상사의 별로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사람들은 헛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비벼 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남자는 운이 좋게도 좌석에 앉는다. DMB 폰으로 지나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편안하게 웃는다. 조그만 화면 속에 춤을 추는 여가수는 손안의 요정처럼 사랑스럽다. 마을버스를 탈 때에도 그는 휴대폰의 액정을 들여다본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현관문을 연다. 침대에 걸터앉은 아내는 한 손에 리모컨을 들고 나머지 다른 손으로 뭉친 어깨를 주무른다.
남자의 액체에는 그의 일상만이 서류의 기록처럼 빼곡하게 차 있을 뿐 우리에 대한 단서라곤 조금도 없었다. 내가 식사를 끝내자 그는 지하철역으로 사라졌다. 허기는 가셨지만 나는 그리 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하고 불안했다. 나는 서둘러 아내가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그곳에 아내는 없었다. 다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번화가의 거리를 오래도록 헤매었으나 아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웅성대는 목소리와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아내의 휘파람 같은 목소리는 파묻혔다. 아무나 붙잡고 혹 아내를 보지 못했느냐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볼 수 있는 존재는 이 번화가에 나 하나뿐이었다.
아내를 찾다 큰 상가 뒤쪽 어두운 뒷길에 들어섰다. 그 어두운 곳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었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서서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골목은 좁고 사람은 많고 비집고 들어가기 힘겨울 지경이었다. 귀 기울여 보니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의 말을 그저 상대에게 쏟아낼 뿐이었다. 한 사람의 말이 첫마디도 끝나기 전에 다른 이가 목청을 높여 떠들었다. 한 번도 타인과 대화를 나눠 보지 못한 이들이 분명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번화가에서 만나길 바라던 나와 똑같은 존재들이었다. 밤에만 나타나서 인간의 경험과 생각과 몽상을 빨아먹고 살아가는 존재. 나와 똑같은 종족들. 나는 아내와 단둘이서 다녔을 뿐 이렇게 많은 무리를 마주한 적은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소리로 우는 여자를 본 적이 있느냐고 그들에게 물어보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입을 다물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는 그 아귀다툼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한 중년의 남자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내가 공원의 남자 화장실에서 어깨에 올라탔던 남자와 너무 똑같이 닮아 나는 흠칫 놀랐다.
우리는 모기요. 모기의 생각이지. 우리가 빨아먹는 액체는 피나 다름없지. 한 번 앵앵 울어보시오. 정말 당신이 모기라는 게 느껴질 테니.
이번엔 백발을 치렁치렁하게 기른 다른 여자가 내 팔을 붙잡았다.
우린 나무라고 생각해요. 나무는 움직이지 못해요. 그러니 늘 한 곳밖에 보지 못해요. 깊은 밤 나무의 꽃은 식물의 영혼을 인간의 자아와 비슷하게 만들어 밤거리에 꽃가루처럼 흩뿌리는 거예요. 아름답지 않나요?
한 노인이 그 틈에 끼어들었다.
아무것도 믿지 말게. 우린 그냥 인간이야. 이건 우리의 꿈이야. 자네가 눈을 뜨면 이 순간은 사라지고 다시 밝은 날이 찾아오지. 건강한 하루 말이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 다들 내게 가래를 뱉듯 한마디씩 내뱉었다.
꿈이라도 악몽이요, 이렇게 배고픔에 시달리는 건. 말했잖아, 이건 진짜 허기가 아니라니까. 이 허기는 배고픔을 가장한 우울이야. 말 잘했소. 우리 모두가 한 우울증 환자가 상상하는 우울한 망상의 형상화요. 만일 겨우 망상의 형상화라면 당신 스스로를 부인하겠다는 겁니까? 난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어차피 날이 밝으면 우리가 떠들었던 말들은 깨끗하게 사라질 테니. 다시 밤이 찾아오면 마치 새로운 시대가 열린 양 이렇게 모여 열렬히 떠들겠지. 그러다 허기진 사람은 다시 번화가로 나서 인간 하나를 붙잡고 쭉쭉 빨고. 우린 인간이 내버린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배설물은 어떤 관념이기에 생각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끌어당깁니다. 관념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라고나 할까요? 생각에 생각이 덮일수록 포만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린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존재지요. 그러기에 다시금 인간이 필요합니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말미잘과 작은 물고기처럼, 인간과 우리의 공생관계는 그러하오.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질질 짜고 돌아다닐 것이 틀림없지요. 우리는 그들의 눈물샘을 조절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어떤 존재냐고? 논란의 여지가 없어요. 우리는 그냥 버려진 컴퓨터나 고장난 휴대폰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란 건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회로의 혼란이겠죠.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멀리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난 여러분의 말을 모두 들었습니다. 그러니 내 말에 한번만 귀를 기울여 주실 수 있을까요?
모두들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혹시 이상한 소리로 우는 한 여자를 못 봤습니까? 새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합니다. 그 여자는 내 아내입니다. 나는 아내를 찾고 있어요.
나를 둘러싼 이들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무리 중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냥 가시오. 쓸모없는 질문으로 우리를 헷갈리게 하지 말고.
내가 움직이자 그들은 길을 비켜 주었다. 내가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곳에선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아내의 목소리를 좇아가다 보니 허름한 건물이 늘어선 컴컴한 대로에 이르렀다. 그 거리는 한때 번화가였으나 지금은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뒷골목으로 변한 곳이었다. 빌딩은 유행이 지난 단조로운 형태에 작달막했고 외관이 낡아 볼품없었다. 밤하늘에는 전깃줄이 느슨하게 축축 늘어져 있었다. 밤하늘에 그어진 어둠의 흉터 같았다. 그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바람이 불면 작은 쓰레기들이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텅 빈 밤거리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더 가깝게 들려왔다.
나는 이 길의 끝에 도착하면 아내를 만나리란 기대감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마음과 달리 나의 걸음은 느려졌다. 갑작스레 허기가 찾아와 손쉽게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지쳤고 두려웠고 어두컴컴한 대로에서 그대로 흩어질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번화가로 나가 누군가를 붙잡아 인간의 액체를 빨아 배를 채우고만 싶었다. 그러면 이 공허는 손쉽게 사라질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면 다시 아내의 목소리는 영영 듣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뒤덮었다. 희미하긴 했으나 저 길 끄트머리에 홀로 주저앉아 우는 그녀가 보이는 듯도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을 더 걸었을까? 허기를 견딜 만큼 견디자 이제 허기는 또렷해졌다. 그러자 두려움은 가셨고 대신 어떤 생각이 툭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는 버려진 짧은 기억.
나는 아내를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에만 아내가 있고 그녀가 나의 가족이라는 기억을 끌고 지탱할 따름이다. 날이 밝으면 우리는 사라진다. 해가 지면 나는 다시 누군가가 내버린 짧은 기억으로 태어난다. 그 기억의 빈 여백을 채우려 나는 다시 사람들에게 달라붙는다. 해가 뜨기 전까지 수많은 타인의 기억이 뒤섞여 스스로를 점점 살아있는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모든 건 허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공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아내가 내 눈에 보였지만 나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아내는 어두운 길 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가 와락 안겨드는 바람에 우리 둘은 어둡고 차가운 길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나는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내 귀를 어루만졌다.
휘이이이, 휘이이이, 휘이이이.
아내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아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날이 밝고 밤이 찾아와 다시 버려진 짧은 기억으로 태어나도 우리가 간직한 기억의 흔적이 남아 있도록.
나는 아내의 귀에 계속해서 많은 말들을 속삭였다. 《문장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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